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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230화 (230/375)

〈 230화 〉 고블린 사냥 #8

* * *

[230] 고블린 사냥 #8

상황이 좋지 않다.

“제길... 라디, 아리엘... 무슨 뾰족한 수가 없을까?”

“...독이 안 통하는 시점에서 저와는 상성이 너무 나빠요. 적어도 제가 고블린 킹한테 유효타를 먹이는 건 어려울 거예요.”

“상대의 완력이 너무 강해. 내 보호막도 버티지 못하고 금방 깨져버릴 거야. 딱 한 번 정도 막아낼 수는 있겠지만...”

“...촉수 때문에 근접할 수도 없고.”

대처하기 곤란한 상대다.

장검으로 어찌어찌 촉수를 잘라낼 수는 있겠지만, 그 정도로는 결정타를 먹일 수 없다. 단도로 급소를 노린다면 제법 유효타를 기대할 순 있겠으나 그렇게까지 접근전을 벌이면 촉수에 붙들리고 말 거다.

‘이럴 때 나도 마나를 쓸 수 있었더라면...’

보다 더 강한 신체강화를 통해 전세를 역전하는 것도 가능할 텐데.

어금니를 깨물며 칼자루를 움켜쥐자 놈들이 다시금 공격을 개시했다.

­꾸르륵! 꾸륵!!

­키이이잇!!

건물 밖, 나무 창틀 너머에서 고블린 아처가 시위를 놓았다. 순식간에 공기를 가르고 육박한 화살은 아리엘의 장벽에 튕겨나갔으나 놈들의 노림수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고블린이 쇠사슬을 끊어버리자 머리 위에서 샹들리에가 낙하해왔다.

­슈화아아악!!

“젠장!! 조심해!!!”

재빨리 라디와 아리엘을 감싸고 자리를 벗어났으나 장막이 깨져나간 틈을 타 수많은 날붙이가 쇄도했다.

황급히 경로에 덩굴을 소환해 틀어막았지만, 날카로운 창날에 팔뚝을 베이고 말았다.

환부를 움켜쥔 채 이를 악물자 타일 위에 내리찍히는 병장기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이 상황에서 판도를 뒤집을 수단을 강구하자면...

“...야.”

­.....

“독 좀 더 내뿜어봐.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최대한 독한 거로.”

­...우웅.

가까스로 기어온 노래기가 충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중상을 입은 나머지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으나 혼신의 힘을 다해 뒤꽁무니를 꿀렁이며 짙은 독무를 뿜어냈다.

개방된 장소인 만큼 땅굴에 있었을 때와 비교하면 효과가 훨씬 덜하겠지만,

­꾸르르륵!?

­케륵!! 케르륵!!!

­카각!!

‘...둘 다 조금만 참아줘.’

괴로워하는 라디와 아리엘에게 시선으로 전하고는 달려나갔다.

고블린 킹이 독성에 면역을 보유했다면 촉수 달린 다른 고블린도 비슷할 터.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곧 멀쩡하게 해독해낼 거다. 참으로 까다로운 상대.

그렇다면 단시간에 승부를 본다.

자욱한 독무에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뛰쳐나갔다. 파손된 자재를 딛고 높게 솟아올랐다. 고블린들은 탁한 기침을 내뱉으면서도 신중하게 주위를 경계했지만, 상공에서 습격해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일단 하나.”

­푸화아악!!!

장검을 내려찍자 고블린의 두개골이 좌우로 갈라졌다. 나는 그대로 바닥을 박차며 자리를 벗어났다. 등 뒤를 스치는 날카로운 파공성에 솜털이 곤두섰으나 더욱 가속하며 질주했다.

한순간이라도 발을 멈췄다간 목숨을 잃을 테니.

“다음.”

기세를 살려 돌격. 중단으로 내찔러 절단. 급격히 회전하며 척추를 양분했고 단단한 부츠를 차올리며 원심력을 이용, 팔꿈치로 아래턱을 깨부쉈다.

녀석들의 이목이 쏠리기 전, 독무를 헤집으며 지척으로 파고들었으나­

­깡!

‘큭...?!’

줄곧 경계하던 라운드 실드에 검격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육체가 경직된 틈을 타 사방에서 칼날이 빗발쳐왔다.

“염병!!”

­콰르륵!!

다급하게 촉수를 소환해 위기를 모면했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방금 걸로 완전히 표적이 되어버렸기에.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도처에서 녹빛 안광이 번뜩이더니 살벌한 날붙이와 내 몸체만 한 대검이 쇄도했다.

검면을 내세워 방어하기가 무색하게도 대검은 날 성대하게 내동댕이쳤다.

­콰아아아아앙!!!!!

“.....!!”

물에 잠긴 것처럼 먹먹한 이명 사이로 애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기세가 꺾이자 힘을 쓴 반동으로 깨질 듯한 두통이 엄습해왔고, 건물 밖으로 튕겨나왔는지 전신을 쿡쿡 찌르는 잔해의 감촉 너머로 차가운 빗방울이 뺨을 적시고 흘러내렸다.

­쿠르그륵!!

­키르엑!!

사방에서 횃불을 든 검녹색 형체가 점점 옥죄여왔다. 묵직한 팔다리는 망가진 기계처럼 꿈적도 하지 않는다.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빛무리가 내 주위를 둘러쌌지만, 홉고블린의 도끼질 몇 번에 깨져나갔다.

고블린 킹이 흉악한 송곳니를 빛내며 내 머리맡으로 다가왔다.

­.....

­씨익.

놈이 입꼬리에 가학적인 웃음을 피어올리며 내 꼴을 조소했다.

이어 처형을 집행하는 망나니처럼 안면에 둔중한 철검을 드리웠고, 천천히 도신을 수직으로 치켜올렸다.

절체절명의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콰득!!!

손에 잡히는 고블린 단검을 쥐고 놈의 팔목을 내려찍는 것밖에.

­쿠아아아아아악!!!!!!!!!!

빗물이 아닌 액체가 뺨에 튀었다. 지금껏 선보이지 않았던 필사즉생의 한 수. 허를 찔린 고블린 킹이 덜렁거리는 손목을 부여잡고 몸부림치며 대검을 놓자 나는 도약하며 놈의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이어 허공에서 느릿하게 선회하며ㅡ

“...일방적으로 팰 땐 좋았지?”

­쿠흘...?!

그대로 몸을 한 바퀴 회전해 대검으로 놈의 멱을 땄다.

시뻘건 선혈이 뭉텅이로 튀었다. 참혹한 비명이 거센 빗발 사이로 울려퍼졌다. 고블린 킹은 목에 큼지막한 절상을 입은 채로 허둥지둥 사선에서 물러났으나 부하들은 그러지 못했다.

지면을 박차며 전력으로 특대검을 휘두르자 고블린 두셋의 머리통이 덩어리째로 터져나갔다.

“크하아아압!!!!!!”

뻐근한 전완근과 대퇴부에 힘을 주었다. 다소 낯선 대검의 무게에 평소에는 부하가 걸리지 않았던 근육이 비명을 지른다. 검보랏빛 촉수는 칼날에 닿기가 무섭게 마수를 뻗쳐왔으나, 대검의 리치와 위력에 힘입어 그대로 절단해버리면 그만이었다.

­빠드드득!!!

나무와 강철을 통째로 부수는 둔탁한 감촉과 함께 방패를 관통하자 고블린은 짧은 단말마를 남기며 절명했다.

‘...역시 큰 게 좋긴 좋네.’

아직은 검에 휘둘린다는 느낌이 강하지만.

비틀거리는 두 다리를 강하게 내디뎌 바로잡고 대검을 어깨에 걸치자 고블린들의 눈빛에 경계심이 서렸다.

나는 기세등등하게 놈들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으나,

“앗...!”

익숙한 외마디 경악성에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고블린 킹이 목을 부여잡고 비척거리며 보석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고­

­콰르르르르르르륵!!!!!!!!!

놈의 두꺼운 손가락이 핏빛 보옥에 닿자 무수한 촉수가 새로 돋아났다.

*

전혀 예상치 못했다.

설마 그 보석이 이변의 원인이었을 줄은.

수세에 몰린 고블린 킹을 비롯해 치명상을 입은 고블린들이 보옥을 움켜쥐자 씨앗에서 싹이 트는 것처럼 촉수가 자라났다.

그중 몇몇은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피를 쏟으며 요절했지만, 일부는 팔다리가 굵어지거나 이마에 가시가 돋는 둥 돌연변이 개체로 진화했다.

‘설마...’

보석, 변화, 생물, 저주.

고블린 대장장이가 남겼던 단어가 그러한 뜻이었을 줄이야.

놈들이 돌연 일제히 고개를 돌려 핏발 선 눈을 희번뜩거리자 무시무시한 오한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이곳에서 도망쳐야 한다.

“라디!! 아리엘!!!”

“잠시만요!!!”

라디가 바닥을 구르며 연막을 터트리더니 고블린의 손아귀에서 떨어진 보석을 천으로 움켜쥐고 달려나왔다.

그녀들의 어깻죽지에는 핏줄기가 흐르고 있었으나 다행히 치명상은 아니다.

“달려!!!”

신전을 벗어나며 줄기로 입구를 뒤덮었다. 아리엘 또한 보호막을 펼쳐 뒤따라 나오는 고블린의 진로를 틀어막았다.

곧바로 건물을 에워싸고 있던 놈들이 무기를 치켜들고 뛰쳐들었으나­

“꺼져 이 새끼들아!!!!”

대검을 횡으로 휘두르자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이어서 라디가 불을 피울 요량으로 챙겨온 기름을 고블린이 든 횃불에 끼얹자 순간적으로 화마가 치솟아 퇴로가 트였다.

­화르르르륵!!!!

“잘했어 라디야!!”

“얼마 못 가요!!!”

“고블린들이 빠져나오려 하고 있어!!!”

아리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등 뒤에서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음이 들려왔다. 장막 형태로 펼쳐졌던 빛무리가 흩어지자 시야가 어두워지고, 뒤이어 덩굴이 찢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피철갑이 된 고블린 무리가 튀어나왔다.

놈들은 해저를 기어다니는 성게 군집처럼 수십 가닥의 촉수로 들판을 헤집으며 무서우리만치 신속한 속도로 우릴 추격해왔다.

“씨발 저 새끼들은 대체...!! 라디야, 연막 남은 거 있어?!!”

“아까 빠져나오면서 쓴 게 마지막이에요!!!”

“아리엘 넌!?!”

“나도 마력이 고갈되기 직전이야!!!”

“염병!!!”

고블린들을 뿌리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등 뒤로 날아온 끈적끈적한 체액이 뒤엉킨 도끼날을 쳐내자 성난 고함이 들려왔다.

축축한 풀잎 위를 미끄러지다시피 내달리자 빗물 웅덩이가 횃불에 반사되어 주홍빛으로 반짝거렸다.

막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 소란을 듣고 튀어나온 두더지들이 화들짝 놀라 경로에서 달아난다.

라디가 다급하게 외쳤다.

“채석장!! 아까 오면서 봤던 채석장으로 가야 해요!!!”

“채석장이면... 이쪽이야!!!”

급격하게 진로를 틀었다. 기세가 험준한 오른쪽 능선으로 향하자 고블린들이 눈에 불을 켜고 쫓아왔다. 놈들의 보물을 훔친 이상 우리가 죽기 전까지는 추격을 그만두지 않을 터.

“라디야 그 보석!!”

“네?!”

“일단 넘겨줘!!”

“네, 네...! 여기요!!”

라디가 건네준 보옥을 드높게 들어올리고 고블린 단검을 들이밀자 놈들이 발광했다. 마치 고라니 떼를 본 소작농처럼 길길이 날뛰며 고성을 내질렀지만, 누구 하나 접근하지 못하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추격해올 뿐이다.

“보석이 깨지는 걸 염려하나 봐요!!!”

“좋았어!! 이대로 달려!!!”

거치적거리는 대검마저 등 뒤로 내던지고는 질주했다. 시뻘건 불화살이 현현한 궤적을 그리며 뺨을 스치자 상공에서 쏟아지는 억센 빗발이 순간 번뜩거렸다.

찰나 상공에서 떨어진 번갯불이 지상을 밝히니 서서히 거리가 벌어지는 고블린 무리가 보였지만­

“좋아! 이대로만 가면...!!”

그때였다.

악몽과도 같은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불길한 고동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퍼지자 전장에 변화가 불었다.

“뭐, 뭐야?!!”

“조심하세요 도란님!! 뭐가 나타날지...!”

“발소리가...! 뭔가 오고 있어!!”

진흙탕에 고인 물이 들썩거렸다. 잔디와 덤불이 바람에 스치며 스산한 소음을 자아냈다. 횃불에 비친 그림자가 불길하게 꿈틀거렸다.

이윽고 기괴한 괴성을 내지르며 등장한 건, 멧돼지에 탄 채 카우보이처럼 올가미를 머리 위로 흔들는 고블린 라이더들이었다.

조악한 낚싯대에 사과를 매달아 멧돼지를 조종하는 기묘한 광경에 그만 경악이 터져나왔다.

“미친!! 저건 또 뭐야!!!”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냥 달려요!!!”

“제기랄!!!”

고블린 라이더가 가세하자 급격하게 간극이 좁혀졌다. 뒤를 돌아보자 석영에 가죽을 덧대 만든 고글 안쪽으로부터 사악한 안광이 번뜩거렸다.

한 놈이 지척까지 다가와 몸통으로 들이받으며 위협했기에 단도를 휘둘러 떨쳐냈으나­

“큭...?!”

녀석이 즉각 물러나며 다른 놈이 올가미를 던져 내 팔을 묶고는 무쇠 갈고리가 달린 반대쪽을 지면에 늘어뜨렸다.

황급히 칼날로 밧줄을 끊어냈지만, 이번엔 반대쪽에서 대형 석궁을 장착한 고블린이 작살을 쏘아왔다. 가까스로 상체를 기울여 작살을 빗겨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제는 한 녀석이 전방으로 치고 나가며 지면에 마름쇠를 깔았다.

극도로 치밀하고 집요한 놈들.

“씨발!!!!”

덩굴을 소환해 떨쳐내려고 해봐도 능력이 한계에 다다랐는지 머리만 욱신거릴 뿐 더 이상 그림자가 내 부름에 답하는 일은 없었다.

그나마 단도를 투척해 사과를 깨부수자 멧돼지가 급정거하며 고블린이 밤하늘 너머로 날아갔지만 아직 스무 마리가 넘는 고블린 라이더가 남아있다.

그나마 남은 유일한 희망이라곤...

눈가로 들이차는 빗물을 훔치며 전방으로 고개를 돌리자 황폐한 채석장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급하게 라디를 쳐다봤지만, 녀석은 가쁜 호흡을 내쉬며 내달릴 뿐이었다.

“라디야!! 일단 오긴 왔는데 이제 어떡할 거야!!!”

“이대로 달려요!!!!”

“뭐?!! 하지만...!”

“그냥 저만 믿고 달려요!!!”

“.....”

몸을 비틀어 고블린 라이더의 올가미를 간신히 흘려내던 찰나,

눈앞의 장애물이 모조리 사라지며 급격한 경사로가 도래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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