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8화 〉 수수께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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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 수수께끼 #4
마차에서 내려 성벽 밖으로 나오자 드넓은 곡창 지대가 펼쳐졌다.
시원한 서풍이 들판을 스치자 청량한 기운이 머리끝까지 퍼져나간다.
아직은 휴경 시기라 황량하지만, 바람꽃이 화사하게 피어날 때 즈음이면 사내들이 밭을 갈고 아낙네들이 그 위에 씨를 뿌리겠지.
조금 더 나아가 작은 언덕을 넘어서자 야트막한 울타리로 둘러진 영역이 나왔고, 그 너머로는 파릇파릇한 목초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멀찌감치 뛰노는 셰퍼드와 송아지 떼를 바라보며 목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라디가 불안하게 팔꿈치를 매만지며 읊조렸다.
“...정말로 이런 데서 관광 마차를 빌릴 수 있는 거예요? 아무리 봐도... 그냥 평범한 목장처럼 보이는데...”
“그러게... 나도 어제 상점 주인한테 들은 거라... 일단 한번 물어나 보자.”
저만치 마구간으로 보이는 허름한 축사가 몇 개 있긴 했지만, 지금은 방목 중인지 텅텅 비어있었다.
방정맞게 다가와 꼬리를 흔들어대는 세쌍둥이 셰퍼드를 쓰다듬어주며 목장 구석 오두막으로 다가가자 방수포 덮어진 장작더미와 건조 중인 붉은 과실 등 흙내 물씬 풍기는 정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리는 마호가니 나무의 붉은 기운이 도는 현관문 앞에 도달해 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혹시 안에 계신가요?”
.....
“실례합니다!! ....반응이 없네.”
“...도란, 만약 여기가 아니면 어떡하지?”
“뭐, 그럼 딴 데서 빌리면 되지. 굳이 마차 대여소가 아니어도 웃돈을 얹어주면 하루 동안 마차를 빌리는 것쯤은...”
끼익...
“아...”
대화를 나누던 도중 문이 열리더니 다부진 체격의 중년 한 명이 비척거리며 고개를 내밀었다.
지독한 럼주 냄새에 라디가 황급히 코를 움켜쥐자 남자가 힐끗 곁눈질하더니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시껌둥이 한 명에 사냥 쥐 꼬맹이까지.. 아주 환장할...”
파직!!
“크흠... 그래 무슨 일인가.”
그는 썩 우리를 반기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니아의 손에 피어오른 스파크를 보고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꿨다.
살며시 손을 뻗어 그녀를 진정시키고 후드를 젖히며 입을 열었다.
“얘기를 듣고 왔는데, 혹시 여기서 마차를 구할 수 있나요?”
“마차? 웬 마차?”
“역시나...”
속으로 탄식하며 고개를 숙이자 중년이 머그잔 안의 맥주를 들이켜고는 옷소매로 거품을 쓱 훔치며 말을 이었다.
“컴... 아마 착각했나 보구먼. 이곳에도 말을 키우긴 하지만 그뿐일세. 마차를 대여해주는 곳은 저 성벽 안쪽으로 들어가면 바로 나올 거야.”
“...감사합니다.”
그래도 너무 멀리 벗어나지는 않아서 다행히다.
가볍게 묵례해 인사하고 막 오두막을 떠나려던 찰나
“...아니면 목장 견학이라도 하고 갈 텐가?”
“목장 견학이요?”
“그래, 마침 일손이 살짝 모자라던 상황이었거든. 내 조금만 도와주면 우유랑 치즈를 좀 나눠주도록 하지. 뭣하면 송아지 고기를 조금 가져가도 좋고.”
“그게 정말입니까...?”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예정했던 도시 투어가 조금 늦어질 수는 있겠지만 어차피 온종일 마차만 타고 돌아다닐 것도 아니니까. 오히려 이런 흔치 않은 경험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슬쩍 돌아보자 아리엘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목장 견학이라... 재밌을 거 같아!! 목장에서 작업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건 처음이거든!”
“나도 목장은 처음인데...”
“저도 찬성이에요.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는 아니니까요.”
“...그럼 결정됐네. 저 그럼 어르신, 거들어 드릴 일이라는 건...”
“별거 없네. 그냥 건초 좀 갈아주고 우유 짜고 뭐 그런 게지. 평소면 혼자서도 거뜬했겠지만 보다시피 다리를 좀 다쳐서 말일세. 그 망할 놈의 개랑 놀아주다가 삐끗했지 뭔가.”
그가 퉁명스럽게 내 발치에 들러붙은 강아지를 눈짓했다. 말투는 다소 불퉁해도 살점 붙은 뼈다귀를 던져주며 은근히 미소짓는 걸 보니 사이가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가 쩔룩거리며 걸어나와 부지깽이를 목발 삼아 움켜쥐더니 목장 쪽으로 앞서나가며 말했다.
“...아까 심한 말을 한 건 사과하지. 술만 들어가면 말이 막 나오는 버릇이 있어서 말이네...”
“뭐... 괜찮습니다. 흔히 있는 일이니까요.”
라디가 언짢았다면 또 얘기가 달랐겠지만, 녀석도 별로 개의치 않는 기색이니까.
하지만 후드를 벗지 않았는데도 내 머리칼 색이랑 라디의 종족은 어떻게 안 거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목장 주인은 내 얼굴을 흘겨보며 마지막으로 잔을 크게 들이켜고는 마당 들목의 우편함을 뒤석거리며 중얼거렸다.
“...대인배구먼. 나쁘지 않아. 그럼 일단 저 소들을 어떻게 해야겠는데... 자네 힘은 좀 쓸 줄 아나?”
“네, 모험가라서 어느 정도는...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우선 소들한테 밥을 좀 줘야겠네. 저기 창고에 가면 쌓아둔 건초가 잔뜩 있을 거야. 그걸 좀 들고 와서 저 여물통에다가 새로 좀 깔아주게나. 거기 부인들은 지푸라기에 찔리면 아플 수도 있으니 조심하고 햇볕이 따가우니 가서 밀짚모자라도 걸치게.”
“아, 감사합니다...”
퍽 세심한 배려에 내심 감탄하며 오두막 외벽에 걸린 짚모자를 수에 맞게 나눠주었다.
이후로는 삐걱거리는 창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산더미처럼 쌓인 건초더미가 보였다.
만선으로 돌아가는 어부처럼 지푸라기를 한 아름 끌어안고 창고를 나서자 남자가 울타리 쪽문을 젖히며 소리쳤다.
“이쪽으로 오게! 여기다가 내려놓으면 되네!!”
“여기 이 통에다가요?”
“그래, 최대한 넓게 펴서 깔아주게. 그래야 소들이 서로 안 싸우지.”
“네, 알겠어요. ...생각보다 옮기기 힘드네.”
“읏...! 도란님! 와서 이것 좀...”
“그래, 잠깐만 기다려...! 지금 갈게!”
휘청거리는 라디에게 얼른 달려가 거들어주었다.
이어서 아리엘이 뒤따라 짚을 들고 나왔고, 니아의 경우에는 아예 창고를 통째로 옮길 기세기에 목장 주인이 황급하게 소리쳤다.
“그, 그 정도는 필요 없네...!!”
“그래요?”
“...그럴세, 한 번에 모든 걸 하려 들지 말고 여러 번에 걸쳐서 하게나. 무릇 인생이란 건 성급해봤자 독이 될 뿐이거늘... 뭔 여인이 저리 힘이 세단 말인가? ...자네 밤에 고생 좀 하겠구먼?”
“....”
딱히 정정하기도 뭐해 머쓱하게 웃으며 흘러넘겼다.
그러고 보니 이 도시에서 니아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을 만난 건 처음이던가. 성벽 밖에서 사는 탓에 소식이 한 발 느린 모양.
느긋하게 여물통에 지푸라기를 채우며 주위를 둘러보자 들판을 자유로이 돌아다니던 소들이 한둘씩 몰려들기 시작했다.
우량 품종인 탓인지, 넓은 목초지에서 방목하는 덕뿐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마리 한 마리가 집채만 한 송아지 무리.
그렇게 한두 번 왕복하자 다행히 할당량을 채울 수 있었다.
수통을 나눠마시며 서로의 옷에 들러붙은 지푸라기를 떼어주자 목장 주인이 다가와 말했다.
“금슬이 좋구먼. 날이 더워지기 전에 일을 끝마쳐야 하니 바로 다음 장소로 갈 건데 괜찮겠는가?”
“네, 다음은 뭐예요?”
“이번 건 조금 힘들 수도 있네. 바로 소 젖을 짜는 일이지. 자 따라오게나.”
“소 젖...?”
의아하게 서로를 돌아보는 라디 일행을 잠시 뒤로하고 쩔뚝거리는 남자의 등을 쫓았다.
뜨거운 한낮의 태양과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들판을 십여 분 정도 가로지르자 목장 주인의 등 너머로 한층 높은 울타리가 쳐진 별개의 구역이 나왔다.
그가 울타리 안쪽을 턱짓하며 말했다.
“암소를 따로 구분해둔 곳일세. 그 옆에 있는 건 염소 무리고. 자네 부인들은 우유를 먹을 수 있나?”
“네, 뭐...”
간혹 분위기를 돋울 때 치즈에 와인을 곁들여 먹기도 했고, 오늘 호텔에서 먹은 음식 중에도 유제품을 가공한 게 있었으니까.
남자가 눈가의 주름을 매만지며 읊조렸다.
“축복받은 체질이군. 나는 우유를 조금만 먹어도 속이 살살 아파서 말이야... 대신 치즈는 좀 먹을 수 있지만.”
“아... 간혹 그런 사람이 있죠. 저희 아버지도 그러셨어요.”
“자네의 아버지라... 그립구먼.”
“네?”
“나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아버지를 여의어서 말일세... 정말 까마득해서 기억도 나지 않아. 자네도 효도할 수 있을 때 잘하구려.”
“아... 네, 감사합니다.”
이젠 효도하고 싶어도 못하지만...
남자는 밀짚모자 아래로 날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챙을 눌러쓰며 울타리 구석으로 다가가 목제 양동이를 들고 돌아왔다.
“자, 이 정도 크기면 충분할 걸세. 내가 먼저 시범을 보일 테니 잘 보고 따라하게나.”
그가 어미 소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배 아래 양동이를 받쳤다.
이어 절름거리는 오른발을 펴고 앉아 지푸라기로 분홍색 젖에 묻은 진흙을 닦아내고는 능숙한 손길로 우유를 짜내기 시작했다.
니아가 내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우와 소년! 정말로 우유가 나오고 있어!!”
“그러게요... 직접 보는 건 처음인가 봐요?”
“응응! 목장에 놀러 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잖아! 나는 항상 동물들이 피해 다녀서... 근데 여기 소들은 진짜 얌전하다! 내가 다가가도 겁을 안 내! 봐봐!!”
“잘됐네요. 지금 즐기실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겨 두세요. ...너희도.”
“네, 이렇게 우유를 짜내는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보니까 신기하네요... 살짝 이상야릇하기도 하고...”
“그러게... 혹시 아프지는 않겠지...?”
“....”
귀엽게 입을 벌리고 감탄하는 그녀들을 보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허리춤의 맞닿아 살랑거리는 표범 꼬리를 의식하며 말했다.
“이따가 직접 해봐야 하니까 잘 보세요 니아 님.”
“알았어! 근데... 우리가 우유를 다 가져가 버리면 소 아기가 먹을 젖은 어떻게 구해?”
“응? 그거야 당연히... 어.. 그러네요.”
“그러고 보니...”
이곳에 가축용 분유가 있을 리도 없는데.
일제히 목장 주인을 쳐다보자 그가 몸을 일으키며 읊조렸다.
“그래서 적당한 만큼만 짜내는 게 중요하다는 걸세. 송아지가 먹을 젖도 남겨놓아야 하니 말이야. 암소 한 마리당 양동이 반의반 정도만 채우면 되니 참고하고, 나는 옆 우리에서 염소젖을 짜고 있을 테니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부르시게나.”
“아, 그럼 염소 쪽도 저희가 도와드릴...”
“괜찮아. 걔네는 성격이 까다로워서 자칫 다칠 수도 있거든. 이 녀석들이나 잘 부탁하네.”
목장 주인이 털털하게 턱짓하고는 양동이를 어깨에 짊어지고 옆 울타리로 향했다.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젖소에게 다가가자 라디가 걱정스럽게 쳐다봐왔다.
“조심하세요 도란님.. 잘못했다가 발에 채이기라도 하면...”
“괜찮아 이 정도는. 니아 님한테 밟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뭐, 뭐..? 내가 왜 소년을 밟아?! 호, 혹시 소년 그런 취향이었어...? 그럼 지금까지 아프다고 했던 것도 사실...”
“그냥 한 소리에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니아의 밀짚모자를 푹 눌러준 뒤 목장 주인이 앞서 보인 것처럼 소의 어깨를 다독여 진정시켰다.
이후 몸체 아래 바스켓을 받치고 젖에 들러붙은 진흙과 풀잎을 닦아낸 뒤 달걀을 감싸듯 움켜쥐자 말캉말캉한 촉감이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손아귀에 압력을 가해 잡아당기자 새하얀 우유가 한줄기 뿜어나온다.
“오오... 진짜 나오네? 생각보다 힘도 안 들어.”
“그래요? 소도 얌전하네요... 막 날뛸 줄 알고 걱정했는데...”
“자, 잠깐 소년...! 얘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데 어디 아픈 거 아냐...?! 빨리 목장 주인을...!”
“괜찮아요. 소가 침을 흘리거나 거품을 무는 건 되새김질 때문이라 들었거든요.”
“아하 그렇구나... 근데 소년은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는데도 아는 게 정말 많네?”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아서요. 그보다 니아 님도 와서 한번 해 보세요. 동물 좋아하잖아요.”
“으... 내가 할 수 있을까...? 너무 세게 쥐어서 젖소가 터져버리면 어떡하지...?”
“터져버린다니... 그야 니아 님은 힘 조절이 서투르긴 하지만...”
말끝을 흐리며 젖소와 니아를 번갈아 쳐다보자 라디가 소매를 걷으며 나섰다.
“제가 도와드릴 테니 괜찮아요. 같이 하면 니아 님도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이쪽으로 오세요!”
“으응, 고마워...”
라디가 니아의 손을 붙잡고 암소에게 다가갔다.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서로 어깨를 맞대고 앉아 열심히 두런거리는 그녀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더군다나 어느샌가 곁으로 다가와 일을 거드는 아리엘의 고아한 얼굴에 성근 밀짚모자 틈새로 드리운 햇살이 장난스러운 빛조각을 수놓은 모습을 보면...
‘어쩌면 귀농도 나쁘지만은 않겠네...’
한 삼십 년쯤 뒤엔 시골에서 텃밭이나 가꾸며 살아가는 것도 진지하게 괜찮지 않을까.
맑게 웃는 아리엘을 쳐다보며 그런 생각을 뇌까리고 있자니 그녀가 하늘을 고이 담은 듯한 눈동자로 말했다.
“음... 이거 말캉말캉해서 은근 재밌다. 도란도... 응? 왜, 왜 도란?”
“.....”
행복감에 젖어 지긋이 응시하자 아리엘은 슬쩍 몸을 뒤로 빼더니 날 불안하게 쳐다보며ㅡ
“저... 도란...?”
“.....”
“나, 난 아직 안 나온다...?”
“...마망?”
새하얀 팔뚝으로 가슴께를 가리는 그녀의 뺨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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