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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252화 (252/375)

〈 252화 〉 검은 토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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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검은 토끼 #6

“그럼... 감사했습니다.”

“아뇨아뇨!! 저야말로 황송합니다! 덕분에 아주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이번 가르침을 토대로 꼭 무사히 완공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도란 님은 베라스틴에 거주 중이라고 하셨지요?”

“아 네 뭐...”

“만약 다음번에 저희 동물원에 방문하신다면 같이 오신 일행분까지 전부 무료로 입장하실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 정말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예! 물론입니다! 아무리 허울뿐인 직책이라지만 그 정도 권한은 있습니다!”

“뭐, 그래 주신다면 저야 고맙죠.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동물원을 뒤로하고 나왔다.

제법 늦은 오후, 황금빛 햇살을 맞으며 호텔 정원으로 접어들자 니아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저... 소년...?”

“왜요?”

“그... 소년은 이제 어떡할 거야? 시간이 조금 애매해졌는데...”

“그러게요... 아침부터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시간 가는 줄 모르다 보니 동물원에서 너무 오래 있었네요. 앞으로 한두 시간 뒤면 해가 지기 시작할 텐데 그럼 마땅히 돌아다닐 데도 없잖아요?”

“그, 그렇지...”

니아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옅게 미소짓고는 넌지시 내뱉었다.

“...그럼 그냥 간단하게 시장에라도 같이 갈래요? 그 정도라면 시간 안에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저, 정말?! 좋아!!”

니아가 돌연 화색하며 내게 안겨들려 했지만, 직전에 멈칫했다.

나는 주저하는 그녀의 머리를 사뿐하게 쓰다듬어준 뒤 앞길을 나아갔다.

기사들이 도열한 정문을 지나 북쪽 거리에 도달했을 즈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니아 님, 붉은 매 길드는 그 도적단 리더를 추격하느라 던전에 와 있는 거라고 했죠?”

“으음... 메다올리눔 던전? 아무래도 그렇지...?”

“그러면 언제까지 계실 거예요?”

“아... 나도 확답은 못 하지만, 적어도 그 남자가 던전에서 떠난 걸 확인하기 전까지는 계속 있을 거야. 하지만 저번 2계층 도적단 공멸 사건 이후로 아무런 단서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이미 볼일을 마치고 떠난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돌고 있어.”

“...그러면 금방 철수할지도 모른다는 뜻이네요?”

“그렇지, 근데 갑자기 그건 왜?”

“별건 아니고... 저도 던전에 볼일이 좀 있어서 니아 님이 돌아갈 때 같이 갈까 해서요.”

“.....”

니아가 느닷없이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차마 회피하기도 전에 그녀가 힘껏 껴안아왔다.

“소년!!!”

“아악!! 이거 좀 놓으세요!! 아파요!!!”

“나 너무 기뻐!!!”

“알았으니까 좀!!”

혼신의 힘을 다해 뿌리치자 니아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외쳤다.

“난 소년이 온다면 언제든지 환영이야!! 내가 진짜 진짜 잘해줄게!! 불침번도 필요 없고! 사냥도 내가 전부 해줄 테니 몸만 와!!”

“...저만 가는 게 아니라 제 애인들도 같이 갈 거예요.”

“음...? 단둘이 가자는 거 아니었어?”

“아니에요.”

“그, 그래?”

순간 니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아주 살짝 줄어들었으나, 곧바로 행복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내 팔뚝을 두드렸다.

“응! 그래도 괜찮으니까 오기만 해! 다 같이 와도 분명 재미있을 거야!! 근데 왜 갑자기 그럴 마음이 들었어?”

“니아 님이 오기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어요. 말톤한테도 볼일이 있고, 7계층에 다시 보고 싶은 마.. 사람이 살거든요. 물론 거기는 엄청 위험한 곳이니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지만...”

“응? 7계층? 거기에 사는 사람도 있어?”

“...그냥 그런 게 있어요.”

“흐음... 그래? 그렇다면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데?”

“정말이에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니아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응! 좀 추운 곳이라 꺼려지기는 하지만... 안 그래도 수사 때문에 8계층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는 상황이었거든! 아마 원정대가 출발할 때 끼워달라고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 소년이라면 누구나 반길 테고, 혹여나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혼쭐을 내줄게! 정 안 되면 우리끼리 가지 뭐.”

“그래만 준다면야 더할 나위 없긴 한데... 안 그래도 부탁해볼까 고민하던 참이었거든요.”

“응! 나만 믿어!!”

“...감사합니다.”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든든하다.

니아를 따라 다니면 던전에서도 안전할 터. 7계층의 위험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라디와 아리엘을 이끌고 사지 한복판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당장 울시나 스승님을 만나는 것도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고마워요. 혹시 해줬으면 하는 거라도 있어요?”

“해줬으면 하는 거?”

“네, 뭔가 보답 드릴 만한 게... 제가 들어줄 수 있는 한에서요.”

“그, 그렇다면...!”

순간 니아가 탐스러운 먹잇감을 발견한 들짐승처럼 눈동자를 빛냈지만, 곧바로 시들시들하게 꼬리를 늘어뜨렸다.

그녀가 피를 토하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으... 난 괜찮아... 이미 많이 받았으니까...”

“....누구세요?”

“나, 나도 염치 정도는 있거든? 같이 어울려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데... 게다가 너 저번에 암시장에서 내 소원 들어주기로 한 것도 있잖아!”

“그거 아직도 기억하고 계셨어요?”

“그야 당연하지! 모처럼의 기회인데!”

“....”

왜 하필 그때 그런 내기를 걸어서...

이제는 다소 익숙해진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도보를 나아가다 보니 어느덧 북쪽 구역의 끝을 알리는 간판이 나왔다.

점점 노후되어가는 건물을 지나쳐 조금 더 걷자 의미없는 낙서와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이 난잡하게 시야 언저리로 늘어졌다.

그중 후미진 골목길 안으로 들어서자 니아가 은근슬쩍 내 팔뚝을 붙잡아왔다.

“소년... 여기 좀 무서운데...”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당신이 제일 무서워요.”

“으... 그건 그렇지만... 어둡고 이상한 가게가 너무 많아. 게다가 기분 탓인지 점점 더 외진 곳으로 가는 것 같고... 우리 시장 가는 거 아니었어? 날 이렇게 으슥한 데로 데려가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가보면 알아요.”

“...나, 난 언제든 받아들일 준비 됐어!!”

뭐가요.

어째선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내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그녀를 가볍게 무시하고 골목길을 나아갔다.

아직 해가 저물기까지는 조금 남았지만,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탁한 연기와 을씨년스럽게 솟아올라 그림자를 드리우는 건물 탓에 몹시 어두웠다.

그렇게 기괴하게 비틀린 목조 건물을 지나 협소한 골목길을 빠져나오자 목표했던 장소가 나왔다.

“도착했어요.”

“여긴...”

니아가 무심결에 내 셔츠를 붙잡고 멍하니 전방을 응시했다.

눈앞의 공간에는 규칙성이라곤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차양막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고, 그 아래로 무수한 사람들이 매대에 놓인 상품을 구경하며 왕래했다.

시끄러운 소음에 조금 언성을 높여 말했다.

“서쪽 광장에 열린 장터에요. 조금 많이 번잡하기는 하지만 이곳에는 상업 단지가 몰려있어서 여러 물건을 구할 수 있거든요. 베라스틴에서 요일과 시간을 불문하고 상시 장이 열려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고요.”

“와... 엄청 신기해... 꼭 던전 암시장 같아! 분위기는 조금 더 어둡지만..”

“신기할 것까지야... 이곳보다 더 큰 곳도 많지 않아요?”

“그야 그렇긴 하지만... 나는 예전부터 이런 곳에는 잘 안 왔거든. 이목도 너무 쏠리고 흥정도 전혀 할 줄 모르니까. 붉은 매 길드에 입단한 뒤로는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아델이나 보급 부대원이 대신 사다 줬어.”

“...그럴 만도 하네요.”

그 재앙과도 같은 금전 감각이라면 차라리 그게 낫다.

그녀가 홀린 듯이 앞으로 발을 내디디자 나는 손을 뻗어 제지했다.

“...잠깐, 들어가기 전에 일단 로브로 얼굴부터 가리죠. 여기는 워낙 밀집도가 높으니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아요. 소매치기나 이상한 사람도 많을 테고.”

“응? 하지만... 허튼 수작을 부리는 놈들은 전부...”

“제가 니아 님과의 시간을 방해받는 게 싫은 거예요.”

“으냑...?! 그, 그래...? 알았어! 소년 말대로 할게!”

“네, 그럼 잠시 기다리고 계세요.”

나는 니아에게 맑게 웃어보이고는 시장 구석의 자그마한 노점에서 중고 로브를 구매했다.

처음엔 그녀의 머리색에 맞춘 황색 계열로 살려고 했지만, 니아의 강건한 권유로 내가 입은 것과 비슷한 검은색 로브를 샀다.

기장이 맞지 않아 호기심에 어른 옷을 껴입은 아이 꼴이었지만, 그럼에도 훤칠한 비율과 후드 아래로 드러난 미모는 숨길 수 없는 게 참 신기하다.

니아는 살짝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고는 내 팔뚝에 슬그머니 팔짱을 껴왔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천천히 시장 안쪽으로 발을 내디디며 말했다.

“...이 안은 엄청 복잡하니까 한눈팔지 마세요. 떨어지지 않게 꼭 붙들고 계시고요.”

“응! 절대 안 놓칠 거야! 앞으로도 계속!”

“아니, 그렇게까지 끌어안을 필요는... 아니다. 놓치지만 마세요.”

팔에 맞닿은 말캉말캉한 과실 탓에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었지만, 애써 무시하며 그녀를 옆에 매달고 시장 거리를 나아갔다.

중고 무기나, 건어물, 말 전용 브러쉬 등 취급 상품에서 일관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장터는 치열한 노점 경쟁과 행인의 발길, 흥정하는 목소리로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고, 하늘을 빼곡히 뒤덮은 차양막 탓에 몹시 캄캄했다.

오징어잡이 배처럼 기다란 줄에 매달아 드리워진 연등을 젖히며 나아가던 도중, 니아가 내 눈앞에 대고 손바닥을 흔들었다.

“...왜요?”

“아니.. 몇 번이나 불렀는데도 못 듣길래... 있잖아 소년, 저건 뭐야? 엄청 희한하게 생겼어! 제사 용품일까..?”

“음... 둠피라 지네의 갑각을 말린 거네요. 이전에 던전에서 본 적이 있어요. 약재로 쓰인다고 했던가.. 정확한 용도는 저도 잘...”

“그럼 저 은색 덩어리는...?”

“순철이에요. 저걸 가공해서 무기로 만드는 거고요. 요 바로 옆에 대장간 거리가 있으니까요.”

“우와!! 소년! 저기 무지갯빛 장식 좀 봐!! 엄청 이쁘다...”

“저건... 저도 이곳에선 처음 보는 건데.. 조개 패각을 가공해서 만드는 거예요. 전복이나 소라의 껍데기를 잘 다듬고 광을 내면 저런 색이 나오는 걸로 알고 있어요. ...아니, 원래 저보다 니아 님이 더 자세히 알고 계셔야 하는 거 아녜요?”

“신기해...”

“...마음껏 봐두세요.”

생경한 광경에 즐거워하는 그녀를 데리고 점포를 구경했다. 시장 내부는 비록 비좁고 혼잡할뿐더러 이따금씩 화로에서 메케한 연기가 풍겨왔지만, 그럼에도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나름의 정취가 있었다.

번뜩번뜩 빛이 나는 캠핑 세트, 2페니로 십 분간 마사지를 해주는 안마 샵, 잡다한 마물의 뼈와 박제를 취급하는 수상한 노점을 지나치던 중, 니아가 손끝으로 내 팔뚝을 콕콕 두드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근데... 그러고 보니 소년은 여기에서 살 거 없어? 그냥 구경만?”

“신 과일을 좀 사 가려고요. 겸사겸사 칼날 손질용 기름이나 숫돌도 보고요. 니아 님은 뭐 가지고 싶은 거 없어요? 장신구라던가...”

아리엘이 신 음식이 먹고 싶다고 했으니 코코 열매나 감귤 계열 과일을 사 가면 되겠지. 라디는 특히나 단 걸 좋아하니까 꿀에 절인 복숭아나 말린 과일을 찾아보면 될 테고.

한데 무심결에 옆을 돌아보니 니아의 표정이 그렇게 밝지만은 않았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장신구라... 으응... 아니야.. 난 괜찮으니까 소년 볼일 봐.”

“네...? 뭐... 알겠어요.”

별일이네.

“그럼 일단 과일부터... 잠깐만요. 찾았다.”

차양막 안으로 들어서자 노점 주인이 웃으며 맞이했다.

“어서 오쇼. 뭐 찾는 거라도 있나?”

“네, 과일을 좀 보려고 하는데요..”

“잘 찾아왔네. 천천히들 둘러 봐.”

그가 의자에 걸터앉아 손짓했다. 나무 합판을 대충 이어붙인 진열대에는 갖가지 과일들이 듬성듬성 쌓여있었고, 개중엔 이 시기에 보기 드문 것도 간간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중 한 품목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제철 과일이 아니네요?”

“오, 눈썰미가 좋구먼. 그건 우리 농장에서 재배한 게 아니라 이웃 도시에서 가져온 거네. 듣자 하니 라프노라는 연금술사가 계절에 상관없이 실내에서 작물을 재배하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하더군. 이건 그 시제품일세.”

“라프노...”

“음...? 무슨 문제 있는가?”

“아, 아녜요. 새콤한 과일 위주로 담아갈 건데 혹시 추천하는 거 있어요? 과일은 많이 안 사 봐서...”

“새콤한 거라... 아내한테 가져다줄 겐가?”

“뭐... 그렇죠.”

“그럼 기다려봐. 내가 실한 놈으로 담아줄게.”

상인이 의자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과일을 주워 담았다.

그에게서 광경에서 시선을 돌리고 막 니아에게 먹고 싶은 과일은 없는지 말을 걸려던 찰나­

“저건...?”

시장 구석, 검은 토끼 한 마리가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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