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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248화 (248/375)

〈 248화 〉 검은 토끼 #2

* * *

[248] 검은 토끼 #2

“허억... 헉... 조금 더 빨리 안 돼요..?”

“죄송합니다 손님... 이게 최고 속력입니다.”

“제길...”

서서히 상승하는 호텔 승강기가 너무나 더디게 느껴졌다.

급하게 달려온 탓에 머리칼은 흐트러졌고, 심장은 터질 듯 빠르게 요동친다.

셔츠 역시 땀에 흠뻑 젖어버렸지만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

“젠장... 화났으면 어떡하지...”

약속했던 정오는 이미 지난 지 오래. 호텔로 오는 도중 몰려드는 인파에 발이 묶인 까닭이다.

약속을 못 지킨 것도 문제지만 상대가 상대다 보니 자꾸만 초조해진다.

A랭크인 걸로도 모자라 잃어버린 탄피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물이니.

혹여나 나를 찾겠다고 베라스틴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고를 친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해진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발을 구르고 있자니 머잖아 승강기가 멈춰섰고, 나는 차임벨이 울리기도 전에 박차고 나가 문을 두드렸다.

“니아 님! 저 왔어요!!”

­.....

“니아 님...!! 문 좀 열어주세요!!”

문고리를 쥐고 거세게 흔들어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설마 그새를 못 참고 외출한 건가?

“니아...!”

­끼이이익...

참담한 심정으로 외치던 도중, 다행히 문이 열리고 익숙한 금발 수인 꼬맹이가 비몽사몽 고개를 내밀었다.

“우음... 무슨 일이더냐아... 본좌의 달콤한 수면 시간을 방해하다니... 그 죄는 목숨으로 달게 받을...”

“니아 님, 저에요 저! 다행이다 아직 자고 계셨구나... 전 또 계속 기다리셨을 줄 알고 걱정했죠. ...그리고 원래 말투 나왔어요.”

“....헛?!”

니아는 졸린 눈을 비비다가 우뚝 정지하더니 뜨악 입을 벌리고 쾅! 문을 닫았다.

잠시 후,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 니아는 부스스하던 머리칼이 반짝반짝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와, 왔어? 어흠... 빨리 왔네?”

“약속 시간이 정오인데 빨리 오기는 무슨... 그리고 저랑 있을 때는 편하게 계셔도 돼요. 억지로 말투 꾸며낼 필요 없...”

“아, 안 그랬어!”

“하지만 방금...”

“아니야!!”

“.....”

뭐 그럼 그런 걸로 치자고.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이 시간까지 주무시고...”

“으응... 그저께 밤을 새워서 베라스틴까지 달려왔으니까... 원래 잠이 많은 편이기도 하고...”

“...그런가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미소지었다.

걱정이 기우였다는 걸 깨닫자 살짝 허탈했지만 그녀를 홀로 바람맞히는 것보단 훨 낫다.

나는 안도하며 니아를 따라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도중에 화들짝 놀라며 질끈 눈을 감았지만.

“니, 니아 님!!”

“우음... 왜 또 갑자기 소리를...”

“옷을 안 입으셨어요!!!”

“응...? 앗...! 냣?!”

니아는 그제야 고개를 숙이고 꼬리 쪽을 둘러보더니 본인이 얇은 속옷 차림이라는 걸 자각하고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벼락같은 속도로 침실을 향해 뛰어가자 방문 너머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어제 봤던 숏팬츠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온 니아는 누가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소년.”

“.....”

“잊어.”

“...네.”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면 강제로 기억을 소거시킬 기세였기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상기된 뺨을 진정시키며 읊조렸다.

“정말... 갑자기 찾아오면 어쩌자는 거야.”

“그렇게 말씀하셔도... 오늘 정오에 보자고 한 건 니아 님이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숙녀가 거처하는 곳에 찾아올 거면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지!”

“...죄송해요.”

“응? 아, 아니 진짜로 사과하면 내가 더 미...”

순간, 니아가 입을 다물었다.

눈 깜짝할 사이, 그녀는 내 지척에 도달해 셔츠를 붙잡고 냄새를 맡았다.

시간이 얼어붙고,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땐 황금색 눈동자에 오싹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한겨울 석빙고처럼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소년.”

“어... 예?”

“여자 냄새가 짙어졌네? 그것도 엄청.”

“.....”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천천히 발을 뒤로 물리자­

“어제 대체 뭐한 거야!!!”

“아, 아니...”

“대답해 소년!!”

“어, 어째서 제가 추궁받는 입장이 되는 건데요!?!”

황급히 따지고 들었지만,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그녀를 떨쳐낼 순 없었다.

나는 벽에 몰린 채로 두 손바닥을 들어 필사적으로 그녀를 진정시켰다.

“이, 일단 흥분 좀 가라앉히세요!!”

“나 완전 차분해!!”

“말로만 그러지 말고!!”

“빨리 설명이나 해!!!”

“아니 그게...! 하 진짜... 제가 두 번째 여자가 생겼다는 건 이미 말씀드렸죠?”

“응.”

“그, 근데 어제 관계에 좀 진전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됐어요.”

“과, 관계에 진전이 있었다면 설마...”

“...니아 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맞을 거예요.”

“.....”

니아는 충격을 받은 듯 입을 쩍 벌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까득 손톱을 깨물고는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발 늦었네.”

“네?”

“응? 왜 소년?”

“아니 방금 ‘늦었다’고...”

“웅? 소년이 잘못 들은 거 아냐?”

“.....”

그럴 리가.

하지만 더 캐물었다간 무언가 험한 꼴을 당하고 말 거라는 직감이 들어 적당히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숙소에만 있는 건 싫죠? 혹시 오늘 뭐 특별히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요?”

“하고 싶은 거? 글쎄... 딱히 생각해둔 건 없는데... 난 소년이랑 같이 돌아다닐 수만 있으면 다 좋아!”

“...그럼 일단 밖으로 나가죠. 오늘은 도시 안내를 위주로 돌아다니면 될 것 같아요. 기왕 비싼 숙소에 묵은 거 호텔 부지를 구경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요. 공원처럼 되게 잘 꾸며놨던데.”

호텔을 벗어난 뒤로는 북쪽 거리를 탐방하다가 적당히 시장이라도 들러서 군것질하면 되겠지. 아니면 저번처럼 공연장을 찾아서 관람하거나.

막상 나도 이렇게 느긋이 베라스틴을 둘러보는 건 처음이라 살짝 들뜨기 시작했다.

­철컥!

열쇠를 챙기고 객실을 나섰다. 승강기를 타고 1층에 도착한 뒤로는 통유리 복도를 지나 호텔 건물을 벗어나자 아름답게 가꾸어진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투명한 샘물이 샘솟는 석제 분수대에는 귀부인들이 모여 한가로이 담소를 나눴고, 벤치에는 중절모를 쓴 신사들이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열띤 정치 토론을 벌이는 중이었다.

고급스러운 의복이나 표정에서 묻어나오는 여유로움과는 별개로, 나와 니아를 보고도 살짝 눈길을 주었을 뿐 놀라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들의 생활 수준을 엿볼 수 있었다.

저들 중에는 분명 영지를 소유한 귀족이거나 개인 상단을 거느린 대상인도 있겠지.

아무리 그래도 후작인 아리엘보다 높은 작위의 귀족은 없을 테지만.

‘...여긴 완전히 별천지네.’

나비를 쫓는 아이처럼 꼬리를 살랑거리며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는 니아와 정원을 거닐다 보니 고즈넉한 산책로가 나왔다.

그렇게 푸르른 나뭇잎 사이로 드리우는 햇살을 맞으며 한적한 돌길을 나아가던 도중...

­따끔!

“....?”

희미한 위화감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순간 무슨 짓을 했나 싶어 의아하게 옆을 돌아보아도 니아는 고양잇과 수인답게 나무 위에 내려앉은 비둘기를 노려보는 데 몰두할 뿐, 평소와 다른 점은 찾지 못했다.

그녀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속삭였다.

“...니아 님, 혹시 이상한 느낌 안 들어요?”

“이상한 느낌? 뭐 말이야?”

“아니 그...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는데 누군가가 쳐다본다던가 그런 거요.”

“으음? 글쎄 난 못 느꼈는데...?”

“그런가.... 뭐, 니아 님이 아니라면 아닌 거겠죠. 제가 좀 예민했나... 어?”

말을 하던 도중, 덤불 속 새빨간 홍채와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오싹한 감각에 단도를 움켜쥐고 침착하게 눈동자의 정체를 확인하자...

“...뭐야, 토끼잖아? 왜 이런 장소에 토끼가...”

그곳엔 새카만 털을 지닌 토끼 한 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다.

니아가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으음... 내가 기척을 놓치다니 별일이네... 아마 여기서 기르는 게 아닐까? 어제 테라스에서 봤는데 공원 구석에 동물이 잔뜩 모여있는 걸 봤어!”

“여기에 그런 시설도 있어요? 그건 좀 보고 싶은데...”

“응, 그럼 같이 가자!! 완전히 처음 보는 동물도 있었어! 누리끼리한 당나귀처럼 생겼는데 등에 커다란 혹이 두 개나 있더라고! 믿어져?!”

“그건 또 무슨...”

설마 낙타를 말하는 건가?

나는 놀라지 않도록 서서히 토끼에게 접근했다. 녀석은 내가 다가오는 걸 빤히 바라보면서도 풀떼기만 우물거릴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토끼를 배 아래부터 부드럽게 감싸 들어올리자 예상과는 달리 다소 이질적인 털의 감촉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얌전한 걸 보니 정말로 이곳에서 사육하던 토끼가 맞는 모양이에요. 얘는 저희가 다시 데려다주죠.”

“그래! 그런데 신기하다.. 내가 동물을 붙잡으려고 하면 늘 도망가기 바쁘던데.”

“그야 니아 님은 표범 수인이니까 그런...!”

­파바박!!

찰나, 니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토끼가 발버둥을 쳐 얼른 부둥켜안았다.

나는 살짝 그녀와 거리를 벌리며 말했다.

“...니아 님이 무서운가 봐요. 아마 귀랑 꼬리를 보고 경계하는 것 같은데... 아니, 그렇게 군침을 흘리고 있으면 누구나 다 도망가죠.”

“우음? 하지만... 궁둥이가 토실토실해서 맛있어 보인단 말야~! 얘 그냥 우리가 확 잡아먹을까?”

“무서운 소리 하지 마세요.”

토끼를 안아 든 채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느긋하게 정원을 가로지르다 보니 자그마한 갈림길이 나와 우리는 동물원이라고 적힌 팻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조금 더 걷자 정말 울타리로 가로막힌 구역이 나왔다.

한데 입구 쪽으로 다가가니 흙 묻은 작업복을 입은 남성이 헐레벌떡 달려와 머리를 숙이며 외쳤다.

“다, 당신들은...! 붉은 매 길드의 니아 님과 소문의 재벌 2세 난봉꾼 망나니 도란 님이 아니십니까?! 누추하신 분들... 아, 아니!! 귀하신 분이 이런 누추한 곳에는 어쩐 일로...”

“....”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와전됐나.

망연자실하게 하늘을 쳐다보며 현실을 도피하자 니아가 발랄하게 외쳤다.

“응! 동물을 보러 왔어!”

“아...”

남자가 난처하게 식은땀을 흘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명백하게 곤란해하는 눈치였기에 나는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 아닙니다!! 문제라고 할 건...”

“...그냥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괜찮으니까.”

“그, 그게...”

남자가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말했다.

“사실... 이미 진작 동물원을 개장해야 했는데 아직 완공이 되지 않아 많이 어수선한 상태입니다... 공사 자재가 사방에 널려있어서... 그, 그래도 정 괜찮으시겠다면 안내해 드릴 순 있습니다!”

뭐, 그 정도라면...

흥미롭게 까치발을 들어 울타리 너머를 엿보는 니아를 잠시 돌아보고 말했다.

“저희는 딱히 상관없어요. 혹시 폐가 되는 건 아니죠?”

“네, 네 물론입니다!! 오히려 두 분이 방문해주신다고 하면 저야 영광입니다!!”

“뭐, 그렇다면... 니아 님 잠깐 들렀다 가도 괜찮죠?”

“응? 물론이지! 난 소년과 함께라면 뭘 해도 좋아!”

“..그렇다네요. 아 그리고 이거...”

“이건...?”

품에 안았던 토끼를 들이밀자 남성이 날 빤히 쳐다봐왔다.

“정원에서 발견했는데 여기서 사육하던 토끼가 아닌가요?”

“네? 그야 저희 동물원에도 토끼를 기르긴 하지만... 이렇게 검은 녀석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요?”

“네, 아직 겨울이 지난 지 얼마 안 돼서 이곳 토끼들은 전부 흰색입니다. 여름을 맞아 털갈이를 해도 보통 갈색이나 회색으로 변하고요. 게다가 이렇게 토끼의 눈이 빨간 이유는 백색증 때문인데, 이 녀석은 털이 검은색이니 조금 이상...”

순간, 토끼가 내 가슴팍을 박차고 울타리 안쪽으로 사라졌다.

재빨리 붙잡으려 했지만 워낙 민첩한 탓에 그만 놓쳐버리고 말았고, 허망하게 고개를 들자 낭패한 표정을 지은 남성이 보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이상한 소리를 해서...!”

“뭐... 괜찮습니다. 저희가 기르던 동물도 아니니까 원래 주인에게 잘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래야죠. ...그럼 들어가도 될까요?”

“네, 네!!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남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안쪽으로 손짓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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