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화 〉 고블린 사냥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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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고블린 사냥 #7
“라디! 아리엘!! 문 막을 것 좀 가져와!!!”
“여기 널빤지가 있어요!!!”
“의자랑 걸상도...!”
“싹 다 가져와!!!”
잠금쇠 대용으로 칼집을 끼워넣었다. 의자 등받이를 대문 손잡이 아래 받쳐 열리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했다. 주변에서 긁어모은 사물로 출입구를 틀어막고 널빤지로 나무 창틀을 덮었다.
다행히 공사 중이던 건물이라 자재는 차고 넘친다.
“바리케이드 쳐!!”
“언니, 이것 좀 도와주세요!!”
“응, 잠시만...!”
고블린이 들이닥쳐도 요격할 수 있게끔 장애물까지 만들고 나자 비로소 호흡에 여유가 깃들었다.
나는 잔해에 걸터앉아 가쁜 숨을 고르며 창문 틈새로 몰래 밖을 내다보는 라디에게 물었다.
“라디야, 상황이 어때...?”
“....이상해요.”
“이상하다고?”
“...직접 보시는 게 빠를 거예요. 여기 좀 와 보세요.”
라디가 창틀에서 눈을 떼고 내게 손짓했다.
방금 전까지 녀석이 들여다보고 있던 틈새를 엿보자 건물 근처로 점점 몰려드는 고블린이 보인다.
한데 조금 이상하다.
“...왜 들어올 생각을 안 하지?”
놈들은 그저 일정 간격을 두고 서성거리기만 할 뿐, 누구 하나 돌입해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라디가 쇠뇌에 묻은 진흙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변심한 것도 아닐 텐데... 왜일까요?”
“조금 전만 해도 다들 혈안이 돼서 쫓아왔는데...”
“다들 겁에 질려 있어. 마치 뭔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
그녀의 말대로 고블린의 입매가 미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꼭 텔레비전에서 튀어나오는 귀신이라도 본 것마냥.
이유가 신경 쓰이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덕분에 한숨 돌렸다.
“뭐, 우리야 나쁠 거 없지. 아마 이곳이 성역이라도 되는 모양인데...”
로브에 고인 물기를 털어냈다. 장검에 묻은 진흙을 떨쳐내고 혹시 빠트린 장비가 없나 확인했다.
일단 한고비 넘겼다고 생각하니 머리를 굴릴 여유가 생겼다.
빠르게 장비 점검을 마치고 란이가 들지 않은 다른 수통으로 목을 축이자 라디가 주위를 둘러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고블린 무리가 언제 다시 공격을 개시할지 모르니 빨리 볼일을 마치고 뜨는 게 좋겠어요. 여기는 뭐 하는 건물일까요? 신전으로 쓰인다는 건 알겠는데... 인간의 눈에 띄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산꼭대기에 지어놨을 정도면 분명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을까요?”
“그러게... 단순히 고블린의 토속 신앙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너무 커. 내가 봤던 놈들은 돌무더기 조금 쌓아놓고 제단이라고 우기는 게 고작이었는데... 아리엘, 혹시 뭐 짐작 가는 거 없어? 종교는 네 전문 분야잖아.”
“.....”
아리엘은 턱을 짚으며 깊은 고민에 빠지더니 천천히 예배당 안쪽으로 향했다.
라디와 잠시 시선을 마주하고 그녀의 등을 뒤쫓자 정갈하게 늘어선 예배용 의자, 다채로운 색조의 타일과 겹겹이 쌓인 목제 따위가 보였다.
하지만 그중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건 신전 중심, 아직 미완성인 거대 조각상이었다.
아리엘이 석상을 올려다보더니 미묘하게 눈살을 구겼다.
“...나 뭔지 알 거 같아.”
“뭔데...?”
“여긴 아수르 신의 신전이야.”
“....?”
의아하게 눈을 깜빡거리는 나와 반대로 라디는 표정을 굳혔다.
“아수르라니... 왜 그분의 신전이 이런 곳에...”
“...그건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 석상은 아수르 신이 맞아. 짧은 머리칼에 붉은 눈. 그의 상징인 두 자루 양날검까지... 묘사도 상당히 세밀한 부분까지 잘 되어있어. 고블린이 아수르 신을 어떻게 안 걸까...?”
“...그러네요.”
“....”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잠깐, 그... 아수르? 걘 또 누구야. 어디선가 많이 들어봤는데...”
라디가 날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으음... 아수르 교단은 이 세계에서 제일 영향력 강한 종교 중 하나인데... 베라스틴 중앙 구역에도 아수르 신전이 있던데 한 번도 안 가보셨어요?”
“뭐... 그쪽엔 아리엘을 만나러 갈 때 외에는 들릴 일이 없었으니까. 가더라도 사제들 때문에 눈치 보이니 대충 볼일만 보고 나왔고.”
“음... 그러면 기사들이 출정을 앞두고 의식을 치르는 건 본 적 있지 도란? 모험가들이 두 자루 검을 교차시켜놓고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라던가.”
“그거야 뭐...”
일과를 시작하기 전이면 어김없이 신전에 찾아가 참배하거나, 고사(??)라 하여 식사 때도 제일 좋은 부위를 먹지 않고 공양하는 모험가들을 보자면 이 세계 사람들이 얼마나 신을 각별하게 생각하는지 알게 된다.
실제로 몇몇 신은 막연히 군림하는 걸 넘어서 정세에 영향을 끼치기까지 한다고 하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지.
당장 내 눈앞의 아리엘도 아가사 님에게 손수 축복을 받은 인재가 아니던가? 말톤 또한 신의 권능으로부터 비롯된 정체불명의 회복력을 선보인 바 있다.
‘아니, 생각해 보니 나도 안디라 신한테 축복을 받았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아리엘이 말을 이었다.
“도란이 그때 본 건 전부 아수르 님에게 기도하는 거야. 아수르 님은 무력과 무위, 전쟁을 관조하는 신이거든. 게다가 제법 후하게 축복을 내려주기도 하니 용병이나 모험가, 기사 같은 전투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이들 믿어. 이상하게도 베라스틴에선 인기가 덜하지만 일부 도시나 나라에선 국교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대중적이고.”
“.....”
기억났다.
분명 안디라, 베그디아와 함께 싸잡혀서 3대 주신으로 불리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문이 풀리는 건 아니다.
“...그런데 왜 그 신의 상징물이 여기에 있는 거야? 인간의 신이면 고블린한테는 적 아니야?”
“나도 그게 의문이야... 외형은 틀림없는 아수르 신이긴 한데...”
다 함께 조각상을 올려다보았다.
짧게 다듬어진 머리칼 아래 두 눈은 붉은 보석이 박혀 당장에라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마른 근육질의 체구는 조각이 덜 되었음에도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그야말로 ‘신’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외모.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눈길을 끄는 건
‘이건... 보석인가?’
앞으로 쭉 내민 왼손 위에 얹어진 큼지막한 광석이었다.
피보라를 내뿜는 듯 짙은 혈색을 간직한 보옥으로 팔을 뻗으려는 순간, 아리엘이 내 손길을 막아세웠다.
“...왜?”
“만지지 않는 게 좋아. 마력이 심상치 않게 요동치고 있어. 틀림없이 저주받은 물건일 거야.”
“저주라... 내 단도처럼?”
“응, 어쩌면 더 위험할지도. 도란의 단검은 만져도 잠깐 얼얼한 정도로 그치지만 이건... 아무튼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어.”
“...그럼 어떻게 하죠? 이대로 방치하고 뒤돌아서기도 찝찝한데... 어쩌면 고블린이 신전 안으로 들어오기를 꺼리는 이유와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요. 이 보석을 잘만 이용하면 무사히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음... 그러면 이렇게 하자.”
아리엘이 종아리의 홀더에서 뽑은 나이프로 로브 밑단을 잘라냈다.
그녀는 천으로 손을 감싸고는 피부에 닿지 않도록 조심조심 보석을 들어올렸다.
“...직접 건드리지만 않으면 되는 거였어?”
“아니, 가까이만 접근해도 저주에 걸리는 것도 있어. 지금은 내 마력으로 얕은 장벽을 쳐둔 상태야. 마력이 고갈되기 전에 담을 곳이 있으면 좋겠는데...”
“제 로브에 감싸서 가져가요. 끄트머리를 잘 묶으면 보따리처럼 사용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 그럼 그렇게...”
돌연 아리엘이 행동을 멈추고 정지했다.
나와 라디 역시 이상 조짐을 감지하고 입을 다물었다.
.....! .....!!
거센 빗발 사이로 육중한 발소리가 다가왔기에.
찰나, 장애물로 막아둔 출입구가 일순간에 터져나가며 수많은 횃불을 등진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
우렁찬 굉음과 함께 등장한 건, 전신에 촉수를 주렁주렁 늘어뜨린 거대 고블린이었다.
놈의 체구는 아름드리나무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커다랬고, 어깨에는 내 몸통 두께만 한 대검을 짊어지고 있었다. 전신에는 사슬이 치렁치렁 늘어진 판금 갑옷을 장비했으며 등 뒤로는 수십 마리의 정예 수하를 거느리고 있다.
이놈이 고블린 무리의 대장이라는 건 불 보듯 뻔한 노릇.
즉각 자리에서 물러나 응전 태세를 취하자 놈들이 우릴 에워쌌다.
쿠르르르륵...!
카르그극!!
그르웩!!
“.....”
젠장.
고블린 한 마리 한 마리가 최소 홉 고블린에 이른 엘리트 집단이다. 심지어 잡졸마저 전부 촉수를 달고 있다.
일단 수를 줄여놓을 심산으로 단도에 정신을 집중했지만, 대장이 손짓하자 전신에 철갑을 두른 고블린 정예들이 날카로운 한손검과 방패를 내세우며 덤벼들었다.
다급하게 외쳤다.
“아리엘!! 라디!! 뒤에서 보조만 하고 절대로 나오지 마!!!”
절대 고블린이라고 얕잡아 볼 상대가 아니다.
나는 장검을 난폭하게 휘둘러 정면에서 도약해온 녀석을 맞받아쳤다. 대퇴근에 힘을 실어 떨쳐내자 측면에서 은빛 칼날이 쇄도했다. 유연하게 허리를 비틀어 흘려내자 이번엔 시차 없이 하단에서 라운드 실드가 치솟았다.
연계 자체만 두고 보면 중급 기사보다 떨어지지만 놈들이 위협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크윽...!’
나는 반격 도중 혀를 차며 물러났다. 놈들의 허점을 노려 장검을 내찌르려 한 순간 촉수들이 도신을 타고 얽혀왔기에.
더군다나 힘과 스피드 또한 정상이 아니다.
쿠에에에에엑!!!!
한 고블린이 창을 투척하는 것과 동시에 손도끼가 날아들었다. 재빨리 장애물을 타고 넘어가 모면하자 이번엔 건물 내벽을 타고 날렵하게 접근한 고블린이 석궁을 쏘아왔다.
라디가 볼트로 재빨리 요격을 시도했지만 단단한 갑옷을 뚫기란 쉽지 않았고, 고블린 서넛이 그녀의 존재를 의식해 방패를 앞세워 포위망을 좁혀갔다.
이윽고 은밀하게 접근해온 한 고블린이 창을 내세워 필사의 일격을 감행했으나
“도란!! 눈 감아!!!”
콰자자작!!!!
아리엘이 빛을 터트려 시야를 교란하자 잠시 숨통이 트였다.
나는 놈들의 공격이 멎은 찰나의 순간, 곳곳에 박혀 산란하는 빛조각이 드리운 그림자를 의식하며 검은 군세를 불러냈다.
“다 튀어나와!!!”
크샥!!!
....우웅.
콰르르륵...!!
개미와 노래기, 불길하게 요동치는 덩굴이 돋아나 눈앞에 보이는 적을 쓸어담기 시작했다. 이교도 광장에서 발휘했던 압도적인 수만큼은 아니지만 지금 내겐 이 정도도 감지덕지다.
하지만 그림자 병단의 출현을 기점으로 사태를 관망하던 고블린 킹이 대검을 질질 끌며 거구를 일으켰다.
개미 두어 마리가 그에게 달려들었으나 놈이 육중한 발로 짓밟자 무력하게 터져나갔다.
“.....”
목덜미가 저릿할 정도의 존재감.
본디 고블린은 강한 몬스터가 아니다. 코볼트보다 한 단계 상위 마물로서 E랭크 정도로 분류되는 것이 고작. 하지만 특유의 집단성과 빠른 번식 속도, 높은 돌연변이 출현 확률이 맞물려 일정 개체 수 이상으로 불어난 경우 C랭크 혹은 드물게 B랭크의 위험도를 부여받기도 한다.
하물며 저 추악하게 꿈틀거리는 촉수는...
쿠오오오오!!!!!
놈이 발을 구르자 깨져나간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육중한 대검이 공기를 가르자 난폭한 칼바람에 자재가 흩날렸다. 습윤한 공기에 섞여 퍼져나간 혈향을 맡고 요동치는 촉수가 먹잇감을 움켜쥐려는 듯 뻗어나갔고, 그의 녹색 안구에 잔인한 충동이 서렸다.
정면으로 덤볐다가 저 특대 대검에 스치기라도 한다면 뼈도 못 추린다.
그렇다면...
“라디야!! 저 대장을 노려!!!”
“아, 안 돼요...!”
“안 된다니 뭐가...”
“독이 안 먹혀요!!!”
“뭐...?!”
눈을 휘둥그레 뜨자 고블린 킹의 목덜미에 박힌 은빛 대못이 보였다.
“촉수가 독을 상쇄시키고 있어요! 저 고블린한텐 독이 안 통해요!!”
“씨발!!!”
놈이 경로의 장애물을 모조리 날려버리며 돌진해오자 지면을 굴러 벗어났다.
잔해를 박차고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매서운 검날이 내리꽂혀 가까스로 회피했다.
어떻게든 근접하려고 해 보지만, 촉수 탓에 다가갈 수가 없다.
쿠오오오!!!!
“크윽...! 너희도 다 이쪽에 붙어!!”
크샥!!!
우웅...
홉고블린을 상대하던 개미와 노래기까지 불러들여 가세해봤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개미들은 거센 검격에 휩쓸려 무력하게 터져나갔고, 노래기는 고블린의 협공을 받고 역소환되기 직전이었다.
두통을 참으며 필사적으로 공격을 회피하던 중, 잔해에 발이 끼자 고블린 킹이 입꼬리를 쭉 찢으며 대검을 들어올렸지만,
“....좆까!!!”
발밑에 덩굴을 솟구쳐 간신히 벗어났다.
황급히 거리를 벌리고 라디와 아리엘 근처까지 물러나자 느긋하게 칼자루를 거머쥔 고블린 킹과 그득한 수하가 보였다.
“...큰일이에요 도란님.”
“어떡하지 도란...”
“.....”
방법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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