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화 〉 고블린 사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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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고블린 사냥 #1
일단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신속히 자리를 이탈했다.
놈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나무 위에 올라서자 탁 트인 전망이 내려다보였다.
나는 즉시 미간을 구기며 혀를 찼다.
“젠장...”
“어떻게 된 일일까요...?”
“...내가 봐도 비정상이라는 건 알겠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일대가 전부 고블린투성이였다.
각개격파를 한다면 별로 어려운 상대는 아니지만...
‘어째서 이렇게 많은 거지...?’
본디 고블린은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종족이다.
그 수는 최소 수십부터 많게는 세 자릿수에 육박하기도 한다.
실제로 내가 만났던 고블린 부족도 그 정도 규모였으니.
하지만 상당히 외진 벽지였던 그때와는 달리 이곳은 도시 근처다. 영주성의 기사들이 치안을 위해 주기적으로 토벌을 나서는 장소이기도 하고, 약초나 산나물 등을 채취하기 위해 모험가들이 종종 찾기도 하는 곳이다.
즉 원래대로라면 마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거나 끽해야 한두 마리 출몰하는 게 고작일 텐데...
더군다나 머릿수만 이상한 게 아니다.
“저 커다란 구조물은 뭘까요...? 건물? 신전?”
“...종교 시설이 맞는 것 같아. 대체 뭘 숭배하는 걸까? 전전대 족장 뭐 그런 건가.”
“도란, 원래 고블린들이 저렇게 높은 건물을 건설하기도 하는 거야?”
“당연히 아니지...”
나는 침을 삼키며 저 멀리 높게 솟은 목제 구조물을 바라보았다.
아직 미완성인 탓에 전모를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범상치 않다는 것쯤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예의 건물까지 가는 경로에는 굳건한 목책이 능선을 따라 늘어서 있었고, 높다란 망루 위에서 활을 든 고블린 궁병이 누런 눈동자를 빛내며 사방을 경계했다.
지상에는 벌목한 목자재를 어깨에 짊어지고 나르는 고블린으로 즐비하다.
아리엘이 내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한 고블린을 가리켰다.
“도란, 쟤 좀 봐봐. 쟤는 생긴 게 좀 특이하지 않아? 다른 애들보다 팔다리도 훨씬 길쭉하고 세 보이는데...”
“홉고블린이야. 보통은 서른 마리 중 하나꼴로 보일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문 놈인데...”
“바글바글하네요. 얼추 보이는 수만 해도 열댓은 넘는 것 같아요...”
“홉고블린 외에도 각종 희귀 개체가 모여있어. 나조차 완전히 처음 보는 놈도 있고. 이 정도 규모면 지휘관이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거야.”
“지휘관? 고블린 부족을 통솔하는 족장을 말하는 거야?”
아리엘이 의아하게 물어와 천천히 전방에서 시선을 떼며 답했다.
“음... 조금 달라. 고블린에서 지휘관이라고 하면 보통 특이 개체를 가리키거든. 이놈들은 번식 속도가 엄청 빠른데 돌연변이가 나타날 확률도 높다 보니 간혹 어마무시한 놈들이 태어나. ...내가 있던 숲에도 그런 녀석이 있었어.”
집채만 한 곰을 한주먹으로 때려잡던 고블린이.
그녀는 곧바로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도란이 쓰러뜨렸다던 코볼트 킹 같은 거 말이지?”
“맞아. 그리고 고블린은 지휘관의 성향에 따라 부족 전체의 성격이 갈리곤 하는데, 정말 역량이 뛰어난 놈이 있으면 이런 일도 가능...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많은데...”
“네, 제가 생각해도 이건 좀...”
이렇게까지 고블린이 번식할 동안 누구 하나 눈치채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는 걸까?
아무리 얼마 전까지 시민 대다수가 피난을 떠나있었다곤 하지만...
“...일단 물러나서 상황을 지켜보자. 여차하면 길드에 신고해서 다른 모험가들을 불러오든가. 어떤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굳이 리스크를 무릅쓸 필요는 없잖아.”
“네, 저도 일단 물러나는 데에는 동의해요. 하지만...”
라디가 난처하게 한구석을 가리켰다.
“저거... 보이세요...?”
“왜 뭐가... 젠장.”
녀석의 손가락이 향한 장소에는 한 고블린이 배회하고 있었고
촉수.
일전에 란이에게서 보았던 것과 동일한 촉수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아리엘의 푸른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도란, 저건 그때...”
“그래...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아. 모양이랑 색깔이 똑같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
이제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놈들에게서 촉수를 발견한 이상 좌시할 수 없다.
란이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할 터. 녀석이 왜 그런 장소에 홀로 있었고, 어째서 감염된 상태였는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연장선상이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냥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어. 도움을 요청하면 안전하긴 하겠지만 촉수의 정체를 알아낼 수는 없을 거야. 다른 모험가들이 지켜보는 와중에 느긋하게 조사할 시간은 없을 테니까. ...이런저런 핑계를 이유로 원정에서 제외될지도 모르고.”
혹은 곤란한 상황에 당면할지도 모른다. 도시 인근 치안 수호는 영주 산하 기사의 임무인 만큼, 만약 이번 사태가 영주성에서 관리를 태만하게 해서 벌어진 일이라면 그들의 입김이 닿았을지도 모르니까.
지하수로 안에서 사육하던 코볼트와 박쥐처럼 말이다.
고블린을 방치하는 것과 위험을 감수하고 정보를 캐내는 것. 나는 짧은 시간 동안 숙고했고, 라디와 아리엘을 돌아보며 결론을 내렸다.
“...난 한 번쯤은 시도해보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너희는 어때? 대신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즉각 물러나는 걸로. 시간만 있으면 언제든 회복해서 다음 기회를 노릴 수 있으니까.”
“음... 나도 그게 좋겠어. 란이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베라스틴 인근 생태계에 큰 변화가 생길 조짐일지도 몰라.”
“저도 찬성이에요. 대신 신중에 신중을 가한다는 전제하에서요. 이상 상황이니만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
실전은 게임 따위가 아니다. 현실에서는 자그마한 상처조차 치명적일 수 있고, 사소한 일로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는 경우도 허다하다.
실로 고블린의 발톱에 긁혔다가 병원균에 감염되기라도 하면 상당히 곤란해진다.
우리는 주변을 배회하던 고블린들이 멀어지기까지 기다렸고, 천천히 나무에서 내려와 능선 아래로 향했다.
*
야심한 밤.
어슴푸레한 별빛이 파르스름한 초목 위를 은은하게 물들였다. 하늘에서는 부슬비가 떨어져 어깨를 적셨다. 구름이 흐르며 밝은 달이 대지를 비추자 사방에서 물기 어린 풀벌레 소리가 구슬프게 울려퍼진다.
하지만 돌연 울음소리가 멎어들었다.
검은 의복으로 갈아입은 남녀 세 명이 수풀을 헤치며 다가왔기에.
아리엘이 피부에 덧바른 진흙을 문지르며 물었다.
“도란, 정말 이걸로 괜찮을까...?”
“그나마 최선이겠지. 그래도 들키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어.”
“...고블린은 몬스터치고는 밤눈이 어두운 편이니까 이 정도로도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거예요. 체취를 속이는 데도 한몫하고요.”
“그래...? 그래도 혹시 모르니 언제든지 보호막을 펼칠 수 있도록 대비하고 있을게.”
고블린은 감각이 예리한 몬스터가 아니다. 기껏해야 겨우 인간과 엇비슷한 정도. 그나마 인간의 살 냄새를 잘 맡긴 하지만 온몸에 진흙을 칠한 지금은 들킬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도 되겠지.
어스름한 달빛에 의존해 본격적으로 고블린의 영역으로 접어들자 놈들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 웅덩이는... 혈흔이에요. 사슴 피 같은데 바위 위에 고여있는 걸 보니 이곳에서 해체하고 나눠 마신 것 같아요. 이리저리 손자국도 나 있고...”
“도란, 저 스산한 뼈 장식물은 뭐야...? 어쩐지 인간을 좀... 닮은 것 같은데...”
“아마 경계 목적으로 세워둔 걸 거야. 경계선을 표시하려는 목적일 수도 있고. ...갈비뼈에 살점이 남아있는 걸 보니 함정일지도 몰라, 우회해서 가자.”
“...흙의 색깔이 미세하게 달라요. 아마 함정이 맞을 거예요.”
“음침하네... 고블린이 이렇게 치밀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치료원에서도 유독 고블린 얘기만 나왔다 하면 치를 떠는 사람들이 있어서 왜 그런가 했...”
아리엘이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재빨리 장검을 뽑아들며 경계하자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전방을 눈짓했다.
“미안... 앞에 저거 사람인 줄 알았어.”
“...인간의 모습을 본떠 만든 짚인형인가 본데?”
“화살이 꽂혀 있는 걸 보니 연습 목적으로 쓴 모양이에요. 저도 모험가 의뢰를 하면서 고블린을 종종 만나봤지만 이렇게 영악한 놈들은 처음인데...”
라디가 성큼성큼 다가가 화살촉을 뽑아들고 유심히 살피며 말을 이었다.
“주철 합금... 끄트머리도 몹시 날카로워요. 아무리 고블린이 마물치고는 똑똑하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정교한 주조 기술을 어떻게 터득했을까요...? 게다가 날끝에는 분변까지 발라뒀어요.”
녀석이 옷소매로 입가를 틀어막으며 콧잔등을 구기자 나는 그 손에서 화살을 빼앗았다.
“...이런 건 맡지 마.”
“네... 자신의 배설물을 방어 수단으로 이용하는 마물이 존재한다는 건 들어봤어도 고블린이 그런다는 건 금시초문이에요.”
“독은 내 능력으로 치유하기 어려운데... 큰일이네.”
“그래도 치명적인 맹독은 아니라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네요. 환부가 곪기 전에 소독하면 되니까요. ...물론 맞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해독제를 챙겨올걸...”
“...잠깐, 뭐가 온다.”
어둠 너머로 일렁이는 불길이 다가와 우리는 서둘러 대화를 중단했다.
일제히 나무 뒤로 숨자 가래낀 듯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쿠륵...
코로롱...?
꾸르르륵...! 꾸륵!!
카르릉, 카릉!!
“.....”
나는 놈들이 코앞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불시에 뛰쳐나가 장검을 휘둘렀다.
투화확!!!!
즉살.
삽시간에 공간을 주파해 도륙하자 고블린들은 단말마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나는 스멀스멀 번져나가는 피웅덩이 속에서 잘려나간 머리통을 건져올리며 읊조렸다.
“정찰 나온 병력인가 본데? 피라미야.”
“쬐끄만한 걸 보니 얘는 새끼 고블린인가 보네...”
“먼저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도란님, 돌입하기 전에 그 장검을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요. 너무 눈부셔서 금방 들통나고 말 거예요.”
“그러게...”
시선을 내리자 횃불을 반사해 번뜩거리는 도신이 보였다.
고블린의 내장에 문대어 광택을 줄이던 차, 느닷없이 라디가 날 잡아끌고 볼트를 연사했다.
철컥! 철컥!!
“뭐, 뭐야...!”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황급히 자세를 고쳐잡자
“...함정이에요. 방금은 미끼고 지금 제가 발견한 놈들이 진짜 정찰병이었던 모양이에요.”
“그게 무슨...!”
비명의 근원지를 확인하자 고블린 중성체 두 마리가 덤불 속에 엎드린 채 거품을 물며 쓰러져 있었다. 마치 은신에 특화된 것처럼 몸이 얼룩덜룩하게 수풀에 동화된 모습.
재빨리 심장을 꿰뚫어 숨통을 끊어놓고 일어나니 라디와 아리엘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서렸다.
“도란님... 저희의 예상보다 훨씬 이상한 놈들이에요. 이건 평범한 고블린이 아니에요.”
“도란...”
“...그래.”
쉽지만은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ㅡ
“...어쩌면 이거 예삿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네..”
나는 장검을 어깨에 짊어진 채 놈들의 본거지를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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