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7화 〉 검은 토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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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검은 토끼 #1
기분 좋은 고양감에 젖은 채 잠에서 깨어났다.
창밖에서 흘러들어오는 따사로운 햇볕을 맞으며 몸을 일으키자 옆에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천천히 고개를 내리니 내 팔뚝을 끌어안고 새근새근 곯아떨어진 아리엘이 보였다.
“.....”
사랑해 마지않는 그녀에게 가볍게 키스하고 일어났다.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고 침실을 나서자 안면 가득 선선한 공기가 느껴졌다.
층계를 내려와 간단한 세수와 양치를 마친 뒤 어디선가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쫓다 보니 나는 어느새 부엌에 다다라 있었다.
고개를 내밀어 슬쩍 엿보자 그곳엔 라디가 한창 식자재를 손질하고 있었다.
불현듯 그녀가 고개를 들더니 해사하게 미소지으며 맞이해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도란님?”
“라디야...”
등 뒤로 다가가 부드럽게 끌어안자 라디가 슬쩍 내 뺨을 꼬집었다.
“어휴... 아주 몸 전체에서 언니 냄새가 폴폴 진동해요.”
“...그래?”
“네, 아주 잔뜩 마킹해놨나 본데요? 냄새만 맡아도 알겠어요.”
“.....”
연인을 두고 다른 연인과 하룻밤을 함께했다는 다소 난해한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자니 녀석이 날 끌어안았다.
라디가 앞머리를 쓸어주며 속삭였다.
“눈치 볼 필요 없어요. 이제 저희 둘 다 도란님의 여자잖아요. 그래도 정 미안하면 그만큼 더욱 애정으로 보답해 주면 되는 거예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죠?”
“...당연하지.”
강하게 끌어안아 키스했다.
잠시간 서로 따스한 체온을 나눈 후, 라디가 천천히 까치발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땠어요?”
“...뭐가.”
“언니 말이에요. 부끄러움도 많이 타고 했을 텐데.”
“음...”
솔직하게 대답했다.
“...엄청 야했어.”
“....”
라디는 그것만으로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더니, 다시금 도마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오늘 밤이 기대되네요. 이제부턴 항상 셋이서 같이 자게 될 텐데 괴롭히는 재미가 쏠쏠하겠어요. 안 그래요?”
“...너도 예전에 나한테 많이 당하지 않았냐.”
“그래서 더 재밌는 거죠. ...아침 드실 거예요?”
“응, 근데 아직 아리엘이 자고 있어서...”
“조금 더 기다려보고 안 일어나면 저희끼리 먼저 먹어요. 몹시 피곤할 테니 아마 오후 때까지는 계속 잘 거 같은데... 근데 도란님 오늘 약속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약속?”
“니아 님 만나러 가기로 했...”
아.
“젠장!! 지금 몇 시야?!!”
“음... 아까 교회 종이 열한 번 울렸으니까 분명 정오 조금 안 됐을 거예요.”
“염병!!!”
황급히 부엌을 뛰쳐나갔다.
욕실로 달려가 상의를 내팽개치고 대충 바가지로 물만 끼얹은 뒤 머리를 말릴 새도 없이 옷방으로 달려갔다.
근처에 걸린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훔치고 폭풍 같은 기세로 옷을 갈아입자 초조함에 시야가 좁아졌다.
이후 현관으로 튀어가 우산꽂이에 놓인 장검을 허리춤에 매달며 외쳤다.
“라디야!! 투구!!”
“네?”
“여기 있던 투구 못 봤어?!”
“...어제 나갔다가 안 가지고 들어오셨어요. 온종일 맨얼굴로 돌아다니셔놓고 그새 잊으신 거예요?”
“아... 젠장... 아카이아 길드에 두고 왔지...”
눈가를 짚으며 침음하자 라디가 보자기에 감싼 무언가를 건네왔다.
“...이건?”
“아침이에요. 이런 일도 있을 거 같아서 미리 만들어뒀어요.”
“고마워...”
충동적으로 녀석을 부둥켜안고 뽀뽀 세례를 퍼부어주려던 찰나, 층계 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라디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아리엘이 잠옷 차림으로 비몽사몽 난간을 짚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가 눈가를 비비며 다가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도란... 어디 가...?”
“아... 응, 오늘 니아 님한테 도시를 안내해주기로 약속해서.. 괜히 마중 나오지 않아도 되는데... 몸은 좀 어때?”
“아, 으응....”
아리엘이 슬쩍 하복부를 매만지더니 달그레 뺨을 붉히며 말했다.
“살짝 아프긴 한데... 괜찮아. 푹 쉬고 나면 나을 거야.”
“치유의 힘으로 회복하는 건...”
“...그랬다간 다음번에 또 아플걸? 구급함에 진통제가 있으니까 그거 먹고 자려고. 어제 잠을 한숨도 못 자서...”
“그래, 푹 쉬어. 혹시 뭐 필요한 거 없어? 먹고 싶은 거라던가...”
“으음...”
아리엘이 뺨을 매만지며 고민하더니 이내 슬쩍 날 끌어안으며 응석을 부렸다.
“신 거. 신 음식이 먹고 싶어.”
“신 거라... 알겠어. 라디 너는?”
“저도 오랜만에 신 과일이 땅기네요. 도란님은 몇 시쯤 돌아오실 예정이세요?”
“음... 아마 해가 지기 전엔 돌아오지 않을까 싶은데... 내가 원하는 데로 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네, 그럼 무리하지 마세요. 몸 조심히 잘 다녀오시고 항상 사람 조심하는 거 잊지 마시고요.”
“그래, 니아도 있는데 별일 없겠지. 저택에 개미 몇 마리 풀어둘 테니까 너희야말로 조심해.”
“네, 알겠어요.”
“그럼 잘 다녀와 그... 서방님?”
“.....”
아리엘의 머리를 격하게 쓰다듬어준 뒤 그녀들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 현관을 나섰다.
연못가에서 퐁당퐁당 물장구를 치며 손을 흔드는 란이에게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어 작별한 뒤 돌길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비록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는 못했지만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하다.
아마 정신적 충족감이 수면의 질에 영향을 미친 거겠지.
나는 은은하게 미소지으며 한낮의 따스한 햇살이 드리운 정원을 지나 대문을 열고 나왔다.
하지만 곧바로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이건 또 뭐야.”
“나, 나왔다!! 도란 씨! 취재 대행 길드에서 나왔습니다!! 잠시 인터뷰 가능할까요?!!”
“비켜! 우린 어젯밤부터 기다렸다고!! 도란 씨!! 니아 양과 교제하고 있다는 게 사실인가요?!!”
“심지어 니아 양 외에도 연인이 두 명이나 더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무려 전 아가사 신전의 사제로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
“베라스틴 남쪽 호수에서 벌어졌던 정령 소동에 도란 씨가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당시 폭주한 정령을 제압했던 인물과 도란 씨의 인상착의가 비슷하다는 제보가 잇따르고 있어요! 한 말씀 해주시죠!”
“혹시 검은 머리인 것과 니아 양이 관련 있습니까?!”
“잘생겼어요!!!”
“.....”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하루 만에 주거지마저 들통난 모양. 금방 찾아낼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빠를 줄이야.
천천히 철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우자 기자들이 득달같이 달라붙었다.
“도란 씨 취재에 협조 부탁드립니다!! 기왕이면 저의 길드 응접실에서...!”
“꺼져 이 사람아! 우리가 먼저라고!! 도란 씨 부디...”
“하룻밤 만에 화제의 중심에 선 기분은 어떻습니까?!!”
“......”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군상들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고했다.
“꺼져.”
“예...?”
“두 번 다신 내 집 앞에 찾아오지 마. 무단침입죄로 영주성에 싹 다 고발하기 전에. 여기 다 사유지인 거 몰라?”
“하, 하지만... 도란 씨가 조금만 협조를 해주신다면 저희는...”
“...경고했다.”
“그, 그럼 딱 한 질문만이라도... 커흑?!”
쾅!!!
부주의하게 접근해오는 한 기자의 멱살을 붙들고 철문에 처박자 난폭한 소음이 울려퍼졌다.
나는 잔뜩 겁에 질린 그의 턱 밑에 단도를 들이대며 서늘한 흑안으로 노려보았다.
“...두 번은 없다.”
“으, 으윽...”
“알아들었어?”
끄덕끄덕!!
“.....”
차차 손아귀에서 힘을 풀었다.
매정하게 발길을 돌려 망부석처럼 굳어버린 인파를 제치고 오솔길 너머로 향하자 잠시 후 등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음이 들려왔다.
조금 심했나 싶어 살짝 마음에 걸리기도 하지만 이렇게 딱 잘라 말해야 나중에 귀찮은 일이 줄어들 거다.
저택에는 나뿐만 아니라 라디, 아리엘, 란이까지 있으니까.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조심조심 뒤따라오는 기자들을 무시하며 걷자 곧 대로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건 겨우 시작에 불과했나 보다.
“앗...! 저, 저 사람은...!”
“아카이아 길드의 도란이다!!”
“그냥 비슷한 사람 아니야...?”
“그럴 리가!! 저 키에 외모! 흑발...! 틀림없어!! 게다가 기자들까지 잔뜩 몰려있잖아! 니아 님을 만나러 가는 걸까...?”
“검은 머리라... 난 대체 저 청년의 어디가 좋다는 건지 모르겠군.”
사방에서 행인의 이목이 몰려들었다.
개중에는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의외로 호의적인 눈빛이나 선망의 시선을 보내오는 사람도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
‘...아니,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소식이 빨라?’
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모험가 길드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내용으로 뒤늦게 전해듣는 게 고작이었는데.
최대한 전방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잰걸음으로 앞길을 재촉하던 중, 문뜩 주변을 곁눈질하자 광장 구석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소년들이 보였다.
나는 잠시 발걸음을 늦추고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이야... 이게 사실이면 엄청나네.. 붉은 매 길드원 중 한 명이 이곳에 와 있다는 거 아냐. 그렇다면 혹시 나중에 다른 길드원도 베라스틴에 방문하지 않을까?”
“아서라, 아무리 그래도 다른 길드원은 무리지. 듣자 하니 지금 메다올리눔 던전에서 계층 공략 중이라는데.”
“그럼 니아 님은 왜 여기 있는데?”
“남자친구 만나러 나왔대잖아. 휴가겠지.”
“와... 진짜 부럽다. 대체 이 사람은 얼마나 능력이 좋길래 니아 님을...”
“...저기요.”
“앗! 깜짝이야!!”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자 소년이 화들짝 놀라며 손아귀에 쥐고 있던 종이를 떨어뜨렸다.
내 발치로 데굴데굴 굴러온 인쇄물을 주워 눈대중으로 훑자...
“이건... 나잖아?”
질 낮은 싸구려 종이 한복판에는 나와 니아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판화로 찍혀 있었다.
조금 주의를 기울여서 활자를 읽어나가자 심심찮은 내용이 엿보였다.
속보! 붉은 매 길드의 전위 니아 양. 갑작스러운 베라스틴 방문?!
니아 양이 베라스틴에 방문한 이유는 약혼 상대 때문인 걸로 밝혀져 충격!
소문의 검은 머리 남성, 흑마법사 길드 ‘우리 일원 아니다’ 일축.
붉은 매 길드가 던전 공략에 차질을 빚고 있다는 증거 세 가지.
최근 베라스틴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종 사건에 대하여.
남자의 정력을 대폭 증강시킬 수 있는 신비의 약초 발견?!
“....그냥 찌라시잖아.”
뒷면을 넘겨보니 이 외에도 수많은 허위 정보와 광고가 빼곡한 글씨로 인쇄되어 있었다.
종이를 손등으로 툭툭 두드리며 물었다.
“...저기요, 이거 어디서 났어요?”
“아... 앗...”
소년들은 어벙하게 입가를 뻐끔거리면서도 손가락을 들어 내 얼굴을 가리켰다.
“그... 그... 아카이아 길드의 도란...!!”
“니아 남친...!!”
“...그건 됐고 이거 어디서 났냐고요.”
한 소년이 새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요 앞에서 샀어요! 신문사 길드들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앞다투어 팔고 있거든요! 저거 보세요!!”
“호외요 호외!! 따끈따끈한 신문 팝니다! 도란에 대한 정보 다수 수록!”
“......”
고개를 돌려보니 정말로 한 꼬맹이가 바구니에 신문을 가득 담은 채 이리저리 가도를 쏘다니고 있었다.
요즘 들어 종이 가격이 많이 싸졌다더니만 이젠 신문 같은 것도 발행하는 모양.
눈가를 짚으며 침음하자 소년들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저... 도란 형...?”
“...왜요.”
“저, 정말로 니아 님과 약혼한 사이에요...?”
“혹시 같이 잤어요?!”
“.....”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약혼은 개뿔. 그런 사이 아냐.”
쫘악! 쫙!!
“앗...!”
눈앞에서 종이를 찢자 소년이 허망한 표정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나는 그들이 무어라 더 묻기 전에 재빨리 발을 놀려 자리를 벗어났다.
니아와 만나기로 약속했던 시간은 정오. 조금 늦긴 했지만 서두르면 어찌어찌 시간 안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다.
한데 북쪽 가도를 따라 달리는 내 시야 언저리로 좀전의 인쇄물을 들여다보며 수군거리는 행인이 여럿 눈에 띄었다.
‘...생각보다 파급력이 훨씬 큰데.’
며칠 소란스럽고 말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니아가 던전으로 돌아가는 시기에 맞춰 잠잠해질 때까지 베라스틴 밖으로 떠나있어야 하나.
하지만...
“...이 불안감은 뭐지.”
혹시 나중에 니아보다 더 큰 거물이 찾아오는 건 아니겠지...?
순간, 던전에서 잃어버렸던 모험가 패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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