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화 〉 검은 토끼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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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검은 토끼 #7
“저건...”
“...왜 소년? 무슨 일 있어?”
“니아 님, 저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요.”
“무슨 일인데 그래?”
“그게... 죄송해요. 급한 거라 나중에 설명할게요. 저기 아저씨, 돈은 돌아와서 낼 테니...”
“그래, 담아두고 있을 테니까 빨리 다녀와.”
“감사합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곧바로 점포를 뒤돌아 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인파를 가로지르자 잠시 후 뒤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니아가 날 아리송하게 쳐다보며 보폭을 맞추었지만, 나는 토끼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걸었다.
그녀도 내 시선이 맞닿은 곳을 살피더니 눈매를 날카롭게 좁히며 중얼거렸다.
“...그때 봤던 토끼야. 어떻게 여기까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한 번 쫓아가 보죠.”
단순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절묘하다.
호텔 정원에서 마주친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거기부터 여기까지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 어떻게든 우리를 뒤쫓아 왔다고 가정해도 인적 없는 골목길을 지나올 동안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조금 이상하다.
인파를 거슬러 나아가자 토끼는 폴짝폴짝 가벼운 뜀걸음으로 물러났다. 슬쩍슬쩍 우리를 곁눈질하기도 하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수많은 행인의 발길에 단 한 번 채이지 않는 모습은 묘한 불길함을 불러일으켰다.
토끼를 뒤따라 시장을 벗어나자 골목길이 나왔다.
하지만 막 모퉁이를 돈 순간 그곳엔 한랭한 냉기만이 감돌 뿐, 우리가 쫓던 검은 토끼는 온데간데없었다.
“그 잠깐 사이에 사라졌네... 어디로 갔을까 소년?”
“글쎄요...”
“소년?”
“저도 서쪽 구역을 자세히 아는 건 아니거든요. 한번 와봤던 길만 알지... 여기는 미로처럼 복잡하기로 악명이 자자해요. 남쪽의 슬럼가랑 서쪽의 장인 거리만큼 베라스틴에서 복잡한 데도 없을 텐데.... 혹시 기척 같은 건 못 느꼈어요?”
“응... 이 골목을 돌자마자 홀연히 사라졌어.”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일단 쫓아서 시장을 나온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막상 놓쳐버리니 앞길이 막막하다.
하는 수 없이 골목을 전부 샅샅이 뒤져봐야 하나 고민하자 니아가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일단 한 번 나뉘어서 이 근처를 둘러보자. 단순한 우연은 아닐 거라는 느낌이 들어. 어쩐지 우리를 이곳으로 유도하는 것 같았고.”
“네 뭐... 저희보고 따라오라는 듯이 쳐다봤으니까요..”
“그래, 그럼 난 이쪽부터 훑어볼게!”
“네, 고마워요 니아 님.”
신중하게 골목을 둘러보며 전진했다. 먼지가 끼어 시꺼멓게 변한 거미줄과 무너진 담벼락이 산재한 고샅길은 언데드의 여파로 집집마다 판자가 처져 있어 몹시도 을씨년스러웠다.
발치에 널브러진 잔해를 넘어서며 주의 깊게 사방을 살피던 도중, 나는 배수로 근처에서 자그마한 발자국을 발견했다.
“니아 님, 여기 토끼 발자국이에요.”
“...그러네. 확실히 이쪽으로 온 건 맞나봐. 계속 쫓아가자.”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대비하고 계세요.”
“괜찮아, 별일이라도 있겠어?”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아요.”
슬그머니 칼자루에 손을 얹고 나아갔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혹여나 뭔가 튀어나올까 긴장했지만, 발길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족적이 뚝 끊기는 지점이 나왔다.
고개를 드니 그곳엔 상당히 오래되어 기울기 시작한 복층 건물이 자리해 있었고, 나무 창틀로부터 희미한 소음과 불빛이 새어나왔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아마 이 안으로 향한 모양인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응, 들어갈게!”
“자, 잠깐...!”
말리기도 전에 그녀가 문을 열어젖혔다.
황급히 뒤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자욱한 연기와 더불어 한약재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니아가 로브자락으로 입가를 덮고 중얼거렸다.
“으... 지독하네...”
“말 좀 하고 들어가시지... 탕약이라도 달이고 있었나 봐요. 가마솥이 끓고 있어요.”
건물 내부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협소했다.
몇 걸음 움직이는 게 고작일 정도로 비좁을 실내를 비추는 광원이라곤 천장에 매달린 반딧불이 조명과 카운터 너머의 가마솥이 유일했으며, 좌우의 낡아빠진 선반 위에는 청동 저울과 비커를 비롯한 연금술 도구가 먼지 쌓인 채 방치되어 있다.
처음엔 흔한 연금술 용품점이라 생각했지만 진열해놓은 상품을 확인하자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금속 가시가 자라는 엉겅퀴... 이런 걸 어디서 구한 걸까요...? 분명 마계 대륙에서만 자라는 녀석으로 알고 있는데...”
“...용화초도 있어. 이무기나 그에 준하는 마물의 둥지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거야. 돈이 썩어나도 구하지 못하는 건데... 여기는 대체 무슨 수로 이런 걸 팔고 있는 걸까?”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어요.”
정체불명의 보라색 자국이 눌어붙은 해골 성배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찰나, 계단 위에서 삐걱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니아와 함께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자 모습을 드러낸 건, 왜소한 체구에 뾰족 모자를 쓴 영락없는 꼬마 마녀였다.
그녀가 검보랏빛 로브를 바닥에 질질 끌며 하품하더니 피로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음... 분명 영업 종료 팻말을 걸어두었을 텐데 대체 누가...”
“...안녕하세요?”
“어... 아? 으응...?”
후드를 젖히며 인사하자 마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점점 크게 벌어지더니 내 얼굴을 삿대질하며 건물이 떠내려가라 외쳤다.
“아, 아카이아 길드의 도란?! 초절정 미소녀를 두 명이나 끼고 다니는 걸로도 모자라 소문의 A랭크 여자마저도 꿀꺽 집어삼켰다는 호색한...!!”
“...벌써 소문이 여기까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이놈의 소문은 주둥이가 달리기라도 한 건지 퍼져나갈 때마다 점점 부풀려져서 곤란하다.
한데 시선을 회피하고 있자니 돌연 마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엎어지듯 다가와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리더니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너, 넌...! 설마... 네, 네.. 네 정체는...”
“...?”
“시, 실례했습니닷...!”
여자가 우당탕 발을 찧으며 층계 위로 달려나가더니 천장 너머로부터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쿵쿵거리던 소음이 멎고 마녀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땐 그녀에게 작은 변화가 일어난 뒤였다.
“.....”
“....”
“...그 우스꽝스러운 가면은 뭐죠?”
“아, 아무것도 아닙니닷...! 검투... 도, 도란 님...!!”
“...수상한데.”
어두워서 잘은 보지 못했지만 어디선가 봤던 얼굴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저 짙은 보라색 생머리와 눈동자는 이 근방에선 흔히 볼 수 없는 특징. 최근에 만난 인물이라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어디서 봤더라...?
“아, 아무튼...! 여기에는 무, 무슨 일로 오셨나요...? 지금은 영업 시간이 지났...”
“...소년, 얘 좀 수상해. 아까보다 키랑 가슴이 커졌어.”
“그, 그럴 리가...! 요.. 전 원래부터 이렇게...”
“아마 요상한 마법으로 외형을 바꾼 모양인데... 게다가 저 탕약에서 희미한 환약초 냄새가 나. 분명 의료 목적 외에는 사용이 금지됐을 텐데... 수인의 코는 못 속이거든?”
“흐약...?!”
니아가 카운터를 손바닥으로 쾅 내리치며 고개를 들이밀자 마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선반에 머리를 쿵 박았다.
나는 니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진정시켰다.
“일단 신원을 캐는 건 나중에 하죠. 우선은 원래 목적부터 해결하자고요. 제가 대신 대화해도 괜찮을까요?”
“응! 알았어!”
니아가 적개심을 거두고 물러나자 여성이 가면을 고쳐 쓰며 중얼거렸다.
“과, 과연... A랭크를 수족 부리듯 다루다니... 역시 그 악명 높은 검투...”
“저기요.”
“예, 옛?!”
“여기서 토끼 한 마리 보신 적 없으세요?”
“토끼...?”
그녀가 턱을 짚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고민 끝에 손가락을 딱 울리더니 능글맞은 목소리로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아하~ 이걸 찾고 있었구나~! 그런 거였으면 진작 말하지!!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러니까 분명 여기 어딘가에...”
여자가 콧노래를 부르며 카운터 아래를 뒤섞거리고는 회심의 탄성을 지르며 한 봉제 인형을 끄집어올렸다.
“찾았다!! 이걸로 말할 것 같으면...! 왕도의 일류 재봉사가 사흘 밤낮 동안 쉬지 않고 만들어낸 토끼 인형입니닷!! 사랑하는 애인한테 선물하기 딱이죠~! 이걸 건네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침대까지 직빵으로...”
“...아니, 토끼 인형 말고 진짜 토끼요.”
“음...?”
여자가 뻣뻣하게 굳더니 이내 관자놀이를 긁으며 머쓱하게 물어왔다.
“...애인한테 선물할 인형이 아니라 진짜 토끼 말하는 거였어요?”
“네, 말했잖아요. 토끼라고.”
“에이 텄네 텄어... 진작 그렇게 좀 말하지. ....근데 왜 토끼를 저희 매장에서 찾아요? 여긴 연금술 관련 물품을 취급하는 곳인데?”
“그러니까... 젠장.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검은 토끼를 쫓아 이 골목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경위를 대충 설명하자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할 일도 더럽게 없네. 그냥 연인끼리 몰래 야한 짓 하러 골목에 들어왔다고 솔직하게 말...”
“네...?”
“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가 당황하더니 짐짓 헛기침하며 말했다.
“으흠...! 죄송해요. 오랫동안 홀로 살았더니 혼잣말하는 게 버릇이 되어버려서... 악의는 없었으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
말없이 노려보자 여자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 그래서...! 저희 가게에 토끼는 없지만 다른 좋은 게 진짜~! 많은데 한번 둘러보시겠어요?! 예를 들면 이 토끼 인형도 연인에게 선물하면 분명 좋은 분위기를 연출...”
“...관심 없습니다. 나가죠, 니아 님. 여기가 아니었나 봐요.”
“아앗..! 그러지 마시고...!! 그, 그럼 이건 어때욧?! 엄선된 비밀 약재를 혼합해 만든 정력제인데... 남자한테 이렇게 좋은 물건이 또 없...”
“.....”
시큰둥하게 발걸음을 돌려 나가려 하자 그녀가 내 로브끄덩이를 붙잡고 애원했다.
“그, 그러지 말고 부디 구경만이라도 제발...!”
“제가 왜요?”
“일주일 내내 쫄쫄 굶었단 말이에요!! 오늘도 수입이 없으면 정말로 굶어 죽어요!!”
“그거야 제 알 바 아니죠. 그리고 저건 뭔데요.”
“아 저건...”
내가 턱짓한 방향에는 감자가 포댓자루째 떡하니 방치되어 있었다.
마녀가 난감하게 뺨을 매만지며 지껄였다.
“그... 감자는 텁텁하고 맛이 없어서... 그쪽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헤헷... 앗...! 자, 잘못했어요!! 잘못했으니 제발 떠나지 마세요!! 반값으로 할인해줄 테니 제발 뭐라도 하나만 사 주세요...!!”
“.....”
성가시게 미간을 구기자 여자는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피더니 목을 가다듬고 뻔뻔하게 읊조렸다.
“흠흠... 잠깐 못 볼 꼴을 보이긴 했지만... 이곳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유명한 가게라고요? 효과도 보증되어 있으니 한 번 믿어 보세요! 이 왕국 전부를 뒤져도 이 가게에서만 구할 수 있는 물건도 있다구요! 보세요!!”
“아니 그런 건 딱히 관심 없는데... 애초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왜 굶고 다니는 건데요.”
“그... 그게... 새로운 연구 설비에 돈을 다 써 버려서...”
“자업자득이잖아요.”
“.....”
한심한 눈길로 쳐다보자 마녀가 어깨를 움찔했다.
그녀의 간절한 호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 니아와 함께 가게를 벗어나려던 순간
“그, 그럼 이건 어때요...! 무려 중급 성수라고요!! 어디에나 활용할 수 있는 만능...”
“.....”
“초, 촉수가 돋아나는 저주도 해주할 수 있어!!”
“.....”
발걸음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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