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화 〉 첫사랑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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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첫사랑 #1
해가 저물었다.
새들에게 생명을 선사하고 이른 봄의 들판을 알리던 햇살은 기울어, 반짝거리는 별과 초승달이 하늘을 대신했다.
우왕좌왕 날아다니며 꽃의 수분을 돕는 꿀벌과 딱정벌레는 이미 잠들었지만 아직 못다 한 연심이 맺어지는 이곳.
염야한 별 구름과 초승달이 은은하게 비추는 열 평짜리 욕실 안에서 아리엘은 처음 마주하는 감각에 휩싸였다.
아니, 생각해 보면 그와 만나고 나서부턴 모든 게 처음이고 생소했다.
에르티넬라 후작 가문의 셋째 딸로 태어나 모자람 없이 사랑을 받으며 자라온 그녀다.
서툴게나마 그림을 그려오면 부모님은 이를 액자에 담아 내걸었고, 마법을 깨우치면 가신들이 몰려와 손뼉을 쳐주었으며, 영지를 거닐 때면 마을 주민들이 다가와 그 한 해 제일 잘 익은 햇과일을 건네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도 가시덤불에 상처투성이가 되어가면서 약초를 구해다 주거나, 일말의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내 일을 자기 일처럼 도와주고, 언제든 곤란할 때마다 달려와 곁을 지켜주는 사람. 또 그런 바보처럼 솔직한 모습에 끌리는 나 자신 모두 처음이다.
하물며 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손을 맞잡고, 잠들 때까지 이야기하고, 감언을 속삭인 뒤로는 눈 덮인 밀밭을 거닐며 서로에게 서로가 있는 미래를 상상하는 그런 삶이라니.
지금 나누는 입맞춤부터 천천히 옷을 벗겨나가는 그의 손길, 이 상황에 미칠 듯이 설레이고 또 살짝 불안해하는 스스로의 모습까지 아리엘에게는 모두 처음이고 생소했다.
스륵...
서로의 온기를 갈구하며 도란의 손가락이 아리엘의 블라우스를 벗겨나갔다. 아리엘은 마법처럼 머릿속의 불안과 근심을 녹여버리는 키스란 생경한 행위 속에서도 자신을 갈구하는 그의 손길을 선연히 느꼈다. 검을 쥐느라 손에 박인 그의 굳은살까지도. 전부.
이대로 가다간 자신은 단 한 번도 이성 앞에서 내보인 적 없는 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리엘은 손길에 저항하지 않고, 되려 욕조에서 등을 떼어 그가 더욱 편히 옷을 벗길 수 있도록 해주었다.
얇은 어깨끈이 쇄골에서 탈락하고, 어떻게 하는지 그녀조차 모르게 도란이 가녀린 두 팔을 들어올려 젖은 옷을 벗겨내자 아리엘의 새하얀 나체가 드러났다.
속옷밖에 남지 않은 아리엘은 애써 몸을 가리려 했지만, 가냘픈 팔뚝으로는 타고난 볼륨감을 숨길 수 없었다.
도란은 달빛에 둘러싸여 은은하게 빛나는 아리엘을 응시하고 말문을 잃었다.
하지만 그녀의 연파랑색 눈동자에 불안이 깃드는 걸 보고 간신히 잊었던 언어를 되찾아냈다.
“아리엘...”
“.....”
“너 진짜 예쁘다...”
“....”
“정말 너무 예뻐. 이대로 앉혀두고 몇 날 며칠이고 감상하고 싶을 정도로. 지금껏 봐왔던 어느 예술 작품보다도 아름다워.”
자칫 입에 발린 사탕발림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도란에게는 일말의 가식조차 섞여 있지 않았다.
한 떨기 백합처럼 가련한 자태, 여성스러운 몸의 굴곡, 군살 하나 없이 매끈한 복부와 움푹 파여 묘한 애욕을 일으키는 배꼽, 수면의 푸른 잔물결이 일렁거리는 살결은 가히 환상적이었기에.
그녀의 물방울 맺힌 나신과 부끄러움에 붉게 물든 뺨은 너무나 사랑스러워 구전 속의 천사를 떠올리게 했다.
‘....’
도란의 말에 아리엘은 몸이 달아오르는 걸 자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서 외모 칭찬은 많이 들어봤다지만, 이번엔 뭐랄까.
달랐다.
아리엘은 가슴 한구석이 겪어본 적 없던 자긍심으로 뜨겁게 채워지는 걸 느꼈다. 만에 하나 도란이 자신의 벗은 몸을 마음에 안 들면 어쩌나 했던 불안감이 말끔하게 해소되는 것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후끈한 열감이 아랫배에서 태동했다.
다소 낯선 감각에 당황하기도 잠시, 아리엘은 자신이 뭘 해야 할지를 알았다.
아리엘은 천천히 손을 뻗어 도란의 옷가지를 벗겨나갔다.
그의 상의를 끌러낸 뒤로는 살짝 낯부끄럽게 웃고, 서로의 배를 맞대고, 입술을 맞췄다.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조금 길고 애틋한 키스가 끝난 뒤로는 서로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못 미더웠던 속옷이 갑갑하게 느껴진다. 이대로 한 발자국, 딱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가도 되지 않을까...?
아리엘이 서서히 손을 뻗었다. 물에 젖어 무거워진, 조금은 갑갑해 보이는 도란의 바지를 벗겨내려 했지만, 그런 그녀를 막아 세운 건 도란이었다.
의아하게, 또 조금은 탓하는 듯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자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조급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오늘은 같이 목욕하기로 했으니까. 아니면... 지금 방으로 갈래?”
“.....”
도리도리.
아리엘은 귀가 달아오르는 걸 자각하며 부그르르 수면 속으로 잠겨들었다.
*
촤라락. 얇은 커튼이 욕실 창문에 드리웠다.
어둠이 내려앉은 욕실에서 보이는 건 희미한 실루엣과, 공연이 끝난 후에도 희미한 잔열을 토해내는 조명처럼 스스로 빛나는 건 아닐까 싶은 하늘색 눈동자뿐.
사실 도란한테는 커튼을 치지 않는 편이 더 좋았지만, 앞으로 펼쳐질 일에 극심한 부끄러움을 느낀 아리엘이 요청한 것이다.
“그럼... 벗긴다...?”
“.....”
주륵...
도란이 욕실 의자에 앉은 아리엘의 치마를 붙잡았다. 파르스름한 나신의 윤곽만이 아른거리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손을 더듬어 앞둘레로 향하더니 엄지로 단추를 풀었다.
아리엘은 손으로 입가를 틀어막은 채 흡 하고 숨을 죽였다. 혹여나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오면 어쩌나. 자신의 소중한 부위에 근접한 도란의 손길을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이상한 감각이 저릿하게 올라왔기에.
아니, 목욕탕 안에서는 옷을 벗는 게 자연스러우니까.
그저 당연한 행위를 할 뿐이다.
그렇게 속으로 수도 없이 되뇌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자 애썼다.
젖은 천이 들러붙어 자아내는 물소리가 야릇하게 귓전에 와닿고, 그의 손길이 맨살을 스칠 때마다 섬뜩한 기운이 허리를 울리는 와중에도.
“...아리엘.”
“....”
“엉덩이 살짝 들어봐.”
“으, 으응.”
차박...
아리엘이 살며시 의자에서 골반을 들어올렸다. 치마에 고였던 물이 허벅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자 욕실 바닥에 작은 웅덩이가 생겨났다.
이에 도란은 한결 수월하게 아리엘의 하의를 벗겨나갔다.
순백색 치마가 늘씬한 종아리를 타고 빠져나오자 아리엘은 재빨리 무릎을 구부려 몸을 가렸다.
분명 속옷도 입고 있고, 도란은 아무것도 못 볼 텐데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하지만 곧 전방에서 그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리엘은 황급히 도란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말했다.
“아, 안 돼...! 속옷은...”
“...하지만 비누칠을 하려면..”
“그.. 그...! 거기까진 안 해줘도 돼...! 그, 그런 곳은 내가 할 테니까 나머지 부위만...”
“...알았어.”
도란은 피식 웃으며 아리엘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는 발치의 비누로 팔을 뻗더니 손바닥을 문질러 거품을 내며 말했다.
“물기는 충분하니까 바로 비누칠부터 할게. 혹시 뭔가 이상하거나 하면 바로 말해줘. ...어두워서 실수로 손이 엄한 데 갈 수도 있으니까 알아두고.”
“시, 실수 맞아?”
“.....”
“시, 실수 맞지...?”
“.....”
도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언제나처럼 선선하게 웃으며 충분히 거품을 낸 손을 아리엘의 매끈한 팔뚝에 가져다 댔다.
차박 차박, 맨살에 비누 거품이 문질러지는 소리가 적막한 욕실에 울려퍼졌다. 단단한 칼자루 탓에 투박해진 검사의 손이라기엔 도자기를 빚는 도공처럼 섬세하고, 애정이 흠씬 묻어나오는 손길을 맞이하고 있자니 아리엘은 가슴에 뜨거운 열기 한 점이 깃드는 것을 느꼈다.
더불어 코끝을 간질이는 비누의 시트러스 향 속에서 어렴풋이 풍기는 살 내음, 커튼 틈새 사이로 실낱처럼 드리운 빛줄기에 언뜻언뜻 내비치는 음영, 사랑하는 그가 내 몸을 정성껏 씻겨주고 있다는 상황은 묘한 정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야해.’
사실 아리엘은 전부 보고 있었다.
도란에게는 밝히지 않은 사실이지만, 안구에 마력을 집중하면 약간이나마 시야를 밝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때문에 캄캄한 암흑 속에서 손끝의 감각에만 의존해 비누칠을 이어나가는 도란과는 달리 아리엘은 욕실 내부의 풍경을 자못 선명하게 보고 있었다.
돌덩이처럼 단단하면서도 과장된 느낌 없이 압축된 그의 근육, 내 어깨로 손을 뻗을 때면 두드러지는 팔뚝의 핏줄, 이대로 뛰어들어 안기고 싶을 만치 넓은 가슴팍과 또 그의 바지를 뚫고 나올 것처럼 팽창한....
‘...저게 바로.’
느껴졌다.
그의 남성적인 신체 일부가 내 안으로 파고들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는 것을...
보금자리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아리엘은 순간 체온이 후끈 달아올랐다.
불판 위의 갑각류처럼 뺨이 익고, 숨이 거칠어졌다. 도란이 천천히 손을 놀릴 때면 전신에 소름이 돋고 찌릿한 전류가 몸을 내달렸다.
찰나, 그의 손가락이 움푹 파인 쇄골로 들어가자 아리엘은 섬뜩한 감각에 그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하지만 도란은 그런 그녀의 반응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혹시 아팠어?”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다행이네. 그럼 이제 다리 쪽도 비누칠해줄게.”
“....”
아리엘이 천천히 다리를 벌렸다.
도란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발끝부터 시작해 아리엘의 하반신을 천천히 타고 올랐다. 매끈한 종아리를 훑은 뒤에는 점점 더 위로. 그대로 허벅지 안쪽까지.
‘흣...!’
아리엘은 목 아래서 새어나오는 신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분명 단순히 청결을 위한 행위일 뿐이고, 혼자서 씻을 때면 수도 없이 만진 부위인데도 왜 그의 손이 닿으니 이렇게 오싹오싹한 기분이 드는 걸까.
혹시 이대로 끝까지 가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됐지만, 조금만 더 참으면...
휘이이잉...
“....!!”
찰나 아리엘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불시에 열린 창문으로 불어온 미풍이 커튼을 휘날리고 욕실 안에 밝은 달빛을 드리웠기에.
예상치 못한 변수에 당황한 아리엘이 핑글핑글 도는 눈으로 도란을 응시했으나 그는 꿋꿋히 다리에 비누칠을 이어나갈 뿐이다.
‘보, 보일까? 보이겠지...? 보이고 있을 텐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까.
설마 내 몸에 흥미를 잃은 걸까.
이렇게 된 거 다리를 조금, 아주 조금만 더 벌려볼까.
혹 너무 밝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너무 부끄러워...’
등등.
혼란에 빠진 아리엘이 몸을 움츠렸지만, 도란은 그저 목석처럼 묵묵히 비누칠에 열중할 뿐이다.
사실 그가 당장에라도 자신을 덮치고 싶다는 충동을 억제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는 건 모른 채.
스윽 스윽...
“...됐다.”
어느덧 조금 길고 애틋했던 시간이 지나고, 속옷 부위만을 제외한 전신에 비누칠을 마치자 도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도꼭지로 향했다.
이제 물로 거품을 씻어내기만 하면 될 터다.
한데 아리엘이 도란의 손목을 붙잡았다.
“....왜?”
“아, 아니 그... 나도 씻겨줄게!!”
“그렇다면 나야 고맙긴 하지만... 비눗기부터 닦아내는 편이 좋지 않아?”
“그... 괜찮아! 나는 조금 나중에 씻어도! 이, 이 비누 엄청 좋은 거라 피부에 오랫동안 남아있어도 되거든...! 모처럼 도란이 칠해준 거고!”
아니아니내가무슨소릴...!
횡설수설한 아리엘이 재빨리 말을 주워담으려 했지만, 도란은 그저 피식 웃고는
“그래, 그럼 부탁할게.”
아리엘 앞에 섰다.
아리엘은 꼴깍 침을 삼키며 도란을 올려다보았다.
늘씬한 기럭지를 보유한 그녀지만, 도란이 워낙 체구가 좋은 탓에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게 된다.
하물며 잔뜩 위축된 지금 이 상황으로서는...
아리엘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고는 그의 하반신을 가까이서 들여다봤다.
당장에라도 실밥이 터질 듯 부풀어오른 그의 바지를.
‘괴로워 보여...’
이대로 콕 찌르면 터지는 게 아닐까.
정말로 펑 하고 터지는 건 아닐까.
사실 아리엘이 도란에게 비누칠을 제안한 건 그에게도 똑같이 호의를 되돌려주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스펀지가 있으면 좋았겠지만 사실 더 좋은 걸 알고 있으니까.
스펀지 대신 직접 몸으로 밀착하고 비누 거품을 묻혀주며 반응을 볼 생각이었는데...
‘이대로 가다간...’
행위에 돌입하기도 전에 옷을 벗기자마자 덮쳐질 기세 아닌가.
늑대 앞에서 바들바들 떠는 토끼 신세가 따로 없다.
그것도 아주 먹음직스러운.
하지만 그렇다고 이미 내뱉은 말을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아리엘. 혹시 무리하고 있으면...”
“아, 아냐! 나 할 수 있어!!”
“.....”
“그, 그럼 벗긴다...?”
아리엘이 목청을 가다듬고는 손에 바짝 힘을 주었다. 떨리는 손길로 단추를 하나둘씩 풀어내고는 바지 윗단을 붙들고 그대로ㅡ
그대로.
그대로...
“......”
“.....”
그녀가 막 도란의 바지를 벗기려던 찰나, 문틈 사이로 욕실을 엿보던 푸른 눈동자와 마주쳤다.
덤으로 히죽히죽 올라간 어여쁜 입술도.
아리엘이 정전기 오른 오소리처럼 얼어붙자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라디가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다 이해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까...”
“그, 그건 안 돼!!!”
울상지은 아리엘이 황급히 달려가 라디의 입을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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