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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239화 (239/375)

〈 239화 〉 불청객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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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 불청객 #8

니아와 작별하고 북쪽 가도를 거닐다 보니 어느새 저택 정문에 도달했다.

하지만 다리에 납덩어리라도 매단 듯 쉬이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점심 약속을 파투낸 것부터 오늘 니아를 만나고 온 것까지 전부 설명해야 할테니.

“하아...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시원하게 혼나고 말자.

옹이구멍 안에서 꺼낸 열쇠로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후의 햇살이 고요한 정원을 내리쬐었다.

아직 해가 저물 때까지는 꽤 남았으나 길드에서 볼일만 마치고 바로 돌아올 거라고 말했던 것에 비하면 한없이 늦은 시각.

느린 걸음걸이로 돌길을 따라 걷자 연못에서 물거품 소리가 들려왔다.

­됴란!!

“...잘 있었어 란이야? 말 잘 듣고?”

­됴란! 됴란!!

“그래, 언니들은 안에 있니?”

­끄덕끄덕!

“그렇구나... 알겠어. 더 놀다가 너무 늦지만 않게 돌아와.”

다정하게 머리를 쓸어주었다.

란이는 연못과 나를 번갈아 보며 잠깐 고민하더니, 미련 없이 고양이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내 어깨 위에 올라탔다.

살풋 웃으며 녀석의 다리를 지탱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현관 앞에 도달해 곧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미적거리자 란이가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봐왔다.

­됴란?

“...아무것도 아냐.”

천천히 문고리를 쥐고 비틀었다.

“....애들아 나 왔...”

­와락!!

말을 마치기도 전에 두 형체가 달려들었다.

시선을 내리자 내 가슴팍을 애틋하게 끌어안은 라디와 아리엘이 보였다.

당황스럽게 내려다보기도 잠시, 라디가 고개를 들어 짙푸른 눈동자로 날 들여다보더니 녀석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어... 도란님.. 멀쩡하시네요...?”

“멀쩡하다니...? 뭐가?”

““.....””

그녀들이 슬쩍 시선을 교환하더니 이번엔 아리엘이 머쓱하게 뺨을 매만지며 물었다.

“음... 도란, 투구가 안 보이는데 혹시 오늘 길거리에서 맨얼굴로 돌아다녔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냐니요... 니아 님이 웬 남성과 교제하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사람들이 도시에 쫙 깔렸어요. 어느 길거리를 가봐도 소문이 끊이질 않고요.”

“난 심지어 도란의 정체가 고위 귀족이 아니냐는 얘기까지 들었어.”

“...그것만으로 나란 걸 안 거야?”

“그것만이라니... 흑발에 장신인 사람이 이 도시에서 얼마나 흔하다고...”

“.....”

“...설명해줄래?”

잠시 후.

거실에 마련된 탁자에 앉아 설명을 마쳤다.

아리엘이 건네준 홍차를 들이켜며 침묵하고 있자니 라디가 허심하게 내뱉었다.

“잘했어요.”

“뭐...?”

“잘하셨어요 도란님.”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안색을 살폈지만, 라디는 내게 싱긋 미소짓고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슬슬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도란님도 충분히 스스로를 지키실 수 있는 수준까지 강해지셨고, 몸가짐에 여유가 묻어나오는 게 눈에 띌 정도였으니까요. 다른 사람 앞에서 머리칼을 드러냈다는 건 트라우마를 어느 정도 극복하셨다는 뜻이니 저희로서는 그만큼 기쁜 일이 없죠.”

“...라디야.”

“다행이야 도란.. 우리가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데... 혹시 원치 않은 일로 갑자기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된 건 아닐까.. 또 마음에 상처를 입는 건 아닐까 걱정했어. 도란이 아픈 일을 겪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아리엘...”

상처 따윈 진작에 극복했다.

두 녀석이 이렇게나 따스한 온기를 보내주니까.

­됴란!!

“...그래, 물론 란이 너도.”

란이가 안겨들어와 꼭 끌어안아 주었다. 녀석의 등을 소중하게 쓸어내리고 있자니 라디와 아리엘도 내 곁으로 다가왔고, 우리는 한동안 서로 포옹하며 체온을 나눴다.

가슴의 두근거림이 조금 진정되었을 즈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앞으로는 방범 대책을 확실히 해두는 편이 좋겠어.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확실히... 화제의 중심에 서면 그에 따라붙는 그림자도 있기 마련이니까요... 좀도둑이나 강도의 표적이 될지도 몰라요.”

“음... 연못에 칸막이를 두는 것도 괜찮겠네. 혹시 집에 찾아온 사람이 란이가 뛰노는 모습을 목격할 수도 있으니까. 어쩌면 기사를 고용해서 정문을 지키게 하는 것도...”

“...기사는 싫어요.”

“아... 미안해...”

“아뇨 뭐... 그냥 제 고집이라... 죄송해요.”

“...야간 경비는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개미들을 불러내서 주변을 순찰하게 하면 되니까. 하지만 나중에는 결국 경비병이 필요하긴 할 텐데...”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쓰는 건 싫다. 오히려 허점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이럴 때 울시가 있었더라면...

찻잔 바닥에 가라앉은 찻잎 쪼가리를 응시하며 고심하던 중, 라디가 손뼉을 치며 정적을 깼다.

“뭐, 그건 천천히 생각하기로 해요. 적어도 이 도시에 니아 님이 머무는 한은 안전할 테니까요. 도란님이 그분과 친분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섣불리 침입해올 사람은 드물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고 보니 깜짝 놀랐어. 도란이 붉은 매 길드랑 친하다는 건 저번에 들었지만 솔직히 반신반의했거든.”

“뭐야, 못 믿은 거야?”

“응? 아니, 내가 도란이 하는 말을 못 믿을 리 없잖아. 근데 붉은 매 길드는 이 왕국에서 제일 영향력이 강한 파티 중 하나니까 솔직히 조금은 과장이 있을 줄 알았어. ...근데 소문을 들어보니 그냥 친한 정도가 아닌 것 같던데?”

아리엘이 힐난하듯이 새침한 눈초리로 쳐다봐왔다.

나는 떨떠름한 심정으로 물었다.

“...소문이 어땠는데?”

“아까도 말했잖아요. 니아 님의 ‘교제 대상’이라고.”

“..혹시나 오해할까 봐 말하지만 나는...”

“알아요. 도란님이 그럴 배짱이 없다는 것쯤은. 적어도 하루아침만에 여자를 늘려 오진 않겠죠.”

“응, 나도 그건 걱정 안 했어.”

“.....”

그렇게 칼답하면 또 어떨까 싶은데...

하기야, 난 여기서 연인의 수를 늘릴 마음이 전혀 없다.

설마 더 늘어나겠어.

머쓱하게 차를 들이켜자 라디가 내 흑발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런데 조금 의외네요. 니아 님이 언젠간 방문하실 줄은 알았지만, 조금 더 나중에 오실 줄 알았는데.”

“응...? 니아가 올 줄 알고 있었다고?”

“네, 이전에 붉은 매 막사에서 저랑 아델 님이라 니아 님이랑 대화했던 거 기억해요? 제가 거기서 하룻밤 자고 오기도 했었잖아요. 그때 이미 한 번 얘기가 나왔었어요.”

“아 그때...”

설마 암시장 때부터 예견되어 있었을 줄이야.

‘잠깐만, 그러고 보니 그때 분명...’

“그것 말고는 딱히... 아, 내기에서 져서 원하는 소원을 하나 들어주기로 했어요.”

“하... 역시나.. 그래서 그렇게 기고만장했네...”

“...왜요? 그래봤자 어린이 아니에요? 고작 소원이라고 해봤자 맛있는 걸 먹고 싶다거나 재밌는 델 놀러 가고 싶다거나...”

“뭐, 어린이? 제길... 너 겉모습만 보고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쟤 마냥 그렇게 어리지만은 않아. 물론 우리 길드 전투원 중에선 최연소에다 하이랭커 치고도 젊은 편이지만, 그래도 너보단 연상이라고. 나이가 있는데 설마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러니 어떤 소원을 빌지는 모르겠지만 각오쯤은 해둬.”

“.....”

암시장에서 독살 사건의 범인을 색출하던 중 내기에 져서 원하는 소원을 하나 들어주기로 했었지.

덤으로 공연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면서 언젠가 캐러멜 팝콘을 만들어주겠다는 약속도 했고.

...왠지 내가 모든 일의 원흉인 것 같은데.

헛기침하며 말을 돌렸다.

“...그래도 악의를 가진 사람은 아니라서 다행이야. 가끔 버겁긴 하지만 니아 님 정도면 웃으면서 넘길 수 있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말톤이 뭐 하고 있는지 들었어.”

“어떻게 지내신대요?”

“뭐 별 탈 없이 잘 있대. 무슨 범죄자를 추적하는 걸 도와주고 있다나 봐.”

“붉은 매 길드가 직접 나설 정도면 상당한 흉악범인가 보네... 그런데 말톤 씨가 그런 일도 할 줄 알았구나.”

“그래,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녀석이... 잠깐, 너 말톤이 누군지 알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보자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하지. 너랑 늘 붙어 다니던 사람이고, 지하수로에서도 몇 번 얘기가 나왔잖아. 게다가 말톤 씨는 치료사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했어. 얼굴은 반반한데 이상한 ...도착증이 있는 사람으로. 가끔 슬라임 같은 걸 몸에 달고 오곤 했거든.”

“....하긴 걘 안 유명할 수가 없지.”

괜히 붉은 매 길드에서도 사고 치는 거 아니야?

아니, 그때 봤던 엘프 여자가 고삐를 쥐고 있으니 괜찮으려나.

한창 같이 의뢰를 수행하던 시기, 놈이 벌였던 기행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가는 가운데 아리엘이 문뜩 입을 열었다.

“아, 말톤 씨 하니까 갑자기 생각난 건데... 치료사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이유가 하나 더 있어.”

“뭔데?”

그녀가 차를 한 모금 들이키더니 잔잔하게 읊조렸다.

“음... 지금도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건데... 말톤 씨는 아무리 큰 중상을 입어도 하루면 다 나았어. 한번은 킬러 호넷한테 잔뜩 당하고 와서 몸 곳곳이 상처투성이였는데 다음날 내가 새로 붕대를 감아주려 하니까 계속 치료를 거부하는 거야. 그러다가 결국 붕대가 벗겨졌는데 전날 상처가 흔적도 없이 아물어 있더라고.”

킬러 호넷이면... 나랑 같이 약초를 채집하러 갔을 때 일인가?

“...걔 아마 축복 때문일 거야. 저번에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큰 화상을 입었던 적이 있는데 조금 뒤에 보니까 낫기 시작하더라고. 본인한테 직접 물어봤더니 신의 가호를 받았다고 했어.”

나는 찻잔에 각설탕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티스푼으로 고루 젓고 음미하자 달콤쌉쌀한 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하지만 불현듯 위화감을 감지하고 고개를 돌렸을 땐, 아리엘이 내게 의아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왜?”

“아니 그야 말이 안 되는걸. 이 세상에 그런 가호는 존재하지 않아.”

“뭐...?”

“...그게 정말이에요 언니?”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응. 엘프들이 주로 숭배하는 신은 자연 계열이나 세계수님 정도인데, 그분들이 내려주시는 축복엔 그런 능력이 없어. 자연 치유력을 소폭 향상시켜줄 순 있겠지만 정말 미미한 정도라 방금 도란이 말한 것처럼 극적인 효과는 없고.”

“그럼 다른 신들은...”

“없어. 신마다 관조하는 분야가 정해져 있는 만큼 줄 수 있는 축복도 한정되어 있거든. 치유 관련 가호를 내려주시는 분은 아가사 님이 유일한데 그랬다면 내가 몰라봤을 리 없고.”

“그렇다면... 말톤님이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거짓이라는 소리예요?”

라디가 진중한 어조로 묻자 아리엘이 머리칼을 꼬며 대답했다.

“음... 아니, 아마 뭔가 가호를 받긴 했을 거야. 그런 기적은 어지간해선 자력으로 발현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이 세상엔 워낙 많은 신님들이 계시고 내가 모르는 분도 있을 수 있거든. 다만 좀 의아한 건...”

“...뭔데?”

“으음... 가호, 그것도 회복 관련 가호를 내려주시는 분이면 누구나 탐을 낼 텐데 왜 그런 분의 존함이 안 알려졌는지가 의문이야. 신도가 많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데...”

아리엘이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불현듯 뭔가가 머리를 스쳐지나간 듯 눈을 크게 떴다.

라디와 함께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뒷말을 기다리던 찰나, 아리엘이 우리의 시선을 눈치채고 손을 내저었다.

“으음... 아무것도 아니야.”

“...방금 뭔가가 떠오른 표정이었는데..”

“응, 근데 너무 말도 안 되게 허무맹랑한 거라서... 나도 조금 더 알아보고 알려줄게. 혹시나 내가 빠트린 신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마 아가사 신전의 대서고에 찾아가면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야.”

“...알았어. 네가 그렇다면...”

“어쩌면 니아 님께 물어보는 것도 괜찮겠네요. 하이랭커면 주변에서 듣는 이야기도 많을 테니까요.”

“그러게...”

하기야... 붉은 매 길드원 정도면 대부분 신의 축복을 받았을 테니 어쩌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전에...

애초부터 왜 말톤은 가호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한 걸까.

‘...다음에 만나면 제대로 추궁해봐야겠어.’

나와 라디를 위해 몇 번이고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희생한 녀석이다. 놈이 이상한 꿍꿍이를 품고 있을 리는 없다. 그것만큼은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물어봐서 나쁠 것도 없다.

만약 곤란한 일이 있다면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푹신한 소파 등받이에 기댄 채 생각에 잠겨있자니 라디가 테이블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식사는 하셨어요 도란님? 설마 굶고 다닌 건...”

“아... 미안해.. 난 밖에서 니아 님이랑 먹고 왔어. ...오늘 점심은 같이 먹기로 했었는데..”

“뭘 미안해해요. 그런 일이 있었는데 당연하죠. 니아 님의 소문을 들었을 때부터 대충 짐작하고 있었어요. ...그러니 미안해하실 거면 언니한테 하세요. 오늘 같이 목욕하기로 해서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데요.”

“라, 라디야!?! 아, 아냐 도란 난...!”

“그랬어?”

“아, 아니야!! 라디가 그냥 지어낸 거야...!!”

아리엘이 손바닥을 내저으며 당황했다. 제대로 정곡을 찔린 모양.

내심 기대하고 있던 걸까?

조금 더 골려주고 싶다.

나는 일부러 시무룩한 표정을 꾸며내며 말했다.

“난 기대했는데 아리엘은 아니었구나... 알겠어...”

“앗...!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조금..! 아니 많이...! 기대했어!”

“그래? 정확히 어떻게 기대했는데?”

“그, 그야... 같이 식사하고 목욕하면서 담소도 나누고... 서로의 몸을 씻겨주기도 하다가 마지막엔... 자, 잠깐! 이거 지금 놀리고 있는 거지?!”

아리엘이 내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 걸 목격하고는 다가와 가슴팍을 투닥거렸다.

하지만 내가 훌쩍 들어올리자 목덜미를 부둥켜안았다.

“꺄앗...! 노, 놓아줘...”

“...아까 내가 말했던 거 기억해?”

“마, 말했던 거?”

“오늘은 애원해도 안 멈출 거라고 했지.”

“.....”

아리엘이 살짝 입술을 깨물고 신음하자 이번엔 라디가 옆에서 거들었다.

“언니, 그러고 보니까 저번에 부탁한 거 언니 방 책상 위에 올려뒀어요.”

“자, 잠깐 라디야!! 그걸 여기서 말하면...!!”

“응, 부탁? 뭐 있었어?”

의아하게 묻자 라디가 내게 슬며시 다가오더니­

“왜 그거 있잖아요 그거. 작고 하얀 거.”

“아...”

고개를 내리자 농익은 토마토처럼 얼굴을 붉힌 아리엘이 보였다.

역시 오늘은 하루가 조금 길어질지도 모르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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