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226화 (226/375)

〈 226화 〉 고블린 사냥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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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고블린 사냥 #4

채 몇 발자국도 떼지 않아 밑바닥에 다다랐다.

아리엘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빛무리를 전방으로 떠밀자 굴곡진 땅굴의 표면이 파르스름하게 빛났다.

“...꽤 기네.”

“여기도 발자국이 잔뜩 찍혀있어. 날붙이 흔적도 보이고... 조심해 도란.”

“응, 내가 앞장설게. 라디야 냄새는 어때?”

“...지독해요. 아마 꽤 빈번하게 지나다닌 것 같은데...”

“그래? 그렇단 말이지...”

손가락을 튕겨 개미를 불러들였다.

녀석을 십여 미터 선두에서 걷게 한 뒤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디뎠다. 야트막한 통로는 고블린의 신장에 맞춘 탓인지 허리를 수그려야 지날 수 있었지만, 통행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개미가 먼저 경고해줄 테고.

나란히 통로를 나아가던 중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도란, 나 예전부터 하나 궁금한 게 있었는데 지금 물어봐도 돼?”

“그래, 물론이지. 뭔데?”

“그... 도란은 이 세계 출신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치?”

“...그래.”

그녀가 나긋나긋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 세계에 오게 된 거야? 라디하고도 얘기를 나눠 봤는데 잘 모르겠다고 하고... 도란이 먼저 말을 꺼낸 적도 없고.”

“...내가 안 알려줬었나?”

“네... 사실 저도 오래전부터 쭉 궁금했는데 먼저 여쭈어보기도 좀 그래서... 안 좋은 기억일 수도 있으니까...”

“뭐...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나는 서서히 발걸음을 늦추고는 목덜미를 매만지며 고했다.

“...사실 나도 잘 몰라.”

“네?”

“그냥 정신이 들고 나니 숲속 공터에 누워있었어. 입고 있던 단벌옷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몸에 상처가 생겨있거나 변화가 느껴진다거나 하지도 않았어.”

“그런... 혹시 그 직전의 일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아마 평소처럼 잠자리에 들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누군가가 기억을 지운 것처럼 두루뭉술해.”

“.....”

두 녀석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난처하게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아리엘이 상체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럼... 다른 세계에 도착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어떤 심정이었어...?”

“음 그게...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어이없는 얘기긴 한데... 사실 한 일주일 정도는 모르고 지냈어.”

“응? 그게 무슨...”

“우리 아버지가 워낙 별난 사람이라 툭하면 날 오지에다가 던져놓고 사라지곤 했거든. 그날도 그냥 평소처럼 자는 사이 납치당한 줄 알았지. 근데 숲을 거닐다 보니 뿔 달린 토끼나 눈이 여러 개인 사슴 등 이상한 생물이 보이더라고. 그리고 오크와 마주치고 깨달았지. 아, 여긴 내가 있던 세계가 아니구나 하고.”

“오크... 정말 용케도 살아남았네... 근데 그 다음은?”

“뭐...?”

“왜... 그 뒤의 일이 있을 거 아냐. 도란은 숲속에서 일 년을 보냈다고 했지? 그럼 나랑 만나기까지 최소 반년은 공백이 있을 텐데... 게다가 너도 처음부터 이 세계의 언어를 알지는 않았을 거 아냐.”

“그러고 보니... 제가 저번에 어디서 말을 배웠는지 물어봤을 때 화제를 돌리며 얼버무렸죠. 말톤님에게 넌지시 여쭤봤는데 그분마저 모르시는 눈치였고... 도란님?”

“.....”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피하자 두 녀석이 의아하게 쳐다봐왔다.

라디가 미심쩍게 눈매를 좁혔다.

“...도란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반년 조금 넘게 모험가 생활을 하신 것치고는 상당히 대인전에 익숙한 이유와 관련이... 설마 여자?”

“...평소 억양으로 보아 비스마르크 영토 안에서 말을 배운 건 아닌 것 같은데... 도란은 바다에 가본 적이 있다고 했지? 도보로 단시간에 베라스틴까지 도달할 수 있는 곳이면 동쪽 해안가일 테고... 거기와 맞닿아 있는 장소는... 설마 여자?”

“자자 일단 여긴 적지 한복판이니까 나중에 이야기하자! 다들 집중하고.”

“.....”

재빨리 손뼉을 쳐 화제를 불식시키고는 발걸음을 재촉해 벗어났다.

잠시간 밀도 높은 침묵이 통로에 내려앉았지만 나는 묵묵히 나아갈 뿐.

남몰래 묵직한 한숨을 내쉬던 와중 불현듯 개미가 침묵을 깼다.

­크샥!!

“...앞에서 뭐가 나타났나 봐. 내가 먼저 확인해 볼 테니까 둘 다 기다리고 있어.”

“....네.”

나는 단도를 전방으로 겨눈 채 땅굴을 전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개미가 경고한 지점까지 다다랐으나...

‘젠장...’

그곳엔 밋밋한 토벽만이 있을 뿐, 딱히 이렇다 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분위기를 읽고 다가온 라디와 아리엘이 침음했다.

“...막다른 길이네요.. 그럼 어딘가에 또 비밀통로가 있었다는 뜻인데...”

“곤란하네... 왔던 길을 일일이 다 짚어볼 수도 없고. 라디야, 후각으로 찾아낼 수는 없어?”

“으... 무리에요. 통로 전체에 고블린의 체취가 배어있어서...”

라디가 소매로 콧잔등을 문지르며 답했다.

난처하게 주위를 둘러보기를 잠시,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좋아! 여기선 내가 해 볼 테니까 둘 다 지켜보고 있어.”

자신 있게 선언하자 두 녀석이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녀들을 뒤로 물리고는 조명으로 다가가 짙은 그림자를 만든 뒤, 음영 속에서 익숙한 생물을 소환했다.

“..오랜만이다?”

­....우옹.

노래기가 과묵하게 대답하자 라디가 눈을 크게 떴다.

“도란님, 그 애는...!”

“아, 그러고 보니 라디 넌 처음 보지? 아리엘 넌 골목길에서 강도를 해치울 때 봤었고.”

“응응, 간만에 보니까 반갑네! 그런데 좀... 귀여워졌다...?”

“...그치.”

이교도 광장에서 불러냈을 때의 녀석은 성인 남성도 깔아뭉갤 만큼 거대했지만, 지금은 그저 내 허리 높이까지 오는 게 고작이었다.

심지어 골목길에서 소환했을 때보다 작아진 상태.

머쓱하게 관자놀이를 긁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힘을 들이면 더 크게 소환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필요 없으니까. 이곳은 많이 비좁기도 하고.”

능력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아직 둘에게 알리지 않았다.

나는 짐짓 헛기침하곤 노래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혹시 독무 좀 분사해줄 수 있어? 인체에 무해한 걸로. 저 전방으로 쭉 지나가면서 내뿜어주면 우리도 곧바로 뒤따라갈게.”

­.....

노래기는 힐끗 내 뒤편에 선 라디와 아리엘을 의식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통로 저편으로 나아가며 통통한 몸체를 꿀렁이자 타이어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음이 흘러나오며 시꺼먼 가스가 사방으로 분출되었다.

소독차를 뒤따르는 아이의 심정으로 녀석을 쫓고 있자니 라디가 로브로 코를 틀어막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으... 끔찍해요.”

“...왜, 어디 안 좋아? 혹시 속이 안 좋다거나...”

“아뇨, 유독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냥 냄새가 지독해서요.”

“그래? 난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아리엘 너는?”

“음... 유황 냄새 같은 게 좀 나긴 하네. 오래 맡았다간 조금 어지러울 수도 있겠어.”

“.....”

나는 완전 면역이라 못 맡는 건가?

걱정스럽게 아리엘을 쳐다보았으나 그녀는 태연하게 손을 내저었다.

“마법으로 정화하고 있으니까 괜찮아. 애초에 독 성분은 없는 것 같고.”

“...혹시라도 이상하면 바로 말해. 라디 너도 마찬가지고.”

“네... 근데 대체 무얼 하시려고...”

“좀만 있으면 곧 알게 될 거야.”

“....?”

갸웃거리는 라디에게 웃음으로 화답하고 전진했다.

씰룩거리는 노래기의 꽁무니를 쫓아 나아가던 도중, 돌연 아리엘이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어...! 도란 저기!!”

“그래, 찾았네.”

통로 한구석, 검은 연기가 돌벽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벽에 희미한 이음매가 나 있었고, 손바닥을 대자 미세한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이제 됐어, 수고했다. 앞으로도 필요한 일이 있으면 종종 부를게.”

­우웅...

노래기를 그림자 속으로 돌려보내고 나자 아리엘이 감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방법으로 샛길을 찾아낼 줄이야..”

“그러고 보니 도란님은 예전부터 중요한 순간에 기지를 발휘하곤 했었죠... 공기의 흐름으로 숨겨진 공간을 찾아낼 생각을 하시다니...”

“뭐, 그냥 문뜩 아이디어가 떠오르더라고. 그럼 여기 어딘가에 개폐 장치가... 그렇지.”

­덜컥.

툭 튀어나온 돌부리 안쪽에 교묘하게 숨겨진 걸쇠를 건드리자 흙이 부스스 떨어지더니 벽면이 기울었다.

입꼬리를 올리며 새로이 드러난 공간 너머로 향하자 두 녀석이 재빨리 뒤쫓아왔다.

도르래가 설치되어 있는지, 등 뒤 입구가 도로 닫히는 걸 확인하며 아리엘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대체 뭐가 있길래 이렇게까지 꽁꽁 숨겨둔 걸까?”

“글쎄... 보물이라도 모아뒀으면 좋겠는데. 고블린은 반짝거리는 걸 좋아하니까.”

“음... 보물도 좋지만... 도란님, 혹시 나중에 돌아가고 나면 아까 노래기를 다시 소환해주실 수 있어요?”

“응 물론이지, 근데 왜?”

“그 애를 이용해서 새로운 무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통 안에 가스를 밀봉했다가 터트리면 생화학 병기로 활용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요? 농도를 짙게 응축하면 잠시나마 시야를 차단하는 효과도 있을 테고... 혹시 가연성이에요?”

“...아마 아닐걸. 지하 광장에서 이교도들이 횃불을 들고 있었는데도 멀쩡했던 걸 보면...”

라디의 눈동자가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그럼 써먹기 더 좋겠네요! 폭발 위험도 없고... 도란님에겐 아무런 위해를 끼치지 않는 모양이니 액체 상태로 만들어서 검에 도포하면 리스크 없이 살상력을 증폭시키는 것도 가능할 거예요! 또 스프레이에 담아서 뿌리면 비상시에도 사용할 수 있는 호신용품으로...”

“.....”

난처하게 고개를 돌리자 아리엘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리자 라디가 의아하게 올려다봤다.

“...왜요? 제가 무슨 이상한 말이라도...”

“아냐, 그냥 귀여워서 그래.”

“....?”

녀석의 뺨을 살짝 잡아당긴 뒤 부지런히 앞길을 재촉했다. 다행히 샛길로 접어들고 나서부터는 눈에 띄게 통로가 넓어져 수월하게 전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머잖아 발걸음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잠깐, 이건... 철로를 깔다 만 흔적? 왜 이런 곳에...”

“...이 검댕은 석탄 같아.”

“철광석... 흙에 합금 찌꺼기가 섞여 있어요.”

사방에서 예사롭지 않은 흔적들이 엿보이기 시작했고­

­...! ...! ...!

“...잠깐, 혹시 무슨 소리 안 들려...?”

“...나도 들었어.”

“이곳은 대체...”

후끈한 열기가 바람을 타고 전해져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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