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화 〉 불청객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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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불청객 #5
“...정말이야?”
“예, 옛..!! 지, 진짜라니까요...?!”
“거짓말 아니고?”
“제 부랄 두 쪽을 걸고 맹세합니다!!”
“곤란하네...”
남자가 내민 양피지엔 ‘헌혈 모집’이란 단어가 대문짝만하게 적혀있었다.
난처하게 종이에서 시선을 떼며 물었다.
“...그럼 나이는 왜 물어본 건데.”
“적정 연령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어린아이한테서 무턱대고 피를 뽑을 수도 없으니까요! 수인은 발육이 빠른 편이라 외견만으로 짐작하고 채혈했다간 낭패를 볼 수도 있습니다!”
“...어디에다가 쓰려고.”
“의료용입니다! 긴급 환자가 나타났을 때 급하게 수혈할 혈액을 미리 조달해놔야 해서.. 무, 물론 맨입으로는 아니고 소정의 보상도 지급합니다! 보세요!!”
남자가 꼬질꼬질한 가죽 재킷 안쪽에서 한 목패를 꺼내들었다. 저게 아마 상품권 대용으로 쓰이는 물건이었던가. 라디가 시장에서 금전 대신 쓰는 걸 얼핏 본 적이 있다.
...그럼 정말로.
“이상한 짓을 하려던 게 아니었어...?”
“예... 뭔가 오해가 있으셨던 모양인데... 업무 중에 딴짓한 게 들통나면 길드장님께 대판 혼납니다. 저희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야, 야 괜찮아?!!”
부그르륵....
‘아이고...’
입에 게거품을 물고 기절한 사내를 보자 죄책감이 몰려들었다.
아니 뭔 생김새며 말투며 건들거리는 모양새만 보면 영락없는 삼류 양아치인데...
“그... 미안하게 됐다.”
“아, 아니 미안하다고 말만 하면...!”
“자.”
짤랑.
품에서 은화를 몇 개 꺼내 건네자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의 손아귀에 억지로 은화를 쥐여주며 달랬다.
“대신이라고 하기엔 좀 뭐하지만... 이걸로 퉁칠 수 있겠어? 해줄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어서 미안해.”
“그게 무슨... 은화야 감사히 받겠지만 사람을 이렇게 패 놓고...”
남자가 코를 훌쩍거리며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봤으나 나도 할 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야, 지금 꼭 나를 무조건 나쁜 놈으로 몰아세우는데... 네가 말 건 상대를 다시 한번 잘 봐봐. 오히려 내가 너희를 구한 거라니까?”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
남자가 니아를 흘겨보며 퉁명스럽게 내뱉었지만, 도중에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그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입을 쩍 벌렸다.
“서, 설마 니아 님...? 베라스틴에 왔다는 소문이 돌긴 했는데 사실이였어...? 듣자 하니 어떤 남자랑 함께 사라졌다던데...”
“..거기까지 알고 있었으면서 못 알아본 게 신기하다. 아무튼, 내가 너희 목숨 살린 거야. 하이랭커들 성깔 있는 건 들어봤지? 이 사람 겉모습은 쬐끄만해도 엄청 무섭다고.”
이전에도 암시장의 유랑단 텐트에서 배우 한 명을 반쯤 죽여놓을 뻔했고.
남자는 언뜻 무해해 보이는 니아의 외견과 하이랭커에 대한 악명을 저울질하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래, 알겠으면 그거 받고 가 봐. 그 때린 건... 미안하게 됐다.”
“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그래, 살펴 가.”
손을 휘저어 배웅했다.
남자는 동료를 등에 업고 부리나케 달려가면서도, 골목 어귀에 도달했을 즈음 니아의 얼굴을 돌아보며 넋을 놓았다.
나는 그 광경에서 천천히 시선을 돌리고 중얼거렸다.
“뭐 저런 새끼들이 다 있어? 니아 님, 혹시 괜찮...”
와락!!
“끄허어어억!!!”
니아가 안겨들자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몰려들었다.
반쯤 혼이 나간 상태로 안겨 있자니 귓가에 어렴풋한 목소리가 와닿았다.
“고마워 소년... 내가 걱정돼서 달려와 준 거야?”
“크헉...! 마, 맞긴 한데 그보다 이것 좀....!”
“....”
그녀가 팔에서 힘을 빼자 지면에 철퍼덕 쓰러졌다.
양팔을 부여잡으며 바닥을 뒹굴자 니아가 상체를 숙이고 날 들여다봤다.
순간 따질까도 생각했지만, 호박색 눈동자에 서린 안타까움을 보자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싸웠다간 분명 질 테니까!
“...미안해.”
“괘, 괜찮으니까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일단 밥부터 먹죠...! 식겠어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에 먹거리를 세팅했다.
라디와 아리엘과 교제하고 나서부턴 늘 휴대하고 다니는 손수건을 니아가 앉을 자리에 깐 뒤 커다란 나뭇잎 포장재를 펼치자 먹음직스러운 부침과 꼬치구이 등 길거리 음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폭력적인 냄새를 맡자 텅 빈 위장이 요동치며 허기를 호소했다.
“...니아 님도 배고프셨을 텐데 빨리 드세요. 여기 손수건 하나 더 있으니 이걸로 손 닦으시고... 아, 깜박하고 마실 걸 안 가져왔네. 금방 다녀올 테니까 니아 님은...”
툭.
“....?”
막 테이블을 떠나려는 찰나, 그녀가 내 소매를 붙잡았다.
어쩐지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의아하게 쳐다보자 니아가 다소 생소한 눈동자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너 나 좋아해?”
“....갑자기 그게 무슨 생뚱맞은 소리예요.”
“하지만... 그럼 왜 나한테 화 안 내...? 갑자기 찾아와서 이런저런 부탁까지 하고... 아프게 했는데도 미운 소리 한 번 안 하고...”
자각은 있던 거냐.
“...뭐라고 하면 때릴 거잖아요.”
“아, 안 그래!! 나도 그렇게 막 나가지는...”
“무슨, 방금도 제가 난입하는 게 조금만 더 늦었으면 큰일 났을 텐데. 얼마나 식겁했는지 알아요? 니아 님이 도시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며 저도 곤란해진다고요. 가뜩이나 이제 절 알아보는 사람도 많을 텐데...”
“......”
니아는 내 머리칼을 힐끔 쳐다보더니 어깨를 움츠렸다.
그 모습이 썩 안쓰러웠기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꼬치구이를 쥐여주었다.
“....?”
“먹어요. 탓하는 거 아니니까 괜히 우울해하지 말고. ...명색이 A랭크면서 뭐 이런 거로 주눅이 들고 그래요. 항상 낙천적인 게 니아 님의 장점이었잖아요.”
“.....”
니아는 한 손에 꼬치를 움켜쥔 채 내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나는 괜히 머쓱해져 뒤통수를 긁적이고는 테이블 위에 쌓인 부침개를 집어들었다.
같이 점심을 먹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지만 사정을 설명하면 라디와 아리엘도 이해해주겠지.
“....안 드실 거예요? 배고프다길래 기껏 사 왔는데.”
“머, 먹을 거야!! 안 그래도 지금 먹으려고 했어...!”
그녀는 내 눈치를 보며 황급히 꼬치구이를 입으로 가져갔다.
과연 많이 배고팠는지 한 번 맛을 보자 니아는 허겁지겁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실소를 흘리고는 기름에 젖어 번들거리는 콧망울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누가 보면 걸신들린 줄 알겠네. 천천히 좀 먹어요. 안 뺏어가니까.”
“.....”
니아는 그제야 속도를 늦추고 음식물을 꼭꼭 씹어 넘겼다. 힐끔힐끔 날 의식하면서도 먹는 데 열중하는 게 마치 어린애를 돌보는 듯하다.
사실 외견만큼 마냥 어리지는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요리사들의 호쾌한 목소리, 지글지글 기름 튀는 소음, 의뢰를 나서기 전에 끼니를 때우러 온 모험가 등을 구경하며 식사를 마치자 니아는 다시 원래의 텐션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짧은 상의 아래로 살짝 드러난 배를 어루만지며 읊조렸다.
“이야~ 잘 먹었다! 엄청 맛있었어! 역시 소년이랑 같이 먹어서 그런가? 너무 좋아!”
“입맛에 맞았다니 다행이네요. 그리고 단둘이 있을 때도 연인 사이를 연기할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아까 길드 소동으로 다들 지레짐작하고 있을 테니까요.”
“연기?”
니아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턱을 짚으며 숙고했다.
그녀가 돌연 손뼉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해맑게 외쳤다.
“그래 소년!! 이제 배도 채웠으니 같이 잘 숙소를 알아보러 가자!!! 난 침대가 푹신한 곳이었으면 좋겠는데!!!!”
“쉿...! 모, 목소리 낮춰요!! 그리고 제가 왜 니아 님이랑 같이 자요!! 전 집에 가서 잘 거예요!”
“뭐? 집으로? 날 집으로 불러들여서 무슨 짓을...!”
“제발 무서운 소리 좀 하지 마요! 제가 니아 님한테 뭘 할 수 있다고... 그보다 어디서 숙소를 구한다... 많이 피곤하죠?”
“우음? 멀쩡한데? 조금 더 둘이서 놀다 가자!”
“아니, 어제부터 한숨도 안 주무시고 달려왔다더니... 그래도 오늘은 안 돼요. 저도 오후에 일정이 있거든요.”
“무슨 일인데 그래?”
“...니아 님은 몰라도 돼요.”
대충 테이블을 정리한 뒤 일어섰다. 제법 넉넉하게 주문했음에도 불구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먹거리를 보자 신통했다. 활발한 만큼 기초대사량도 높은 걸까?
군살 없이 홀쭉한 복부를 슬쩍 흘겨보자 니아가 내 옆구리를 움켜쥐며 말했다.
“....지금 이상한 생각 했지.”
“...아니에요. 그보다 빨리 이곳을 뜨죠. 슬슬 사람들이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난 상관없는데.”
“제가 상관있어요.”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린 니아를 데리고 먹자골목을 나서자 그곳엔 이미 한 무리의 인파가 늘어서 있었다.
다만 좀 전과는 달리 그새 나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라도 한 건지 니아뿐만 아니라 내게 주목하는 이들도 보였다.
사진기 대용으로 얼굴을 묘사하기 위한 휴대용 소형 캔버스나 양피지에 깃펜을 휘날리며 날 위아래로 훑어보는 걸 보니 취재 길드에서도 파견 나온 모양.
...이것이 스타의 삶인가.
하지만 그간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아온 나로서는 이런 관심이 거북하기만 할 뿐이다.
시선을 전방에 고정해 말을 걸고자 다가오는 군상을 차단하고 걸었다. 몇몇 기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불쑥 튀어나와 진로를 가로막았지만, 니아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사납게 노려보자 슬금슬금 물러났다.
인파를 지나쳐 대로로 접어들자 니아가 내 소매를 잡아끌며 물었다.
“근데 소년,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북쪽으로요. 거기가 고급 여관이 많거든요. 돈도 충분한데 잠은 좋은 곳에서 자는 게 좋지 않겠어요? 설마 그런 녀석이 있을까 싶지만... 밤중에 강도가 들 걱정도 없고.”
“응! 나도 그게 좋아! 이전에 머물렀던 막사에도 좀도둑이 들어서 곤란했던 적이 있거든!”
“...아니, 붉은 매 막사에 침입한 사람이 있다고요?”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놈이네.
니아가 기지개를 켜며 대답했다.
“응, 옛날부터 가끔 있었어! 우리 주둔지에는 비싼 물건이 많으니까 하나만 건져도 대박이잖아! 목숨을 걸어서라도 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봐. 물론 아델한테 곧바로 붙잡혔지만.”
“아델 씨라...”
잘 지내고 계실까? 그분은 한번 뵙고 싶은데...
“도란, 무슨 생각해?”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말톤은 요즘 어떻게 지내요? 전해야 할 말이 있는데.”
“아, 그 사람? 잘 지내는 것 같던데? 엘루아한테 좀 시달리긴 하지만.”
“엘루아? 아 그 엘프... 근데 붉은 매 길드에서 왜 말톤을 필요로 하는 거예요? 듣기로는 무슨 협력 같은 걸 하고 있다고...”
“응? 음... 정확히는 그 말톤 씨가 가진 능력이 필요해. 나도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직접 눈앞에서 보고 나서 알았어! 그렇게 추적술이 뛰어난 사람은 처음 봤거든!”
잠깐.
“추적이요...?”
“응! 몰랐어? 우리도 나름 자신 있는 분야였는데 그 남자한테는 발끝도 못 미치겠더라고. 우리 멤버 전원이 달라붙어도 못 해결하던 걸 혼자 해냈어.”
“....”
아니 뭐 말톤이 그런 쪽으로 소질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마물을 상대할 땐 종종 못 미덥지만 대인전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녀석이다. 오필리아 상단 호위 임무에서 단신으로 도적단을 쓸어버리기도 했고, 던전 1층을 전전하던 당시 바위 아래 은폐된 모험가 시체를 찾아내기도 했다.
말톤의 크누트 금 플레이트에 ‘중범죄자 세 자릿수 처형’ 업적 마크가 새겨져 있기도 했고.
하지만 이름난 A랭크 정예 길드에게도 인정받는 수준일 줄이야.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럼 그 말톤의 능력을 빌려서까지 찾아야 하는 상대가 누군데요? 추적술이라 했으니 누군가를 쫓고 있을 거 아니에요.”
“어... 그, 그건 말이지...”
니아가 그녀답지 않게 당황하더니 이내 표정을 풀고는 시원스럽게 토로했다.
“뭐 소년한테라면 밝혀도 되겠지! 우리 길드의 입단 후보 1순위인걸~! 음... 소년은 왜 붉은 매 길드가 세워졌는지 알아?”
“그냥 강한 사람들이 한둘씩 모이다 보니 만들어진 게...”
“음... 2점짜리 대답이야! 우리가 모이게 된 데에는 궁극의 목표가 하나 있거든!”
“목표?”
“...그래.”
그녀의 금색 눈동자가 묘한 이채를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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