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241화 (241/375)

〈 241화 〉 불청객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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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불청객 #10

­끼릭!

­콰르르르르!!

수도꼭지를 돌리자 맑은 물이 쏟아졌다.

대형 욕조를 밑바닥부터 서서히 채워가는 온수를 보니 몸을 담그기도 전부터 피로가 녹아내리는 듯하다.

채광창으로 드리운 노을이 욕실을 아름다운 주홍색으로 물들이는 광경을 바라보며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자, 아리엘이 불 마석 대용으로 사용하는 홍옥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음... 마력을 불어넣어 놨으니까 이 정도면 충분할 거야. 처음에는 물이 좀 뜨거울 수도 있으니까 데이지 않게 조심하고.”

“그래. ...어디 가게?”

“응? 라디 도와주러 가야지.”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있다가 가. 지금쯤 란이 재우고 있을 텐데 도중에 깨면 곤란하잖아.”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아리엘이 난처하게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이내 눈치를 살피더니 슬그머니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옆으로 물러나 그녀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리엘, 나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

“...뭔데?”

“뭘 그렇게 긴장을 하고 그래. 이상한 게 아니라 마나에 관련된 거야.”

“아, 그.. 그래? 어떤 게 궁금한데?”

“...넌 언제부터 마나를 쓸 수 있었어?”

“아...”

아리엘이 내 얼굴을 힐끔 바라보고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부터. 어릴 때부터 개인 교사에게 마법을 쓰는 법을 배워왔어. 우리 가족은 전원 마력을 다룰 수 있거든.”

“그럼 마나는 유전되는 거야?”

“음... 대체로 그렇지만 무조건은 아니야. 내 지인 중에도 가족이 전부 마법사인데 혼자서만 마나를 전혀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 있어. 반대로 평범한 농촌 마을 태생인데도 대마법사가 된 사람도 있으니까. 도란은 마력을 직접 본 적이 없다고 했지?”

“그렇지 뭐...”

마법을 통해 생성된 부산물이라면 볼 수 있다. 예컨대 이교도들의 지하 광장에서 목격했던 거대한 얼음 기둥이나 불사조 같은. 그건 명백하게 현실에 생성된 물질이니까.

그게 아니라면 공기의 흐름, 안구에서 발하는 마력광, 옷자락이나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걸로 간접적으로나마 유추하는 게 고작이다.

아리엘이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인간은 모두 알게 모르게 마나를 소유하고 있데. 대부분은 그 양이 워낙 미미하거나 겉으로 발현되지 않아서 감지하지 못하는 것뿐이고. 하지만 체질에 따라 후천적으로 마나를 각성하는 사람도 있으니 너무 상심하지 마. 도란도 언젠가 마나를 쓰게 되는 날이 올 거야. 어쩌면 라디도.”

“...그랬으면 좋겠다.”

마나 사용자와 일반인 사용에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존재하니까.

오늘 니아와 함께 다니면서 여실히 깨달았다.

마나를 각성하지 못한다면 그녀 수준에 도달하는 건 어림도 없다는 사실을.

아직도 붙잡혔던 감촉이 선연한 팔뚝을 응시하자 아리엘이 다소곳하게 깍지를 끼며 말했다.

“그리고 마나라고 하니까 생각난 게 있는데 말이야...”

“뭔데?”

“왕도의 대신전에 가면 마력을 탐지해주는 수정구가 있다나 봐. 비용이 조금 들긴 하지만 이용료만 내면 누구나 마력의 적성과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고.”

“그래? 그렇다면 나중에 한 번 꼭 가봐야겠네.”

“응... 근데 문제가 하나 있어.”

“문제?”

의아하게 눈썹을 올리며 묻자 아리엘이 살짝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으, 응.. 대신 그 수정구를 쓰면 마력 외에도 성별이나 받은 가호의 종류, 종..족까지 전부 다 나온다나 봐... 물론 수정구의 주 이용층은 대부분 귀족이니 원한다면 따로 분리된 별실에서 비밀리에 결과를 확인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응? 그게 뭐가 문제야? 오히려 내가 정말로 안디라 신의 축복을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으니 좋은 거 아니야?”

가능하다면 말톤도 꼭 검사해보게 시키고 싶을 정도다.

아리엘이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치...!! 응응, 도란이라면 분명 굉장한 결과가 나올 거야!”

“.....”

그렇다면야 좋을 텐데.

솔직히 아직 확신이 없다. 나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니 태생부터 마력을 쓰는 게 불가능할 수도 있으니까.

라디가 몇 번이나 거듭 가능할 거라고 장담했지만 불온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

시선을 내리자 아리엘은 내 표정을 보고 안절부절못하더니 가슴팍을 꼭 끌어안았다.

그녀가 안쓰러운 눈망울로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저기 도란... 만약에 내가 기분을 북돋아 줄 수만 있다면...”

“...괜찮아, 늘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그러지 말고... 응? 도란한테라면 뭐든 해줄 테니까...”

“뭐든지?”

“그래, 도란... 아, 아니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너무 야한 건...”

“그럼...”

끌어당겨 입술을 맞추었다.

아리엘은 잠시 움찔하더니 이내 슬그머니 내 목덜미에 팔을 두르며 체중을 실어왔다.

나는 그녀의 등허리에 손을 얹으며 더욱 밀착했고.

서로의 따스한 온기를 향유했다.

잠깐의 입맞춤 이후 천천히 입술을 떼며 읊조렸다.

“아리엘...”

“...응, 도란..”

“키스하자.”

“응... 잠깐? 읏...?!”

그녀가 마음을 놓았을 즈음 상체를 숙여 입술을 훔쳤다.

물망초색 눈동자가 크게 뜨이자 나긋나긋한 신체에 딱딱한 긴장이 실렸다.

평소의 가벼운 입맞춤과는 다른 분위기에 그녀가 당황하는 것이 느껴지고, 나는 끌어안은 팔에 힘을 실으며 허락을 구했다.

이윽고 아리엘은 마침내 결심한 듯 내게 상체를 밀착하더니 꽃봉오리가 트듯 천천히,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그렇게 우리는 키스했다.

“.....”

­꾸욱.

가녀린 손가락이 내 어깨를 파고들었다. 얇은 의복 너머로 전해져오는 심장 박동은 조금 빠르다. 더더욱 강하게 끌어안는 두 팔로부터는 날 신뢰하고, 의지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나는 아기 새를 다루듯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점진적으로 나의 색을 넓혀나갔다.

처음 맛보는 아리엘의 입안은 새콤하고, 조금 뜨겁고, 촉촉했다.

사락사락 옷깃이 접힐 때마다 풍겨오는 달금한 체취, 살짝 들뜬 숨, 내 사소한 몸짓 하나에도 생동감 있는 반응으로 돌려주는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아직 키스에 익숙지 않은 그녀가 슬슬 숨이 가빠오는 기색이었기에 천천히 포개었던 입술을 떼자 반짝거리는 실이 늘어졌다.

식후에 마신 과실주의 경미한 알코올은 날아가 버린, 달달함만이 남은 키스.

나는 달콤한 디저트를 먹을 때면 으레 그러했던 것처럼 노곤한 표정을 지은 아리엘을 품에서 살짝 떨어뜨려 주며 읊조렸다.

“...아리엘.”

“.....”

“좋아해.”

“...나도.”

아리엘이 애틋하게 끌어안아왔다.

그간의 조바심 따위는 모조리 날아간 듯한 얼굴로 행복하게 미소짓는 그녀를 보니 보호 욕구가 샘솟았다.

짖꿋은 장난기가 슬쩍 고개를 내밀 정도로.

나는 그녀를 붙잡은 채로 웃으며 욕조를 향해 서서히 기울어졌다.

“도, 도란...?”

“.....”

아리엘이 당황하며 몸을 빼려 했지만 나는 용납하지 않았고...

­첨벙!!

우리는 큼지막한 물보라와 함께 온수에 빠져들었다.

천천히 팔을 풀자 아리엘이 상체를 일으키더니 뺨에 들러붙은 은발을 넘기며 말했다.

“정말... 다 젖었잖아... 갑자기 왜...”

“아리엘.”

“....?”

그녀가 의아한 눈초리로 응시해오자 나는 느릿하게 다가가­

“...너 지금 엄청 야해.”

“읏...?!”

아리엘은 그제야 의표를 찔린 듯한 표정으로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물에 젖어 들러붙은 블라우스 안쪽으로는 새하얀 살결과 속옷이 투명하게 비쳐 보였다.

그녀는 달아오른 얼굴로 황급히 가슴께를 가렸지만, 이미 고조될 대로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그런 행동은 스테이크 위에 뿌려진 데미글라스 소스처럼 흥분만 돋울 뿐이다.

“아리엘.”

“으, 응...”

“...우리 좀 더 하자.”

수면에 파문이 일자 두 형체가 겹쳐졌다.

젖은 입술에 가벼운 키스부터 시작해서 서서히 움직였다.

서로의 숨을 섞고, 깊게 맞물리고, 타액을 교환하고.

마음을 공유하고, 생경한 감각을 나누고, 조금은 야릇하게 상대의 몸을 어루만지면.

그녀가 옅은 탄식을 흘렸다.

나는 아리엘과 깍지 낀 손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입맞춤을 이어나갔다.

상냥하게 입동굴을 비집자 따스한 혀가 수줍게 마중을 나왔다. 나는 그녀의 혀에 내 혀를 얹었고,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반응을 감상하며 더욱 눈앞의 온기를 갈구했다.

창밖에서 드리우는 황혼은 더욱 짙어져, 우리를 붉게 물든 적야(赤?)로 끌고 갔다.

날 애타게 끌어안은 그녀의 팔에서는 다분한 애정이 느껴졌다.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며, 뺨을 훑고 목을 타고 내려가 그녀의 쇄골에 얼굴을 묻었다.

느릿하게 몸을 겹쳐 아리엘을 욕조 구석에 비스듬히 기대며 입을 열었다.

“아리엘... 그때 기억해?”

“.....”

“우리 처음 만났던 날 말이야.”

“.....”

아리엘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왜 묻느냐는 듯.

나는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종용했다.

“..말해줄래?”

“...여름이 오기 전 숲 속에서..”

“그래, 그리고 그 뒤에 일도.”

“응... 전부 생생하게 기억해... 내가 도란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종종 상태를 보러 갔었어. 가끔 옷이나 빵을 들고 찾아간 적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너는 나를 매몰차게 쫓아냈고...”

아리엘이 살짝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미안해.”

“.....”

당시 나는 너무나도 지쳐 있던 상황이었으니까.

그때 아리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꾸준히 날 찾아와주지 않았더라면, 나 도란은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그때의 일을 상기하자 아리엘이 다 이해한다는 듯 살며시 눈을 감으며 내 등을 다독였다.

나는 미소로 화답하고 말을 이었다.

“...그러면 내가 모험가가 된 것도 기억나?”

“응... 기억나. 갑자기 치유소 앞에 찾아와서 놀랐어.”

“널 보기 위해 모험가가 되었어. 그때의 일이 마음에 걸려서. 사과하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응.. 사실 매번 네가 내게 찾아왔을 때... 외면하면서도 속으로는 하루라도 보이지 않으면 불안했어. 도시 안에서 무슨 봉변을 당한 건 아닐까... 이상한 일에 휘말린 건 아닐까... 내가 이 세계에서 봐 온 인간은 전부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더라고.”

“.....”

“그래서 성벽 안으로 들어왔어. 널 더욱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도시에서 체류하기 위해선 신분증이 필요했고, 신분증을 얻기 위해선 모험가가 되어야 했어. 그래서 지금 모험가인 내가 있는 거야.”

“도란...”

아리엘이 애절한 시선을 보내왔기에, 나는 그녀와 잠시 입술을 포개었다가 뗀 후 말을 이어나갔다.

“..모험가가 되고 난 후에는 틈만 나면 중앙 구역을 찾아갔어. 널 보기 위해. 하루하루가 고되어도 치유소의 창문 너머로 분주하게 일하는 널 보면 힘이 났거든. 하지만 그때는 내가 너에게 연정을 품었다는 사실을 잊으려 했어.”

“...왜 그랬어? 솔직하게 얘기했더라면...”

“그래선 안 됐거든.”

“어째서...”

나는 그녀를 애틋하게 껴안으며 고했다.

“나 따위는 너와 이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어.”

“전혀 그렇지 않아!! 도란 너는...!”

“적어도 그땐 그렇게 생각했어.. 네가 내 머리를 보고도 이전처럼 살갑게 인사해줄까. 내가 이 마음을 전해도 되는 걸까. 너를 이미 상처입힌 내가 너를 사랑할 자격이 있는 걸까. 많이 고민했고, 또 갈등했어.”

“.....”

“...그래서 결론을 내렸던 거야. 내가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면, 적어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을 찾을 때까지 곁에서 지켜주기로. 스스로 좋아하는 마음을 억눌러가면서.”

“....도란.”

“알아. 하지만 이젠 아니야. 널 향한 내 마음을 자각해버렸으니까. 마음이 너무 커져버렸으니까.”

“도란...”

“아리엘, 이제는 전할 수 있을 거 같아.”

“.....”

“사랑해.”

나는 다정하게 웃으며 눈물을 흘리는 그녀에게 고했다.

욕조에 떨어지는 물소리 탓에 그녀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으나­

서로의 이름을 애타게 연호하는 목소리가 겹쳐지고 잔물결이 이는 수면 위에 옷가지가 한풀 한풀 흘러내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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