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화 〉 고블린 사냥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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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고블린 사냥 #9
놀란 나머지 급작스럽게 멈춰섰다.
칼로 도려낸 듯 송두리째 떨어져나간 지반을 내려다보자 두려움이 샘솟았다.
여기서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그때부터는 통제를 벗어나 끝없이 미끄러지겠지.
최후에는 어떤 결과가 도사리고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라디가 곧바로 내 손목을 잡아당기며 외쳤다.
“뭐 해요 안 뛰어내리고!! 지금 바로 내려가야 해요!!”
“그게 무슨...”
“나중에 설명할 테니 일단 가요!!!”
녀석이 거칠게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여전히 높은 장소는 버거운지 손끝이 떨렸으나, 눈동자에서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나는 입매를 굳게 다물며 아리엘과도 시선을 마주했고
“.....”
“....”
손을 맞잡으며 전방으로 뛰어내렸다.
경사 아래로 내닫자 목전까지 육박했던 날붙이가 아슬아슬하게 머리칼을 스치며 매서운 밤바람이 옷자락을 나부꼈다.
비에 젖은 경사로는 몹시 미끄러워 안전장치 없는 워터 슬라이드와도 같았다.
떨어지지 않도록 서로를 꼭 끌어안고 미끄러지던 도중, 라디가 위쪽을 쳐다보더니 다급하게 소리쳤다.
“쫓아오고 있어요!!!”
“아직도?!!”
상체를 틀자 노도의 기세로 쏟아져 내려오는 검은 형체가 보였다. 그들 중 몇몇은 날카로운 암반에 몸뚱이가 찢겨나가거나 빗발이 쏟아지는 밤공기 너머로 튕겨났지만, 그를 웃도는 압도적인 숫자로 몰아붙이며 빈자리를 메꾸었다.
개중에는 어디선가 뜯어낸 나무껍질이나 다른 동료를 보드처럼 타고 언덕을 미끄러져 오는 놈들도 있었다.
이젠 광기마저 느껴지는 광경.
라디를 돌아보며 다급하게 물었다.
“젠장!! 다 계산된 거야?!!”
“포위망에서 벗어나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요!! 목책 주변에도 병력이 잔뜩 깔려있었을 거예요!!!”
“염병...!”
놈들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조바심이 들었는지 보석이 깨질 염려를 차치하고서라도 우리를 향해 손에 든 무기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중 대다수는 균형을 잡지 못한 나머지 궤도가 엉망이었지만 일부는 위태위태하게 살갗을 스쳐 지나가며 옅은 생채기를 남겼다.
“머리 감싸요!!”
“도란!! 조심해!!!”
“제기랄!! 둘 다 꼭 붙들고 있어!!!”
이대로 가다간 바닥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화를 입게 될 거다.
나는 제동을 걸고자 단도를 석벽에 꽂아넣었으나 으스러질 듯한 하중이 손목을 강타해 검날을 튕겨냈다.
“크헉?!!”
“무리하지 마 도란!!!”
“지금 멈추는 건 불가능해요!! 자칫하다간 튕겨나갈 수도 있어요!!!”
“시발!!”
산비탈을 벗어나니 경사가 조금 완만해지기는 했지만 속도가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최대한 몸을 펼쳐 접촉면을 늘려보아도 빗물 고인 바위는 살얼음처럼 미끄러웠다.
아리엘과 라디를 꽉 움켜쥔 채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있자니 몇몇 고블린이 기어코 근처까지 다가와 발톱과 촉수를 휘둘러왔다.
키이이익!!!
쿠르륵!!
“이 끈질긴 새끼들!!!”
허리춤의 고블린 단검을 뽑아 한 손에 거머쥐었다. 정신없이 미끄러지는 와중 필사적으로 중심을 바로잡아 발을 디딘 다음, 잠시나마 강하가 지연된 틈을 타 놈에게 칼날을 쑤셔박았다.
푸확!!!!
그르르륵...!
홉고블린은 심장이 꿰뚫리면서도 촉수를 뻗어와 동귀어진을 시도했지만, 내가 중력에 몸을 맡겨 거리를 벌리자 미수로 그쳤다.
곧바로 측면에서 다른 놈들이 합을 이뤄 다가왔으나 무턱대고 내찌른 창대를 붙잡아 내팽개치자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경사면 바깥으로 튕겨나갔다.
묘기와도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는 재빨리 아래쪽으로 피신해오자 라디가 내 허리춤을 붙들었다.
“잘하셨어요!!!”
“아직 모자라!!!”
머리 위에는 아직 무수한 고블린이 온존해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거리를 좁혀오는 중이다.
간신히 놈들을 떨쳐낸다고 하더라도 속도를 줄이지 못하면 결국 옥상에서 떨어진 토마토처럼 터져나갈 것이다.
곧 다가올 파국에 절박한 심정으로 이를 악문 순간
“도란!! 란이를 불러줘!!!”
“뭐, 지금?!”
“네!! 빨리요!!!”
“......”
마지못해 수통을 열자 익숙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란이는 곧바로 내게 안겨들며 귀여운 목소리로 외쳤다.
됴란!!
“란이야...! 위험하니까 지금은...”
“이제 곧 밑바닥에 도달할 거예요!!!”
전방을 내려다보자 저 멀리 암반이 부자연스럽게 뚝 끊겨 있었다.
아리엘이 외쳤다.
“란이야 도와줘!!!”
.....
란이는 의아하게 우리를 둘러보더니 절벽 아래를 곁눈질하곤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참렬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디와 아리엘은 내 허리를 꽉 끌어안아올 뿐이었고
후우우웅...!!
일순간, 발밑이 허전해지며 우리는 서늘한 밤공기 한복판으로 내쳐졌다.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뜨자 멀찌감치 베라스틴의 성곽 너머로 뿜어나오는 불빛이 보였다. 먹구름 사이 온전한 보름달,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와 별무리는 찬란한 빛을 토해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광경.
하지만 곧 빛꼬리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늘어지더니 서서히 낙하하기 시작했다.
눈덩이처럼 점점 불어난 가속도는 어느덧 걷잡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 우리는 살벌한 파공성을 자아내는 돌 부스러기와 함께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했다.
두 녀석을 끌어안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라디!!! 아리엘!!! 만나서 행복했고 다음 생에도...!”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도란, 아래를 자세히 봐 봐.”
“응?”
눈살을 찌푸리자 어슴푸레한 야음 너머로 슬쩍 내비친 건
“개울...?”
굴곡을 타고 흐르며 별빛을 반사해 반짝거리는 물살이었다.
지면에 가까워지자 아래쪽에서 이변이 일었다.
부그르륵.... 첨벙!!
때아닌 작달비에 불어난 냇물이 거품을 내뿜으며 끓어오르더니 무서운 기세로 솟구쳤다.
간헌철처럼 치솟은 물줄기는 부드럽게 우리를 감싸 낙하 속도를 늦추어주었다.
온갖 야경의 불빛을 담아내 아롱거리는 물거품에 휩싸여 서서히 지상으로 하강하자 장엄한 경관이 내려다보였다.
마치 유원지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대관람차처럼.
“...전부 계산한 거였어?”
“음... 절반 정도는요.”
“..어떻게.”
“오늘 낮에 도란이 란이랑 놀아주러 갔을 때 라디랑 같이 개울을 거닐다가 발견했어. 절벽 아래서 개울이 흐르고 있더라고.”
“그런...”
“그래도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탈출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요... 란이한테 고마워해야겠어요. 그리고...”
“도란, 저기 봐. 동이 트고 있어.”
“.....”
먼 지평선에서 붉은 태양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어슬한 여명이 먹구름을 닦아내었다. 푸렴푸렴 날이 밝자 굽이 흐르는 물줄기가 산세를 덮었다. 손등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은 황금빛 선율이 되어 상공을 수놓았고, 서늘한 새벽의 향기가 콧방울을 간질였다.
긴 밤이 끝났다.
어째선지 가슴이 벅차오르는 일출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노라니 사랑하는 두 여인이 양쪽에서 손을 맞잡아왔다.
손가락에 깍지를 끼고, 서로를 보며 웃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자 이번엔 란이가 내 가슴팍을 끌어안았다.
“...고마워 란이야. 이번엔 덕분에 살았네.”
됴란! 됴란!!
“.....”
피식.
란이를 세게 끌어안고 머리를 헝클어뜨려주었다.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천천히 하강하다 보니 어느새 지면에 다다랐다. 물로 이루어진 징검다리를 지나 개울을 빠져나오자 주위에는 불구가 된 고블린이 즐비했다.
머리 위 벼랑에서는 아직도 검은 형체들이 후드득거리며 떨어지는 중이다.
“...단체로 번지점프라도 하는 것 같네.”
줄은 없지만.
자 그럼 이제 이걸 어쩐다.
*
이번에도 란이의 힘을 빌렸다.
녀석은 개울이 오염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수류를 조작해 동동 떠다니는 고블린 사체를 뭍으로 내동댕이쳤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체구의 고블린 킹에게 다가가자 놈이 돌연 상체를 일으켜 덤벼들었다.
쿠오오오!!!!!
“란이야.”
됴란!!
란이가 아기자기한 기합을 외치며 손바닥을 뻗자 뾰족한 물의 창이 날아들어 고블린 킹의 종아리를 꿰뚫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흩어진 개울물이 다시금 모여들더니 놈의 사지를 허공으로 띄어올리고 포악하게 난도질했다.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고블린 킹을 보자 오금이 저렸다.
“...아리엘, 란이를 마법사에 비유하면 어느 정도야...?”
“음... 마법사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전문 분야가 다양하니 쉽게 단정 지을 수 없지만... 적어도 물가에서만큼은 중급 마법사쯤 되지 않을까?”
“...굉장하네. 중급 마법사면 하루 파티에 고용하는 데에도 금화가 들어가잖아.”
여기서 진화하면 얼마나 더 강해지는 걸까.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란이를 제지했다. 이어 라디에게서 로브로 감싼 보석을 조심스럽게 건네받고는 맥없이 늘어진 고블린 킹에게 다가갔다.
놈은 팔다리의 힘줄이 죄다 찢겨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눈동자만은 짙은 살기를 흘리며 번뜩거렸다.
쪼그리고 앉아 그와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야, 아직 살아있냐?”
......
“내가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 너 이거 어디서 났냐?”
.....
코앞에 보옥을 들이밀자 고블린 킹은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내가 방심한 틈을 타 보옥을 삼키려 들기에 나는 재빨리 단도로 놈의 혓바닥을 꿰뚫어 바닥에 고정했다.
쿠와아아아악!!!!
“어딜... 너 내 말 이해하고 있는 거 다 알거든? 구차하게 굴지 말고 빨리 불어.”
“...못 알아듣지 않을까요? 그때 봤던 대장장이는 워낙 특이한 케이스고...”
“에이 설마.”
이렇게나 부락을 발전시켰을 정도로 영리한 놈이다. 목책 주변에 함정을 파 놓는 건 물론, 망루를 비롯한 방위 시설과 비밀통로까지 건설했을 정도로.
심지어 나와 전투 중에도 딱 한 번 방심해서 기습을 먹은 걸 빼고는 단 한 번도 치명타를 허용하지 않았을 정도로 영악하기까지 하다.
따로 책략가라도 있는 게 아닌 이상 고블린 라이더 육성이나 대장장이에게 무기 생산을 지시한 것도 전부 이 녀석일 테고.
하지만 아무리 칼날로 몸 곳곳을 헤집으며 고문해도 놈은 입을 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아쉬움을 머금고 물러나려던 찰나
“...잠깐만 기다려 봐 도란. 얘 어깨 부근에 뭔가 그려져 있어.”
잘려나간 촉수 밑동에 가려졌던 문양이 드러났다.
놈이 안간힘을 써 가며 감추려 했지만,
“이건... 문신? 무슨 표식일까...?”
“꼭 낙인 같은데... 이전에 노예한테서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어.”
“문양으로 보아서는... 불법으로 몬스터를 육성하는 세력이 새긴 게 아닐까요? 이 고블린은 거기서 자력으로 탈출했거나 일부러 방생.. 했을 가능성도...”
“역시 누군가가 개입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건가...”
상당한 기술력을 요하는 용광로 설비나 상단의 문양이 찍힌 도구, 아수르 신의 신전을 봤을 때부터 막연히 짐작은 했지만 설마하니 진짜였을 줄이야.
착잡한 심정으로 생각을 정리하던 차, 발치에서 칠판을 긁는 듯 괴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
“...깜짝이야. 너 사람 말도 할 줄 알았냐? 그렇다면 잘 됐...”
꾸륵... 인간... 죽인다...
“아니, 그거 말고 이 보석이 어디서 났는지나 말...”
인간... 얼마 못 가 멸종...
“...도란, 잠깐만. 내가 대화해볼게.”
아리엘이 옆으로 다가와 고블린 킹에게 눈높이를 맞추더니 조곤조곤하게 읊조렸다.
“...안녕? 우린 적이었으니 동정은 하지 않을게. 다만 이거 하나만 답해줄 수 있겠어? 보석이 어디서 났는지 말이야. 여기 이 운디네도 그 저주 때문에 죽을 뻔했거든.”
......
고블린 킹은 내 품에 안긴 란이를 힐끔 흘겨보더니 주둥이에서 피를 토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저주.. 아닌 축복... 꾸륵... 허약해 빠진... 일개 고블린을... 지금의 나로 만들어준... 축복... 쿠흘...!
“...그렇다고 생각해?”
당연! 그리고...
녀석은 우리를 향해 흉측하게 입꼬리를 찢으며
이건... 시작... 곧 큰 전쟁이... 온다... 그때가 되면... 인간들은...
모조리 아수르 신 앞에 목이 떨어지게 될 것이다.
고블린 킹이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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