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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228화 (228/375)

〈 228화 〉 고블린 사냥 #6

* * *

[228] 고블린 사냥 #6

협소한 통로를 나아가던 중, 자리에 멈춰섰다.

등 뒤를 돌아보자 코알라처럼 안긴 란이와 녀석을 끌어안고 난처하게 뺨을 긁는 아리엘이 보였다.

“...아직 안 들어간대?”

“응... 이번 일로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혼자 있기 싫은가 봐...”

“...어쩔 수 없지. 아직 어리니까 조금은 응석을 들어주자.”

시간이 지나면 녀석도 이별에 익숙해지겠지.

허리춤의 벨트에 고블린 단검을 고정한 채 걸어갔다. 날카로운 칼날은 베이지 않도록 헝겊을 둘러 보호했고, 가죽끈을 위에 덧대 단단히 동여맸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장간 내부에 쌓여있던 무구는 전부 용광로에 소각했다. 혹여나 다른 고블린이 주워다 쓰면 큰일이니.

단검치고는 이상하리만치 묵직한 무게감을 의식하며 통로를 전전하다 보니 라디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언니는 아까 그 나무토막이 낱말 카드라는 걸 어떻게 아신 거예요? 글자가 작아서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어려웠을 텐데... 언니는 멀리서도 단박에 눈치챘잖아요.”

“음... 궁금해...?”

“.....”

아리엘이 눈치를 살피며 뜸을 들이자 라디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더니 허리춤에 매달아둔 주머니를 들어올리며 마지못해 내뱉었다.

“...이거 내가 개량한 거야.”

“네?”

“뭐?”

우뚝 자리에 멈춰서서 빤히 바라보자 아리엘이 말을 이어나갔다.

“음...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내가 어릴 때, 그러니까 아직 독립하기 전의 일인데 한 번은 시찰을 나왔다가... 아.”

“...그런데?”

“우음... 시장을 둘러보다 보니 활자를 못 읽는 사람들이 많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쉽고 재밌게 글을 익힐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떠올린 게 바로 이거야. 마침 내 남동생도 막 글을 배워가던 시기였으니까.”

“그럼 정말로 그걸 네가 개발했다고...?”

눈을 휘둥그레 뜨며 쳐다보자 아리엘이 손바닥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아니, 말했잖아. 난 그저 원래 있던 걸 개량한 게 전부야. 기존에도 비슷한 물건이 있긴 했지만 서민이 감당하기엔 너무 비싸고 실용성도 떨어졌거든. ...설마 베라스틴에도 와 있을 줄은 몰랐지만.”

“...대단하네요. 언니한테 그런 재능이 있는 줄은...”

“으음... 솔직히 운이 좋았지. 나는 그저 아이디어를 냈을 뿐인데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이 많았으니까.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저택도 그때 번 자금으로 산 거야. 낱말 퍼즐 외에도 가끔 괜찮아 보이는 게 있으면 재무관하고 상담해서 상품화했거든. 그래서 매달 그 이윤을 길드 계좌로 받고 있어.”

“굉장하네... 솔직히 조금 다시 봤어. 멋있다.”

“...그, 그래? 도란이 그렇게 말하니까 쪼끔 낯간지럽네... 헤헤.”

아리엘이 부끄러운 듯 움츠렸지만 칭찬이 나쁘지만은 않은지 입가를 히죽거렸다.

그간 씀씀이가 넉넉하길래 당연히 부모님의 지원을 받았을 줄 알았는데 어엿이 스스로 자립했을 줄이야.

‘게다가 꾸준히 기부도 하고 있다고 했지...’

마음씨가 대견해 머리를 쓰다듬으니 그녀가 뺨을 붉히며 미소지었다.

“...그럼 그걸 챙겨온 것도..”

“응! 이걸로 란이한테 말을 가르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잘 생각했어. 내가 다 든든하네.”

“읏...”

팔에 힘을 주어 허리를 끌어안자 아리엘이 헛숨을 들이켜며 긴장했다.

자연스레 피부가 밀착하고, 그녀가 꼴깍 침을 삼켰다. 요란한 심장의 박동이 소음을 차단하자 가녀린 손이 살그머니 내 허리로 내려갔다.

자석에 이끌리듯 살금살금 다가오는 고개와 올라가는 까치발. 무언가를 갈구하며 암시하는 듯한 시선.

제법 야리꾸리하고 바람직한 상황이었지만 도중에 나는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리엘의 커다란 가슴에 압착된 란이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나와 그녀를 밀어냈기에.

“그래, 미안해. ...기분은 좀 나아졌어?”

­.....

란이는 말없이 내 품으로 옮겨탔다.

라디는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짓더니, 이내 아리송하게 뺨을 짚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 고블린은 어쩌다가 그 낱말 카드를 손에 넣게 된 걸까요? 인간 사회에 잠입해서 들어갈 수도 없었을 텐데...”

“그러고 보니 그러네... 어째서일까? 내가 알기론 우리 영지 말고는 보급이 잘 안 되어있을 텐데...”

“뭐, 이 근방을 지나던 상인한테서 노획한 게 아닐까? 아까 용광로에 공구를 던져 넣을 때 보니까 상단의 문양이 찍힌 물건이 있더라고. 물자를 운송하다가 봉변을 당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렇다면 납득이 가네요... 최근 언데드 때문에 워낙 뒤숭숭해서 상인 한두 명이 실종되어도 흐지부지 넘어가곤 했으니까요.”

라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지만 불현듯 발을 멈추며 눈빛을 차갑게 갈무리했다.

“왜?”

“...알코올 향이 나요.”

“이런 지하에?”

“네, 희미하긴 하지만... 출구가 얼마 머지않았을 수도 있겠어요. 조심해요.”

“...광량을 최소한으로 낮추는 게 좋겠네.”

“....”

조금 더 걷자 막다른 길 한복판에 목제 사다리가 기대어져 있었다.

귀를 기울여 고블린의 기척이 들리지 않는 걸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지상을 내다보자 어둑한 실내와 케케묵은 선반, 그득한 포댓자루가 보였다.

“...식료품 저장고인가 봐. 올라와도 될 것 같아. 아무도 없어.”

“네, 잠시만요...”

“먼저 올라가 라디야. 곧바로 뒤따라갈게.”

두 녀석을 도와 지상으로 끌어올려 주자 라디가 새빨개진 코를 문지르며 읊조렸다.

“알코올 냄새는 여기서 나는 거였네요... 지독해요.”

“그러게... 좀 독하네.”

어둠에 익숙해지자 부서진 채 방치된 오크통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닥에는 흘러내린 포도주가 골골거리며 희미한 소음을 자아냈고, 마루 결을 타고 흐르며 신발 밑창을 적셨다.

“잠깐... 옆면에 원산지가 적혀 있는데...”

아리엘이 오크통으로 다가가더니 라벨에 불빛을 비추며 말을 이었다.

“...카베르나산 포도주네. 이거 꽤 비싼 건데... 고블린이 직접 공수했을 리는 없고 상인한테서 약탈한 게 맞는 것 같아.”

“카베르나? 어디서 들어봤는데...”

“...아마 붉은 매 길드의 막사에서 들었을 거예요. 비아투스 할아버지가 말한 적이 있거든요.”

“아 그때...”

유적에서 구한 술을 팔아 어마어마한 금화를 얻었지.

드워프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떠올리고 있노라니 라디가 로브 안쪽을 뒤지며 말했다.

“그래도 마침 잘됐네요. 여기다가 독을 풀면 될 것 같아요.”

“그래, 기왕이면 골고루 타 놓자. 혹시 모르니까.”

“맡겨만 주세요.”

라디가 반투명한 유리병을 꺼내 능숙한 손놀림으로 오크통마다 독약을 떨어뜨렸다.

아리엘과 함께 독이 잘 섞이도록 막대기로 저은 뒤 뚜껑을 다시 덮는 과정을 거치던 중 라디가 주변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저 포대에도 독을 타 놓을까요?”

“어디 보자... 곡물? 옥수수랑 밀 이삭이네... 그래, 여기다가도 독을 풀어놓자. 확실하게 해야지.”

“네, 그럼 결정...”

그때였다.

창고 문 틈새로 두 쌍의 누런 눈동자와 마주친 건.

재빨리 뛰쳐나가려 했으나 미끄러운 바닥 탓에 반응이 한 발 느려졌고­

­꾸에에에에엑!!!!!!

귀청을 찢을 듯한 울음소리가 달밤에 메아리쳤다.

*

황급히 건물 밖으로 뛰쳐나오자 괴성을 지르며 달아나는 두 고블린이 보였다.

벼락같이 질주해 한 놈을 도륙하고 단도를 투척하자 고블린이 잔디를 뭉개며 지면을 굴렀다.

나는 놈이 일어날 시간을 주지 않고 툭 불거진 칼자루를 난폭하게 걷어차 숨통을 끊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젠장.’

누군가는 분명 이 울음을 들었을 터.

추적추적 빗발이 굵어지기 시작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자 라디와 아리엘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아리엘이 낭패 서린 얼굴로 말했다.

“어떡하지 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곧 고블린이 떼거리로 몰려들 거예요. 그 전에 빨리 어딘가로 피신해야...”

“...독은 다 섞었어?”

“일단 대충 뿌리고 왔어요.”

“.....”

이런 허허벌판에서 놈들에게 포위당했다간 그대로 끝장이다. 마력 방벽으로 빗발치는 화살을 잠시나마 막아낼 순 있겠지만, 아리엘의 마나도 무한정으로 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지하로 숨을까?”

“안 돼요... 놈들은 이곳에 비밀통로가 있는 걸 알고 있을 테니 제일 먼저 확인할 거예요. 비좁은 땅굴에서 앞뒤로 에워싸이면...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끝날 테고요.”

“그렇다면 일단 산 아래로... 위험해!!”

찰나, 날카로운 섬광이 번뜩여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첨예한 화살촉을 건틀릿으로 튕겨내자 풀숲에서 성난 외침이 들려왔다.

­카아악!!

“이 새끼가...!”

재빨리 덩굴을 솟구쳐 놈을 꿰뚫었지만, 저 멀리 능선 아래로부터 횃불이 하나둘씩 점등하며 북소리가 울려퍼졌다.

시간이 없다.

“젠장...! 일단 달려요 도란님!!!”

“그래!! 란이야 이제 안에 들어가 있어!”

­...됴란!

란이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얌전히 수통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재빨리 후드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능선 위쪽을 향해 내달렸다. 고블린의 촌락을 벗어나려면 산등성이 아래로 내려가야 하지만, 그랬다간 화톳불에 뛰어드는 불나방 신세밖에 안 된다.

젖 먹던 힘까지 사력을 다해 경사를 뛰어올랐으나 비에 젖어 미끄러운 진창 탓에 자꾸만 미끄러졌다.

라디가 다급하게 외쳤다.

“건물...! 건물로 들어가야 해요!! 일단 농성하면서 버틸 수밖에 없어요!!!”

“염병!! 이 썩을 고블린...!”

“조심해!!!”

찰나, 아리엘의 손바닥에서 눈부신 빛무리가 뿜어나와 검은 형체를 튕겨냈다.

장벽을 강타한 돌도끼가 커다란 파문을 남기는 걸 기점으로 진흙탕에 엎드려 있던 고블린들이 잇따라 뛰쳐나왔지만­

“...산개!!”

아리엘이 감았던 눈을 뜨며 외치자 장막이 무수한 빛의 파편으로 깨져나가 고블린을 덮쳤다.

쉬지 않고 발을 놀리며 외쳤다.

“뭐야...! 너 그런 것도 할 수 있었어?!!”

“도란도 저번에 지하에서 봤잖아!!”

“그땐 영창이 길었잖아!!”

“...대신 그만큼 위력이 약해!! 치명상은 아닐 거야!!”

재빨리 뒤를 돌아보자 고블린들은 곳곳에서 피를 흘리며 혼란에 빠져 있었으나 그녀의 말대로 대부분 경상에 그쳤다.

“제길...!”

“뒤돌아보지 말고 계속 달려요!!!”

라디가 품에서 유리병을 꺼내고 이빨로 난폭하게 코르크 마개를 뽑아 등 뒤로 내던졌다.

깔끔한 포물선을 그리며 나아간 독병이 증기를 뿜어내자 연기를 쐰 고블린들이 바닥을 구르며 괴로워했다.

나 또한 개미와 덩굴을 소환해가며 필사의 도주를 감행하던 중, 라디가 산의 정상 부분을 손짓하며 외쳤다.

“도란님 저기...! 저 건물로 숨어요!!”

“저건... 신전?”

“낮에 봤던 그 건물이야!!”

스스로 독 안에 뛰어드는 신세라지만, 선택권이 없다.

우리가 신전에 근접하면 근접할수록 고블린의 저항이 거세졌다.

­카아아악!!!

­쿠륵!! 쿠르르륵!!!

한 고블린이 몸을 던져 경로를 틀어막았으나 상체를 양단해 떨쳐냈다. 수풀 뒤에서 튀어나온 세 놈은 라디가 볼트로 미간을 꿰뚫었다. 빗줄기를 가르고 빗발쳐온 화살과 돌도끼는 아리엘이 마법을 써 튕겨냈다.

진창에 발을 들이자 숨죽이며 대기하고 있던 고블린 창병이 대량으로 뛰쳐나왔으나­

“꺼져!!!!”

일순간 덩굴을 한꺼번에 해방해 지상을 휩쓸자 맹렬한 기세로 나가떨어졌다.

“도란님...! 어서!!”

“도란!!”

“크윽...! 다 됐어!!”

끈덕지게 들러붙는 한 놈을 걷어차고 도약한 순간, 아리엘의 머리카락이 마력으로 남실거리며 흉흉한 기운이 부풀었고­

그녀가 빛무리를 일제히 터트리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전 안으로 뛰어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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