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화 〉 수수께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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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수수께끼 #6
“읏...?!”
내 뒤로 다가올 동안 어떠한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황급히 전방으로 도약하며 칼자루를 움켜쥐자 시야에 들어온 건
“...어르신이 왜 여기에..”
“요리에 쓸 물을 길으러 나왔는데 재밌는 짓을 하고 있지 않나. 궁금해서 한 번 와봤지. 어디 좀 자세히 봐도 되겠나 꼬마 숙녀분.”
.....
목장 주인이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란이와 시선을 맞췄다.
그는 상당히 오래되어 보이는 제스처로 정중하게 예를 갖추더니 란이의 말캉말캉한 손등을 요리조리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흐음... 타고났군. 정령 중에서도 마력을 다루는 솜씨가 현저해... 마나 용적도 월등하고... 곧 있으면 중급으로 진화할 텐데 훗날이 기대되는군.”
“아니 아니 잠깐만...! 지금 뭐라고...!!”
황급히 끼어들어 그의 손목을 붙들자 거목이라도 움켜쥔 것처럼 전례 없는 단단함이 느껴졌다.
밀짚모자 아래로 마주친 눈동자가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품었기에, 나는 불에 데인 듯 황급히 물러서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 아니 그보다 정령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으신 거예요?”
“정령이 뭔 대수인가.”
“아니... 하지만 정령은 상당히 드문 종족이라고...”
“꼭 그렇지만도 않네. 옛날엔 제법 흔했지만 지금은 인간들을 피해 자연 각지로 숨어들어서 수가 줄어든 것처럼 보이는 게지. 잘 둘러보면 이 들판에도 노움 몇 마리가 땅에 박혀있었을 텐데 못 봤나?”
“.....”
평범한 낙농업자가 대체 어떻게 그런 걸...
아니, 만약 이 사람이 마나를 대량으로 보유했을 경우 외견만으론 연령을 짐작할 수 없다. 보기보다 비범한 인물일 수도 있다는 뜻.
마력을 다룰 줄 안다고 해서 모두가 모험가나 기사 마법사 등 전투직에 종사하는 건 아니고, 이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분명 존재하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니아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일단 이 남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보류한 뒤, 조바심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럼 그건 둘째 치고... 물어볼 게 너무 많은데, 정령에 대해서 얼마나 아시는 거예요?”
“남들 정도만큼은 안다고 자부하지.”
“그럼... 란이가 곧 중급 정령으로 진화한다고요?”
“그래, 아마 얼마 남지 않았을 게야. 마력량만 보면 이미 진즉에 진화하고도 남았겠군. 다만... 최근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마나의 순환이 고르지 못해.”
...촉수에 감염되었던 탓인가.
“그럼 어떻게 치료하죠...?”
“자연히 나을 테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좋네.”
“그런가요...”
속으로 안도하자 그가 덧붙였다.
“마나의 흐름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날이면 머잖아 진화할 테지. 이목구비도 뚜렷하고, 자네의 사랑을 받고 자랐으니 어여쁜 꼬마 숙녀가 되겠군. 경사로구먼.”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요... 자, 잠깐...!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숙녀라고 했어요?”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아, 아니... 어떻게 그걸 아신 거예요...? 분명 정령은 중급이 되기 전까지는 성별을 특정하는 게 불가능...”
“그 정도쯤이야 보면 바로 아네. 내가 얼마나 많은 정령을 봐왔다고 생각하는 건가.”
“.....”
“...그러니 유아용 옷이나 몇 벌 사두는 게 좋을 걸세. 그때도 지금처럼 맨몸으로 다닐 수는 없을 테니.”
“아니, 그... 감사합니다..”
뭐... 란이가 여자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다.
묘하게 행동이나 몸가짐이 여성스럽기도 했고, 라디나 아리엘을 대할 때와 날 대할 때의 태도가 확연하게 달랐으니까.
물론 이자의 말을 전부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입을 다물고 침묵하자 란이가 또르르 달려와 내 등 뒤로 숨었다.
남자는 우리를 짙은 고동색 눈동자에 담으며 희미하게 미소짓더니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읊조렸다.
“사랑받고 있구먼... 그럼 물도 다 길었으니 난 이제 돌아가 보겠네. 축사를 치워준 건 감사를 표하지. 점심이 준비되기까지는 아직 좀 남았으니 부인들과 좋은 시간 보내고 있구려.”
“아... 네... 감사합니다.”
목장 주인이 개울물이 든 양동이를 어깨에 짊어지고 터벅터벅 오두막으로 향했다.
그에게 목발이 없었다는 걸 깨달은 건 한참이 흐르고 난 뒤였다.
*
란이가 원 없이 만족할 때까지 냇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오두막으로 돌아오니 다소 생소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언니! 뒤에 조심해요!!”
“읏...! 막아볼게!!”
“느려~.”
“.....”
난데없는 육탄전에 어안이 벙벙한 채로 마당에 들어서자 세 명이 동시에 동작을 멈추더니, 그중 금발 형체가 내게 달려들었다.
“소년~!”
와락!!
“아니! 아파요!! 이거 좀 놓고 이야기해요!! ...근데 다들 뭐 하고 있던 거예요?”
“응! 대련 연습중이었어! 다치면 안 되니까 타격하는 시늉만! 내 근접 격투술을 한 번 배워두면 앞으로 요긴하게... 응? 잠깐만 이상한 냄새가...”
그녀가 도중에 말을 멈추더니 내 셔츠에 얼굴을 묻고 킁킁거렸다.
라디와 아리엘을 의식해 재빨리 발을 빼려던 찰나, 니아가 먼저 고개를 떼더니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정령...?”
“...아니, 어떻게 냄새만으로 알아보시는 거예요.”
“진짜로 정령 맞아? 이런 곳에서...? 대체 어떻게...”
“설명할 테니까 일단 이것 좀 놓아주세요.”
어차피 니아한테는 언젠가 밝힐 예정이었으니까.
그녀를 천천히 떼어놓고는 얼음 호수에서 처음 만난 것부터 저택에서 함께 지낸 것까지 란이의 대해 털어놓자 금색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하지만 니아는 살짝 놀란 게 전부일 뿐,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말을 마친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생각보다 침착하시네요?”
니아가 표범 귀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으응... 아냐, 엄청 놀랐어. 도란이 정령하고 계약했을 줄이야... 아니 계약을 한 건 아니라고 했던가?”
“네, 뭐... 저번에 말했던 촉수 있죠? 거기에 감염되었던 걸 도와주니 졸래졸래 쫓아오더라고요. 지금은 저희 집에서 같이 살고 있고요.”
“으음... 그래서 그때 촉수란 단어에 그렇게 예민했었구나? 흠... 사실 근처에 도란 말고도 정령하고 계약한 사람이 한명 더 있거든. 엘루아 기억나?”
“엘루아라고 하면...”
“...그때 말톤님과 함께 보았던 엘프님이네요. 분명 엘루아즈... 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것 같은데.”
“그래, 기억났다.”
말톤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던 모습이.
어느새 다가온 라디의 허리를 슬쩍 끌어안자 니아가 손가락을 입에 물며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으나 도리도리 고개를 젓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엘루아가 정령술을 다룰 줄 알거든! 솔직히 나는 그쪽에 문외한이다 보니 일반 마법하고 무슨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이 원한다면 나중에 자리 한 번 마련해 줄까?”
“정말요? 그럼 너무 감사하죠!”
붉은 매 길드라면 내가 정령을 사역한다는 걸 알아도 크게 괘념치 않을 테니까.
“응 응! 아실리도 엄청 좋아할 거야!! 소년이 정령을 부리고 다닌다는 소식을 들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길드에 포섭하려고 들걸?”
아닐 수도 있고.
“...그럼 그건 조금 고려해보는 편이..”
“에이 그런 건 나중에 얘기하고, 어쨌든 지금 그 물통 안에 운디네가 담겨있다는 거지? 으흠... 미다스 금속을 썼구나? 그러니 내가 못 알아봤지.”
“네... 아직은 하급이지만 곧 중급으로 진화할 거라네요. 지금은 놀다가 지쳐 잠들었으니 직접 보여드리는 건 다음번에 할게요.”
“으음... 알았어!”
“잠깐, 도란 지금 곧 중급으로 진화한다고 했어?”
“응,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목장 주인이 가르쳐줬어.”
“저 어르신이...?”
“그래. 이야기하자면 좀 복잡한데...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아.”
“흐음... 그래?”
아리엘이 고운 눈썹을 꿈틀거리며 그가 있는 별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가 살짝 끌어당겨 머릿결을 쓸어주자 표정을 풀고는 슬그머니 기대왔다.
니아가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우와... 지금 소년 엄청나게 나쁜 사람 같아.”
“...제가 뭐요.”
“네가 직접 봐 봐. 양손에 미소녀를 두 명이나 끼고 있잖아. 그것도 엄청 자연스럽게.”
“....”
헛기침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 그래서... 조금 전까지 하던 모의 전투? 그건 다 끝난 거예요?”
“응, 일단 지금은. 앞으로 내가 베라스틴에 있을 동안 종종 봐주기로 했어. 사실 누군가를 지도하는 건 처음이라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둘 다 재능이 뛰어나서 가르치는 보람이 있을 거 같아!”
“오... 대단한데? 하이랭커한테 인정을 받을 줄이야..”
“뭘 남 일처럼... 나중에 도란님도 같이 받을 거예요.”
“그래?”
“네, 사실 누구보다도 필요한 게 도란님이잖아요. 가장 전위에서 싸우시니까요. 하이랭커한테 개인 지도를 받는 건 정말로 흔치 않은 기회라구요?”
“.....”
그야 그럴 수만 있다면 감지덕지긴 하지만...
실로 나는 간간이 검술에 체술을 응용시켜서 전투에 이용해 먹곤 했으니까.
만일 니아의 무투술을 습득할 수만 있다면 단기간에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어 내는 것도 가능할 터다.
도중에 어디 하나 부러지지 않고 버텨낼 수만 있다면.
한숨을 내쉬며 빈 그루터기에 걸터앉으려던 찰나, 목장 주인이 외쳤다.
“거기 있는가! 와서 이것 좀 도와주게!!”
“네! 잠시만요!!”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달려가 사립문을 열어젖히자 목장 주인이 커다란 솥을 든 채로 말했다.
“...이것 좀 옮겨주게. 오두막 안에 있는 식탁 위에 놓으면 될 거야. 뜨거우니 조심하고.”
“네, 좋은 향기가 나는데 뭐에요?”
“리소토일세. 버터에 쌀알을 볶고 그 위에 우유와 치즈를 곁들인 게지. 먹을 만할 걸세.”
“...말만 들어도 엄청 맛있겠네요. 그럼 먼저 가 있을게요.”
“그래, 나도 곧 따라가지.”
솥 손잡이를 젖은 헝겊으로 감싼 뒤 아궁이 딸린 부엌을 뒤로하고 나왔다.
도우러 다가오는 라디와 아리엘을 시선으로 물리고는 오두막 문을 젖히고 들어서자 오래된 가구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오는 원목 식탁 위에 솥을 내려놓자 뒤따라 들어온 여성진이 내부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우와... 엄청 예쁜 집이네... 벽난로랑 테이블도 운치있고... 귀농해서 살기에 딱 좋겠어. 이런 곳에서 비를 맞으며 함께 시간을 보내면 하루하루가 꿈만 같을 텐데.”
“그러게요... 밖에서 볼 땐 상당히 허름해 보였는데... 아늑해요.”
“응! 조금 좁긴 하지만 멋있는 집이네! 그러고 보니 요즘 던전에도 이런 집을 짓는 게 유행하고 있어!”
“그래요, 니아 님?”
“응! 암시장에서 돈을 받고 통나무집을 건설해주는 상단이 있더라고! 던전 내부에선 개인이 땅을 소유할 수 없지만, 집을 지어놓으면 사유 재산으로 인정이 되거든!”
“...그럼 꽤 비쌀 텐데 그걸 사는 사람도 있어요?”
“으음... 짓는 족족 불티나게 팔리던데? 모험가들이 하도 많이 몰려와서 이제 암시장이 있는 3계층까지는 마물도 거의 나오지 않아. 벌이도 나쁘지 않겠다, 실력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은 하위 계층 진출을 계획하면서 던전에 눌러앉을 생각으로 집을 사는 거지.”
“혹시 그 집을 건설해서 판매한다는 상단 이름이...”
“음... 아마 오필리아였나 그런 이름이었어.”
“역시나...”
거기서 그런 장사를 할 상인이라고 하면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뗏목 장사부터 성인용품 판매에 더불어 이제는 건설업까지 손을 덴 건가.
기가 차 헛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돌린 순간, 오두막 문이 열리고 목장 주인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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