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화 〉 검은 토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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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검은 토끼 #4
소음이 멎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여기서 그의 이름을 들을 줄이야.
나는 목소리가 떨리는 걸 자각하며 메마른 입술을 비집었다.
“니아 님... 지금 뭐라고...”
“응? 뭐가? 우리 길드 전투원은 전부 축복을 받았다고 한 거? 그야 사실인걸? 심지어 몇몇은 가호를 여러 신한테서...”
“아, 아니 그거 말고요.”
“음... 아수르 님 말이야?”
“네! 지금 분명히 아수르라고 했죠?!”
“소, 소년...?”
니아가 그녀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당황했다.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꼬물거리는 호피 무늬 꼬리를 보고 나서야 어떤 상황인지 깨달았다.
반쯤 올라타다시피 한 그녀의 몸 위에서 내려와 짐짓 헛기침하자 저 멀리서 황급히 딴청을 피우는 동물원 총 책임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걸로 터무니없는 소문이 하나 더 생겨나겠군.
니아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손가락으로 금발을 베베 꼬았다.
“그... 소년.”
“...죄송합니다 니아 님.”
“괘, 괜찮아! 방금 엄청 박력 있었어...! 덮쳐지는 줄 알고 심장이 콩닥... 아, 아니 그보다 아수르 님이 왜?”
“니아 님이 그분한테 축복을 받았다고요?”
“으응.. 받은 지 꽤 됐어.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거야?”
“아뇨, 문제라고 할 것까진 아니지만...”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혹시 어떤 경위로 축복을 받았는지 여쭈어볼 수 있을까요? 좀전에 분명 신 앞에서 직접 받았다고 했죠?”
“응, 얘기가 조금 길어질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네...! 부디!!”
고블린 부락에서 발견했던 아수르 신전과 저주받은 보석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기회다. 어쩌면 고블린 킹이 남긴 유언을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란이와 고블린을 폭주시켰던 촉수와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조마조마하게 뒷말을 기다리자
“음... 그 이야기를 꺼내려면 우선 칼른베니아 제국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을 수 없는데... 거긴 제1 왕자가 왕위를 물려받는 게 아니라 제일 강한 후계자에게 황제 자리를 넘겨줘. 혹시 들어봤어?”
“아뇨... 제가 제국 쪽 사정은 잘 몰라서...”
“그래? 아무튼 그래서 후계자 경쟁이 엄청 치열해. 만약 황족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여 있다면 누구나 황좌를 차지할 수 있으니까. ...물론 현 황제는 엄청나게 강하고 마나 때문에 늙지도 않아서 수백 년간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적이 없다고들 하지만...”
“...그런데 그거랑 아수르 신하고 관련이 있어요?”
“응, 마저 들어봐. 아무튼 황제가 그렇게 강한 데다가 군사력도 막강하잖아? 게다가 다음 왕위도 제일 센 황족에게 물려준다고 하니 나라 전체에 힘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조성된 거야. 그래서 도시 곳곳마다 투기장이나 콜로세움 같은 시설이 정말 많아.”
“....”
아수르는 분명 무력과 무위, 전쟁을 관장하는 신이었지.
“그렇다면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가 바로...”
“그래, 맞아 아수르 교단이야! 그래서 나라 곳곳에 아수르 님의 신전이나 상징물이 정말 많아. 굳이 그분이 아니더라도 무예나 전투에 관련된 소규모 신도 많이들 숭배받는 편이고. 그럼 여기까지 대충 제국 분위기가 어떤지는 알겠지?”
“네, 이해했어요.”
아리엘이 아수르 신은 베라스틴보다 타 도시와 국가에서 더욱 영향력이 강한 신이라고 말해주었던 게 기억났다.
베그디아, 안디라와 묶여서 3대 주신으로 불릴 정도니...
니아가 말을 이었다.
“음... 그래서 그 연장선상으로 아수르 님이 직접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어. 바로 4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무투대회인데, 그때가 되면 전국 방방곡곡에서 내로라하는 강자들이 몰려와! 나도 그때 유소년 시합에서 준우승한 덕에 시상식에서 축복을 받은 거야. 황제도 그때 처음 봤고.”
“그렇구나... 대단하네요. 그런 곳에서 준우승이라니...”
“응? 그야 그렇기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재수가 좋아도 너무 좋았지. 다른 쟁쟁한 우승 후보들이 알아서 동귀어진해준 덕에 거의 공짜나 다름없이 올라갔거든! 결국 결승에서 완전히 대패한 덕에 족히 한 달은 병상에서 죽은 사람처럼 지냈지만. 설마 내가 준우승까지 할 줄은 아무도 예상 못 했을 거야!”
그녀가 쿡쿡거리며 실소했다.
나는 내심 복잡한 심경을 가라앉히며 마저 물었다.
“그럼... 니아 님이 본 아수르 님은 어떤 이미지였어요...?”
“음... 뭐 절대 범접할 수 없는 절대자 같은 느낌? 솔직히 멋있다거나 외모가 어떻다기보단 엄청 섬뜩했어.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 중 한 분이잖아. 마음만 먹으면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도륙하는 것도 가능했을 테고. 그분이 내려준 가호 덕에 A랭크까지 도달했으니 상당히 고마운 분이기는 하지만...”
“...니아 님은 그분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응? 어떻게 생각하느냐니... 소년은 어떤 답을 바라는 거야? 나도 나름 명색이 축복을 하사받은 신도인데 그렇게 물으면 존경한다고밖에 할 말이...”
아차...
“...죄송해요. 제가 굉장히 무례한 질문을 해버렸네요.”
“아니야. 나랑 소년 사이인데 그럴 수도 있지 뭐. 실제로 나도 내게 축복을 내려주신 고마운 분이라는 생각 외에 특별한 감정은 품고 있지 않으니까. 아니, 근데 소년은 왜 이런 걸 물어보는 거야? 정말로 무슨 일 있었어?”
“.....”
난처하게 이마를 짚으며 니아의 시선을 피했다.
여기서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면 고블린의 부락에서 겪은 일을 전부 이야기해야 할 거다.
놈들이 그녀의 주신을 숭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나. 아수르가 모든 인간을 절멸시킬 거라는 고블린 킹의 유언이나.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를 의심하는 뉘앙스가 되는 건 필연이겠지.
아수르 신의 은총을 받은 니아의 기분이 좋지 못할 거라는 건 당연하고.
이전이라면 몰랐겠지만, 그녀의 사정을 알게 된 지금은 솔직하게 털어놓기 꺼려지는 게 사실이다.
습관처럼 칼자루를 매만지며 갈등하고 있자니 니아가 고운 눈썹을 늘어뜨리며 슬픈 표정으로 날 올려다봤다.
“왜... 나한테는 털어놓기 힘들어...?”
“아, 아니 그런 건...”
“괜찮아... 만약 네가 그렇다면야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뭔가 고민이 있고 내가 들어줄 수 있으면 내용이면 솔직하게 이야기했으면 좋겠어. 네가 날 도와준 것처럼 나도 널 돕고 싶으니까.”
“.....”
젠장.
그건 반칙이잖아.
느즈막한 오후에 드리우는 햇살처럼 따스한 그녀의 일면을 보자 심장이 동요했다.
실은 지금 눈앞의 성숙한 모습이 평소의 활기차고 발랄한 태도 뒤에 감춰진 그녀의 본모습일까.
다정하게 손등을 겹치며 미소짓는 니아와 마주하고 있자니 새삼 그녀가 나보다 연상이라는 게 실감 났다.
나는 어렴풋한 미소로 화답하며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란이에 관련된 내용을 제외하고 그녀가 기분 나빠하지 않게 차분히 일련의 사건을 이야기하자 니아는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살짝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니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뭐야, 그게 다야?”
“네...?”
“난 또 뭐라고... 정말로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잖아.”
“그, 그게 전부에요?”
의외로 꽤나 담백한 반응에 놀라자 니아가 말을 이었다.
“그래, 고블린이 사람 말을 했다니 조금 신기하기는 하지만... 몬스터가 인간의 신을 숭배하는 건 나도 본 적이 있어.”
“그게 정말이에요?”
“응, 드물긴 하지만 몇몇 똑똑한 마물은 인간을 습격하고 얻은 전리품을 몸에 치장하고 다니는 경우가 있거든. 예를 들어 예전에 한 리자드맨이 로자리오를 목에 걸고 돌아다니는 걸 봤어. 오우거의 아지트를 습격했더니 바위굴 안에 종교용품을 잔뜩 모아둔 것도 봤고.”
“하지만... 그걸 숭배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무리가...”
“솔직히 그렇긴 하지... 하지만 아직까진 아수르 신님과 명확한 관계가 있다고 증명된 건 아니니까. 그분이 얼마나 바쁜데 설마 여기까지 와서 고블린한테 오늘부로 나를 섬겨라~ 하고 갔겠어?”
“...그렇긴 하죠.”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자 그녀가 덧붙였다.
“응, 그래서 혹시 나도 그 보석을 볼 수 있을까?”
“보석이요? 뭐... 그래 준다면야 저야 감사하지만... 아무리 니아 님이라고 해도 건드리는 건 안 돼요. 혹여나 무슨 일이 벌어지면 큰일이니까요.”
“응, 꼭 조심할게! 만약 그게 진짜로 아수르 님의 물건이면 내가 곧바로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엄청 든든하네요. 근데 만약 그 보석에 정말로 아수르 님의 입김이 닿았으면 어떡해요?”
“음...? 으... 일단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는 있는데... 뭐, 그때 가서 생각해봐야지. 난 아마 몇몇 흑마법사들이 아수르 님의 소행으로 위장하고 이상한 꿍꿍이를 부린 게 아닐까 싶어.”
“그렇겠죠...?”
“응응! 나도 거들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앞으로도 고민거리가 있으면 언제든 상담해 줄게! 같이 암시장 독살 사건을 조사하기도 했던 동료잖아!”
“.....”
동료라...
“...고마워요 니아 누나.”
“흐냣?!!”
웃으며 그리 고하자 돌연 니아가 전기라도 오른 듯 꼬리털을 부풀렸다.
그녀가 눈을 왕방울만 하게 뜨고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소, 소년 바, 방금 뭐라고...”
“...뭐가요.”
“방금 니아 누나~라고 하지 않았어...?”
“..그런 적 없거든요?”
“아, 아니 이 두 귀로 똑똑히 들었어!! 다시 한번 말해봐! 소년 방금 진짜 진짜~ 귀여웠단 말야!!”
“됐어요. 다 먹었으면 이제 슬슬 일어나죠.”
“아 정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깔끔하게 보자기를 접어 품 안에 갈무리하고 손수건으로 손에 묻은 소스를 닦아냈다.
이후 로브를 거칠게 잡아당겨 끈덕지게 들러붙는 니아를 떨쳐내자 한결 몸이 가뿐해졌다.
“...왜요. 귀찮게.”
“다시 한번 불러줘... 니아 누나! 라고.”
“하는 거 봐서요.”
“정말 이럴 거야?!”
“아니, 평소엔 연상 취급하면 싫어했으면서. 그보다 저기 좀 보세요. 저 원숭이 어쩐지 니아 님 닮지 않았어요? 귀가 판박인데.”
“말 돌리지 마! 그리고 나 원숭이 아냐! 긍지 높은 아무르 표범 수인이라고!!”
“네, 어련하시겠죠.”
“소년─!!!”
우리는 티격태격하며 길을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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