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화 〉 일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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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 일상? #2
목장 사건이 지나고 다음 날.
오후 단련을 마치고 차가운 냉수를 끼얹자 머리가 한결 개운해졌다.
가운 앞섶을 여미고 욕실을 나서니 탁자에 시원한 얼음물이 놓여있었다.
잔을 들이켜며 방으로 향하자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니까 그때 도란님이 어떻게 했냐면...”
“어, 어떻게 했는데...?!”
“저를 호숫가 근처 나무 뒤로 끌고 간 다음 그대로 들어서...”
벌컥.
“.....”
문을 열자 말소리가 뚝 그쳤다.
동시에 두 수인 소녀가 꼬리를 삐쭉 세우며 놀라더니 내 쪽을 돌아보며 쭈뼛거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가가 라디의 귀를 살짝 꼬집었다.
“아얏...!”
“이상한 바람 좀 넣지 마.”
“우으... 아프잖아요. 귀랑 꼬리는 예민한 거 알면서...”
“엄살은.”
라디가 푸른 눈망울에 눈물을 글썽이며 올려다봤지만, 자업자득이다.
탁자에 컵을 내려놓으며 눈짓으로 고마움을 표하고는 아리엘에게 물었다.
“계속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었던 거야? 오늘 정원사 길드에 들렀다 왔다며. 다들 피곤할 텐데 좀 쉬지...”
“음... 겸사겸사 니아 언니 무용담도 들을 겸 너 기다리고 있었지.”
“나? 나는 왜.”
“니아 님이 집에 방문하면 고블린 신전에서 발견한 보석을 보여드리기로 했잖아요. 그새 잊으셨어요?”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지.”
솔직히 까먹고 있었다.
목장 건에 모든 정신이 쏠려있었으니까.
라디가 따가운 눈초리로 쳐다봐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나는 란이가 연못에 놀러 나간 걸 확인하고는 옷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목함을 꺼냈다.
느슨했던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는 걸 느끼며 자물쇠에 열쇠를 꽂고 돌리자 철컥 묵직한 쇳덩어리가 떨어져내렸다.
긴장을 머금고 조심스레 뚜껑을 젖히자
끼익...
“이게 바로 그...”
“...언제 봐도 불길하네요.”
보옥(??).
핏줄을 타고 흐르는 선혈처럼 새빨간 보석이 자태를 드러냈다.
수압 커팅된 다이아몬드처럼 각진 표면은 기이할 정도로 매끄러웠고, 투명한 보석 내부는 살아있기라도 한 듯 은은하게 점멸하며 소름 끼치는 붉은 광채를 방 곳곳에 드리웠다.
온화했던 봄철 실내의 기온이 한풀 꺾이는 걸 느끼며 옆을 돌아보자 턱을 짚으며 고심하는 니아의 얼굴이 보였다.
“으음...”
“...뭔가 알겠어요 니아 님?”
“글쎄... 그게 말이지... 혹시 더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는 없을까?”
“그럼 이 집게로 들고 확인해 보세요. 위험한 물건이니 조심하는 거 잊지 말고요. 혹여나 실수로 떨어뜨렸다가 피부에 닿았다간...”
“어휴 알았어. 군말 말고 이리 내.”
니아가 서랍에서 꺼낸 집게를 건네받더니 서슴없이 보석을 들어올렸다.
그녀는 조명에 보석을 비춰가며 요리조리 둘러봤지만, 도통 갈피가 안 잡히는 모양이다.
한데 불현듯 황금빛 눈동자에 시퍼런 도깨비불이 번뜩거렸다.
화들짝 놀라 제지하려던 차, 아리엘이 손바닥을 들어올려 가로막았다.
“괜찮아. 이건 마력시라고 해서 시각을 집중적으로 강화한 거야. 이렇게 하면 마나의 흐름을 더 세밀하게 확인할 수 있거든.”
“...혹시 위험한 건 아니지?”
“완전히 장담하지는 못하지만... 니아 님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제어할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
“.....”
하긴, 이래 봬도 A랭크니...
똥꼬발랄한 아깽이 같은 알맹이는 둘째 치더라도.
살짝 딱한 심정으로 지켜보자 잠시 후 그녀가 보석을 내려놓았다.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물었다.
“니아 님.. 결과는 어떻게...”
“....”
니아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모르겠어.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요...? 아쉽네요.. 그래도 뭐 덕분에...”
“근데 한 가지는 알아냈어. 이거 성물이야.”
“아, 그래요? 잠깐, 성물? 성물이라면...”
“...아수르 신님의 물건이 맞다는 소리예요?”
라디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거기까진 모르겠어. 하지만 일반 마력보다 훨씬 상위의 힘이 느껴져. 아수르 님의 신성력이 느껴지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부글부글 끓는 잡탕 스튜처럼 여러 신의 힘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리엘, 넌 어떻게 생각해?”
“저도 비슷한 생각이에요. 다만 성물이라고는 해도 여러 신의 힘이 담긴 경우는 좀처럼 없으니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그러게요... 다중의 신성력이 한 물건에 깃드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니었어요? 서로 다른 신성력이 만나면 반발 작용이 일어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음... 반은 맞고 반은 틀려. 아가사 님과 안디라 님처럼 극상성인 경우를 제외하면 여러 신의 힘이 한 물건에 깃드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거든. 하지만 신님들 중엔 자존심이 센 분이 많아서 어지간해서는 서로 협력하려 들지 않아. 그리고 한 물건에 동시에 신성력을 부여했다간 나중에 곤란한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가령 다른 신을 피습하는 도구로 쓰인다던가...”
“맞아! 그래서 정말 사이가 좋거나 특별한 이유라도 있지 않은 한 여러 신이 한 물건에 신성력을 담는 경우는 없다고 들었어!”
“그렇구나... 그건 몰랐네요.”
“.....”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럼 요약하자면... 이 보석이 성물 중에서도 유별난 물건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아수르 님의 힘이 깃들어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우음... 그렇지...? 자신만만하게 말했는데 미안해. 도움이 못 돼서...”
“아뇨. 이것만으로도 충분해요. 하지만 그 말은 즉 지금 베라스틴에서 일어나고 있는 촉수 사태의 배후에는 어떤 신이 암약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네요...?”
“.....”
순간 방안에 무거운 침묵이 드리웠다.
서로 눈치를 보며 발언을 망설이던 중, 니아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아니, 꼭 그렇다고만 볼 순 없지~! 이 보석에 어떤 경위로 신성력이 깃들었는지 모르잖아? 원래 다른 용도로 만들어진 걸 누군가가 변질해서 오용했을 수도 있고.”
“그, 그렇죠?”
“음... 아무튼 이걸로 조심할 게 하나 더 늘었네요. 이번 사건에 신이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존재하는 한 앞으론 신중하게 행동해야겠어요. 신의 눈 밖에 나는 것만큼 두려운 일도 없을 테니까요.”
“으음... 그럼 이 보석은 당분간 집안 깊숙한 곳에 봉인해두자. 자칫하다간 의심을 살지도 몰라. 혹여나 우리가 이번 사태의 주범이라고 몰리면...”
“...끔찍하네.”
어쩐지 하루하루가 갈수록 근심거리가 늘어나는 기분이다.
나는 보옥을 목함에 신중하게 갈무리하고 단단히 자물쇠를 잠갔다. 이어서 옷장 깊숙한 곳으로 되돌리고 나자 방안을 메웠던 불쾌한 기류가 한층 수그러드는 듯하다.
라디가 창문을 열어 침체된 공기를 환기하는 동안 생각에 잠겨있자니 문뜩 힐끗힐끗 쳐다봐오는 니아의 시선이 느껴졌다.
슬쩍 벌어진 가운 앞섶을 고쳐매자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걸로 보석 건은 정리됐고... 도란은 이제 뭐 할 거야?”
“나? 오늘 단련도 끝났고 딱히 할 것도 없으니까 그냥 집에 있을까 하는데.. 지금부터 뭔가를 하기엔 시간이 좀 애매하지 않아?”
“그래? 알았어 그럼...”
“왜, 어디 다녀오게?”
의아하게 묻자 라디가 대신 대답했다.
“네, 저희는 니아 님 의복을 사러 잠시 나갔다 오려고요. 여유분이 없다는 모양이라서...”
“어 그래요? 저번에는 다른 옷 입고 있지 않았어요?”
“그거 호텔에서 빌린 거야. 세탁을 맡겼는데 옷이 덜 말랐었거든.”
“그러고 보니... 베라스틴에 도착할 때 빈손으로 왔었죠.”
찝찝했을 텐데 진작 말하지...
나는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같이 가요. 아직 일몰 때까지 조금 남았기도 하고 지금 같은 시기에 따로 떨어져서 다니기도 좀 불안하니까요.”
“정말?! 같이 가줄 거야?!!”
“네 뭐...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자 니아가 반색하며 기뻐했다.
라디와 아리엘은 그녀를 바라보며 훈훈하게 미소지었고, 연못에서 수영을 마치고 돌아온 란이는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물통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한데...
“...계속 여기 계실 거예요?”
“으, 응? 왜 소년...?”
“아니, 니아 님이 여기 계시면 제가 옷을 못 갈아입잖아요. 잠시 1층에서 기다리고 있든지 하세요. 곧 내려갈 테니까.”
“아... 그게 말이지...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궁금하고 자시고 안 보여줄 거예요. 두 번 말하게 하면 같이 안 나갈 테니 그렇게 아세요.”
“아, 알았어!!”
니아가 후닥닥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라디와 아리엘이 방관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니 뭐 대충 예상이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일단 나머지 두 녀석도 내보낸 다음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어깨 위에 새하얀 셔츠와 외투를 걸치고, 단도와 란이가 든 수통까지 가죽 홀더에 고정하고 방을 나서자 현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그녀들이 보였다.
천천히 층계를 내려와 말했다.
“일단 나가기는 하는데... 어디로 갈지는 정했어? 아무리 니아 님이 있다지만 너무 늦기 전에 돌아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북쪽 거리로 가려고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기도 하고 거기에 미리 점찍어둔 가게가 있거든요.”
“그래? 그럼 후딱 다녀오자.”
문을 열고 나오니 늦은 오후의 서늘한 공기와 남실바람에 흔들리는 관상목이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따스한 봄기운에 무성하게 자라난 식생은 널찍한 정원을 가득 메웠고, 날씨가 거듭 온화해짐에 따라 무르익으며 아기자기한 꽃망울을 틔어올렸다.
불그스름한 과실이 맺힌 보리수를 눈으로 훑으며 정원을 빠져나와 북쪽 구역에 접어들자 고급스러운 상점이 즐비한 거리가 나왔다.
우리는 그중 아리엘이 미리 점찍어둔 옷가게로 들어갔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조명이 후드에 내리쬐었고, 매장 곳곳에서는 플로럴 계열의 은은한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우아함을 강조한 연보라색 인테리어는 불편하게 가슴을 쿡쿡 찌른다.
내게는 다소 과할 정도로 여성스러운 분위기에 움찔하자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은 여성 두 명이 공손하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손님. 저희 헤르모사 의류점에 방문하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혹시 신원을 증명할 명패나 그에 준하는 물품이 있으신가요?”
“.....”
네 명 전원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으니 수상쩍어 보일 수밖에.
살짝 한숨을 내쉬며 모험가 패를 건네려는 찰나, 니아가 한발 빨랐다.
그녀는 짧은 하의의 뒷주머니에서 붉은 매 길드 패를 꺼내더니 서슴없이 점원에게 건넸다.
“여기!”
“네, 잘 받았습니다. 붉은 매 길드... 붉은.. 니, 니아 님...?!”
“응! 잘 부탁해!!”
“아, 아...! 실례했습니다!!”
점원이 식겁하더니 연거푸 허리를 굽혔다.
이제는 몹시 익숙해진 반응에 난처하게 웃어넘기자 다른 점원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저... 니아 님 일행이 이곳엔 무슨 일로...”
“응! 옷 사러 왔어! 외출복이랑 속옷을 좀 사려 하는데... 활동하기 편한 거로!!”
“활동하기 편한 옷... 바,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점원이 다소 긴장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게 안쪽을 향해 정중히 손짓했다.
로브 아래로 꼬리를 살랑이며 뒤따르는 니아를 따스하게 바라보고는 막 건물을 나서려던 찰나, 누군가 내 손목을 강하게 붙들었다.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자 라디가 도끼눈을 뜬 채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 가요.”
“...어디 가긴. 여긴 여성 전용 옷가게잖아. 난 걸리적거리니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같이 가요.”
“...싫어.”
“저를 이곳에 혼자 두고 가시려고요?”
“넌 여기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잖아. 아리엘이랑 니아도 있는데 왜...”
“이런 고급 의류점에 와 보는 건 처음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니아 님 옷만 사기도 좀 그렇고 온 김에 아리엘 언니 것도 살 건데 도란님이 골라줘야죠.”
“싫다고 하면...?”
“니아 님을 불러서 힘으로 해결할 거예요.”
“.....”
천천히 발을 빼자
“니아 님!! 도란님이...!”
“아, 알았어! 내 발로 갈게...”
이왕 발을 들인 거 란이 옷이나 미리 사두어야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가게 안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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