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화 〉 수수께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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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수수께끼 #1
끼이익...
“...나 왔어.”
이제는 완전히 땅거미가 져버린 하늘을 등지고 현관에 들어섰다.
나는 장검을 풀러 우산꽂이에 거치하고 젖은 로브를 옷걸이에 건 뒤 서서히 층계를 올랐다.
차갑게 식은 복도를 지나쳐 밝은 불빛이 새어나오는 문 앞까지 도달하자 대화가 뚝 멎는가 싶더니, 부산스러운 발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익숙한 두 형체가 달려들었다.
“도란님!!!”
“도란!!”
그녀들을 꼭 끌어안자 라디가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벌써 해가 졌는데... 같이 저녁 먹으려고 언니랑 기다리고... 무슨 일 있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어.”
“또 그런 소리 한다... 솔직하게 말해봐 도란.”
“...실은 촉수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들었거든.”
“촉수? 니아 님한테서요?”
“아니, 조금 달라. 어떤 가게에 들어갔을 때 듣게 된 내용인데...”
“음... 잠깐만요 도란님.”
라디가 미소짓더니 상냥하게 흑발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식사 안 하셨죠? 목욕물 데워두었으니까 따뜻하게 씻고 같이 저녁 먹으면서 이야기해요. 젖었잖아요.”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잠시 후, 목욕을 마친 뒤 한결 개운해진 몸을 이끌고 계단을 내려오자 저택에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새하얀 마석등의 불빛이 드리운 부엌에 도달하니 보글보글 끓고 있는 수프와 먹음직스럽게 익은 스테이크, 라디의 특제 소스가 버무려진 샐러드 등이 식탁에 올라있었다.
일찍 잠자리에 든 란이가 자리에 없는 걸 확인하고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뭐야, 오늘 뭐 무슨 날이야? 엄청 호화스럽게 차렸네... 수프엔 게랑 새우도 들어가 있고. 해산물은 엄청 비싸잖아?”
“응! 나름 힘 좀 썼지! 어때?”
“오늘은 사치 좀 부렸어요. 도란님도 최근에 계속 고생하셨으니까요. 자, 식기 전에 드세요.”
“고마워... 잘 먹을게.”
라디가 국자로 수프를 떠서 내 그릇에 듬뿍 담아주었다.
고맙게 받아들고 도로 자리에 앉으려는 차, 녀석이 살짝 귀띔했다.
“...정력에 좋은 재료들로 만들었으니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드셔야 해요? 아리엘 언니랑 같이 정성 들여서 만들었다고요.”
“.....”
슬그머니 옆을 쳐다보자 아리엘이 뺨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라디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두 녀석의 접시에 고기를 덜어주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먹자. 아리엘, 기도 안 해도 돼?”
“...응, 도란이 오기 전에 했어.”
“그래? 그럼...”
천천히 수프를 입에 머금자 극상의 감칠맛이 느껴졌다.
“어, 엄청 맛있어...! 간도 딱 맞고 국물도 잘 우러나서 진짜 맛있다! 이 정도면 팔아도 전혀 손색없겠는데? 아, 아니 그러면 내가 많이 먹을 수 없으니까...”
라디와 아리엘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며 화색하더니 천천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잠시간 식탁에 식기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차오르고, 애정이 듬뿍 담긴 요리에 착잡했던 마음이 풀려갈 즈음, 아리엘이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심란했던 건 좀 괜찮아졌어, 도란?”
“....응 아, 덕분에.. 고마워.”
“정말... 우리 도란은 밖에 나가기만 하면 근심거리를 달고 오나 봐. 아예 집구석에 묶어놓아야 하는 거 아냐?”
“그러게요. 진지하게 괜찮은 생각 같기도... 뭐만 했다 하면 사건에 휘말리니...”
“크, 크흠...”
짐짓 헛기침하자 라디가 샐러드를 집으며 물어왔다.
“그럼... 촉수에 대해서 들었다는 건 뭐예요?”
“아... 얘기하자면 좀 길어. 우선 설명해야 할 게 있는데...”
두 녀석에게 니아가 아수르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과 그녀 역시 말톤이 가진 권능에 대해서는 짐작 가는 부분이 없다는 점, 최근 베라스틴에서 발생한 실종 사건과 촉수가 달린 채로 발견된 변사체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말을 전해 들은 라디는 곰곰이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과연... 도란 님이 신경 쓰셨을 법도 하네요. 근데 그것 말고 또 없어요?”
“...또 없다니?”
“아니, 혹시 저희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나 해서요.”
“...아니, 그게 다야.”
“흐음...”
라디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심쩍은 눈초리로 쳐다봤지만, 곧 어깨를 으쓱하고는 눈앞의 샐러드로 시선을 돌렸다.
아마 다 눈치챘겠지.
굳이 캐묻지 않는 씀씀이에 감사하며 덧붙였다.
“아, 그러고 보니까 베라스틴에도 크누트 길드가 생겼다더라. 얼마 안 됐데.”
“아 정말요? 그렇다면 같이 한 번 찾아가 보는 것도...”
“아니, 그건 안 돼.”
“....?”
“...그런 게 있어.”
단호하게 주장하자 라디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녀석의 입에 스테이크 조각을 넣어주자 입가를 오물거리며 마지못해 끄덕였다.
한숨을 내쉬며 안도하자 아리엘이 홍합과 새우를 덜어주며 물었다.
“많이 먹어 도란. ....그러면 내일도 니아 씨를 보러 나가는 거야?”
“음... 아니. 내일은 집에 있을 거야. 아마 모레 아침에나 다시 만나러 갈까 생각 중인데...”
“그래? 잘됐다! 그럼 셋이서 오붓하게 있을 수 있겠네?”
“그치... 근데 니아가 우리 집에 오고 싶어 하는 모양이더라고.”
“그래요?”
“응, 보석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대. 정말로 아수르 신의 물건이면 자기가 알아차릴 수 있으니까. 오늘 먹은 샌드위치도 마음에 든 모양이고. ...앞으로 일주일은 더 머물다 갈 텐데 얼굴 한 번 안 보는 것도 좀 그렇긴 하니까. ...어떻게 생각해?”
혹여나 부담스러워할까 봐 걱정했지만, 아리엘은 밝게 미소지으며 흔쾌히 승낙했다.
“응! 난 좋아! 사실 안 그래도 먼저 말을 꺼낼까 고민하던 참이었어. 함께 살면서도 일주일이나 도란하고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니 괴로워서... 니아 님만 괜찮다면 같이 다니는 것도 물어보려던 참이었거든.”
“미안해... 라디 너는?”
“저도 찬성이에요. 니아 님은 편견도 없으시고 던전에서 저희를 도와준 은인이기도 하니까요. 무엇보다 집에만 있기도 슬슬 심심하던 참이라 같이 돌아다니면 재밌을 거 같아요. 저도 베라스틴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둘러보고 싶은 곳이 많으니까요.”
“아...”
그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미안한 눈초리로 쳐다보자 라디가 새침하게 포크를 놀리며 말했다.
“...딱히 안 삐졌으니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대신 앞으로라도 잘하세요.”
“....그래.”
“뭐, 그렇다고는 해도 저야 지금 이 생활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지만요. 안 그래요 언니?”
“응! 나도 도란하고 함께 살면서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해!”
“.....”
따스하게 미소짓고는 식사를 이어나갔다.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그릇을 거의 다 비웠을 즈음, 아리엘이 식탁 아래를 눈여겨보며 물었다.
“음... 그런데 도란, 거기 기대어져 있는 건 뭐야?”
“아, 이거?”
나는 발치에 내려두었던 과일 바구니를 들어올렸다.
“올 때 시장에서 사 왔어. 신 음식이 먹고 싶다고 했지?”
“정말?! 잠결에 말한 건데 그걸 또 기억해주고... 고마워 도란!!”
“이 정도쯤이야... 과일 말고도 꿀 과자랑 이것저것 사 왔으니 라디 너도 같이 먹어.”
“제 것까지... 고마워요 도란님. ...그런데 뭔가가 더 있는데요?”
“아 이건...”
성수와 토끼 인형을 내려다보며 난감하게 대답했다.
“...아까 말했던 연금술 가게에서 공짜로 얻은 거야.”
“성수를 공짜로 받았다고요...? 게다가 이건... 무려 베그디아교의 중급 성수네요.. 인기가 많아서 돈이 넘쳐나도 쉽게 구하기 어려운 물건인데...”
“그게... 사실 베그디아 신전의 성수가 아니라나 봐. 상점 주인이 사기를 치려던 걸 니아가 간파하고 혼내줬어. 이건 그 대가로 보상... 삼아 얻어낸 거고.”
“...그러네, 자세히 보니 베그디아 교단의 신성력이 아니야. 품질도 조악하고... 성수를 바꿔치기할 생각을 하다니 정말 겁 없는 사람이네. 그럼 그 인형도 같이 받아온 거야?”
“뭐... 그렇지. 나도 원래 이건 받을 생각이 없었는데... 길가에 버리고 오기도 곤란하니 란이한테 주면 좋아할까 해서.”
정령이 봉제 인형을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선물로 줘봐야지.
위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을 녀석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입가가 풀어졌다.
라디가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손뼉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럼 이제 두 분도 다 드신 것 같으니 슬슬 일어나죠. 도란님은 쉬고 계세요. 설거지는 저랑 언니가 할게요.”
“됐어, 내가 할게. 오늘 당번은 나잖아.”
“괜찮으니까 우리한테 맡기고 쉬어 도란. 오늘 하루 고생했잖아.”
“...그럼 물에 담가놨다가 내일 하는 거로 타협하자. 란이가 있을 때 하면 훨씬 수월하잖아.”
“뭐 그럼... 알겠어요. 도란님은 바로 주무실 거예요?”
“글쎄... 너희는 어떻게 할 건데?”
다 먹은 접시를 치우며 묻자 라디가 거들며 대답했다.
“저는 읽던 책이 있어서 그것만 마저 보고 자려고요. 언니는 마법 수양 한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마법 수양?”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실력이 녹슬지 않으려면 주기적으로 연습해야 하거든. 게다가 요즘은 상위 마법을 익히려고 노력 중이야. 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없지만...”
“그래? 잘 됐으면 좋겠네. 어디서 하는 거야?”
“뒤뜰에서! 그래야 마력 조절에 실패해도 별 탈이 없으니까.”
“마력이라...”
살짝 짓궂게 웃으며 물었다.
“...오늘 밤에도 마력공급 해줄 거야?”
“으응...? 앗...! 도, 도란은 무슨 소릴 하는 걸까...?!”
아리엘이 라디를 돌아보며 무심결에 가슴께를 끌어안았지만 그럴수록 제 무덤만 파는 꼴이다.
나는 다소 능글맞은 어조로 말했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이미 초야도 치른 사이인데. 아까 라디가 말했던 대로 오늘 수프에도 정력에 좋은 것만 쏙쏙 골라서 담았고. 아니야?”
“으으...”
“하기야... 오늘 도란님이 나가 계시는 동안 살짝 추궁하니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술술 불던데요? 목욕탕에서 무릎베개를 해준 것부터 그대로 안아들고 침실로 향한 것까지. 언니 말로는 엄청 설렜었다고...”
“라, 라디야...!”
아리엘이 재빨리 달려가 라디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자 끝내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와. 내일은 오후까지 늦잠 자도 되니까. 알겠지?”
“.....”
끄덕.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아리엘을 세차게 끌어안아 준 뒤 흡족하게 부엌을 나서자 라디가 슬그머니 달라붙으며 물었다.
“그럼... 도란님은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언니가 돌아올 때까지 조금 걸릴 텐데... 단련?”
“글쎄다, 목욕하고 난 직후라 땀 흘리는 건 ... 아, 그래. 혹시 추천하는 책 있어?”
“책이요?”
“응, 시간도 때울 겸 볼 만한 게 있었으면 좋겠는데. 조금 쉬운 내용으로. 난 아직 글씨를 잘 못 읽으니까.”
유흥거리가 적은 세계이니만큼 시간을 보낼 수단이 한정적이다.
라디가 손뼉을 치며 화사하게 웃었다.
“좋은 생각이에요!!”
녀석이 내 손목을 잡아끌고 1층 서재로 데려갔다.
이내 가느다란 검지로 책표지를 훑더니 그중 한 권을 꺼내들었다.
“동화책이에요. 제가 어렸을 때 정말 좋아했던 책인데 언니도 가지고 있더라고요. 그림도 많고 어휘도 어렵지 않으니 도란님도 쉽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혹시나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제가 가르쳐드릴게요!”
“그래? 고마워. 읽는 건 어디서 할래?”
“도란님 침실로 가죠. 거기가 넓어서 뒹굴뒹굴하기엔 딱이니까요.”
“그래, 그러자”
라디의 어깨에 손을 얹고 침실로 향했다.
문고리를 쥐고 돌리니 큼지막한 벨벳 침대와 카펫 대용으로 깔아둔 스노우 타이거 모피, 천을 덮어 광량을 줄인 취침등 따위가 시야에 들어왔다.
침대에 드러눕자 라디가 살그머니 손짓했고, 정답게 눈웃음을 지으며 녀석의 허벅지를 베고 책장을 펼치니 오래된 양피지와 가죽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머리맡에 와닿는 부드러운 감촉을 만끽하며 물었다.
“근데 이거 대충 줄거리가 뭐야?”
“음... 개요 자체는 상당히 흔한 내용이에요. 신의 축복을 받은 용자가 마왕을 물리친다는... 하지만 제가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글이 엄청 순수하기 때문이에요. 옛날 동화는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거나 잔인한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
하기야...
내가 있던 곳에서도 과거에서 동화는 잔혹하거나 선정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책 자체가 고가의 사치품으로 분류되어 이야기 대부분이 구전으로만 존재하다 보니 자극적인 내용만 살아남아 전해져온 까닭.
아이들의 인권이 희박하던 시절이니 동심을 지켜준다거나 하는 인식이 있었을 리도 없고.
“용자라... 여기에 그런 것도 있었어?”
“아, 네네... 베그디아 신님의 최상위 축복을 받은 사람을 보통 용자라고 칭해요. 아니, 조금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도란님은 용사라는 단어가 더 익숙할 수도 있겠네요... 베그디아 님이 누군지는 알죠?”
“당연하지. 이 세계에서 제일 센 신이잖아. 신도 수도 제일 많다며.”
지구로 따지자면 고대 그리스의 제우스 같은 포지션이던가. 인기가 많은 만큼 신전도 많고 교단의 위세가 대단하다고 들었다. 성수나 로자리오 같은 상징물에도 상당한 금액이 붙을 정도고.
당장 내가 받아온 성수만 해도 그런 까닭에 값비싼 베그디아 교단의 성수로 둔갑할 뻔했으니.
한데 조금 신경쓰이는 대목이 나왔다.
“...근데 그 최상위 축복이란 건 뭐야? 축복에도 종류가 있었어?”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베그디아 신님만 내려줄 수 있는 축복인데, 한 시대에 단 한 명밖에 받을 수 없는 가호라네요. 당연히 그 효과는 남들과 비할 바가 아니고요.”
“그래...? 그럼 지금 용사는 누군데?”
“음...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
의아하게 바라보자 라디가 말을 이었다.
“베그디아 님의 최상위 축복, 그러니까 용사는 역사적으로 드문드문 존재했다는데 지금 시대는 아직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어요. 어쩌면 아직 안 태어났을 수도 있고, 어느 왕국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숨겨두고 있을 수도 있어요. 저는 후자가 더 그럴듯한데...”
“그래? 신기하네...”
뭐, 나와는 관련 없는 이야기니까.
나는 뺨을 문질러오는 꼬리의 촉감을 즐기며 책장을 넘겨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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