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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254화 (254/375)

〈 254화 〉 검은 토끼 #8

* * *

[254] 검은 토끼 #8

“잘 생각하셨어요! 역시 중급 성수는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만든다니까~!!”

“.....”

“이 성수로 말씀드릴 것만 같으면, 무려 베그디아 신전 사제들이 꼬박 사흘동안... 흐익?!!”

“....”

눈이 마주치자 마녀가 화들짝 놀라 물러났다.

나는 천천히 카운터로 되돌아가 서늘한 음색으로 고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그, 그걸...?”

“촉수 말이야.”

“읏...”

마녀는 내 오른손이 칼자루에 가 있는 걸 목격하고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물러났다.

팔에 힘을 싣자 그녀가 두 눈을 질끈 감고 손바닥을 뻗으며 외쳤다.

“제, 제발... 다 말씀드릴 테니 진정하세요...! 딱히 숨길만 한 내용도 아니라구요!!”

“당장 말해.”

“그... 그렇다면 솔직하게 털어놓는 대가로 은화를 조금... 히익!? 아, 알겠어요 지금 당장 불게요!!”

그녀가 황급히 말을 이어나갔다.

“실은...! 제가 연금술 재료 외에도 돈이 될 만한 건 전부 판매하거든요. 이런 변두리의 작은 소매상만으로는 수입이 안 나오니까... 그래서 가끔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소정의 대가를 받고 자료를 넘겨줄 때가 있어요.”

“그래서. 촉수에 대한 정보를 어디서 접했는지나 말해요.”

“으윽... 제가 촉수에 관련된 내용을 접한 건 크누트 길드에서...”

“크누트 길드...? 크누트 길드가 이곳에 있다고요?”

“아 네, 네... 베라스틴에 생긴 지 얼마 안 됐어요. 한 두어 달쯤 됐으려나...”

“젠장... 그 미친놈 소굴이 이곳에도...”

던전에 들어가기 전, 신고식이랍시고 내게 술을 들입다 퍼부었던 놈들이 떠올랐다.

덕분에 그곳에서 라디와 만나기는 했지만...

“소년, 괜찮아? 속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아요. 니아 님이야말로 탕약 냄새 때문에 힘드실 텐데 밖에서 기다리고 계실래요?”

“으응... 아니야. 같이 있을래.”

“네 그럼...”

“거 봐, 꽁냥대러 온 거 맞잖아.”

“.....”

스릉. 칼날을 조금 들어올리자 그녀가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크누트 길드에서 술을 마시다가 듣게 된 건데... 최근 도시 곳곳에서 촉수가 돋아난 사람을 목격했다는 자들이 속출하고 있어요! 일각에서는 요즘 빈번하게 발생하는 실종 사건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추측도 돌고요.”

“.....”

제길.

그러고 보니 오늘 저택을 나오던 도중 읽었던 찌라시에 실종 사건에 대한 언급이 있었지.

심지어 카렌도 비슷한 소리를 했었다. 촉수 때문에 각 길드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어쩌면 아직 소문이 안 퍼져나갔을 뿐 곧 모두가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모른다.

칼자루에서 손을 떼며 물었다.

“그럼 실종 사건과 촉수가 관련이 있을 거라고 한 건 어째서죠?”

“음... 이건 저도 주워들은 얘기지만.. 한 남자가 밭일을 하고 돌아오던 도중 행방이 묘연해졌나 봐요. 그래서 가족이 흥신소에 의뢰를 해봤는데 결국 강 하류에서 촉수가 달린 채 물에 팅팅 부은 익사체로 발견되었고요. 이런 사례가 한둘이 아니에요.”

“그럼 혹시 촉수에 감염된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었나요?”

“음... 공통점...?”

여성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가면을 고쳐 쓰며 말했다.

“공통점이라고 하면... 대부분이 노숙자거나 소작농처럼 빈곤한 경우가 많았어요. 어린이와 노인보단 건장한 청년이나 중년이 많았고... 아! 그러고 보니 대부분 남자였다고 했어요!”

“남자? 그러면 여성한테는 안 옮는 건가요?”

“아니, 그건 또 아닌 게... 감염된 배우자에게 접근했다가 화를 입은 부인도 종종 있기는 한가 보더라고요. 실종자 대다수는 남성이었지만...”

“...그렇군요.”

설마 우려하던 대로 촉수가 인간한테까지 영향을 미칠 줄이야. 만약 고블린을 상대할 때 아리엘이 곁에서 바로 치료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도 지금쯤...

‘아니, 지금은 그것보다...’

보석 외에 다른 감염 경로가 있는 건가?

아니면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사람들을 감염시키고 다닌다거나...

험악하게 미간을 구기며 생각에 잠기자 마녀가 손뼉을 쳐 분위기를 전환했다.

“그. 래. 서! 바로 이 성수가 필요하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요거 하나면 아무리 촉수가 돋아나도 뱀이 허물 벗듯 떨어진다고요! 단돈 8골드 아니, 10골드로 미래에 대비하세요!”

“.....”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저기요.”

“네...?”

“증명해 보세요.”

“증명...?”

“그 성수가 정말로 효능이 있는지. 아니, 진짜 성수가 맞긴 한 건지 검증해 보라고요.”

“아니...?! 무슨 그런 말을...!! 그럼 제가 사기라도 친단 말이에요?!”

“그럼 어쩔 수 없죠. 대체 어떤 호구가 약팔이 말만 듣고 혹해서 선뜻 금화를 지불하겠어요. 그것도 10골드나.”

“야, 약팔이라니... 그, 그래도 촉수가 달린 사람을 찾아올 수도 없잖아!! 귀중한 상품을 허투루 쓸 수도 없고...”

“그거야 제 알 바 아니죠.”

“으낙!?”

여자가 경악하며 고개를 젖혔다. 가면 너머의 표정이 상상 가는 건 기분 탓인가.

토끼가 이곳으로 오지 않은 것도 확인했고 겸사겸사 촉수에 대한 정보도 얻었겠다, 이제 미련 없이 가게를 떠나려는 찰나 내 발길을 붙잡은 건 전혀 뜻밖의 인물이었다.

“소년, 이거 아마 성수 맞을 거야.”

“...그래요?”

“응, 신성력을 보면 알 수 있어. 다만... 베그디아교의 성수라고 했지?”

“아... 네, 넷...!”

“흐음...”

니아가 눈매를 날카롭게 좁히고 유리병 안의 내용물을 들여다보더니,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거기 너, 이름이 뭐야?”

“저, 저요...?”

“응.”

“그... 라.. 피넬이라고 합니다.”

마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면 너머 보라색 눈동자가 요리조리 요동치는 걸로 보아 가명임이 분명했지만, 니아는 아랑곳 않고 산뜻하게 웃으며­

“응 라피넬 너 뒤질래?”

“에, 엣...?!!”

­쾅!!

니아가 손바닥을 세게 내리치자 카운터가 움푹 주저앉았다.

“이거 짝퉁이잖아. 겉에 찍힌 인장은 베그디아 신전 게 맞지만 내용물은 이름이 알려지지도 않은 중소규모 교단 거야. 품질도 끽해봐야 하급이고.”

“으... 아으...”

“게다가 사칭을 하더라도 적당히 해 처먹어야지, 다름도 아니라 전국에서 신자 수가 제일 많은 그분을 건드려? 베그디아교의 성기사들이 이걸 알고도 가만있을 거라 생각해?”

“힉... 히끅...!”

니아가 금안에 흉흉한 마력을 두르자 마녀가 아연실색하며 주저앉았다.

나한테는 이제껏 한 번도 내보인 적 없던 적의가 타인에게 향하는 모습을 보며 벙쪄 있자니 니아가 사뿐하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

“소년, 가자.”

“...네? 하지만...”

“가서 경비대에 신고해. 성수를 바꿔치기한 게 들통나면 종신형까지도 선고받을 수 있거든? 그 전에 이단심문관의 엄벌을 받게 될 테고. 가자 소년.”

“이, 이단 심문...!”

니아에 등쌀에 떠밀려 막 가게를 나서려는 찰나, 마녀가 문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가 무릎을 꿇더니 니아의 발목을 붙들고 싹싹 빌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순간 금전에 눈이 멀어서...! 이렇게 사죄드릴 테니 제발 신고만은 하지 말아주세요!!”

“...가자 소년, 이런 년은 감옥에서 평생 감자만 먹으면서 썩어야 해. 감히 소년을 속이려 들어? 제 분수를 알아야지.”

“제, 제발...”

“이거 놔.”

“하, 하지만...!”

“어? 안 놔?”

­콰직!!!

니아가 발을 구르자 마룻바닥이 함몰되었다.

하지만 마녀는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도 니아의 다리를 부둥켜안고 버텼다.

그녀가 간곡한 목소리로 통곡했다.

“제발...! 잘못했어요 니아 님!! 이단 심문관한테 끌려가면 정말로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요!! 정말로 다신 안 그럴 테니...!”

“상대가 잘못됐어.”

“네...?”

“사과를 할 거면 소년한테 해야지. 당연한 거 아냐?”

“아... 으...”

여자가 당황하더니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힘겹게 고개를 조아렸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잘못했어요 검투.. 도, 도란 님...!”

“아니 뭐... 솔직히 괘씸하긴 한데...”

지금은 그보다...

“....가면 한 번 벗어 보실래요?”

“가, 가면이요...?! 왜요..!?”

“그냥...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저희 어디서 본 적 없어요? 최근 일 년 사이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아마 베라스틴까지 오면서 들렀던 마을이나 그보다 더 전에 다른 대륙에서...”

“....?!”

가면 아래로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줄줄 쏟아져내렸다.

...이건 분명 뭐가 있다.

“저기요.”

“제, 제발 가면만은... 사실 제가 대인공포증이 있어서...”

“거짓말, 너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잖아. 또 거짓말할래?”

“으, 으윽...!”

니아가 예리하게 꼬집자 마녀가 가면을 움켜쥐며 신음했다.

난처하게 내려다보니 그녀가 울먹거리며 간절하게 종용했다.

“그, 그렇다면 이 성수랑 토끼 인형을 드릴 테니 이걸로 만족하고 돌아가 주시면 안 될까요...? 베, 베그디아 교의 성수는 아니지만 촉수에 효과가 있다는 건 사실이에요! 적어도 금화 5개 어치는 톡톡히 하는 물건이라고요!”

“.....”

“아, 안 될까요?”

“....”

...하는 수 없지.

정체가 신경 쓰이긴 하지만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애걸복걸하는 소녀를 무시하고 확인할 정도는 아니다. 물건 가격을 속이려 든 게 살짝 괘씸하기는 하지만, 값비싼 성수를 공짜로 변상해주겠다고까지 할 정도면 조금은 반성하는 것 같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니 그냥 스쳐지나면서 내 얼굴을 본 사람이겠지.

괜히 뒤탈을 남기기도 곤란한 바, 나는 니아가 성수를 받아드는 걸 확인하고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니아는 그것만으론 성이 안 찼나 보다.

“이리 와!!”

“아, 안 돼!!”

“돼!!!”

니아가 가면을 쥐고 잡아당기자 가죽끈이 끊어지며 마녀의 맨얼굴이 드러났다.

차마 모른 척 할 순 없었기에 슬그머니 다가가 들여다보자...

“...소년, 아는 얼굴이야?”

“.....”

“소년?”

“...아니요,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마법으로 외형이 바뀌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가뜩이나 어두운 실내에 눈물로 범벅이 된 탓에 식별하기 어려웠지만, 적어도 기억에 부합하는 인물은 없다.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그녀를 가까이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니 문득 어디선가 희미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한데 이 찌릿한 냄새는...

“...소년, 가자.”

“....네.”

난처하게 목덜미를 매만지며 막 건물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마녀가 새빨개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

“네...?”

“그래 가! 꺼지라고!!”

“아, 아니 왜 갑자기...”

“여기서 당장 사라져! 성수고 나발이고 다 가져가!! 그리고 두 번 다시 내 가게에 찾아오지 마!! 이 말미잘!! 해파리!! 플라스크 밑바닥에 남은 찌꺼기!! 무지막지한 괴물!!! 살인자!!!”

­쾅!!

마녀가 가게 안 물품을 손에 잡히는 대로 내던지더니 나와 니아의 등을 떠밀고 거세게 문을 잡아당겼다.

반쯤 부서져 너덜거리는 경첩을 바라보며 망연하게 서 있자, 잠시 후 니아가 내 소매를 툭툭 잡아당기며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정말로 처음 보는 사이야? 같은 고향 출신이라던가...”

“....모르겠어요. 그건 확실하게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데..”

감이 안 잡힌다.

나는 뒤죽박죽 혼재된 사고를 끌어안고 힘겹게 골목길을 나아갔다.

터벅터벅 땅을 보고 걷자 문뜩 머리칼에 차가운 감촉이 와닿았다. 서서히 고개를 들어 회색으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니 가느다란 빗줄기가 뺨에 떨어진다.

점차 세기를 늘려 대지를 적시는 소나기, 담벼락 너머로부터 들려오는 행인의 다급한 목소리, 빗줄기를 피해 스멀스멀 달아나는 거미 떼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니아가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말했다.

“소년... 괜찮아...?”

“아... 네.. 그냥 조금 심란해서...”

“내가 괜한 짓을 한 걸까...?”

“아니요, 니아 님은 잘하셨어요.”

“.....”

평소와 같은 어조였지만 어째선지 그녀는 안쓰럽게 올려다봐왔다.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손아귀에 쥔 유리병을 건네왔다.

“...받아.”

“네? 이건...”

“...아까 챙긴 거야. 나보다는 네가 더 유용하게 쓸 수 있을 테니까... 다음번에 네 애인이 위험해지면 써.”

“....고마워요.”

“그래, 그럼...”

니아가 살포시 내 어깨를 토닥이고는 뒤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인 미소가 너무나도 처연했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잠깐...! 어디 가요...!”

“오늘은 이만 돌아갈게. 정말 고맙고... 미안해..”

“아니 뭘 잘못했다고 미안해요? 니아 님은 잘못한 거 없다니까요. 그보다 길도 모르면서...! 호텔에 데려다 줄 테니...”

“괜찮아, 지금은 좀... 걷고 싶네. 소년도 피곤할 테니 내일까지 푹 쉬어. 모래 보자.”

“아니...! 잠깐만!!”

채 붙잡기도 전에 그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뻗었던 팔을 천천히 내리자 작은 빗방울 하나가 투명한 유리병을 타고 흘러내렸다.

갑갑한 가슴을 틀어쥐고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 그녀가 있던 자리에 떨어진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허리를 굽히자­

“...또 너냐.”

나는 토끼 인형을 주워들고 혼자서 집으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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