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7화 〉 일상?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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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 일상? #6
양팔에 옷가지를 한가득 사 들고 매장을 나서자 점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깍듯하게 배웅해주었다.
불과 반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대우에 다소 머쓱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자 어둑한 밤하늘에는 흐르는 구름 사이로 길게 찢어진 그믐달이 푸른 잔상을 드리웠다.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결국 완전히 어두워졌네... 니아 님은 오늘 저희 집에서 묵고 간다고 했죠?”
“응, 말려도 자고 갈 거야.”
“네 뭐... 알겠어요. 라디랑 아리엘도 괜찮다고 하는 모양이니...”
“.....”
힐끔 돌아보자 두 녀석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까 선물을 해주고 나서부터 계속 이런 상태.
뭐 대충 이해는 간다만...
“...근데 라디랑 아리엘은 왜 이러는 거야? 내가 옷 갈아입고 나올 때부터 소년이랑 시선을 못 마주치는 것 같은데...”
“...그냥 그런 일이 좀 있었어요. 니아 님 것도 있는데 그건 조금 이따가 집에 도착해서 드릴게요.”
“응? 뭐가 있어?”
“네, 근데 그보다... 아리엘, 우리 집에 혹시 남는 술 있어?”
“으응...? 수, 술...?! 아, 아니.. 있기는 한데 거의 다 떨어졌을걸..?”
“그래? 그럼 가는 길에 몇 병 사가자.”
마침 전날 농장에서 안줏거리도 받아온 참이니까.
나는 근처 가게에 들러 양질의 와인과 사과나무 칩으로 훈연향을 더한 위스키 등 고급 주류를 몇 병 사들였다.
한데 묵직한 보따리를 이끌고 가도로 나오자 우리의 정체를 알아보기라도 한 건지 제법 사람들의 이목이 쏠려있었다.
하는 수 없이 도보 구석에 정차해 있던 마차에 올라타자 젊은 마부가 쾌활하게 인사하며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손님!! 연인과 달콤한 밀월을 보내기엔 더없이 좋은 밤이죠! 목적지는 어디로 하면 되겠습니까? 여관 거리? 북동쪽 담쟁이 저택?”
“아 네, 그럼 북동쪽... 잠깐, 저희 주소를 대체 어떻게?”
“뭘요, 이 도시에서 니아 님 일행이 어디 사는지 모르면 간첩 아니겠습니까! 선술집에서 그쪽 소문으로 물이 마를 새가 없을 지경인데! 혹시 르마리아 님이나 아델 님은 베라스틴에 안 오시나요? 그분들을 꼭 만나 뵙고 싶었는데...”
“아하... 그분들은 잘 모르겠네요...”
적당히 대답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흘러가는 도시의 야경을 감상하자 머잖아 잡목이 우거진 장소가 나왔다.
마부에게 운행료를 지불하고 마차에서 내린 뒤 오솔길을 나아가니 이제는 국민 주소가 되어버린 저택이 나왔다.
나는 현관에 도착하고 나서야 탄식하며 기지개를 켰다.
“...드디어 도착했네. 어휴.. 한두 시간 안에 다녀올 예정이었는데 뭔 시간이 벌써 이렇게...”
그래도 도중에 기자한테 둘러싸이거나 별다른 문제는 벌어지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간단한 조작으로 마석등을 점등하자 거실이 찰나에 화해졌다. 이어서 벽난로에 불을 지피니 제법 쌀쌀했던 실내에 따스한 온기가 차오른다.
잠시 여성진과 헤어지고는 쇼핑해온 옷가지를 드레싱룸에 옮겨놓고 막 문을 열고 빠져나오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라디와 마주쳤다.
의아하게 내려다보니 녀석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도란님은 이제 뭐 하실 거예요...?”
“음... 거실에서 같이 와인 좀 마시면서 노가리나 깔 예정이었는데? 이왕 목장에서 치즈랑 햄도 받아왔는데 한번 먹어보고 싶어서. 흔한 기회는 아니잖아.”
“아... 그래요...?”
“왜, 따로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
라디가 회색 꼬리를 손에 쥐고 꼼지락거리며 읊조렸다.
“..저랑 아리엘 언니는 샤워하고 올 건데 혹시 같이 하실래요...?”
“....”
미심쩍게 되물었다.
“...그거 니아는 안 오는 거야?”
“그야... 들어오고 싶어 할 테지만 도란님이 원하시면 저희가 잘 타일러서 따로 씻도록 부탁해볼게요...”
“.....”
그야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긴 하지만...
“아쉽지만 같이 씻는 건 다음번에 하자. 지금은 손님도 있고 그건 평소에도 할 수 있으니까. 대신 마음은 고맙게 받을게.”
“아 네...”
“...왜, 아직도 쑥스러워?”
“그야 당연하죠.. 이런 경험은 처음이니까요... 살면서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아본 건 수도원에서 수확제 때 곡식을 나눠 받거나, 어릴 적 부모님께 받은 것밖에 없었는데... 도란님하고 만나고 난 다음부터는 하루하루가 늘 새롭고 행복해요..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요...?”
“뭘... 평소처럼 그냥 곁에 있어 주기만 하면 돼.”
내게 있어 가장 큰 행복은 너희니까.
웃으며 그리 고하자 라디는 나를 올려다보며 새삼 사랑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부드럽게 내 허리를 껴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고... 저희가 보답해줄 수 있는 게 있으면 좋겠어요. 혹시 가지고 싶으신 건 없으세요? 새 장검이나 갑옷 같은... 아니면 멋진 로브도 괜찮고요. 꼭 물질적인 게 아니라 그 어떤 부탁이라도 좋으니까...”
나는 라디의 연색 머리를 쓸어주며 답했다.
“정말로 괜찮아. 겉치레가 아니라 진짜 욕심이 없어서 그래. 너희랑 만나기 전까지는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날도 있었고 자주 굶곤 했는데, 이젠 집도 있고 따뜻한 옷에, 언제든 창고에 먹거리가 넘쳐나잖아? 하물며 란이도 있고... 난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거든.”
“.....”
라디가 말없이 두 팔에 꼬옥 힘을 실었다.
나는 녀석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마. 씻고 온다고 했지? 이따가 다 같이 거실에서 보자. 오늘 술 괜찮겠어?”
“네... 그런데 벌써부터 취한 느낌이에요..”
“그래.”
짧은 키스를 나누고 녀석을 떠나보냈다.
이후, 편안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내려오니 란이가 비몽사몽 눈을 비비며 종아리에 엉겨붙었다.
“...잘 잤어?”
꾸벅..
“그래, 아빠랑 언니는 이제 이야기하다 잘 건데 란이는 치즈라도 먹고 있을래?”
치..즈...?
“오 그래! 다시 한번 발음해봐!”
.....
란이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직 인간의 말을 하는 게 낯선 모양. 그래도 아리엘의 단어 학습이 효과가 있는 것 같아 기쁘다.
언젠가 분명 유창하게 대화할 수 있는 날도 오겠지.
“중급 정령이 되면 어떻게 변하려나...”
됴란...?
“그냥 혼잣말이야.”
말캉말캉한 녀석의 머리를 쓸어준 뒤 부엌으로 향했다. 창고에 보관해둔 치즈를 종류별로 덜어내 가지런히 접시에 담은 뒤, 와인 글라스와 위스키용 얼음을 챙기고 스모키 햄도 조금 잘라냈다.
먹기 수월하도록 햄을 저며내자 란이가 관심을 보였다.
“...한번 먹어볼래?”
됴란!
“그래, 잠깐만... 이건 이렇게 치즈를 햄에 감싸서... 그렇지, 어때?”
.....
슬라이스한 치즈를 햄에 감싸서 입에 넣어주자 란이는 조심스레 받아먹더니 돌연 눈동자를 빛내며 내 팔뚝을 찹찹 두드렸다. 굉장히 마음에 든 모양.
이젠 녀석이 먹는 것만 봐도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간다.
‘정령이 행운을 가져온다고 했던가...’
그 말 그대로, 이것도 녀석이 불러온 소소한 행복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온화하게 미소지으며 마저 햄을 썰고 거실로 나오자 타닥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는 따스한 불빛으로 하여금 썩 아늑한 분위기가 펼쳐져 있었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대리석 탁자 위에 와인과 위스키를 세팅하니 멋들어진 술상이 완성되었다.
‘...꼭 지구에 온 것만 같네.’
코끝을 맴도는 짙은 포도 향에 어릴 적 향수가 되살아났다. 놀이터에서 여동생과 흙투성이가 된 채 돌아오면 이따금씩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렇게 식탁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지.
어쩐지 지금의 내 모습이 아버지의 등과 겹쳐 보였다.
시원스런 웃음에 상념을 지우고 와인을 맛보려는 차, 층계 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 온 란이를 안아주며 올려다보자 잠옷을 차려입은 세 미소녀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말리며 내려왔다.
새삼스럽게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말했다.
“오, 이번에 산 잠옷이야? 예쁘네.. 다들 잘 어울린다.”
“.....”
그녀들이 수줍게 웃으며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아리엘은 내가 사준 목걸이를 어루만지며 슬며시 어깨를 맞대왔고, 라디도 팔찌를 매만지며 애틋한 시선을 보내왔다.
니아 건 뭐... 이따가 분위기 좋을 때 건네주면 되겠지.
호주머니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목함의 감촉을 되뇌며 입을 열었다.
“...그럼 다들 들죠. 니아 님의 첫 베라스틴 방문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제대로 축하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요 며칠 사이에 벌써 많은 일이 있었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나야말로 잘 부탁해! 다들 너무 고마워!! 무턱대고 기별도 없이 찾아왔는데 이렇게 환대받을 줄은 몰랐거든! 라디와 아리엘과도 친해진 것 같아 다행이야!”
“저도 덕분에 즐거웠어요 니아 님. 같이 목장을 견학하거나 고급 호텔에서 식사한 것도 색다른 경험이라 좋았고요.”
“저도 그렇네요.. 처음에는 어려운 분일 줄 알았는데 유쾌하고 친절해서 놀랐어요.”
“...고마워.”
니아가 살짝 뺨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훈훈한 분위기 속, 나는 잔을 높게 들어올리며 말했다.
“자... 그럼 건배하자. 다들 잔 들고...”
“짠~!”
니아의 구호에 맞춰 잔을 맞부딪혔다.
적색 수면이 찰랑이자 산뜻한 향이 피어올랐고, 유리 글라스의 맑은 음색이 울려퍼졌다.
제법 쌉싸름한 와인으로 입맛을 돋우고 훈제 햄과 치즈를 음미하자 깊은 풍미가 우러나왔다.
니아가 꼬리를 쭉 뻗으며 외쳤다.
“우와?! 이거 엄청 맛있다!! 소년도 한번 먹어봐!!!”
“네 어디 한번... 음... 이 조합도 괜찮네요. 부드럽고 고소한 게...”
“도란님, 이렇게도 한번 드셔보세요.”
“도란, 이거도 한번 먹어봐. 자, 아~.”
“....”
세 방향에서 건네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있으니 꼭 황제가 된 것만 같다.
진지하게 나에 대한 소문이 완전 과장된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둥 쓸데없는 생각을 곱씹고 있자니 불현듯 좌우에서 향기로운 샴푸 냄새가 훅 끼쳐왔다.
홀린 것처럼 고개가 이끌리자 라디와 아리엘이 서로 눈짓하더니 아리엘이 뺨을 붉게 물들이며 귓가에 속삭여왔다.
“...전부 깨끗이 씻었어.”
“뭐, 뭐가...!”
“..도란님이 마음만 있다면 언제든지 침실로 가도 돼요. 원하는 요구가 있다면 뭐든지 들어드릴 테니까...”
“....”
아니, 니아가 있는데 어떻게...
그림의 떡이라는 말을 실감하며 착잡한 심정을 알코올의 쓴맛과 함께 흘려보내자 니아가 내 입에 치즈를 넣어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리엘은 어떻게 하다가 소년하고 만나게 된 거야? 라디는 저번에 들었는데 아리엘은 못 들은 것 같아서...”
“으음... 얘기하자면 긴데 괜찮겠어요?”
“응! 궁금해!”
“음... 일단 첫 만남이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도란이 절 벗기려고 했던 거 아세요?”
“뭐, 뭐어?! 덮치려고 했단 말이야?!!”
“아니 그건 또 아닌데...”
아리엘이 내 눈치를 살피며 운을 뗐지만, 나는 그저 착잡하게 술잔을 들이켰다.
그보다 빨리 이걸 건네줘야 할 텐데...
호주머니를 매만지자 선물 상자의 감촉이 느껴졌지만, 어째선지 머릿속이 어수선한 게 뭔가 중요한 걸 빠뜨리고 있는 기분이다.
불현듯 창밖을 쳐다보자 그곳엔 짙은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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