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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225화 (225/375)

〈 225화 〉 고블린 사냥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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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고블린 사냥 #3

완만한 경사의 부지를 거닐었다.

통행하기 편하게 다듬어놨는지, 목책 안쪽은 드높은 잡목 대신 작은 덤불과 관목이 주류거나 잔디가 고작이었다.

나는 지면에 깔다 만 석제 블럭과 파헤쳐진 땅 등 시공의 흔적을 흘겨보며 중얼거렸다.

“...잘도 해놨네. 누가 보면 도시라도 건설하려는 줄 알겠어. 아예 길까지 터놓고.”

“...아예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몰라요. 고블린에게 가장 큰 욕구는 번식이니까요. 개체수를 늘려가다 보면 자연스레 부락 규모를 벗어날 수도 있겠죠.”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이 있어. 대전쟁 이전에는 몬스터들이 모여 건국한 국가도 있었다고.”

“걔네가 그럴 지능이 돼?”

“응, 그야 그때는 지금과 많이 달랐으니까. 마물들이 모여 만든 나라지만 제대로 된 성곽도, 언어도, 법도 있었대. 다양한 종족의 원로 장로들이 군림하며 정세를 다스렸는데 그중에는 고블린도 있었다나 봐.”

“...신기하네.”

몬스터 국가라.

제법 흥미로운 화제였으나 지금은 눈앞에 집중해야 할 때다.

나는 전방의 길쭉한 목제 구조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건물이야.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주의하자. 라디야, 고블린 냄새는 안 나지?”

“음... 이 근처에는 없는 것 같지만 확실하지 않아요. 풀밭 곳곳에 체취가 배어있어서 섣불리 판단하기가 어렵거든요. ...이 건물 안에서 고약한 악취가 풍겨오고 있어서 냄새를 맡기 어렵기도 하고요.”

“...그래, 그럼 내가 먼저 돌입할 테니까 너희 둘은 밖에서 엄호해줘.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신호를 보낼게.”

“그... 도란..”

“왜?”

“조심해.”

“.....”

굳건하게 고개를 끄덕여 화답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고블린의 부락 내부에서 첫 번째로 마주한 건물. 어쩌면 여기서 촉수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 수도 있다.

“.....”

­끼익...

조악한 나무문을 발바닥으로 젖히자 녹슨 경첩에서 소름 끼치는 소음이 흘러나왔다.

장검을 중단으로 내세운 채 신중하게 문턱을 넘었지만, 부슬비가 자아내는 희미한 빗소리 외에는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니 물기를 머금은 건초의 습기, 꿉꿉한 곰팡내, 침체된 탁한 공기와 짐승의 악취가 코를 찔렀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벌어진 천장 틈새로 흘러들어온 달빛이 사방에 쌓인 지푸라기를 비추었다.

“...빈 건물이야. 안심해도 될 거 같아.”

“다행이네...”

“일단 최대한 교전은 피하는 게 좋으니까요.”

두 녀석이 제각각 무기를 내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조용히 문을 닫고 아리엘이 희미한 빛 알갱이를 피어올리자 우리는 그제야 건물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축사로 쓰던 건물인가 봐... 마구가 그대로 남아있어.”

“고블린 기병이라도 양성하고 있었던 걸까요?”

“굴레가 새 걸로 갈아져 있는 걸 보니 사용한 지 얼마 안 됐어. 고삐도 손질이 잘 되어있고.”

직물을 엮어 만든 끈을 집어들었다. 건물 구석에는 하루살이 유충이 들끓는 물 양동이와 작은 놋쇠 방울, 건초를 쉽게 정리하기 위한 쇠스랑 등이 기대어져 있었다.

나는 말발굽치고는 조금 특이하게 생긴 청동 부착물을 발끝으로 툭 차며 읊조렸다.

“형태를 보니 말은 아닌 모양인데 뭘 기르고 있던 걸까? 이런 발 모양을 가진 생명체면...”

“아마 멧돼지가 아닐까 싶은데요?”

“멧돼지?”

“네, 저기 나무 울타리 이음매에 억센 털이 끼어있어요. 고블린은 체모가 없으니 아닐 테고... 굵기나 길이로 봤을 땐 멧돼지가 틀림없을 거예요. ...무엇보다 특유의 누린내가 나요.”

“멧돼지를 몰고 다니는 고블린이라... 상상이 안 가네.”

대충 호그 라이더 고블린이라 명명하면 되려나?

우리에 없는 걸 보니 지금은 방목 중인 모양이다.

기다랗게 늘어선 축사를 나아가며 내부를 면밀히 살폈지만, 이곳에선 별다른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반대편 출구까지 도달하자 아리엘이 난처하게 뺨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런데 결국 여기서도 딱히 단서라고 할 만한 건 찾지 못했네...”

“그러게요... 저도 아까부터 촉수의 흔적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는데 코빼기도 보이질 않아요. 아마 다음 건물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아까 우리가 봤던 녀석은 꽤 강해 보였으니까 병영 막사 같은 장소에 있을지도 몰라. 아니면 난 아까 봤던 신전 비스무리한 건물이 의심스러운데...”

천천히 쪽문을 열고 나왔다.

혹여나 고블린 무리가 에워싸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우릴 맞이한 건 상쾌한 바깥 공기와 우렁찬 개구리 울음소리뿐이었다.

비에 젖어 물방울 맺힌 풀잎 위를 누비자 바지 밑단이 축축하게 물들었다.

멀찌감치서 드문드문 보이는 건물의 음영을 눈여겨보며 달빛 아래를 거닐던 도중, 불현듯 라디가 옷소매를 툭툭 잡아당겼다.

“왜?”

“아니 미처 의논하지 못했던 게 있는데... 탐색하는 건 좋지만 그다음은 어쩌실 생각이세요?”

“그다음이라니? 촉수가 뭔지 알아내고 난 뒤에 말이야?”

“네, 고블린들을 그냥 방치하기는 조금 마음에 걸리지 않아요? 놔두면 언젠가 피해자가 나올 텐데... 도시 인근 주민을 납치해다가 수를 불려나갈지도 몰라요.”

“...웬일이야? 네가 그런 걸 다 신경 쓰고.”

“네?”

라디는 허를 찔렸는지 눈동자를 크게 떴다.

하지만 곧 반달 모양으로 눈매를 좁히며 날카롭게 쏘아봤다.

“그게, 무슨 소리죠?”

“아니... 너 원래 다른 사람한테는 관심 없잖아. 주변 모험가가 다치든 말든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으면서.”

이전에도 던전에서 뗏목을 타고 습지를 건너던 도중 악어의 습격을 받자 다른 모험가들을 미끼로 쓰자는 의견을 서슴없이 내뱉었을 정도다. 나랑 처음 만났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냉소적이기도 했고.

매정하다기보단 천부적인 모험가라고 해야겠지만.

녀석이 고개를 돌리며 새침하게 읊조렸다.

“...실례네요. 저도 기본적인 양심은 있다고요. 게다가 제가 살던 빌헴 마을은 규모가 작아서 가끔 고블린에게 희생당한 사람도 나왔어요. 그래서 무보수로 고블린 소탕 작전에 참여한 적도 있었고요.”

“...미안해. 그런 사연이 있을 줄은 몰랐네...”

“아니... 그래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니까 미안해하실 필요까진 없는데... 그래서 어떡하실 거예요?”

“뭐... 가능한 한에서 최대한 수를 줄여놔야지. 아무리 죽여도 잡초처럼 금방 불어나는 놈들이니까 한 번에 일망타진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혹시 독 챙겨온 거 있어? 효과 직방인 걸로.”

“네, 저는 집 안이든 밖이든 언제나 한두 병 정도는 휴대하고 다니니까요.”

“.....”

아니, 집 안에서도 휴대하고 다니는 건 어떨까 싶은데...

“...아무튼 그럼 이번에야말로 우물이나 식료품에 독을 풀어놓자. 그게 제일 안전하고 간편할 테니까.”

만일 이곳이 지구였더라면 전쟁 범죄라고 지탄받아 마땅할 짓이지만 이곳에선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윤리와 도덕은 시대상에 따라 판이하기 마련이고 몬스터에겐 권리 따위 없으니까.

아리엘의 의견도 물으려는 찰나­

재빨리 입을 다물고 덤불 뒤로 숨었다.

숨소리를 죽이고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한 고블린이 어깨에 돌도끼를 들쳐멘 채 털레털레 눈앞을 지나갔다.

놈이 관목 너머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고 난 뒤 천천히 입술을 뗐다.

“부락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 만난 첫 번째 고블린이네... 어떡할까?”

“음... 일단 쫓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다른 고블린이 모여있는 장소로 안내해 줄지도 몰라. 어쩌면 그 촉수가 달린 고블린도.”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너무 멀리 가기 전에 빨리 뒤쫓는 게 좋겠어요.”

“그래, 그럼...”

로브 자락에 풀잎이 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어렵사리 찾아낸 기회를 그냥 날려버릴 수도 없는 바, 살금살금 고블린의 뒤를 쫓다 보니 여러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황폐한 채석장과 바위에 꽂힌 철제 곡괭이, 네모반듯하게 다듬어진 석제와 망가진 수레 따위를 지나치자 마침내 녀석이 다 쓰러져가는 창고 앞에 멈춰서더니 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라디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저곳인가 봐요.”

“무슨 볼일이 있길래 이런 야밤에 돌아다녔을까? 뒤도 안 돌아보고...”

“...지금부터 알아보면 되겠지. 엄호 좀 해줘. 이번에는 들어가자마자 제압할 거야.”

“혹시 모르니까 보조 마법을 걸어줄게.”

“고마워.”

상대는 고블린 한 마리. 평소라면 매우 손쉽게 처치할 수 있는 상대지만, 이곳에서 벌어지는 영문 모를 사건들은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검을 내세워 서서히 창고로 다가갔고, 초라한 사립문에 다다른 순간 문짝을 박살 내며 돌입했다.

감았던 눈을 뜨며 어둠에 적응된 시계로 창고 내부를 훑었으나­

“.....”

손아귀에서 힘을 풀었다.

검날을 낮게 늘어뜨리며 멍하니 멈춰서자 아리엘이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도란... 무슨 일이야...?”

“없어.”

“없다니 뭐가...”

“...아무도 없어.”

말 그대로.

고블린이 사라졌다.

라디가 조심스럽게 다가왔으나 이내 맥없이 쇠뇌를 내리며 중얼거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그러니까. 방금 이 안으로 들어가는 걸 똑똑히 봤는데.”

“발자국도 그대로 찍혀있어... 이렇게 비좁은 공간에는 숨을 곳도 없을 텐데...”

“.....”

주위를 둘러봤으나 창고 어디에서도 고블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건물의 면적은 여섯 평 남짓. 아무리 체구가 작은 고블린이라도 몸을 감추기에는 턱없이 비좁은 공간이다. 창고라고 해서 번듯한 선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수납장 따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밋밋한 나무 바닥에 각종 기자재가 어지러이 쌓여 있을 뿐.

재빨리 입구를 살폈지만 질펀한 진창에는 고블린의 족적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라디가 그중 한 발자국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비가 내리는데도 발자국엔 물이 차 있지 않아요. 생긴 지 얼마 안 됐다는 뜻인데... 잠깐 뒤에 좀 보고 올게요.”

“같이 가자.”

혹시나 싶어 창고를 빙 둘러봤으나 출구라곤 내가 조금 전에 부순 사립문이 전부였다.

창문이 있을 리도 만무.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그러게요... 이 안으로 들어온 건 틀림없는데...”

미련을 떨쳐내지 못하고 기자재들을 살펴보던 도중, 아리엘이 손짓했다.

“도란, 이리 좀 와봐.”

“왜?”

“이거 좀 이상하지 않아?”

그녀가 난잡하게 찍힌 족적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들어간 발자국은 있는데 나온 발자국이 없어. 크기도 제각각이니 여러 마리가 왔다 갔다는 뜻인데. ...혹시 이 건물 안쪽에 다른 장소와 이어진 비밀통로가 나 있는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로 발자국이 모두 일정한 방향을 향해 찍혀있었다.

라디가 눈썹을 움찔하더니 신속하게 건물 안쪽으로 달려가 잡동사니를 헤집었다.

녀석이 억눌린 목소리로 외쳤다.

“도란님, 이 마룻바닥.. 부자연스럽게 결이 끊긴 부분이 있어요...! 이 부분을 들어올리면...”

“그럼 어딘가에 손잡이가...”

­툭.

창고를 샅샅히 훑던 도중 뭔가가 발부리에 걸렸다.

고개를 내리자 바닥에 단단하게 박혀있는 손도끼가 하나 보였다.

‘...에이 설마.’

도끼의 자루 부분을 움켜쥐고 잡아당기자 마룻바닥이 들썩이며 먼지가 흩날렸다.

“...맞네.”

“잘했어 도란!!”

“...여기 쌓여 있는 기자재들은 전부 이 손잡이를 숨기기 위해서였나 봐요... 고블린이 이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더라면 무심코 지나쳤을 게 분명해요.”

“.....”

대체 뭣 때문에 이렇게까지 엄중하게 숨기려고 했을까.

바닥에 쌓인 잡동사니를 치우고 마룻바닥을 들추자 감추어져 있던 비밀통로가 드러났다.

나는 허리를 굽혀야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좁다란 토굴을 내려다보며 침음했다.

“왠지 꺼림칙한데...”

“...투정 부릴 때가 아니잖아요.”

“나도 알아. ...들어가자.”

“잠깐, 일단 불을 좀 밝히고...”

허리춤의 수통을 고쳐맨 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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