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4화 〉 일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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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 일상? #3
“소년! 이거 좀 봐봐!! 어때?! 예쁘지!?”
“네, 엄청 잘 어울리시네요. 그보다 목소리 좀...”
“우와... 저것도 이쁘다... 저건 어때 소년?!”
“...괜찮네요. 황색 계열이라 니아 님 귀랑 꼬리에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응! 근데 저기에 뭔가 있는데? 아리엘! 우리 한 번 가보자!!”
“네, 니아 언니.”
“.....”
벤치에 쓰러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수분이 빠져나간 민달팽이처럼 축 늘어져 있자니 옆에서 비틀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흘끗 눈알만 굴려 쳐다보니 라디가 창백하게 입가를 가리고 다가왔다.
“...어때.”
“....울렁거려요. 가격대가 무슨... 가장 저렴한 평상복도 제가 아끼는 로브의 곱절 수준이니...”
“나도...”
비단 가격 때문만은 아니다.
라디야 어릴 때부터 홀로 자립해온 탓에 절약 정신이 몸에 배었다지만, 나는 단순히 이곳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을 뿐이니까.
그도 그럴 게, 니아의 등쌀에 이끌려 매장 곳곳을 돌아다녔으나 같은 남자는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더욱이 여성 의류점이 으레 그렇듯 남성인 내가 보기에는 민망한 디자인이 많을뿐더러, 사방의 귀부인들로부터 미적지근한 시선이 몰려드는 탓에 도통 진정할 수가 없다.
흐리멍덩한 눈동자로 천장을 응시하고 있자니 매장 저편에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표범 귀가 보여 재빨리 몸을 숙였다.
송골송골 스며나오는 식은땀을 훔치자 라디가 내 소매를 툭툭 잡아당겼다.
“도란님... 니아 님이 찾는 모양인데 안 가보셔도 돼요...?”
“...냅둬. 아리엘이 어련히 잘하겠지.. 그보다 너는 옷 안 골라? 가격이 부담되면 그냥 내 사비로 사줄게.”
“마음은 고맙지만... 괜찮아요. 옷이 상할까 봐 맘 편히 입고 다니지도 못할 것 같거든요. 시장에서 사면 같은 가격에 비슷한 옷이 몇 벌인데...”
“.....”
목소리를 낮추고 자그맣게 속삭였다.
“...너 저번에 암시장에서 산 속옷도 제법 비싸지 않았어?”
라디가 꼬리를 움찔하더니 살짝 뺨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건 겉옷이 아니라 내의잖아요. 어지간해서는 오래 입을 수 있다구요. 그리고 그때는... 도란님도 아시잖아요.”
“그래, 그러면 하나 더 사. 아니 기왕 온 거 여러 개 사자. 비용은 내가 댈 테니까.”
“아니 그런 게 늘어나도 딱히... 비싼 지출을 감당하면서까지 사고 싶은 건 아니라서요.”
“내가 보고 싶어서 그래.”
“뭐 그렇다면 저야 고맙지만...”
라디가 말끝을 흐리더니 힐긋 매장 안쪽을 쳐다보았다. 말로는 싫다고 하지만 녀석도 관심은 있겠지. 그간 모험가 일에 매진하며 검소하게 살아왔으니 더더욱.
부드러운 어깨 위에 손을 얹고 막 벤치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라디가 아차 싶은 듯 읊조렸다.
“아... 도란님 그런데 속옷 코너는 여기 2층에 있는 모양이던데 괜찮겠어요? 꽤 안쪽까지 들어가야 할 텐데...”
“.....”
슬그머니 도로 주저앉자 라디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쳐다봤다.
녀석이 두 손으로 내 손목을 움켜쥐더니 온 힘을 다해 잡아당겼다.
“일어나요 도란님...! 같이 가기로 했잖아요!!”
“그, 그건 그렇지만...! 그래!! 계, 계산만 하면 안 될까...?!”
“아니 무슨 혼자서 기사단도 때려잡으셨던 분이 고작 이런 일로 쩔쩔매요!!”
“그치만...! 이건 상황이 다르잖아! 차라리 전투라면 몰라도 이런 건 거북하단 말야! 게다가 다들 날 파란 젖소 보듯 쳐다보잖아! 혼자 바보가 된 것 같다고!”
다들 니아의 혼약자라느니 미래를 약속한 사이라느니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운운하며 속닥거리는 모습이 영 위장에 좋지 않다.
물소 떼에게 쫓긴 사자처럼 웅크리자 라디가 난처하게 주위를 둘러보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녀석이 자세를 낮추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도란님, 대신 이번에 저 따라오시면 나중에 좋은 거 해드릴게요.”
“좋은 거?”
“네, 도란님이 엄청나게 좋아하는 걸루다가...”
“내가 좋아하는 거라면... 설마...!!”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보자 라디는 야릇한 미소를 피어올리며
“네, 맞아요. 무지무지 야한 거요. 기왕 하는 거 언니도 꼬셔볼까요? ...란이는 조금 일찍 재워야겠지만..”
“.....”
꿀꺽.
마른침을 삼키자 라디가 치뜬 눈동자로 올려다보며 종용했다.
“...그러니까 눈 딱 감고 한 번만 같이 가요. 어차피 이따가 니아 님한테 끌려갈 게 뻔한데 지금 가나 나중에 가나 똑같잖아요.”
“.....”
“응? 도란..”
“.....”
한숨을 내쉬며 눈가를 짚었다.
틀린 말은 아닌 게, 니아의 성격으로 보아 결국엔 어떤 연유로든 연행되고 말 게 분명하다. 쇼핑을 나올 때 이런 상황을 아예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가게 안에 남자가 한둘 정도는 있을 줄 알았다.
평소라면 매장 인근 찻집에서 음료나 홀짝이며 기다렸을 테지만...
스윽.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라디가 화사하게 웃으며 손목을 잡아끌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대신 저도 이따가 도란님이 사고 싶으신 게 있으면...”
“...켜.”
“네?”
“...약속 지켜.”
“으이구 알았어요. 정말... 사족을 못 쓴다니깐...”
“남잔 원래 다 그래.”
라디와 손을 맞잡고 걸었다.
점점 진열된 옷의 노출도가 늘어나는 매장 안쪽으로 나아갈수록 산성 웅덩이에 뛰어든 것처럼 따끔따끔한 시선이 날아들었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아 무시했다. 추후에 있을 달콤한 보상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내할 만했으니.
한데 속옷 코너가 있는 2층으로 발을 옮기려고 한 순간 점원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저... 송구합니다 손님. 저희 매장의 2층은 여성분만 출입하실 수 있습니다.”
“아... 그래요?”
“그렇습니다. 불편을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남성분께서는 모쪼록 1층에서 대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따뜻한 차를 내올 테니 이쪽으로... 다시 한번 거듭 죄송합니다...”
“아뇨!! 오히려 잘됐...! 아, 아니 그거 참 아쉽네요. 하하... 그럼 어쩔 수 없이 못 들어가는 걸로...”
듣던 중 반가운 소식.
이거라면 라디도 더는 보채지 않겠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180도 뒤돌려는 찰나, 점원이 도중에 말을 끊고 의아하게 옆을 돌아보았다. 다른 점원이 헐레벌떡 달려온 까닭.
둘은 속닥속닥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돌연 태도를 바꾸어 길을 터 주었다.
“...올라가셔도 됩니다.”
“아니... 방금까지는 분명 안 된다고...”
“저희 매장의 책임자께서 손님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다고 합니다. 니아 님과 그 배후자를 소홀히 대할 수는 없다고 하더군요.”
“....”
그렇게 세심한 배려는 필요 없는데...
희미하게 피어올랐던 희망의 불씨가 어김없이 사그라들었다.
속으로 눈물을 머금고 점원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천천히 발을 옮겼다. 우아한 보라색 융단으로 장식된 층계를 올라 2층에 접어드니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로부터 어마어마한 광량이 쏟아졌다.
그리고 이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나는 왜 이곳이 금남 구역인지 절절히 실감할 수 있었다.
마네킹에 씌워진 옷가지가 하나같이 휴지처럼 나풀거렸으니까.
뇌쇄적이고, 관능적이며, 방어력이 한없이 낮을 것 같은 정체불명의 끈 쪼가리를 바라보며 심각한 원가 절감의 말로가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하자니 도처에서 호기심 어린 시선이 몰려들었다.
“어머어머 저기 좀 봐. 저 애가 바로 그 소문의 남자구나?”
“뭐야~ 난 또 엄청 무섭다길래 중후한 중년일 줄 알았는데.. 아직 아가네? 니아 양이 저렇게 영계 취향일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러게... 근데 진짜 소문대로 매력 덩어리긴 하다. 얼굴도 엄청 잘생겼고 몸도 다부져..! 우리 남편하고는 비교도 안 되네... 힘도 세겠지?”
“누가 아니래~. 저 저 부끄러워하는 것 좀 봐. 엄청 귀엽다! 검은 머리만 아니었어도 사위로 삼으려 했을 텐데.”
“그러게 그게 좀 아쉽네. 그래도 나름 괜찮을 수도?”
“....”
나는 수치심에 붉게 물든 얼굴을 감추며 라디의 손을 놓았다.
“...나 집에 갈래.”
“다 큰 어른이 애처럼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군소리 말고 따라오세요!”
“시, 싫어!!”
“아니, 정말...! 애도 아니고!”
말 꽁무니에 매달린 패잔병처럼 매장을 질질 끌려다니다 보니 점차 라디의 발걸음에 경쾌함이 실리기 시작했다.
소형 크로스보우가 매달린 팔뚝을 앞뒤로 흔들며 기분 좋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녀석을 보니 제법 흐뭇했지만, 주변의 이 뜨뜻미지근한 시선은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마지못해 따라 걷고 있자니 라디가 해사하게 웃으며 물어왔다.
“도란님은 제 어떤 속옷이 보고 싶어요?”
“글쎄... 난 네가 입은 거라면 뭐든 좋아. 모델이 좋잖아.”
“아주... 말은 청산유수네요. 그럼 저건 어때요?”
“그래, 어디 한 번... 아니, 저거 속옷 맞아?”
“왜요?”
“뻥 뚫려있잖아.”
“하긴... 색이 저번에 샀던 거랑 비슷하네요. 그럼 이번에는 다른 거로...”
“아니 그걸 말하는 게 아닌데...”
제작자의 노골적인 의도가 엿보이는 천 나부랭이를 지나쳤다. 본디 속옷이란 몸을 보호하기 위한 용도일 텐데 왜 끈 하나만 잡아당기면 스르륵 모두 벗겨지게 디자인했는지 모르겠다.
아니 그편이 뭔가 판타지를 충족시켜주기는 하지만...
살짝 뺨을 붉힌 채 힐끗거리며 매장 내부를 둘러보던 중, 라디가 한 마네킹 앞에서 멈춰서더니 내 쪽을 올려다보며 물어왔다.
“도란님, 그럼 이거는 어때요? 디자인은 마음에 드는데... 너무 수수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과하지도 않아요.”
“...응, 괜찮네. 생김새도 고급스럽고 소재도 좋아 보여.. 무엇보다 진한 회색이라 너랑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럼 입은 거 한번 보실래요?”
“속옷을? 어떻게?”
“탈의실에서 슬쩍 갈아입고 도란님이 들어오시면 되죠. 아까 보니까 여기 매장은 시착용 견본 제품이 따로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세탁도 꾸준히 한다고...”
“아서라... 주변에 사람도 많은데 괜히 또...”
“저기요, 이거 한 번 입어보려고 하는데 혹시 수인용으로 꼬리 구멍이 따로 나 있는 것도 있어요?”
“네, 이 란제리 제품 말씀이시죠? 곧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
말리기도 전에 라디가 점원을 붙들고 이야기하자 점원이 고개를 숙이더니 매장 안쪽에서 상자에 담긴 견본 제품을 들고 다가왔다.
라디는 공손하게 받아들며 인사하더니 구석에 세워진 탈의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그럼 금방 갈아입고 나올 테니까 기다리고 계세요 도란님. 어디 한눈파시지 마시고요.”
“아니 그러면 내가 혼자 남게 되잖아. 날 이곳에 혼자 두고...”
“그럼 같이 들어가실래요?”
“...아니, 그것도 좀..”
보는 눈이 너무 많다.
주위를 의식하며 머뭇거리자 라디가 피식 웃고는 손을 흔들었다.
녀석이 탈의실 안쪽으로 사라지자 잠시 후 사박사박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라면 설레어 마지않을 상황이지만, 마냥 기뻐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새끼 임팔라처럼 광활한 공간에 홀로 남겨져 굶주린 눈동자들의 표적이 되고 있자니 서늘한 오한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차마 버티지 못하고 탈의실 앞을 서성이던 찰나
반짝.
“...응?”
매장 저편에서 무언가가 번뜩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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