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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222화 (222/375)

〈 222화 〉 소동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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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소동 #5

물가에서 쉬던 중 란이가 날 어딘가로 잡아끌었다.

녀석을 따라 하류로 나아가자 물살이 빨라지더니 작은 폭포가 하나 나왔다.

란이가 쪼맨한 손바닥으로 내 검지를 붙잡고 열심히 절벽 아래를 가리켰다.

“뭐야, 뛰어내리라고?”

­됴란!!

“...갑자기?”

마지못해 한숨을 내쉬었지만 두 손은 이미 웃옷 단추를 풀어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내가 란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겠지.

두꺼운 로브를 바위 위에 벗어둔 뒤 각반과 건틀릿을 대강 모아두었다. 속옷을 내리기 직전에 잠시 망설였으나 물에서 나온 뒤를 고려해 마저 벗고 나자 란이가 장난스럽게 손바닥을 놀렸다.

­찰싹찰싹!

“어허... 이건 가지고 노는 거 아니야.”

­됴란...?

“뱀장어 아니야.”

말캉한 겨드랑이 아래를 붙잡아 떼어내자 녀석은 아쉬운 듯 손가락을 입에 물었지만 곧바로 다시 채근해왔다.

“그래 잠깐만.”

바위 끝자락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폭포의 높이는 약 십여 미터. 날카로운 암반도 없고, 물거품이 넓게 퍼져나가지도 않는 걸로 보아 깊이도 충분하다.

나는 마지막으로 마물이나 소용돌이 등 다른 위험 요소가 없는지 확인한 후 급류 아래로 몸을 던졌다.

­풍덩!!!

입수의 충격 이후 무수한 공기방울이 따갑게 안면을 찔렀다.

“푸핫!! 정말로 차갑지 않네...”

­됴란! 됴란!

“응? 놀아달라고?”

란이가 첨벙첨벙 물을 튀겨왔다. 웃으며 슬쩍 물장구를 쳐 반격하자 녀석이 곧바로 눈동자를 반짝이더니 수류를 조작했다.

빠르게 흐르던 개울물의 유속이 느려지고 허공에 떠오르는가 싶더니,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내게 쇄도해온다.

하지만 일전의 호수 때와는 달리 지금 란이의 기술에선 다분한 애정이 묻어나왔다.

녀석은 내 가슴팍을 콕콕 찌르거나 수면 아래로 잠수하기도 하며 한동안 내게 응석을 부리더니 은은한 물살로 내 전신을 휘감으며 안겨들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녀석이 불과 며칠 전에는 잠시나마 적대하는 관계였다니...

나는 마치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내 가슴팍을 꼬옥 끌어안는 란이를 토닥여주며 말했다.

“...마침 잘됐다. 너한테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됴란?

“음... 우리가 함께하다 보면 언젠가 네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올 거야. 라디나 아리엘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크게 다칠 수도 있어. ...란이도 그건 싫지?”

­....!!

란이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래, 그래서 이참에 네 능력을 조금 보여줄 수 있겠어? 우리가 얼마나 합을 맞출 수 있는지 알아둬야 하니까. 음... 저기 낙타 모양으로 생긴 바위를 한 번 대상으로 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의뢰를 하러 떠날 때면 며칠 동안 집을 비워야 할 상황도 있을 터, 그때마다 란이를 타인에게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던전이나 사냥 퀘스트에도 같이 다녀야 한다는 소린데...

란이도 자기 몸 하나 정돈 지킬 수 있어야 한다.

녀석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단아하게 수면을 딛고 서더니 눈을 감고 집중했다.

이윽고 사방에서 굵직한 물줄기가 솟구치는가 싶더니 일제히 경로를 꺾어 표적에게 육박했다.

­콰르르르르륵!!!

‘...살벌하네.’

과연 하급이라고는 해도 정령은 정령인가.

수압 절단기에 꿰뚫린 것마냥 예리하게 깎여나간 바위에 놀라자 녀석이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다가와 머리를 내밀었다.

“쓰다듬어달라고?”

­끄덕.

“.....”

피식 웃으며 머리를 쓸어주자 란이는 행복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너무나 인간적이고 사랑스러운 모습에 순간 숨을 들이켜기도 잠시, 녀석은 내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슬그머니 거리를 벌리고 이번엔 물 밑으로 잠수했다.

동시에 빠른 물살이 발목을 잡아당겨 당황했지만­

‘...뭐야.’

숨이 막히는 일은 없었다.

수면 밑으로 내려오자 큼지막한 공기 방울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기에.

못 바닥에 서서 바라보는 초현실적인 광경에 말문을 잃고 공기 장막을 매만지자 잔잔한 파문이 퍼져나갔다.

주위를 둘러보자 투명한 개울물 너머로 란이의 순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것도 네가 한 거야?”

­끄덕.

“대단하네...”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발밑을 내려다보자 일렁이는 수면을 반사해 아름답게 반짝이는 자갈과 그에 들러붙은 다슬기, 홍색 민물 새우가 선명하게 보였다. 장벽 밖으로 손을 내밀자 자그마한 송사리들이 손가락을 스치며 유유히 헤엄친다.

희미한 물 냄새와 보글거리는 물거품, 둔탁한 폭포의 소음에 둘러싸여 있자니 꼭 양수 한복판에 웅크린 태아가 된 것만 같다.

‘...신기한 능력이네.’

이 능력만 있으면 물속에서도 원활하게 행동할 수 있겠지.

수중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제약을 한풀 벗어던지고 다른 모험가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장소도 가볼 수 있을 거다. 예컨대 연안에 가라앉은 난파선이나 숨겨진 해저 동굴 같은.

또한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란이야 이거 좀 움직여볼래? 날카로우니까 날에는 손 안 닿게 조심하고.”

단도를 소환해 건네주자 란이는 물살을 조종해 이리저리 가지고 놀았다. 불규칙하게 소용돌이치는 단류에 빙글빙글 휘말리는 도신을 보니 내심 신기하면서도 그 힘이 품은 가능성에 다소 섬뜩해졌다.

‘그러고 보니... 그런 속설도 있었지.’

운디네는 인간을 물가로 유혹해서 익사시키는 종족이라고.

이처럼 물속에서도 공기 방울을 유지하고 물의 흐름을 수족 부리듯이 다루는 건 물론, 바위도 꿰뚫을 정도의 수류 조작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겠지.

물론 앞으로 란이가 날 헤칠 리는 없다.

요사스러운 웃음으로 날 홀리려는 걸 보니 요물은 맞긴 하지만.

물살에 몸을 맡기고 느긋하게 물속 경치를 감상하자 녀석이 슬그머니 다가와 껴안았다.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받친 채로 등을 다독여주던 와중 문뜩 이전에도 들었던 의문이 떠올랐다.

“근데 너... 남자냐 여자냐?”

­됴란?

“아니, 운디네는 성장하면 겉으로는 구별이 힘들 정도로 인간과 비슷해진다며. 성별 정도는 있을 거 아냐.”

­....??

“그러니까 너 뭐... 아니다. 어차피 곧 알게 되겠지.”

중급으로 진화하면 여러모로 두드러질 테니까.

나는 충분히 휴식을 마친 뒤 강바닥을 딛고 물기슭으로 올라왔다.

한데 막 돌아갈 채비를 하자 란이가 내 팔목을 붙들며 아쉬워했다.

“...안 돼, 이제 가야지. 충분히 쉬었잖아.”

­됴란...

“라디하고 아리엘도 기다리고 있을 거야.”

­.....

녀석은 조금 더 나와 단둘이 보내고 싶었는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리며 따라왔지만, 곧바로 해맑게 웃으며 덥석 목덜미에 매달려왔다.

과연 어린애라서 그런지 기분 전환도 빠르다.

“알았어 인마.”

맑게 웃으며 말캉말캉한 다리를 붙잡아 무등을 태워주자 란이는 내 흑발을 잡아당기며 신을 냈다.

대충 물기를 털어낸 뒤 속옷 위에 로브만 걸친 채로 녀석을 등에 태우고 걷자 머잖아 라디와 아리엘이 있는 장소에 도달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다.

“...무슨 일 있어?”

“...아, 오셨어요?”

“이거 좀 봐봐 도란.”

“....”

그녀들이 수풀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손짓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란이를 등에서 내리고 다가가자 그곳엔 선명한 아이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나는 단박에 알아채고 말했다.

“...고블린 흔적이네. 중성체 정도 개체에 엄지발가락이 안쪽으로 휘어있는 걸 보니 전형적인 숲 고블린이야. 끄트머리가 흐려진 정도로 보아 발자국이 찍힌 지 이틀 조금 안 지났을 테고, 그 말은 즉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은신처가 있을 확률이 높... 왜.”

“아, 아니... 되게 박식하네...?”

“...고블린은 워낙 가까이서 봐왔으니까. 놈들에 대해서라면 내가 어지간한 모험가들보다 잘 알걸. 심지어 라디보다도.”

여러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고블린 부락에 직접 초대까지 받은 인간은 이 세계에서 내가 유일할 거다.

하지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어쩐지 난연한 기색의 아리엘이 보였다.

의아한 눈초리로 물었다.

“...아리엘, 혹시 할 말 있어?”

“으, 으응..? 갑자기...?”

“계속 빤히 쳐다보고 있었잖아. 왠지 정신도 딴 데 팔려있고.”

“내가? 으음... 그냥 잘못 본 게...”

그녀가 시치미를 떼자 라디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 호수에 빠졌을 때를 제외하면 언니가 도란님의 맨살을 보는 게 이번이 처음 아니에요? 그때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진득하게 감상할 여유가 없었지만요.”

“아, 아니 난 그런 게 아니라...!”

“....”

정곡이구나.

나는 변명거리를 찾으며 횡설수설하는 아리엘을 온화한 눈빛으로 보듬으며 말했다.

“괜찮아, 나는 다 이해하니까.”

“아, 아니 정말로...!!”

“괜찮아요 언니. 다 자연스러운 거니까요. 하기야... 저번에도 둘만 있을 때 저한테 도란님의 성적 취향 같은 걸 질문했었...”

“라, 라디야...!!”

아리엘이 얼굴을 붉히며 다급히 라디의 입을 틀어막았다.

자필 소설을 반 친구에게 들킨 초등학생 같은 반응에 조금 더 놀려먹고 싶었지만 이대로 가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았기에 적당히 화제를 끊었다.

“...이제 슬슬 정리하고 이동하자. 고블린을 잡으러 가야 하니까 괜히 기운 빼놓지 말고. 이러다가 애 울겠다.”

“아쉽네요... 언니, 오늘은 제가 다른 방에서 잘 테니 언니가 도란님이랑...”

“괘, 괜찮아...!! 그런 배려는...!”

“응? 필요 없어요? 그래도 첫날밤은 단둘이 오붓하게 보내는 편이...”

“그... 그건 나중에...!! 나중에 얘기하자!! 알겠지...?!!”

아리엘이 황급하게 손뼉을 마주쳐 주제를 불식시키고 뻣뻣하게 앞서나갔다.

나와 라디는 잠시 시선을 마주하고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뒤쫓아갔다.

높은 초목이 즐비한 산림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짙푸른 녹음이 우거졌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동물의 울음소리와 동면에서 깨어나 나뭇가지 사이를 뛰어다니는 다람쥐를 보자 겨울이 다 끝나간다는 것이 실감 났다.

이따금씩 머리 위를 스치며 우리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구관조를 흥미롭게 쳐다보며 걷던 중, 나는 돌연 자리에 멈춰섰다.

“정지.”

“.....”

라디가 즉각 반응해 쇠뇌를 들어올리며 경계하자 아리엘이 긴장한 어조로 물었다.

“...뭔가 있어?”

“그래, 또 고블린 발자국인데 아까 봤던 것과는 좀 달라. 이건 완전히 다 자란 성체인 데다가 찍힌 지 하루도 안 됐어. 게다가... 많아.”

“이제 거의 다 도착했다는 뜻이네...”

아리엘이 침을 꼴깍 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고블린 족적이 선명하게 찍힌 흙바닥에서 손을 떼며 덧붙였다.

“...그래도 당장 마주칠 가능성은 낮을 거야. 고블린이 근처에 있으면 주변 짐승 씨가 말라서 숲이 조용해지거든. ...그래도 앞으로는 정말 신중히 나아가는 게 좋겠어. 간간이 배회하는 놈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부락 규모가 얼마나 큰지도 모르니까.”

고블린의 지능은 무시할만한 게 못 된다. 놈들은 인간처럼 도구를 다룰 줄 알고, 저들만의 언어로 소통하며 전술을 구사하기도 한다.

나는 놈들이 떼거리로 합심해 집채만 한 트롤을 사냥하는 모습도 목격했다.

개미를 내세워 주변 기척에 온 정신을 집중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정말로 얼마 안 가 소음이 뚝 끊겼다.

라디가 잠시 멈칫하더니 미간을 찡그리며 후각에 이상이 있음을 알렸다.

곧이어 불에 그슬린 나무 밑동과 을씨년스러운 흉터가 새겨진 바위, 만들다 만 구덩이 함정 따위가 시야에 들어왔고, 짐승의 핏자국이나 뼈로 만든 기괴한 오브제 등 예사롭지 않은 흔적과 연이어 맞닥뜨렸다.

숨소리도 죽인 채 전진하던 도중ㅡ

“.....”

우리는 마침내 덤불 너머 꿈틀거리는 초록색 마물을 발견했다.

­....케륵!

­퀴이익!!

­푸릉!!!

­크룩...!

­케르릉... 케륵...

­쿠르르르륵!

­고블고블!!

근데 좀 많다.

지나치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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