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화 〉 고블린 사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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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고블린 사냥 #2
바위에 걸터앉아 칼날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있자니 두 녀석이 다가왔다.
라디가 쇠뇌를 정비하며 말했다.
“이걸로 열둘... 미끼 역할로 배회하던 고블린까지 더하면 스무 마리 가까이 잡았네요.”
“이제 정찰병은 다 처리하지 않았을까?”
“음... 적어도 오는 길에 있던 놈들은 전부 해치운 거 같은데... 그렇지?”
크... 크샤아앗...!
개미가 허겁지겁 고블린의 머리통을 삼키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신선한 고기라 그런지 정신없이 먹어치우는 모습.
나는 녀석의 머리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그래, 우리는 이제 안쪽으로 들어가 볼 테니까 계속 돌아다니면서 보이는 것들은 전부 처리해놔. 들키면 곤란하니까 깔끔하게 해치울 수 없으면 동료들을 모아서 한꺼번에 기습하고.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크샥!!
손을 내젓자 녀석을 필두로 개미들이 일사불란하게 산개했다. 언데드처럼 본능적으로 생명의 기척을 감지하는 놈들이니 풀숲에 숨은 고블린을 찾아내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겠지.
능력을 무리하게 발동하면 머리가 아프지만 이 정도라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아리엘이 난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미 몇 번 보긴 했지만... 용케 말이 통하네...”
“도란님은 이상할 정도로 동물이랑 교감을 잘하시더라고요. 포악한 마물을 길들인 적도 몇 번 있고... 잠시나마 야생에서 살아온 영향일까요?”
“뭐... 그냥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시골길을 거닐다 보면 온 동네 개들이 마중을 나오곤 했었지.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능선을 거슬러 나아갔다.
응달 사이를 누비며 은밀하게 이동하기를 잠시, 머잖아 목책 근처까지 도달했으나 삼엄한 경계 탓에 부락 안으로 들어가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망루에 서서 주위를 감시하는 고블린 궁수를 몰래 훔쳐보며 말했다.
“...곤란하네. 밤이 되면 조금 나아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경비가 삼엄해.”
“주변 나무도 몽땅 베어져 있어서 몰래 타고 넘어가는 건 불가능하겠어요. 목책 아래로 땅굴을 파서 돌입하려 했다간 첫 삽을 뜨기도 전에 고슴도치가 되어버릴 테고요.”
“내가 섬광을 터트려서 궁병들을 실명시킬 순 있겠지만... 그랬다간 고블린이 전부 깨어날 텐데 어떡하지?”
“.....”
목책을 넘어서 놈들의 주거 공간까지 도달하려면 필연적으로 개활지를 가로질러야만 된다.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건 명백해 보이고, 그보다 먼저 망루에 있는 고블린 궁수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말 거다.
라디의 쇠뇌도 저곳까지는 닿지 않는 상황.
놈들에게 들키지 않고 부락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성가시네... 일단 우회해서 길을 탐색해봐야 하나? 어딘가에 분명 허점이 있을 텐데...”
“음... 아까 둘러봤을 땐 오른쪽 능선이 험난해 보였으니까 그쪽으로 한 번 가보는 건 어때? 그만큼 감시도 뜸하지 않을까...?”
“그래, 일단 시도는 해 보자.”
천천히 자리에서 물러나 이동하려던 찰나 라디가 우릴 멈춰세웠다.
“...아니면 오히려 역으로 함정을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함정을?”
라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 앞에 있는 함정을 발동시키면 누군가 확인하러 나오지 않겠어요? 당연히 고블린들의 관심도 집중될 테고 그 틈에 도란님이 그 이상한 보법인지 뭔지로...”
“이상한 게 아니라 스승님한테 배운 거야. 너도 직접 봤잖아.”
“그건 그렇지만... 무슨 거창한 이름을 붙여놓고 연습이랍시고 맨날 복도에서 뛰댕기잖아요. 기술명을 안 외치면 집중이 안 된다나 뭐라나...”
“아, 도란이 매일 외쳐대는 게 그거였어? 근데 스승님이라니?”
“그건... 나중에 직접 소개해줄게. 아마 깜짝 놀랄걸.”
“....?”
아리엘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나는 씨익 웃으며 넘기고는 발밑에서 개미를 한 마리 더 소환했다.
“그럼 일단 발동시켜 본다? 기회가 보이면 곧바로 달려나가서 급습할 테니까 둘 다 대비하고 있어.”
“잠시만요. 일단 확실히 숨고요.”
라디가 내 허리춤을 잡아끌었다. 큼지막한 바위 뒤로 이동한 후, 개미의 꽁무니를 토닥여 전진하게 명하자 녀석은 군말 없이 개활지로 기어나갔다.
지뢰 제거를 감독하는 지휘관처럼 조마조마하게 가슴을 졸이고 있자니 곧 멀쩡했던 지면이 푹 꺼지고 파열음이 들려왔다.
풀썩!
크룩?
크르르르...
고로록!!
목책 너머에서 소란이 일었다.
잠시 후, 통나무를 덧대 교묘하게 위장해둔 출입문이 열리더니 고블린 세 마리가 창을 내세운 채 살금살금 걸어나왔다.
“...물었다.”
“걸려들었네요. 이대로만 다가와 준다면...”
“잘 돼야 할 텐데...”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놈들은 고블린답지 않게 신중했다. 두 마리가 조심스럽게 접근해 사방을 경계하는 사이 나머지 한 녀석이 허리를 숙이고 구덩이 안에 횃불을 비추었다.
놈이 구멍 아래로 몸을 들이민 순간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고
‘...백은보(白??).’
도약했다.
기척을 지우고 지면 위를 질주했다. 샛누런 시선이 미치지 않는 사각으로 육박했다. 어슬한 밤의 정경이 빠르게 시야 구석으로 흘러가고, 밤하늘의 휘황한 달빛이 이정표처럼 내게 길을 터주었다.
함정을 딛자 발밑에서 희미한 작동음이 들려왔으나,
콰득...!
더욱 가속해 뛰어넘자 그물이 솟구치며 허공을 덮쳤다.
그제야 몇몇이 눈치채고 활을 겨누었으나 나는 이미 목전까지 도달해 있었다.
“안녕?”
쿠륵?!!
눈이 마주치자 말뚝을 딛고 박차올랐다. 뾰족하게 깎아낸 머릿부분을 넘어 녀석들이 위치한 망루에 발을 디디자 고블린의 안구가 경악으로 벌어졌다.
놀란 고블린들이 허둥지둥 등을 돌려 달아났지만, 나는 장검을 신속히 내찔러 심장을 꿰뚫었다.
“일단 한 놈.”
손아귀의 장검을 회전했다. 손가락과 손등을 이용해 단도를 선회했다. 오른팔을 되돌리며 나는 한 놈의 상반신을 절단했고, 곧바로 발등을 차올려 턱뼈를 깨부쉈다. 옆 망루에서 날카로운 화살이 쇄도했지만 이는 들짐승처럼 민첩하게 엎드려 빗겨냈다.
그대로 발판을 박차고 허공을 뛰어넘어 반대편 망루로 넘어가자 고블린의 주둥이가 쩍 벌어졌다.
놈의 뱃거죽을 뒤엎으며 단도를 투척하자 칠흑의 도신이 혜성처럼 밤공기를 갈랐다.
단도는 순식간에 한 고블린에게 육박해 시위에 얹은 손가락을 관통하고는 얄팍한 목을 꿰뚫었다.
푸욱!!
크르륵?!! 크륵!!
“.....”
순식간에 고블린 궁병들을 참살하고 고개를 들자 황급히 망루에서 뛰어내리는 한 녀석이 보였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놈은 몽둥이를 움켜쥐고 비상벨을 울리기 직전이었다.
재빨리 손가락을 튕기자 고블린의 다리 사이에서 가시넝쿨이 솟구쳐올라 척추를 관통했다.
“...끝났나.”
이걸로 이 근방의 경비 병력은 전부 처리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고블린 군단과 정면으로 맞붙는 건 꺼려지는 바, 은밀히 처리하는 데 실패했으면 일단 물러날 생각이었는데.
옅은 미소를 품으며 찌릿한 이마를 짚고 있자니 라디와 아리엘이 목책 아래로 다가왔다.
“...해치웠어?”
“네, 심장을 꿰뚫고 구덩이 아래로 던져놨어요. 날이 밝기 전까지는 눈치채지 못할 테.... 도란님,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괜찮으세요?”
“응, 별거 아니니까 걱정 마.”
가뿐하게 지면으로 내려와 웃으며 맞이했다.
혹시 놓친 적이 있을지도 모르니 유심히 귀를 기울이던 와중 아리엘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겉으로 볼 때는 몰랐는데 여기 엄청 넓네... 그만큼 들킬 위험은 적어서 좋지만...”
“그러게요. 저도 지금까지 고블린이 부락을 짓기도 한다는 얘기는 종종 들어봤지만 이렇게 커다랄 줄은 몰랐어요. 대부분은 동굴이나 땅굴을 파고 살아가는 게 고작이었는데...”
“...일단 부지런히 움직이자. 날이 밝기 전에 조사를 마치려면 서둘러야 할 테니까. 혹여나 깨어있는 놈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고.”
고블린은 기본적으로 주행성이지만 사냥을 나서거나 할 땐 밤에 돌아다니기도 한다. 이렇게까지 치밀한 놈들이니 부락 안쪽에 보초 한두 명은 남겨두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
그렇게 막 적막한 부지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덜컹!
“읏...?!”
급작스레 발밑이 허전해졌다.
재빨리 지면을 붙잡고 버티려고 했을 땐 이미 발이 바닥에 닿아있었다.
“도, 도란?!!”
“도란님 지금 바로...!”
“쉬이잇...! 난 괜찮으니까 소리 줄여! ....이건 뭐지?”
가슴 높이 정도 오는 구덩이. 몹시 협소한 탓에 몸을 가누기조차 힘겹다.
침입자를 격퇴하기 위한 함정이라기엔 날카로운 죽창이 꽂혀 있는 것도 아니고 깊이도 너무 얕다. 굳이 활용처를 찾자면...
‘...김장독 묻기 딱 좋은 사이즈인데..’
땅을 짚고 가뿐하게 빠져나오자 아리엘이 구멍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음... 이것도 아마 일종의 방위 시설일 거야.”
“뭐? 이게...?”
“응, 구멍 안에 인원이 교대로 들어가서 소리를 듣는 거야. 멀리서 대규모 병력이 다가오면 말발굽 소리나 땅울림을 먼저 감지할 수 있으니까. 땅속에 있으면 진동이 멀리 퍼지거든.”
“고블린이 거기까지 생각했단 말이야...?”
“...그런 이유에서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네요.”
그러고 보니 어렴풋하게 들어 본 적이 있다.
타조가 땅속에 머리를 묻는 행위도 비슷한 이유였던가.
세간에는 지능이 떨어져 자신이 보지 못하면 상대방도 자신을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해서라는 낭설이 돌지만 이는 잘못된 사실이다.
타조는 더운 날씨에 체온을 조절하기 위해, 혹은 천적의 발소리를 듣기 위해서 땅에 머리를 박는다. 소리는 기체보다 고체에서 훨씬 빠르게 전달되어 지면 아래에선 작은 소리도 훨씬 잘 들리게 되니.
사냥꾼이 사냥감의 기척을 감지할 때 땅에다 귀를 대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겠지.
지혜에 감탄하며 구멍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문뜩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아리엘, 근데 넌 그걸 어떻게 안 거야? 어디서 쉽게 접할 만한 정보는 아니잖아.”
군사 시설 관련이면 더더욱.
아리엘이 태연하게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꼬며 읊조렸다.
“응... 그야 우리 아빠 성채에도 비슷한 시설이 있거든. 내가 어렸을 때 재무관하고 시찰을 나왔다가 궁금해서 들어가 본 적이... 헛...!”
“...성채가 뭐가 어째?”
“아, 아니 방금 건 그냥...!”
“.....”
귀한 집 딸인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설마 성까지 소유했을 줄이야...
그녀가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손바닥을 내저었다.
“도, 도란...? 조금 전은 그냥... 말실수야! 지인이라고 하려던 걸 잘못 말...”
“언니가 귀족 집안 출생인 건 이미 공공연하게 알고 있는데 왜 그래요?”
“아니 그, 그래도...”
“괜찮아.”
“으, 응...?”
나는 그런 아리엘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이며 말했다.
“자기 입으로 알아서 불게 만들면 되니까 괜찮아. 조금 괴롭히면 위로든 아래로든 대답하겠지. 이번 임무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단둘이 얘기 좀 할까?”
“그, 그건 무슨 뜻...?!”
“뭐 그야...”
다 알면서.
아리엘이 귀 끝까지 새빨갛게 물들이며 신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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