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1화 〉 수수께끼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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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수수께끼 #7
오두막 문이 벌컥 열리자 목장 주인이 실내로 들어왔다.
그가 갓 구운 호밀 빵과 잡곡으로 빚은 탁주를 식탁에 내려놓자 모든 점심 준비가 끝났다.
다 같이 음식 앞에 둘러앉아 서로의 눈치를 보며 뜸을 들이자 중년이 잘게 찢은 빵을 리소토에 찍으며 읊조렸다.
“안 먹고들 뭐하나. 식으면 치즈가 굳어서 맛이 없어질 걸세.”
“아, 네... 감사히 먹겠습니다.”
목제 숟가락으로 손을 뻗었다.
천천히 리소토를 한술 떠 머금자 농후한 치즈의 풍미가 입안에 퍼져나갔다.
라디가 조심스럽게 뒤따라 한 입 머금고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호평했다.
“어, 엄청 맛있어요!! 이렇게 치즈가 많이 들어간 음식은 살면서 처음이에요! 버터 때문에 고소하기까지...!”
“음 진짜 맛있어! 게다가 중간중간 들어간 이 향신료는 뭘까...? 완전히 처음 먹어봐. 후추랑은 다른데 되게 독특하고 맛있어!”
“....!!”
니아에 이르러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그릇에 얼굴을 묻고 있다.
중년은 인자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더니 스푼을 입에 가져가며 말했다.
“...오늘 자네들이 수확한 우유로 만든 걸세. 양은 넉넉하게 있으니 많이들 들게. 그리고 아까 그 정령은 아무것도 안 먹어도 되는 겐가?”
“.....”
그러고 보니 란이도 슬슬 배고파할 때가 됐지만...
“...같이 동석시켜도 되겠습니까?”
“그야 물론이지.”
“뭐 그렇다면야...”
귀를 쫑긋하고는 슬그머니 그릇에서 고개를 드는 니아를 의식하며 수통 마개를 열자 하늘색 형체가 무릎 위로 쏟아졌다.
란이는 졸린 눈을 비비적거리며 내게 응석을 부렸지만, 이내 음식 냄새를 맡았는지 식탁 위로 시선을 돌렸다.
콧김을 내뿜는 니아와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됴, 됴란...?
“그, 그... 귀여운 생명체는 뭐야 소년?! 이렇게 귀엽다는 소린 안 했잖아!! 운디네가 원래 이렇게 깜찍한 거였어?”
“처음 봐요? 아깐 분명히 붉은 매 길드원 중에도 정령술사가 있다고...”
“하지만 엘루아가 다루는 정령 중에 운디네는 없는걸? 운디네가 정령 중에서도 유별나게 예쁘다는 소리는 들어봤지만... 나 한번 만져봐도 돼?!”
“네, 뭐... 괜찮긴 한데 적어도 밥은 다 먹은 후에 해주세요.”
“알았어!!”
니아가 쾌활하게 외치며 란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란이는 불편한 기색을 대놓고 드러내며 내 옷깃을 쿡쿡 잡아당겼지만, 식욕이 앞섰는지 모락모락 김이 뿜어나오는 식탁 위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입김을 불어 식힌 리소토를 앞접시에 덜어주자 녀석은 조심스레 맛을 보더니 입가를 가리고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날 돌아보았다.
“...맛있어?”
됴란!!
란이가 어설프게 스푼을 쥔 채 방긋 웃자 식탁 저편에서 기묘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턱을 괸 채 녹아내리는 듯한 표정을 지은 니아를 보며 말했다.
“...일단은 밥부터 먹어요. 나중에 시간 많으니까요.”
“알았어~ 조금만 더 보고! 저 입 오물거리는 것 좀 봐! 어떻게 이렇게 귀엽지?”
“....”
하긴, 우리 란이가 많이 귀엽긴 하지.
한층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부지런히 식사를 이어나가다 보니 목장 주인이 무심하게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그쪽 부인분께선 식전에 기도를 올리던데, 따로 믿는 신이라도 있는 겐가?”
아리엘이 스푼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네, 저는 얼마 전까지 아가사 신전에서 사제로 활동했거든요. 이쪽은 아수르 님의 축복을 받았고요.”
“아가사에 아수르라... 쉽지 않구먼. ...그럼 그쪽 부인분은?”
중년이 슬쩍 흘겨보자 라디가 난감하게 대답했다.
“...저는 딱히 종교가 없어요. 예전부터 이곳저곳 옮겨 다니다 보니 기댈 데가 없었거든요. 그나마 굳이 고르자면 크누트 신일까요? 한창 의뢰를 찾기 어려울 때 도움이 되었으니까...”
“크누트라... 그거 참 기묘한 인연이로군...”
“네...?”
순간 그가 날 돌아보며 미소지었기에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남자는 곧바로 시선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참으로 낡고 그리운 이름일세... 하지만 실체도 없는 신이지 않나. 수백 년이 넘도록 흔한 목격담 하나 없는. 왜 그런 신을 믿지?”
“그렇긴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저도 진심으로 믿는 건 아니니까요. 그냥 어디까지나 길드에 많이 신세를 졌을 뿐이에요.”
“흐음... 그런가? 신기하군. 모험가들은 보통 축복 때문에라도 제대로 된 신 하나쯤은 섬기려 들던데 말이야. 그럼 자네는 어떤가?”
“네? 저요?”
“그래. 자네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
나는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딱히 신앙심을 가진 적은 없지만 굳이 꼽는다면... 안디라 님일 겁니다.”
“안디라라... 그자를 지칭하는 이름은 매번 바뀌어 왔지. 지금은 또 그런 시기인가.”
“...네?”
“왜 굳이 안디라지? 더 나은 신이 널리고 널렸을 텐데 말이야. 이를테면 바람을 관장하는 아카이스는 어떤가? 교단 규모는 작아도 착한 신이지. 아니면 사냥의 신 캘라는? 조금 까탈스럽지만 운이 좋아 권능을 받는다면 자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힘을 안겨줄 걸세.”
“.....”
가벼이 대답하려던 찰나, 입을 다물고 말았다.
호롱불을 등지고 앉은 그의 형체 뒤로 무언가가 남실거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기에.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차가운 땀 한 줄기가 등을 타고 흘러내렸고, 실내의 조도가 한 단계 어두워졌다.
심장과 목덜미를 따갑게 찌르는 통증을 느끼며 눈앞의 놓인 탁주를 들이켜자 한결 호흡이 편해졌다.
“그래서, 대답은?”
“그렇게 말하셔도... 저는 신들에 대해서 잘 모르거든요. 워낙 외진 산골에서 자라다 보니 마을에 교회 같은 것도 없었고...”
“앞으로도 개종할 생각이 없다는 뜻인가?”
“네 뭐... 지금 상황에 딱히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도움... 이라고 하기에 뭐하지만 나름 신세 지고 있는 분이기도 하고... 애초에 믿는다는 표현을 쓸 만큼 각별하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지만요.”
“그런가... 안디라가 자랑스러워하겠군. 잘 알았네.”
“.....?”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계속 밥이나 들게나. 그리고 정령을 안 챙겨줘도 괜찮겠나? 아까부터 자네를 쭉 쳐다보고 있네만.”
“아...”
시선을 내리자 날 뚫어져라 쳐다보던 란이의 옥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한숨을 내쉬고 살며시 웃고는 앞접시에 식힌 리소토를 덜어주자 녀석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기뻐했다.
어느덧 비좁은 식탁에는 둔탁한 나무 식기 소리만이 들려왔고, 식사가 거의 끝났을 즈음에는 기분 좋은 포만감에 취해 나른함이 몰려들었다.
다들 행복함에 젖어있자니 목장 주인이 접시들을 한데 모으며 말했다.
“그럼 밥도 다 먹었으니 난 그릇을 씻으러 가보겠네. 설거지가 끝나는 데로 우유랑 치즈를 챙겨줄 터니 그때까지는 밖에서 잠시 쉬고 있구려.”
“아, 저희가 좀 거들...”
“괜찮으니 쉬고들 있게. 뭣하면 마당에서 개들이랑 좀 놀아주던가. 살아있는 인간은 오랜만이라 다들 반가울 게야.”
“....”
‘살아있는 인간’ 이란 단어에 의문을 표하기도 전, 그가 솥단지 안에 식기를 담더니 문을 열고 오두막 밖으로 나갔다.
석연치 않게 서로를 마주보고는 목덜미를 긁으며 뒤따라 나서려는 찰나, 라디가 내 소매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도란님 저기 좀 보세요.”
“어디... 벽난로를 말하는 거야?”
“네,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음... 뭐가...? 그냥 평범한 벽난로 아냐?”
“.....”
라디가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벽난로 안쪽에 식물이 자라 있어요. 겨울이 지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런데 그에 반해 집이 너무 깔끔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 보통 찬장이나 장식품 위에는 으레 먼지가 쌓여있기 마련인데... 작은 티끌 하나조차 보이지 않아요.”
“그러고 보니 나도 좀 의아한 게 하나 있어... 저기 저 장식장 보여? 겉보기엔 평범하지만... 희미하게 새싹이 돋아나고 있어. 분명 죽은 나무일텐데도... 봐봐! 여기 원목 식탁도!!”
“.....”
오두막 내부를 면밀히 살펴보자 정말로 곳곳에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푸릇푸릇한 싹이 자라난 목제 기구, 오랫동안 실온에 방치됐음이 분명함에도 생기를 잃지 않은 곡물, 포댓자루에서 굴러떨어지자마자 급속하게 발아하기 시작하는 콩.
마치 이 공간에 생명력이 짙게 응축된 것처럼.
순간 오싹한 기분에 식은땀을 흘리며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풍겨오는 방 안쪽으로 손을 뻗으려는 순간ㅡ
“자네들은 안 나올 겐가?”
“아... 아, 알겠습니다.”
중년이 문 손잡이를 붙잡은 채 쳐다보고 있었기에 서둘러 오두막 밖으로 나왔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그가 설거지를 하러 냇가로 떠나자 부득이하게 흐름이 끊겨버렸다.
하는 수 없이 질문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마당 그루터기 위에 걸터앉아 새카만 섀퍼드 세 마리를 쓰다듬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얼마 안 가 목장 주인이 돌아왔다.
그가 우리를 데리고 오두막 뒤에 있는 창고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우유 외에도 종류가 많으니 한번 둘러보시게. 아마 마음에 드는 게 제법 있을 거야.”
“마음에 드는 거라고 하면...”
“뭐, 버터나 치즈 그런 게지. 염소젖으로 만든 유제품이나 훈제 송아지 고기도 있으니 적당히들 골라 가시게.”
“.....”
남자가 창고 문을 열자 발효된 치즈의 독특한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제법 널찍한 창고 내부에는 오크통과 천으로 덮인 원형 치즈틀이 잔뜩 적재되어 있었고, 천장에는 잘 숙성된 훈제 햄이 갈고리에 매달려 있었다.
몹시 뛰어난 품질에 감탄하자 목장 주인이 그중 몇몇 나무틀을 골라내 천을 들추며 우리에게 설명했다.
“요건 염소젖으로 만든 치즈라네. 고소한 맛이 일품이지. 그리고 이건 양젖을 저온에서 오랜 기간동안 숙성시켜 만든 건데, 부드럽고 말랑해서 샐러드를 먹을 때 곁들이면 좋을 걸세. 그 외에도 여러 종류별로 조금씩 챙겨줄 테니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혹시 더 필요한 게 있나.”
“아뇨... 이 정도만 해도 충분...”
“그래, 기왕 온 김에 이것도 가져가. 버터랑... 송아지 고기도 큼지막한 거로 한 덩이 챙겨가고. 우유는 얼마나 가져가겠나?”
“...인당 두 병씩 사가기로 했습니다. 그보다 이렇게 퍼주시면 어르신이 남는 게 없지 않겠습니까?”
“난 괜찮네. 수백 년간 질리도록 먹어서 말이야. 어차피 놔둬 봐야 다른 신들이 탐을 낼 테니 자네들한테 주겠네. 내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군.”
“...어르신의 정체는 대체..”
“.....”
많은 함의가 압축된 질문.
하지만 그는 침묵으로 대응하며 수레에 유제품들을 옮겨 실었다.
이후 고기를 갈고리에서 떼내어 두꺼운 천으로 감싸더니 이 또한 수레에 한가득 담고 창고를 나섰다.
뒤따라 창고를 나서자 그가 손짓하며 말했다.
“그럼 이제 슬슬 가보게. 나도 하던 일을 마저 끝마쳐야 하니 말일세. 수레는 안 돌려줘도 되고, 원래 받기로 했던 우윳값은 목장 일을 거들어 준 거로 대신한 셈 치지.”
“...그보다 어르신, 묻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습니다.”
“....”
“어르신...?”
그가 묘연한 시선으로 쳐다보더니 밀짚모자를 푹 눌러쓰며 읊조렸다.
“...자네가 뭘 궁금해하는지는 대충 알고 있네. 의문에 대답해주지 못해 미안하군. 그래도 머지않아 알게 될 테니 너무 심려치 말게. 곧 자네에게도 익숙한 존재가 찾아갈 테니까 말이야.”
“익숙한 존재... 말인가요?”
“그래,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질세. 그럼 잘 가게.”
“자, 잠깐...!”
남자가 손을 흔들어 작별했다.
정신이 들었을 땐 나도 모르는 사이 성문 앞에 도달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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