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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259화 (259/375)

〈 259화 〉 수수께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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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 수수께끼 #5

양동이를 전부 채운 뒤, 망가진 울타리 손질과 간단한 청소까지 마쳤을 즈음 목장 주인이 다가와 말했다.

“흠... 솔직히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시켜봤는데 예상보다 일을 훨씬 잘하는구먼? 중간에 힘들다고 내팽개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난 또 여자 앞에서 뻗댈 줄이나 아는 뺀질이일 거라 생각했지.”

“이 정도는 가뿐합니다. 그럼 이제 다음 일은 뭡니까?”

“이게 끝이라네.”

“네?”

“말했잖은가. 조금만 거들어주면 된다고. 그래도 점심이 훌쩍 넘어서야 다 끝낼 줄 알았는데 원... 자네들은 이제 가봐야 하지 않나? 일을 거들어주는 건 이 정도면 충분하네.”

“아... 그래요?”

예상보다 훨씬 싱겁게 끝났다.

아쉬운 마음에 옆을 돌아보자 우유에 손가락을 찍어보며 호들갑 떠는 라디 일행이 보였다.

이대로 돌아가기엔 조금 섭섭한데...

슬그머니 그녀들에게 다가가자 니아가 오목하게 만든 손바닥에 우유를 담아 내게 들이밀었다.

“소년도 한번 마셔봐! 엄청 달고 고소하다?! 이렇게 진하고 맛있는 우유는 처음 먹어봐!!”

“.....”

난처하게 라디와 아리엘을 쳐다봤지만 그녀들은 그저 따스한 미소를 보내올 뿐 딱히 불편해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니아의 손에 담긴 우유를 마시자 그녀가 까르르 웃으며 물어왔다.

“어때 소년?”

“어, 엄청 맛있네요...!”

비릴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심지어 설탕을 넣은 것도 아닌데 달짝지근하기까지 하다.

‘신기하네...’

그러고 보니 우유를 먹어보는 게 얼마 만이던가.

이 근방에는 대규모 낙농을 하는 사람이 드물뿐더러, 유통 문제로 상인들도 취급을 꺼리는 탓에 생우유를 구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간신히 파는 곳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엄청나게 비쌀 테고.

양동이 가득 찰랑이는 하얀 수면을 응시하자 목장 주인이 다가와 말했다.

“갈 때 조금 정도는 싸갈 수 있게 해주겠네. 뭣하면 더 가져가도 되지만 나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 1온스당 3페니로 어떤가?”

“저, 정말요?”

“그렇고말고. 자네들이 아니었더라면 상당히 수고로울 뻔했으니. 마음만 같아서는 더 챙겨주고 싶지만 이 목장에서 나온 우유를 바라는 자들이 많아서 말이야. 인당 두세 병까지가 한계라네.”

“아뇨! 그 정도로도 엄청 감사하죠!!”

1온스당 3페니면 대략 1리터짜리 한 병에 은화 한 닢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결코 가벼운 금액은 아니지만 시중에서 판매되는 우유의 가격을 생각하면 거저나 다름없다. 이만큼 품질 좋은 것도 없을 테고.

얼마나 사갈까 고민하자 목장 주인이 양동이에 뚜껑을 덮으며 재촉했다.

“그럼 우유만 사면 바로 떠날 겐가? 그렇다면 서두르도록 해. 병에 담는 게 늦어질수록 신선도가 떨어질 거야. 살균 과정도 거쳐야 하고.”

“떠나다니? 도란, 우리 벌써 가는 거야?”

“응, 그런가 봐.”

“우음... 뭔가 아쉬운데...”

“그러게요...”

“.....”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으며 내뱉었다.

“...그럼 조금 더 있다 갈까?”

“어? 그래도 돼 도란?”

“뭐... 땀도 흘렸겠다, 이대로 돌아다니기도 곤란하고 집에 들러서 한번 씻어야 할 텐데 그럼 늦는 건 매한가지잖아. 기왕 이렇게 된 거 도시 관광은 내일 하고 오늘은 좀 느긋하게 있다 가자.”

“응응! 나도 그게 좋아!!”

“저도 찬성이에요!”

“그래, 그렇다면...”

슬그머니 목장 주인을 쳐다보자 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젊은 사람들이 늘어나면 나야 환영이지. 덕분에 시끌벅적하고 좋구먼. 그럼 오두막으로 돌아가세. 좀 머물고 간다고 하니 이왕 점심도 먹고 가.”

“감사합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자 남자가 털털하게 손을 내저었다.

나는 우유가 든 통을 짊어지고 목장 주인의 등을 쫓아 들판을 가로질렀다.

야트막한 언덕을 넘나들며 그와 나란히 보폭을 맞추다 보니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기도 어색해 말을 걸었다.

“저... 어르신, 근데 뭐 하나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하게.”

“어르신은 이런 곳에 살면서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아무리 도시 근처는 기사가 정기적으로 토벌을 나온다고 해도 가끔 몬스터가 출몰할 텐데... 걱정되지는 않으세요?”

아무래도 이 세계는 마물이 존재하는 만큼 도시를 중심으로 인구가 분포해있고, 작은 마을도 성곽이나 목책 등 방비 시설이 확고하다.

성벽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상당히 드물다는 것이다.

목장 주인이 전방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몬스터 따위는 두렵지 않네. 갈퀴질 한 번이면 전부 머리가 터져나갈 것들 아닌가. 오히려 뻔뻔하게 가축을 서리하러 드는 인간이 더 무섭지.”

“....”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머뭇거리자 그가 말을 이었다.

“...되레 내가 묻고 싶군. 자네야말로 괜찮은 건가? 검은 머리로 살아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오백 년 전, 대전쟁이 벌어지기 이전에는 흑발도 취급이 나쁘지 않았지만 지금은 종종 악마와 비견되곤 하지 않나?”

“뭐... 마냥 좋지만은 않죠. 그래도 이젠 괜찮아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니까 사람들도 덜 건드리더라고요. 뭐라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냥 무시해버리는 편이고요.”

“그런가? 많이 유해졌구먼... 그렇다면 만약 비슷한 존재가 나타나면 어떻게 할 건가?”

“비슷한 존재? 같은 흑발인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그럴세.”

“아니 뭐 그야...”

말을 잇던 도중 입을 다물었다.

앞서 걷던 그가 발을 멈추고 날 빤히 주시하고 있었기에.

온 농작물의 기저, 퇴비 섞인 대지처럼 짙은 갈색 눈동자에 담긴 저의를 보자 순간 멈칫했다.

나는 의아하게 그와 시선을 맞추며 대답했다.

“...검은 머리라고는 해도 단지 그뿐이고 저랑 딱히 관련이 있다거나 한 건 아니니까요. 조금 동정심이 들기야 하겠지만...”

“그럼 그냥 방치할 텐가?”

“음... 방치라고 하니 어감이 조금 이상하지만... 아마 그렇겠죠?”

“그런가...”

그가 고개를 돌리고 발걸음을 이어나갔다.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무심코 덧붙였다.

“뭐 그래도... 어떻게 인연이 닿는다면 가능한 한에서 도와줄 수는 있겠지만요. 사실은 지금도 한 수인을 구출하려고 노력 중이거든요.”

“영주성에 갇힌 그 소녀 말인가.”

“네 맞아요. 어쩌다가 우연히...”

잠깐.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눈초리를 매섭게 좁혔다. 발을 뒤로 물리며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긴장을 머금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으나 남자는 태연하게 손을 내저으며 앞길을 재촉했다.

“아까 부인들이 하는 대화를 들었네. 엿들으려 의도했던 건 아니니 기분 상하지 말게나.”

“아... 그럼....”

뭐... 딱히 숨길만 한 내용은 아니었긴 한데...

라디와 아리엘이 밖에서 그런 대화를 했다고...?

떨떠름한 뒷맛을 삼키며 들판을 나아가자 곧 오두막이 나왔다. 무늬진 통나무 외벽과 타다 남아 잔불이 일렁이는 화톳불은 아늑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쪽문을 젖히고 마당 한켠에 양동이를 내려놓자 셰퍼드 세 마리가 혓바닥을 휘날리며 득달같이 달라붙었지만, 목장 주인의 손짓 한 번에 시무룩하게 꼬리를 말고 물러났다.

그가 허리를 펴며 말했다.

“그럼 난 점심을 준비하고 있을 테니 쉬고들 있게. 찝찝하다 싶으면 저 개울가에 가림막이 있으니 가서 씻고. 웬만해선 저 축사 근처로는 가까이 다가가지 말게.”

“축사는 왜...”

“별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고 그냥 더럽거든. 요즘 청소를 안 해서 오물투성이일 걸세. 다음번에 비가 팍 쏟아질 때 씻어내야 하는데...”

“...알겠습니다.”

“그래, 너무 멀리들 가지 말고 근처에 있어.”

목장 주인이 내게서 양동이를 받아들더니 별채로 향했다.

천천히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여성진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니아가 내게 소리쳤다.

“소년! 얘네들 좀 봐!! 내가 만져도 가만히 있다?! 신기해!!”

­컹!!

개들에게 둘러싸여 어쩔 줄 모르는 그녀를 보자 입가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아리엘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소매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뭐랄까... 이렇게 보니까 니아 님도 그냥 평범한 여자애 같네.”

“그러게.”

“...뭘 남 일처럼 말하는 거야. 대체 뭘 어떻게 하면 까다롭기로 소문난 A랭크를 이렇게 순한 양처럼 바꾸어 놓은 건데?”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저번에 암시장에서 잠깐 같이 돌아다닌 거랑 이번에 조금 챙겨준 것밖에...”

“...이러다가 정말로 아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거 아녜요? 한 대여섯 명쯤...”

“아서라, 난 여기서 더 늘릴 생각 없다.”

아리엘과 동시에 교제하게 된 것도 워낙 특별한 경우였으니까.

손을 휘저어 그럴 리 없다고 일축하고는 마당 바깥으로 향하자 라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디 가게요?”

“개울에서 손 좀 씻고 올게!”

겸사겸사 란이한테 바깥 공기도 쐬어줄 겸.

걸어서 오두막으로부터 오 분 정도 떨어진 지점까지 도달하자 맑게 흐르는 냇물이 나왔다. 다행히 성 외부로부터 흘러오는 덕에 식수로 써도 문제없을 만큼 맑고, 하류 쪽에는 축사로 보이는 허름한 건물이 세워져 있다.

서늘한 냇물에 발을 담그며 특수 제작된 미다스 금속 수통을 열자 물 대신 익숙한 형체가 튀어나왔다.

­.....

“란이야 잘 있었...”

­홱!

“라, 란이야...?”

한데 녀석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는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황급히 말을 더듬으며 란이의 두 어깨를 붙잡았다.

“왜, 왜 그래 란이야...? 오랫동안 혼자 둬서 그래...?”

­.....

“미안해... 아빠가 좀 바빠서 그랬어. 이따가 잔뜩 놀아줄 테니까 화 풀어. 어쩔 수 없다는 거 잘 알잖아.”

­....

“이리 와.”

란이가 마지못해 다가와 품에 안겼다.

온 애정을 다해 끌어안고 토닥여주자 녀석은 차츰 기분을 풀더니 슬그머니 내게 밀착했다.

둥그스름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속삭였다.

“...란이야, 조만간 던전이란 곳을 갈 거거든? 그때가 되면 남들 시선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같이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 조금만 참아. 란이도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지?”

­.....

“응, 란이야?”

­....

란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 내키지는 않는지 여전히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지만, 그마저 검지로 뺨을 쿡 찌르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가슴팍에 안겨들었다.

이래서 다들 딸바보가 되나 보다.

나는 녀석을 품에 끌어안고 함께 평화로운 목장의 풍경을 감상했다.

멀리서 음메­ 하고 울어대는 송아지 무리, 파란 하늘 속에서 양떼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 반짝거리며 발치를 적시는 시냇물을 보고 있노라면 모든 근심이 씻겨내리는 듯하다.

한데 돌연 란이가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손짓했다.

­...됴란.

“왜, 저기 뭐가 있어?”

­끄덕.

“아, 동물 우리 때문에... 곤란하네.”

란이가 가리킨 곳에는 너저분한 축사가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강이 오염되는 걸 싫어했지.

축사에 가까이 접근하자 지독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가득 차다 못해 넘쳐흐르는 배설물은 잔디를 적시고 흘러내렸고, 개울로 스며들어 수질을 흐렸다.

건물 뒤편으로 분뇨 구덩이가 나 있긴 하지만 입구가 오물로 막힌 모양.

“오랫동안 청소를 못해서 틀어막혔나 보네... 어떡할까 란이야, 치우고 싶어?”

­.....

녀석은 미간을 한껏 구긴 채 대답 대신 수류를 조작했다.

졸졸 흐르던 개울에서 투명한 물줄기가 뱀처럼 솟구치더니 일제히 한 지점으로 쇄도하며 축사 바닥에 쌓인 배설물들을 깔끔하게 씻어내기 시작했다.

잔디 위에 흘러넘친 분뇨까지 남김없이 구덩이 안으로 몰고가는 수류 조작 능력에 감탄하고 있자니 문뜩 미세한 위화감이 들었다.

“어...? 근데 란이야 너.. 키가 좀 큰 것 같다...?”

­됴란?

“아니... 분명히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자란 것 같은데...”

눈을 찡그리고 란이의 전신을 요리조리 훑어봤지만 녀석은 축사를 청소하는 데 몰두했다.

잠시 후, 시냇물의 수위가 살짝 낮아졌을 즈음에는 발목 높이까지 쌓였던 오물이 말끔하게 처리되었다.

의기양양하게 허리를 짚고 고개를 치든 란이를 대견스럽게 바라보고 있자니­

“호오... 운디네인가.”

누군가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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