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3화 〉 첫사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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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첫사랑 #2
부그르르...
어찌어찌 비누칠을 마치고 욕조에 들어온 아리엘이 새빨간 얼굴로 수면에 잠겨들었다.
어찌나 안색이 붉은지 크리스마스 조명이 따로 없을 정도.
환하게 켜진 마석등 탓에 더 이상 욕실에 밝기를 더해도 곤란할 따름이었지만.
목욕의자에 걸터앉은 라디가 몸에 온수를 끼얹으며 쿡쿡 실소를 흘렸다.
“언니 지금 얼굴 엄청 빨개요. 꼭 수확 직전 사과처럼.”
“.....”
“설마 진짜로... 여기서 바로 하실 생각이었어요?”
“아, 아냐!!”
“그래요? 하지만 도란님은 의욕 만땅이셨던 것 같은데... 덮치기 직전이셨잖아요.”
라디가 마찬가지로 욕조에 들어가 있는 도란을 돌아보았다.
도란이 머쓱하게 뺨을 긁으며 말했다.
“덮치다니... 내가 얼마나 열심히 참았는데. 내 노력을 뭘로 보고...”
“하지만 옆에서 다 봤는걸요? 불끈불끈하는 거로도 모자라 스멀스멀 언니 뒤통수로 손을 뻗는걸. 그대로 조금만 더 놔뒀으면 아마 아리엘 언니는...”
“.....”
도란과 시선이 마주치자 아리엘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가 자신에게 욕정했다는 걸 깨닫자 묘한 기쁨이 아랫배에서 꿈틀거렸다는 사실은 비밀로 한 채.
라디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근데 도란님도 너무하셨어요. 훤히 다 보고 계셨으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하고. 언니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잖아요.”
“으응? 자,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그야 도란님도 밤눈이 밝은걸요? 안디라 신의 능력을 받았잖아요.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더 나은 수준이긴 하지만... 언니의 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계시던데.”
“뭐, 뭐?! 그, 그게 사실...”
아리엘이 정면에 앉은 도란을 쳐다보자
...끄덕.
도란이 마지못해 시인했다.
그렇다면 아까 사실은 처음부터 전부....
아리엘이 기묘한 신음성을 터트리며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자 도란이 욕조에 등을 젖히며 중얼거렸다.
“...들켰네.”
“어때요? 완전 범죄가 수포로 돌아간 소감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쥐구멍.... 그럼 들어오실래요?”
라디가 몸을 덮은 수건 아랫부분을 사알짝 들어올렸다.
뜨거운 온수가 또르르 흘러내리는 다리 사이로 무언가가 아주 잠깐 드러나고
불끈!
도란 쪽 수면에서 희미한 파문이 일었다.
아리엘이 시뻘겋다 못해 터질 듯한 얼굴을 가리며 외쳤다.
“라, 라디!! 그런 건 안 돼!!! 무슨 파렴치한...!!”
“네? 하지만 도란님은 이런 걸 좋아하는데요?”
“뭐, 뭐...?! 그, 그게 사실...”
핏발 선 눈동자랑 살짝 거친 콧김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도란이 시선을 피하고는 차마 부정은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아리엘의 심장이 철렁했다.
그렇다면...
‘나, 나도 언젠가 저렇게 노골적인 행동을...’
정말 내가 할 수 있을까.
아마 평생이 지나도 무리지 않을까.
도란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각오가 되어있지만, 역량 밖의 일조차 어찌할 수는 없는 것이다.
라디와의 까마득한 격차에 아리엘이 절망하고 있자니, 킥킥 귀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조바심내실 필요 없어요. 저도 처음엔 엄청 부끄러워했는걸요? 손잡는 것조차 수줍어하고 얼굴도 제대로 못 볼 정도로.”
“...정말?”
“네. 도란님을 만나기 전까진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숫처녀였는데~ 첫 키스 한 날 저를 홀딱 벗겨 놓고 제 꼬리도 만지고 이것저것 다 하더니 마지막엔 기절한 절 가지고...”
“크, 크흠....”
도란이 헛기침하며 라디의 말을 끊었다.
라디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욕조로 다가와 도란의 뺨을 쿡 찔렀다.
“...부끄럽긴 한가 봐? 오빠.”
“그야... 아, 아니 그때는 그래도 쌍방이었잖아...! 꼭 나만 밝힌 것처럼...”
“뭐야, 그럼 앞으로 꼬리 안 내준다?”
“...잘못했습니다.”
“응!”
라디가 환히 웃더니 탕 안으로 들어왔다.
풍덩!
“후으...”
라디는 온수에 몸을 담그고 아슬아슬하게 몸을 가리던 수건을 벗어내더니 희미하게 탄식하며 말했다.
“목욕이라... 좋네요. 이 좋은 걸 모르고 살았다니... 아마 도란님하고 언니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평생 몰랐겠죠?”
“...그래? 하지만 요즘은 대중 목욕탕도 슬슬 들어서는 추세 아냐...? 최근 수도 시설도 발전되서 개인 욕조가 딸린 주택도 늘어나는 분위기고...”
“으음 그건 그렇지만... 제가 살던 곳은 워낙 작은 마을이라 그런 게 없었거든요. 우물가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로 씻는 게 고작이었어요. 집도 없어서 매일 여관방을 전전하던 신세였고요. 저축한 돈이 있으니 마음만 먹었더라면 집을 구할 수 있었을 테지만 뭔가...”
라디가 도란을 올려다보더니 살며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포근하게 미소지었다.
“...이제야 정착할 곳을 찾았다는 느낌이에요.”
“그렇구나...”
나도 그 마음 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니까.
아리엘은 투명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함께 수차례 역경을 딛고, 자칫 연적이 될 수도 있었던 날 그대로 받아들여 주고, 내가 좋아하는 남자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주는 동생이 사랑스럽지 않을 리 없으니까.
아리엘은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지는 걸 느끼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지나친 사치는 지양하는 탓에 그녀조차 생소한 고급 입욕제, 분위기를 낸다고 띄워둔 붉은 꽃잎, 은은한 향초가 자아내는 방향에 취해.
영지를 떠나오고 수년. 그간 아픈 환자들을 돌보며 얻는 보람으로 버텨왔지만, 외딴 타지에서 홀로 밤하늘을 올려보는 날이면 얼마나 외로웠던가.
하지만 이젠 서로 슬픔을 덜어주고, 행복을 공유할 동반자가 생겼다.
그것도 둘이나.
아리엘은 창문 너머로 휘황한 별과 달을 올려다보며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었다.
하지만 도란과 라디는 어떻게 알고 다가와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부드럽게...
꽈악...!
“....?”
다소 강한 악력에 아리엘이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어쩐지 꿍꿍이 다분한 안색의 라디와 도란이 보였다.
라디가 입을 열었다.
“드디어 잡았네요. 후후...”
“그래, 드디어 잡았어. 흐흐...”
“.....?”
어쩐지 불온한 분위기에 아리엘이 흠칫 물러나려던 찰나 도란이 소리쳤다.
“지금까지 맨날 도망 다니기만 하고! 오늘이야말로 기필코 어디 가문인지 듣고 말겠어!! 라디 부사관!!”
“네! 도란 장교님!! 꽉 붙들고 계세요! 제가 직접 심문하겠습니다!!”
“그, 그게 무슨...?! 히, 히익?!!”
아리엘이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움찔했다. 자그마한 손이 불쑥 수면 아래로 기어들어온 까닭.
예고 없이 난입한 라디의 손은 아리엘의 허리를 매만지더니 그대로 매끈한 복부를 타고 올라...
출렁!
“오오... 도란님 이거 장난 아닌데요? 꼭 마시멜로처럼 부드럽고.. 탄력도 완전 저세상 탄력이에요!”
“...보고 있다. 계속해.”
“참... 도란님은 복 받은 사람이네요. 이런 걸 독차지하다니...”
출렁출렁!
아리엘이 순식간에 한계치까지 얼굴을 붉히고 소리쳤다.
“라, 라디야!! 안 돼!! 이, 이런 건...!”
“...아무래도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하신 모양이네요. 도란님.”
“그래, 내가 집도한다.”
“도, 도란...?”
이번엔 라디가 뒤에서 붙잡고 도란이 앞으로 다가왔다.
아리엘이 꿀꺽 침을 삼키며 올려다보자 도란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위? 아니면 아래?”
“....?”
“위인지 아래인지 골라.”
“뭐, 뭘 고르는 건데...?”
“.....”
이에 도란과 라디는 눈을 마주치고 씨익 웃더니
““당연히 어딜 괴롭혀줬으면 좋겠는지 말이지.”죠.”
“뭐, 뭐어?!”
“오 초 안에 안 고르면 내가 임의로 정한다. 5... 4...”
“위...! 위로 할게!!”
아무리 그래도 아래보단...!
생각을 거치지 않고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아리엘도 스스로 놀랐지만, 도란은 그저 실실 웃더니
“좋아, 솔직하게 이야기했으니 선물이야. 양쪽 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건데!!!”
아리엘이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도란은 과장스럽게 손을 쪼물딱거리며 서서히 다가올 뿐.
아리엘이 다급하게 외쳤다.
“말할게!! 아니, 말할게요!!”
“......”
“말한다고!! 진짜로!!!”
“....”
아리엘이 옴짝달싹 못 하는 사이 도란의 손은 착실하게 거리를 좁혀왔다.
이대로 가다간 그녀는 소중한 부위를 마음껏 희롱당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단 몇 센티만을 남겨두고 아리엘은 질끈 눈을 감더니
“후작!! 나 후작이야!!! 이제 됐어?!!”
절박한 통곡성이 욕실에 울려퍼졌다.
도란과 라디는 잠시 멀뚱히 서로를 쳐다보고는...
““후, 후작?!!””
기겁하며 물러났다.
아리엘이 자유를 되찾은 팔로 두 다리를 끌어안은 채 씨근거리자 라디가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후작이면... 왕가의 혈통이 섞였다는 칠공작 바로 아래 계급인데...”
“후, 후작이면 엄청 대단한 거 아냐...? 초대형 영지를 몇 개씩이나 거느리는 귀족 아니었어...? 오등작 중 두 번째 작위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
라디가 신음하더니 진땀을 뻘뻘 흘리며 물었다.
“저... 아리엘 언니...? 아, 아니.. 레이디 아리엘 님...? 저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가문명을 여쭤볼 수...”
“....라”
“...네?”
“에르티넬라...”
“.....”
...딸꾹.
라디의 입에서 딸국질이 새어나왔다.
도란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아연실색한 라디가 바들바들 떨면서 말했다.
“에르티넬라 변경백... 비스마르크 왕국의 서쪽 국경 일대를 다스리는 엄청난 대귀족이에요... 후작이지만 공작 가문에도 당당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을 정도의 그런... 칠공작과 함께 묶여서 비스마르크 8대 대귀족이라고 불리는...”
“그, 그럼... 그게 아리엘의 아버지라고...?”
덤으로 장인어른 될 사람이고.
도란이 꺽꺽거리며 현실을 도피했다. 현대 지구에서는 귀족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이 많이 퇴색되었지만, 그는 그간 이 세계에서 구르면서 보고 들은 게 있으니까.
알기 쉬운 비유로 따지자면 막 입대한 이등병이 여자친구를 사귀었는데 알고 보니 여자친구 아버지가 포스타더라~ 와 같은 상황인 것이다.
잠시 혼돈의 카오스가 욕실에 도래하고, 조금 이성을 되찾은 라디가 뺨을 긁으며 말했다.
“아니... 설마설마 아리엘 언니가 후작가 영애셨을 줄은... 귀족이라고는 해도 당연히 남작이거나 자작, 정말 정말 만에 하나라도 백작가 영애이실 줄 알았는데...”
“...니야.”
“네...?”
“영애 아니야...! 나도 엄연한 후작이라고! 우리 쪽은 공동 작위라 나 말고 내 언니들도 전부 후작이란 말야! 당연히 계승권은 남동생이 가지고 있지만...”
그 말은 즉...
““아, 아리엘 후작님...?””
“....알면 잘 해.”
““몰라뵈었습니다!!””
도란과 라디가 욕조물에 머리를 박았다. 광활한 국경 지역을 통치하는 후작 가문의 딸인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이젠 아예 후작 그 자체라고 하신다.
이 세계에는 성별보단 마력의 여하에 따라 사회 진출이 갈리는 만큼 여성의 몸으로도 작위를 가진 귀족이 드문 건 아니지만...
‘아무리 영지 통치권은 남동생이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말 한마디면 나와 라디를 불경죄로 처형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근데 방금 전까지 그런 고귀한 몸을 떡 주무르듯 만져댔으니!
도란이 라디와 함께 혼신의 알몸 도게자를 하고 있자니 톡톡 등을 건드리는 기척이 전해져왔다.
재빨리 수면 위로 고개를 들고 푸핫 숨을 들이마시자 새침하게 볼을 부풀린 아리엘이 눈에 들어왔다.
“흥...! 내가 왜 지금까지 안 밝혔는지 알겠지? 이렇게 호들갑 떨게 분명한데 누가 말하고 싶겠어.”
“아니 그것도 그렇긴 한데...”
솔직히 좀 꼴리는뎁쇼?
고귀한 혈통의 소녀를 이리저리 물들여간다고 생각하니...
“으, 으응...?! 도란 눈빛이 좀...”
“기분 탓이야. ...근데 그럼 풀네임을 어떻게 불러야 하지...? 아리엘 에르티넬라? 에르티넬라 아리엘...”
“아리엘 데 에르티넬라가 맞아요. ‘데’가 ‘~의’라는 뜻이니 에르티넬라 영지의 아리엘이란 뜻이 되는 거죠.”
“오... 신기하네... 그렇다면 내가 아리엘하고 결혼하면 나도 도란 데 에르티넬라가 되는 건가?”
“음... 아무래도 그렇죠? 아무래도 언니 쪽 계급이 더 높으니까요. 물론 세습되지 않고 1대에 그치는 성씨지만요.”
“에르티넬라라...”
어쩐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도란이 슬쩍 아리엘을 쳐다보자 그녀가 어색하게나마 미소짓더니 장난스러운 어조를 가장해 말했다.
“으, 응.. 설마 비스마르크 왕국의 후작을 건드려 놓고 내뺄 건 아니겠지? 너 이제 나 끝까지 책임져 줘야 해. 안 그러면 둘 다 처형할 거야.”
“.....”
내용은 다소 강압적이었지만.
도란은 라디와 잠시 시선을 마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러면... 한시라도 빨리 기정사실로 만들어야겠네.”
“응! 으...? 읏...?! 뭐?! 잠깐만...!”
천천히 아리엘에게 다가갔다.
본방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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