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240화 (240/375)

〈 240화 〉 불청객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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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불청객 #9

아리엘의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내복으로 갈아입고자 막 거실을 빠져나가려던 찰나, 라디가 소매를 툭툭 잡아당기며 물어왔다.

“그러면... 저희는 이제 식사하러 갈 건데 도란님은 그동안 쉬고 계실 거예요? 아니면 한술이라도 뜨실래요?”

“음....”

솔직히 아까 군것질한 탓에 딱히 배가 고프지는 않지만...

“그래, 같이 가자. 슬슬 출출할 때도 됐으니까 저녁 겸 해서 먹지 뭐.”

정성껏 차려놨는데 안 먹기도 좀 그러니까.

나는 미소짓는 라디와 여전히 부끄러워하는 아리엘을 데리고 식당에 들어섰다.

하지만 식탁 위 천에 덮인 채 식어있는 밥상과 공연히 맴도는 쓸쓸한 분위기를 목도하자 욱신거리는 죄책감이 가슴을 찔렀다.

“...미안.”

“신경 쓰지 말라니까요. 전 스튜 좀 데우고 올 테니 언니랑 도란님은 편하게 앉아 계세요.”

라디가 냄비를 들고 부엌으로 사라졌다.

란이를 전용 어린이 의자에 앉히고 아리엘과 함께 원형 식탁에 둘러앉자 잠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말을 걸 요량으로 옆을 쳐다봤지만 아리엘은 자꾸만 내 시선을 피할 뿐.

나는 슬쩍 그녀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오늘따라 유독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데... 이유라도 있는 거야?”

“.....”

“이따가 같이 목욕하기로 한 것 때문에 그래?”

“으...”

아리엘이 더욱 움츠러들자 나는 의자를 붙여 어깨를 맞대었다.

그녀의 팔뚝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잔잔한 어조로 속삭였다.

“...아리엘. 아까는 장난으로 그랬지만 난 네가 싫다고 하면...”

“그, 그런 게 아니고... 그냥...”

“그냥?”

“.....”

아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연안의 푸른 하늘을 담은 눈동자가 날 마주하자 흠칫 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그 안에 품은 감정이 라디가 달밤에 내 침대로 숨어들어왔을 때 보았던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걸 깨달았기에.

이번엔 그녀가 먼저 내 목덜미를 끌어안고 입술을 포개왔다.

다소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아리엘을 끌어당기고 온기를 느끼자 곧 부엌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다 데워왔어요. 아까 차를 타 올 때 미리 한 번 덥혀놔서 금방 데워졌네요. 오히려 국물이 조금 졸으니까 더 맛있어.. 둘이 무슨 일 있었어요...?”

“으, 응?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

아리엘이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으나 눈치 백 단인 라디를 속일 수 있을 리가.

라디가 국자로 스튜를 그릇에 덜어내며 말을 이었다.

“...언니는 너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냥 대놓고 해도 아무도 뭐라 안 할 텐데. 저도 도란님이랑 별로 개의치 않잖아요.”

“으... 다른 사람이 신경 쓰인다기보단 그냥 내가 부끄러워서... 이렇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겠어...”

“...그래서 더욱더 오늘 교류 시간을 갖자는 거예요, 자.”

녀석이 부끄러워하는 아리엘에게 그릇을 건넸다.

라디가 내게도 스튜를 담아줬기에 고맙게 받아들고 의자를 되돌렸다. 슬금슬금 내 허벅지 위로 올라타는 란이를 다시 자리에 앉히고는 접시를 덮어두었던 천을 젖히자 빵과 치즈 등 다양한 음식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나머지 반찬은 식어도 그럭저럭 먹을 만한 구성이다.

우리는 아리엘이 짧은 기도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식탁 위로 손을 뻗었다.

나는 이곳에선 나름 부유의 상징과도 같은 흰 빵을 길게 찢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스튜에 찍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리엘, 나 예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는데...”

“응, 뭔데 도란?”

“.....”

슬쩍 눈치를 살피며 운을 뗐다.

“...너 혹시 가족이랑 사이가 나빠?”

“응? 아니 전혀. 지금도 종종 편지로 연락하곤 하는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

“아 그래? 그냥... 도통 말을 안 하니까. 독립한 이유도 신경 쓰이고...”

“음... 정말 별거 아닌데...”

아리엘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식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가족이랑은 잘 지내. 언니가 두 명 있고 남동생이 한 명 있는데 언니들은 모두 결혼했어. 독립한 건 베라스틴 지부 신전에 사제가 모자란다고 해서 파견 온 거고, 부모님이 처음엔 승낙을 안 해주다가 남동생이 태어나고 나서 허락해줬어.”

“언니한테 남동생이 있었구나... 몰랐어요.”

“응, 근데 그렇다고는 해도 나랑 나이 차가 많이 나서 오랫동안 막내처럼 자랐어. 그래도 그 애가 가문을 물려받기로 해서 내가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거야. 덕분에 결혼 문제에서도 비교적 자유롭고. 사실 아가사 신전의 사제가 된 것도 슬슬 혼담 얘기가 나와서 도망치듯 입교한 것도 있거든.”

결혼이라...

“...부모님은 언제 뵈러 가면 되는 거야? 아니면 날 보면 싫어하려나..”

“으응...?”

아리엘이 내 표정을 살피더니 황급히 손을 붙잡으며 외쳤다.

“아, 아냐...!! 두 분 다 굉장히 좋은 사람이야!! 편견도 없고 정말 상냥한 분이라 내가 신전 업무를 핑계로 결혼을 늦춰도 너그럽게 용인해주셨어! 도란을 소개해주면 정말 기뻐할 거야!!”

“...나 같이 근본 없는 놈을 반긴다고?”

이 세계에서의 결혼이 대충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고 있다.

뼈대 있는 귀족일수록 개인 간의 유대보다는 가문 간의 결속을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정치적 수단이라는 것도.

제정신이 박힌 부모라면 귀하게 키운 딸을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르는 놈에게 선뜻 내어줄 리 없다.

다소 무거운 심정으로 식탁보를 응시하자 그녀가 내 곁으로 의자를 끌고 와 끌어안았다.

“도란이 뭔가 잘못 생각하는 모양인데... 전혀 그렇지 않아. 도란은 아직 이 세계가 낯설지?”

“...그건 무슨 뜻이야?”

“이곳에서는 신이 상당한 의미를 지녀. 농부들은 한 해 농사를 짓기 전 농업의 신 티바르에게 기도하고, 상인들은 부의 신 라하의 상징물을 늘 몸에 지니고 다니곤 해. 매일매일 신전에 찾아가 두 시간씩 참배하거나 없는 살림에도 재산을 긁어모아 성금하는 사람도 적지 않아.”

“.....”

그녀가 투명한 눈동자로 날 응시하며 앞머리를 넘겨주었다.

“도란은 안디라 신님의 힘을 쓸 수 있지?”

묵직한 입술을 뗐다.

“...그건 내 능력이 아니잖아. 내가 그림자 병사들을 소환할 수 있는 건 전부 무기가 때문...”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저도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온화한 눈길로 날 바라보던 라디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아무리 단검 때문이라도 안디라 신의 권능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금시초문이에요. 애초에 도란님이 그분의 축복을 받았다는 게 거의 확실시된 상황이기도 하고요. 세상에 신의 성물을 가호도 없이 자유자재로 다루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왜 나야? 난 그 신하고 아무런 접점이 없는데...”

“그거야 우리도 모르지. 내가 오랜 시간 동안 사제로 살아오면서 느낀 게 하나 있다면, 신의 생각은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다는 거야. 당장 나만 해도 축복을 받기 전까지는 아가사 신전의 사제가 될 거라고 상상도 못 했는걸?”

“게다가... 최근에 떠오른 생각인데, 안디라 님은 세간에 알려진 편견과는 달리 선량한 분일지도 몰라요. 연고도 없이 슬럼가에서 헤매던 수인 소녀를 도와줬을 정도니까요. 어쩌면 도란님이 그 소녀와 만날 걸 예상하고 미리 축복을 내린 게 아닐까요?”

“.....”

나도 그의 성품이 사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실비라고 불렸던 그림자 여왕이 정확하게 어떤 과정을 거쳐 마물로 변했거나, 단도의 능력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찾아오는 부작용 등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아니, 신을 인간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 고양이 수인을 구출해서 정보를 얻고자 하는 건데...

아리엘이 내 접시에 빵을 덜어주며 화제를 되돌렸다.

“음... 그래, 다시 이전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도란은 정말 유일무이한 존재야. 다른 세계 사람인 걸로도 모자라서 절대 축복을 안 내려주시기로 유명한 2위계 신님한테서 가호를 받았으니 말이야. 그러니 절대로 기죽을 필요 없어.”

“네, 게다가 운디네를 사역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정령과 연관된 사람에겐 큰 행운이 뒤따른다고 하니 귀족이라면 모두 도란님을 사위로 두고 싶어 할 거예요. 자신의 가문에도 복을 가져다줄지 누가 알겠어요?”

“....”

하지만 오히려 이세계 출신이라는 점이 발목을 잡지 않을까.

미약한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간 이런 일로는 고민한 적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결혼 얘기가 나오면 걱정이 많아지는 건 전 세계 남자 공통인가 보다.

아리엘은 내 표정만으로 머릿속에 든 생각을 꿰뚫어보고 말했다.

“괜찮아... 아까도 말했잖아. 내 부모님은 정말로 편견이 없으신 분이라고. 특히나 우리 아버지라면 반드시 두 손 들고 환영할걸? 술상을 펴 놓고 밤새 다른 세계 이야기를 들으려 할지도 몰라. 도란이 곤란해할 정도로.”

“.....”

“정말... 걱정할 필요 없다구... 이래서 내가 귀족이란 걸 밝히기가 그렇게 싫었던 거야.”

“...알았어. 둘 다 고마워.”

두 녀석에게 천천히 미소를 지어 안심시키고 나직하게 물었다.

“...그럼 언제쯤 보러 가는 게 좋을까? 그래도 인사는 올리는 게 예의상 맞지 않아?”

“흠... 글쎄... 하지만 당장 급할 필요는 없을 거야. 베라스틴에서 꽤 먼 곳이니까 거기까지 가려면 여러모로 채비를 꾸려야 하거든... 일단 이번에 부칠 편지에는 도란에 대해서도 써 놓으려 하는데 그 뒤에 답장을 받고 방문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

“할 게 많네요. 손에 여자가 많으니 부지런히 움직이셔야겠어요. 앞으로 점점 더 바빠지실 텐데.”

“...그건 또 무슨 의미야?”

“글쎄요?”

“....”

한숨을 내쉬었다.

옆구리에서 콕콕 찌르는 손길이 느껴져 호호 불어 식힌 스튜를 란이의 입에 넣어주고 고개를 돌리니 아리엘이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정다운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왜.”

“그냥... 이러고 있으니까 진짜 예비 부부 같아서.”

“.....”

그럴지도 모르겠다.

다시금 눈앞의 식탁으로 시선을 돌렸다. 따사로운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친 뒤, 기분 좋은 포만감을 만끽하며 일어서자 창밖으로 어느덧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해가 보였다.

란이의 도움을 받아 수월하게 설거지를 마치고 층계를 오르자 라디가 앞치마를 벗으며 읊조렸다.

“...그럼 저는 준비할 게 있으니 먼저 욕실에 가 계세요.”

“알았어. 근데 란이는 어떡할 거야?”

“아... 그러고 보니 란이가 있었죠...”

라디가 내 발치에서 똘망똘망 눈을 빛내는 란이를 바라보며 고민했다.

이내 녀석이 란이의 겨드랑이 아래를 붙잡고 들어올리며 말했다.

“읏차... 그럼 란이는 제가 재워두고 올 테니 두 분이서 욕실에 물 좀 받아주세요. ...그렇다고 먼저 일 벌이진 마시고요.”

“아, 안 그래...!!”

“뭐... 도중에 저지르셔도 딱히 상관은 없는데... 모처럼 입욕제를 얻어왔으니 느긋하게 즐기다 탕에서 나가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라디는 우리에게 싱긋 웃어보인 뒤 란이를 품에 안고 제 방으로 사라졌다.

나는 머쓱하게 목덜미를 매만지고는 우왕좌왕하는 아리엘을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

한데 막 문턱을 넘으려는 찰나, 그녀가 머뭇거리며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왜?”

“아니 그... 정말로 같이 들어가는 거야...? 셋이서..?”

“...셋이서 들어가는 건 싫어?”

“아, 아니! 그럴 리가!! 오, 오히려 단둘이 들어간다고 했으면 더 부담스러웠을 거야...! 라디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그럼 왜.”

“솔직히 좀 떨려서...”

“.....”

상냥하게 그녀를 껴안았다.

아리엘은 뻣뻣하게 굳은 채로도 슬며시 내게 팔을 얹어왔다.

나는 그대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리엘.”

“으응...?”

“지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착각...?”

“들어갈 땐 셋이겠지만 나올 땐 둘이야.”

“.....?”

아리엘이 아리송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곧 의미를 깨닫고 시뻘겋게 얼굴을 물들이며 뒷걸음질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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