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화 〉 수수께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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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 수수께끼 #3
“으으... 무심결에 과식해버렸나 봐요.”
“그러게... 너무 맛있어서 한계치까지 먹어버렸어... 이렇게 호화로운 만찬은 정말 오랜만이야.”
“저는 아예 처음 먹어봐요. 대체 어떻게 후추에다 금박을 입힐 생각을 할 수 있죠...? 아니, 애초에 금도 먹을 수 있는 거였어요?”
“뭐, 그러니까 요리로 내놓지 않았을까? 앞으로도 종종 놀러와! 끼니마다 매번 다른 음식이 나와서 색다르거든. 난 언제나 환영할게!”
“고마워요 니아 님. 저희 쪽에서 부탁하고 싶을 정도에요. 하이랭커가 되면 이렇게 호화로운 삶을 살기도 하는구나... 그보다 도란님, 듣고 있어요?”
“.....”
“도란님?”
“어, 응... 왜 불러?”
“아까부터 계속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계시던데.. 무슨 일 있어요?”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산책로를 걷던 중, 라디가 내 얼굴을 살피며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내가 말없이 니아를 흘긋 쳐다보자 그녀가 어깨를 움찔했다.
“뭐, 뭐야... 난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이야?”
“그... 죄송하지만... 네, 맞아요. 잠시 라디랑 대화 좀 하고 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 주실 수 있으세요?”
“으... 알겠어.”
“....그래, 도란. 내가 니아 님이랑 같이 있을 테니까 둘이서 다녀와. 걱정하지 말고.”
“고마워.”
살며시 니아의 손을 맞잡는 아리엘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라디를 데리고 수풀 너머로 향했다.
녀석을 가로수 둥치에 부드럽게 몰아세우고 혹여나 듣는 귀가 있을까 주변을 살피자 라디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니아 님이 많이 서운해하실 거예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시겠죠?”
“그래, 다름이 아니라 묻고 싶은 게 있어.”
“네, 말씀하세요.”
“....”
숨을 들이쉬고, 잠시 뜸을 들인 뒤 입을 열었다.
“그 실비? 라고 했었나. 그 그림자 마물, 아니 여왕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
일순간 라디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지만 곧바로 눈매를 좁히며 되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요?”
“아까 창문을 닫으러 갔을 때 정원에서 두 사람이 서 있는 걸 봤어.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니 사라져서 긴가민가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중 한 명이 걔였던 거 같아. 발치에 그림자가 없었거든. 혹시 뭐 짚이는 거 없어?”
“.....”
라디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 애의 진짜 정체랑 무슨 목적으로 저희에게 접근했는지는 저랑 아리엘 언니도 모르거든요. 저도 도란님이 알고 있는 정보보다 아주 약간만 더 들었을 뿐이에요. 가령 저번에도 말씀드렸듯 미래에 연인이 조금 늘어날 거라던가...”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걔 동행도 있었어?”
“...그러고 보니 조금 이상하네요. 누군가랑 같이 있었다고요? 그 애한테 저희 말고 지인이 있을 리가 없는데...”
“그래, 굉장히 옛날 사람이잖아. 고대 유적에 매장되었으니...”
“...같이 있었다던 사람의 인상착의는 어땠는데요?”
“.....”
힘겹게 찰나의 기억의 편린을 끄집어 대답했다.
“뭔가... 키가 큰 사람이었어. 아니, 어쩌면 위압감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수도... 새까만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체형이랑 얼굴은 못 봤지만 분위기가 장난 아니었고..... 엄청 무서웠어.”
그 형체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강렬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마치 누군가가 주삿바늘로 피부밑에 기생충을 주입하는 것처럼.
질척하게 시야를 일그러뜨릴 만치 공포에 잠시 머뭇거린 순간 두 형체는 이미 사라졌었다.
라디가 걱정스럽게 내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도란님이 이렇게 겁먹으실 정도면 대체 얼마나 강해야... 설마 여왕의 반려일까요...? 그 왜... 유적에도 왕의 묘실이 비어있었잖아요. 도란님이 단도를 발견했던 그 장소 말이에요.”
“...아니, 그건 아닐 거란 직감이 들어.”
근거는 없으면서도 그런 것보단 조금 더 고차원적인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다. 생명다운 존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 누군가의 소환수거나 분신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지근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내뱉었다.
“하 씨 돌아버리겠네. 왜 늘 걔만 나왔다 하면 골머리가 아프냐고. 뭔가 알고 있는 건 분명한데... 이번엔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보고만 있었던 거지...? 저번처럼 경고를 하고 사라진 것도 아니고...”
“.....”
언젠가 다시 한번 유적에 찾아가 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자니 라디가 나를 살짝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저도 열심히 생각해 보고 있을 테니 다음번에 기회가 되면 아리엘 언니랑 같이 이야기해요. 지금은 시기가 좀 나쁘네요. 더 늦으면 니아 님이 걱정하실 거예요.”
“...그래.”
천천히 발길을 돌려 정원 산책로로 향하자 멀리서 불안하게 쳐다보는 금빛 눈동자가 보였다. 번개 치는 날 홀로 방치된 강아지처럼 초조하게 흔들리는 꼬리도.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가장하며 돌아오자 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어왔다.
“그... 이야기는 끝났어?”
“네, 난처하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아, 아냐...! 근데 대체 어떤 얘기를 했길래... 혹시 나랑 관련된 거야...? 내가 불편하게 했다던가...”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좀 개인적인 문제라 말하기 곤란했을 뿐이에요. 그 왜... 다들 그런 내용 하나씩은 있잖아요. 솔직하게 말하면 라디가 부끄러워할까 봐...”
“아 뭐야 그런 거였어?”
니아가 힐끗 라디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화살이 자신에게 꽂히자 라디가 내게 원망스러운 눈초리를 보내왔지만, 이내 미약한 한숨을 내쉬고는 남몰래 내 허벅지를 꼬집으며 말했다.
“...네, 제가 며칠 전부터 도란님께 상담하던 내용이 있었거든요. 대외적으로 말할 만한 내용은 아니라... 죄송해요 니아 님.”
“아냐! 괜찮아!! 그런 거였다면 미리 말하지... 괜히 걱정했잖아! 난 또...”
“음... 그래도 잘 해결된 모양이니 다행이네. 이제 우리 어디 갈 거야 도란?”
“음... 일단 생각해둔 곳이...”
무심결에 아리엘과 눈이 마주치자 등골이 오싹했다.
부드럽게 올라간 그녀의 입매와는 달리 눈꼬리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기에.
황급히 시선으로 나중에 설명하겠다고 전한 뒤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 일단 서쪽 성문 근처에 마차 대여소가 있다고 하니까 거기부터 가보려고..! 아무리 베라스틴이 작다고는 하지만 도보로 다니다 보면 금방 피곤할 테니까. 주변 시선도 신경 쓰이고.”
“음 관광 마차를 말하는 거야? 좋은 생각이네!”
“아, 알고 있었어? 그래, 나도 어제 이것저것 알아보다 발견한 건데 하루 동안 마차를 대여해서 도시를 돌아보는 게 있대. 중간에 원하는 장소가 있으면 내려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고 하니까 괜찮겠다 싶어서.”
“저도 찬성이에요. 마차를 타고 도심지를 여행한다라... 색다른 경험이네요. 여기는 제가 있던 빌헴 마을보다 규모도 훨씬 크니까 구경할 곳도 많을 테고요.”
“응! 나도! 난 도란이랑 함께라면 뭐든 좋아!”
“....”
내심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가의 암흑기라고 불리었던 중세와 유사한 세계이니만큼 마땅한 유흥거리가 없다. 아마 지구에서 데이트 코스를 짜는 것보다 훨씬 어렵지 않을까.
그렇다고 투기장이나 도박장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녀들을 데리고 그런 장소에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괜히 노예 검투사가 있는 게 아니지.”
“응? 무슨 말 했어 도란?”
“별거 아니야.”
기사가 도열한 호텔 정문을 지나 북쪽 거리로 나오자 길을 오가는 수많은 행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숙박업소 거리의 아침인지라 가벼운 숙취에 시달리거나 아직도 전날의 달콤한 꿈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띈다.
몸에서 달달한 방향을 풍기는 커플을 지나쳐 대로변에 정차된 소형 마차에 올라타자 꾸벅꾸벅 졸던 마부가 가죽 모자챙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어서 옵쇼 손님. 행선지는 어디로 하면... 어.. 어...?”
“서쪽 마차 대여소로 부탁드릴게요.”
“아, 아니...! 그보다 당신은 혹시 아, 아카이아 길드의 도란...?! 그, 그렇다면 그 옆에 계신 분들은...”
“.....”
이제 이런 반응에도 익숙해졌다.
니아가 후드를 살짝 젖히고 웃자 남자가 혼절할 것처럼 눈을 희번덕거리며 외쳤다.
“니, 니아 님! 영광입니다!! 오래전부터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게다가 아리엘 님마저... 제가 예전에 고블린에게 다치고 입원했을 때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하하... 치유사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걸요.”
“어쩜 겸손까지... 소문이 정말이었나 보군요. 아리엘 님에게 정인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많은 베라스틴의 남성들이 절망했는지... 그래도 행복하신 것 같아 보기 좋습니다!”
“.....”
아리엘이 내 손을 맞잡고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가 고삐를 잡아당기며 시동을 걸었다.
“그럼 늙은 마부의 잡소리는 그만하고 슬슬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양옆의 끈을 잡아당겨 가림막을 만들 수 있습니다. 조금 흔들릴 수도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이럇!!”
마부가 고삐를 잡아당기자 마차가 서서히 돌길 위를 나아갔다.
현대처럼 서스펜션이 있을 리도 만무한 노릇이라 마차는 노면의 굴곡을 선명하게 훑으며 충격을 고스란히 허리에 전해주었지만, 이전에 매번 걸어 다니던 것에 비하면 양반이다.
가림천을 내려 길거리의 시선을 차단하고 로브를 좌석 위에 깔아 그녀들이 쾌적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자 니아가 묘한 눈길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소년은 원래부터 이랬어?”
“네? 제가 뭐요?”
“같이 걸을 때면 도로 안쪽으로 걷게 한다거나, 늘 손수건을 들고 다니면서 챙겨준다거나... 은근히 걸음 속도를 맞춰주기도 하고.. 사소한 것도 하나하나 전부 기억해주고.”
“...제가 그랬어요?”
“으음...”
그녀가 내게서 시선을 돌리더는 라디와 아리엘을 쳐다보았다.
라디가 살짝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네, 아마도요. 모두한테 다 이런 건 아닌데... 적어도 자기 사람은 끔찍이 아끼더라고요. 한번은 던전에서 같이 야영할 때였는데 제가 피곤해 보이니까 몰래 제비를 바꿔치기해서 새벽 불침번을 자청한 거 있죠?”
“정말? 흐물흐물한 피망이랑 새벽 불침번만큼 이 세상에서 끔찍한 것도 없을 텐데... 나야 이제는 야간 경계 담당 길드원이 따로 있으니까 불침번을 설 일은 거의 없지만 가끔 특수한 마물을 잡을 때면 밤을 지새워야 할 때가 있거든. ...혹시 라디 너한테 꿍꿍이가 있어서 그랬던 거 아냐? 호감을 산다던가...”
“아뇨, 그건 절대 아닐 거예요. 지금 생각해도 열이 뻗치는데, 그때 이 사람 제가 여자인 줄도 모르고 있었어요.”
“뭐, 뭐어...?! 그게 무슨 뜻이야?”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저... 라디야 그 이야기는 좀....”
“도란님은 가만히 계세요.”
라디가 단호하게 내뱉었다. 녀석의 짙푸른 눈동자에 감도는 냉기를 보자 모골이 송연해진다.
나는 대체 언제까지 그때의 실수로 고통받는 걸까.
아마 자식을 낳고 난 뒤로도 계속 회자되지 않을까.
눈물을 머금고 입을 다물자 아리엘이 내 머리를 붙잡더니 푹신한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아, 아리엘...?”
“응, 괜찮아 도란. 난 다 이해해줄 수 있어.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도란이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위해 힘써주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마망.”
“음?”
“아리엘 마망!!”
“뭐, 뭐... 마망...?! 자, 잠깐만 도란!! 니아 님 앞이야!!”
“도란님?! 밖에선 좀 자중하세요...!!”
.....
잠시 마차에 다른 덜컹거림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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