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화 〉 불청객 #2
* * *
[233] 불청객 #2
불온한 기류가 스멀스멀 발목을 옥죄었다.
홀에 발을 들이자 몰려들었던 눈동자들은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수십이 넘는 모험가들을 곁눈질하며 신중히 입술을 뗐다.
“...그 손님이란 작자가 누군지 지금 알려줄 수 있어?”
“안 돼요...”
“왜.”
“...본인이 직접 대화할 테니 먼저 밝히지 말라고 당부했어요.”
“위험한 인물이야...?”
“그건... 아직 잘 모르겠어요. 도란 씨한테 무슨 용건이 있는 줄 모르니까...”
“.....”
솔직히 지금 당장에라도 내빼고 싶다. 하지만...
나는 장검을 검집에 갈무리하며 전방을 눈짓했다.
카렌은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울리지 않게 긴장한 걸음걸이로 길드 안쪽을 향해 나아갔다.
그녀의 등을 쫓자 경로에 있던 모험가들이 좌우로 갈라져 길을 터주었으며, 개중 몇몇 사내로부터는 날 가늠하는 듯 예리한 시선이 느껴졌다.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쓰며 층계를 올랐다.
하지만 길드 응접실이 있는 두 번째 층에 도달해도 카렌은 발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응접실은 2층 아니었어...?”
“...거긴 일반실이고 한 층 더 올라가면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쓰는 특실이 나와. 몰랐어?”
“.....”
거기부턴 로비에서도 안 보이는데 내가 알 턱이 없지.
“보통 누가 쓰는데?”
“신전에서 협정 계약을 맺으러 온 고위 사제나 타 길드 대표, 새로 전입을 희망해온 하이랭커나 길드 자금을 지원해주는 대부호 정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니야.”
“.....”
무심코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카렌이 열거한 대상은 하나같이 쟁쟁한 존재였기에.
신전과의 협력이나 길드를 후원해주는 투자자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고, 하이랭커의 경우 그들을 얼마나 소유했는가에 따라 길드의 위상이 갈리기도 한다.
이는 곧 신규 모험가들의 입단 희망과도 직결되고.
이 앞에 있는 건 적어도 그에 맞먹는 인물이라고 받아들이면 되겠지.
카렌은 아카이아 길드의 상징인 검과 방패 문양이 그려진 문 앞에 도달하자 멈춰서더니, 내 손목을 붙잡으며 다소곳이 속삭였다.
“...도란, 우리 길드가 약소 길드라는 건 알지?”
“그랬어?”
“그래. 베라스틴 안에서는 나름 괜찮은 편이지만 밖으로 나가면 끽해야 중소규모 취급이야. 라이벌 관계인 발텐 길드와 견주어봐도 사실 비교하기가 무색할 정도고.”
“근데 그게 지금 이 상황이랑 무슨 관련이...”
“...잘 해, 도란. 만약 여기서 네가 무례한 행위를 저지르기라도 한다면...”
“.....”
길드의 존속에 영향이 갈 수도 있다는 말인가.
꼴깍 마른침을 삼키자 그녀가 내 어깨를 다독였다.
“자 그럼 다녀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뭐? 너는 같이 안 들어...?!”
“...화이팅.”
카렌이 재빨리 손잡이를 비틀고 등짝을 떠밀었다.
얼떨결에 사자 우리에 발을 들인 임팔라처럼 응접실로 내쳐지자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황급히 문고리를 쥐고 흔들어봤지만 그새 밖에서 수작을 부리기라도 한 건지 손잡이는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길.’
문에서 시선을 떼고 천천히 응접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제법 안락하게 꾸며진 공간에는 화려한 무늬로 장식된 꽃병과 이름 모를 화가의 작품, 향긋한 향을 피워올리며 끓어오르는 주전자와 알록달록한 다과 따위가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중 압권인 건 돈깨나 들였을 듯 거대한 소파였는데, 주위를 장식한 반투명한 레이스 너머로 한 실루엣이 홍차를 들이켜고 있었다.
“.....”
각오를 다잡았다.
이미 발을 들인 이상 이제 와서 물러날 수는 없다. 아니, 애초부터 물러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로브 아래로 단도를 거머쥐고 다가가 레이스를 젖히자
“아, 왔어?”
“.....왜 당신이 이곳에 와 있는 겁니까.”
*
다소 맥빠지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걸터앉았다.
분명 거리를 두고 반대편에 앉았을 텐데도 이 표범 수인은 기어코 내 곁으로 다가와 초롱초롱한 시선을 보내왔다.
“저기 소년~.”
“...예, 니아 님.”
“투구 벗어봐.”
“...왜요?”
“그냥 벗으라면 벗어!”
“자, 잠깐?!”
순식간에 그녀가 내 투구를 낚아채갔다.
나 또한 속도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지만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나는 훤히 드러난 흑발을 손으로 가리며 요구했다.
“...돌려주세요.”
“응? 싫은데?”
“제 겁니다.”
“돌려주면 다시 쓸 거잖아.”
“당연하죠.”
“에... 그럼 싫어.”
그녀는 능숙하게 한 손가락으로 투구를 돌리더니 허공으로 튕겨올렸다.
나는 재빨리 자리를 박차고 투구를 탈환하고자 시도했지만, 차마 근처에 도달하기도 전에 기다란 얼룩무늬 꼬리가 투구를 휘어감았다.
텅 빈 손아귀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하게 서 있자니 그녀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장난스레 눈웃음을 지었다.
“응, 응! 넌 투구를 벗은 게 훨씬 나아! 그렇게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감추려 하는 거야? 몸도 좋고 키도 훤칠한데!”
“...사람들이 아니꼽게 보잖아요. 니아 님도 흑발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아시면서... 이것 때문에 맨날 싸웠다고요.”
“응? 겁도 없이 소년한테 시비를 거는 놈들이 있어? 소년 엄청 세잖아! 7계층에서도 맨몸으로 살아 돌아왔고, 혼자서 스노우 타이거를 잡은 적도 있고! 일반 모험가는 상대가 안 될 텐데?”
“그건 그렇지만...”
주변에서 시비를 걸어올 때마다 일일이 상대해주다간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거다.
투구에 눌린 머리칼을 흐트러트리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붉은 매 길드원이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겁니까. 용건이 있을 거 아녜요. 저한테 볼일이 있는 겁니까?”
“피... 재미없게...”
그녀가 홍차를 들이켜더니 이번엔 다과에 눈독을 들이며 태평하게 내뱉었다.
“딱히 용건은 없는데?”
“네?”
“그냥 와 본 거야! 소년이 뭐하나 궁금해서.”
“그게 무슨... 고작 그런 이유로 이런 소동을...”
“소동?”
“아니... 오면서 깔린 인파 못 봤어요? 니아 님이 왔다고 잔뜩 들떠있던데.”
“응? 들떠있다니? 평소랑 똑같지 않아?”
“그게 평소와 같을 리...”
아니.
이 사람에겐 그게 일상이겠지.
나는 참담하게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이제 예전 일상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할 터. 그녀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사실이 퍼져나가면 앞으로는 어딜 가더라도 사람들의 이목이 따라붙을 테니.
예컨대 은근슬쩍 접근해서 붉은 매 길드에 대한 정보를 캐내려 들거나, 입단시켜 달라고 조른다거나.
이외에도 종종 번거로운 일이 발상할 거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손을 바들바들 떨며 쳐다봤으나 니아는 태연하게 내 입속에 쿠키를 넣어주며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휴가를 얻었어! 암시장을 관리하느라 던전 공략도 못 해서 지루하던 참인데 혼자서 돌아다니다간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른다면서 사냥도 못 하게 하는 거 있지? 비아투스랑 아델은 맨날 요상한 술이나 찾으러 다니고...”
“....”
그러니깐 그 말은 즉...
“...요약하자면 심심해서 왔다는 말이네요?”
그 귀하디귀한 연차까지 쓰면서.
“그렇지~! 소년, 똑똑하네?”
“.....”
한숨을 내쉬었다.
최악의 경우, 방문객의 정체가 내게 앙심을 품은 자객일지도 모른다고 각오했으니 이 정도로 끝난다면 차라리 양반이지만...
앞으로 성가셔질 거라는 예감을 지울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점을 꼽자면 이제 내게 집이 있다는 점. 여차하면 저택 안에 틀어박혀서 농성하면 될 테니. 당분간 얌전히 아리엘과 라디랑 꽁냥대다 보면 관심도 시들해지겠지.
나는 짧은 시간 동안 차후 행보까지 생각을 마치고는 사뿐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 그럼 얼굴 봤으니 됐죠? 이제 돌아가세요.”
“뭐어? 매정해 소년~.”
“...달라붙지 마세요. 누가 보면 곤란하단 말이에요.”
그녀가 내 팔뚝에 안겨 와 서둘러 떨쳐내려 했지만... 가능할 리가.
외견이야 귀엽고 깜찍하다지만 그녀는 명실상부한 A랭크. 나 같은 풋내기가 전력을 쏟아붓는다고 한들 완력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닐뿐더러, 가뜩이나 그녀는 힘을 주력으로 삼는 무투가다.
결국,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걸 포기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언제 던전으로 돌아가실 건데요. 내일? 아니며 모레?”
“나 앞으로 여기서 한 열흘은 머물다 갈 건데?”
“네...?”
“휴가 기간이 일주일이야! 조금 늦은 거야 아실리한테 잠깐 꾸지람 들으면 되고 이왕 던전에서 나온 거 최대한 본전은 뽑고 가야 하지 않겠어? 어때! 소년도 그렇게 생각하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머리를 싸매며 주저앉자 니아가 걱정스럽게 들여다봤다.
“...소년은 나 안 보고 싶었어?”
“아니, 보고 자시고... 니아 님 때문에 제가 지금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고요. 이제 어딜 가든 절 알아볼 텐데...”
“그래? 유명해지면 좋지 않아? 그런데... 킁...”
돌연 니아가 내 목덜미에 키스할 듯이 얼굴을 들이대고 코를 쫑긋거렸다.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치자 그녀가 뺨을 짚으며 아리송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내 살짝 차가워진 음색으로ㅡ
“음... 처음 맡는 냄새인데... 혹시 새 여자 생겼어?”
“....”
어이가 없다.
“...냄새로 그런 것도 알 수 있어요?”
“응? 그야 물론이지. 수인은 기본적으로 다 코가 좋은걸? 아무리 그래도 사낭 쥐 수인만큼은 아니지만!”
“....”
수인 종특이란 건가.
“...어쨌든 그럼 전 이만 가볼 테니 니아 님은...”
“응? 어디 가?”
“네? 당연히 집에 가야죠. 저도 이제 가정이 있는 사람인데...”
“같이 가!!”
“무슨...!”
황급히 거리를 벌리며 외쳤다.
“어디까지 쫓아올 생각이세요!! 저도 일정이란 게 있다고요!!”
빨리 집에서 아리엘과 순애절정맘마수유플레이를 해야 한단 말입니다!
“...안 돼?”
“그야 당연히...”
서글픈 눈동자와 마주치자 순간 뒷말을 머금었다.
던전에서 베라스틴까지면 마차를 타더라도 최소 사흘은 걸리는 거리다. 그녀라면 도보로 훨씬 빨리 도달할 수는 있겠으나 날 보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빨리 만나고 싶어 제대로 몸단장할 여유도 없었는지 발목에 묻은 진흙 자국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더군다나 나는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그녀가 선물해준 살라만더의 레더 아머 덕분에 목숨을 건지지 않았던가.
미약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집에서 머무는 건 곤란해도 도시 안내 정도는 해줄 수 있어요. 뭐... 애초에 저한테 돌아가라고 할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정말이지!?!”
“...네.”
“이얏~ 호!”
니아가 환호성을 지르며 내 가슴팍을 끌어안았다.
가느다란 두 팔이 흉부를 옥죄자 갈비뼈에서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크헉?! 흑...! 자, 잠깐....!”
“아, 미안 미안~ 내가 힘 조절에 살짝 서툴러서 말이야? 조금 아파도 이해해!”
“으윽...!”
등을 팡팡 얻어맞자 척추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만 같다.
나는 공격수의 압박에서 탈피하는 미드필더처럼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어 상황을 모면하고 문고리를 붙잡으며 말했다.
“그, 그럼 빨리 여기서 나가죠...! 저도 길드에 볼일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이 더 많이 몰려들 테니까...”
“그래!! 어디부터 가볼 거야? 듣자 하니 베라스틴 북쪽 거리가 그렇게 아기자기하고 예쁘다던데!”
“음... 보아하니 니아 님 오면서 아무것도 안 먹었죠? 일단 식당부터 안내할게요. 그리고 투구 돌려주세요.”
“응? 투구는 왜.”
“당연한 소릴... 사람들이 보면...”
“괜찮아 괜찮아~ 만약 소년한테 뭐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두 번 다시 기어오르지 못하게 머리통을 아작내줄게.”
“.....”
방금 건 조금 심쿵했을지도...
아니, 그래도 확실히 알았다. 그녀의 고집을 꺾기란 고블린 킹 수십 마리를 상대하기보다 어려울 거란 것을.
니아는 사뿐한 발걸음으로 내게 다가오더니 다소곳하게 팔짱을 꼈다.
“....떨어지세요.”
“싫은데?”
“전 임자 있는 몸이거든요.”
“뭐 어때, 친구끼리. 내가 해명해줄 테니 걱정 마!”
“...계속 따져도 말 안 들으실 거죠?”
“당연하지!”
“.....”
나는 일찌감치 체념하고 뻐근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열게요.”
끼익...
중후한 문이 열리자 층계 너머로부터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저기로 내려가야만 한다.
팔에 초초대형 혹을 매단 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