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9화 〉 잠든 도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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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잠든 도시 #1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재빨리 외출복을 걸쳤다. 단추를 잠그는 손놀림이 오늘따라 더디게 느껴진다.
황급히 층계를 내려와 거실로 향하자 탁자 위에는 먹다 남은 술상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따스하게 타오르던 벽난로는 온기를 잃고 차갑게 식어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피니 유리 글라스 밑바닥에 남은 와인의 잔여물이 보인다. 찐득찐득하게 굳은 정도로 보아 얼추 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었으며, 치즈 덩어리는 수분이 날아가 겉면이 딱딱하게 굳어있다.
그렇다면...
“최소 예닐곱 시간은 지났다는 소린데... 설마 꼬박 하루동안 잠든 건가...?”
그런데도 도중에 누구 하나 깨어나지 않다니. 아무리 술에 취한 상태였다고 한들...
재빠르게 부츠 끈을 묶고 거치대에 놓인 장검을 거머쥐었다. 이후 서슴없이 현관문을 열어젖혔지만, 나는 곧바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윽?! 뭐, 뭐야...! 뭐가 이렇게 추워...!!”
도저히 봄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추위. 살을 에는 한기가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다.
이 한파가 착각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현관에는 시퍼런 살얼음이 끼어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밤공기는 불가사의한 분위기를 배가시켰다.
나는 황급히 되돌아와 두터운 겨울용 로브를 껴입고 문밖을 나섰지만, 조도가 너무 낮아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새벽녘 작물을 뒤덮은 냉해처럼 암흑에 휩싸인 정원은 고요하게 잠들어 있을 뿐, 발밑을 비추는 광원이라고는 저택 2층 침실의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유일했다.
“.....”
삐걱...
불안감을 억누르며 끼릭끼릭 마석등을 점등하자 살얼음에 휩싸인 돌길이 드러났다. 허나 짙은 어둠 탓인지 빛조차 멀리 뻗어나가지 못하고 수그러들었다.
고작 다섯 보 앞을 비추는 게 고작인 랜턴 불빛에 의존해 나아갔지만, 정원 그 어디에서도 자그마한 기척조차 느낄 수 없었다.
밤중에 단련할 때면 어김없이 찾아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왔던 땅굴쥐, 길고양이의 번뜩이는 눈동자, 이따금씩 흙무더기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던 두더지와 정원을 거닐 때면 으레 들려왔던 풀벌레의 울음소리도.
...모두 전무하다.
“....”
모골이 송연해졌다.
마치 초대받지 않은 누군가가 곁에 서 있는 것처럼.
파르스름한 마석등의 조명이 얼어붙은 연못에 드리우자 반쯤 파묻혀 꽁꽁 얼어버린 금붕어가 시야에 들어왔다. 서둘러 앞길을 재촉해 정문까지 도달했지만 철창 자물쇠는 단단하게 얼어붙어 꿈적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열쇠를 집어넣고 담장을 뛰어넘었다.
다소 난폭하게 정문 앞에 착지하자 을씨년스러운 발자국이 보였다. 무릎에 묻은 얼음 조각을 털어내며 천천히 고개를 들자 시커먼 나뭇가지에 들러붙은 고드름이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전날 밤중에 비가 내린 까닭인지 곳곳에 생겨난 웅덩이에서는 싸늘한 한기가 풀풀 피어오른다.
“.....”
파스슥...!
단도를 소환했다. 오싹한 냉기에 손이 굳어 소맷자락으로 오른손을 거칠게 둘러쌌다.
나는 발소리를 최소한으로 낮추고 오솔길을 전진했다.
분명 평소에는 몇 분 걸리지도 않았을 거리임에도 무언가가 내 발목을 잡아끄는 듯 쉬이 벗어날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쉴새 없이 울려대는 경종을 애써 무시한 채 나아가 대로변까지 다다르자 그 어떤 때보다도 강렬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불빛이 미치는 구석, 아니 그 너머 어디에서도 인적을 찾아볼 수 없었기에.
심지어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와 나뭇잎, 처마를 적시고 흘러내리던 물방울조차 차갑게 얼어붙어 미동하지 않았다.
마치 도시 전체가 깊은 영면에 빠진 것처럼.
“제길...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맥없이 단도를 늘어뜨린 채 가도를 거닐었다. 추위와 야음에 뒤덮인 거리는 두 세기 전 버려진 폐광촌처럼 적막했다.
불빛이 닿는 곳마다 반짝거리는 푸른 살얼음은 제법 장관이었지만, 폐 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한기 탓에 여유로운 감상은 들지 않았다.
나는 근처 주택가로 달려가 대문을 두드렸다.
“저기요!! 거기 혹시 누구 없어요?!!”
.....
“저기요!!!”
....
“시발 돌아버리겠네...”
길가를 서성이며 대문을 두들겼지만 여전히 인기척은 들려오지 않는다. 실수로 길가에 놓인 양철 바스켓을 차서 넘어뜨리자 날카로운 소음이 울려퍼졌으나, 빈 방에 노크하듯 이조차 아무 반향도 돌아오지 않았다.
급기야 널찍한 가도를 활보하며 소리도 질러봤지만 이 역시 허사로 돌아갔고, 채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이유 모를 섬뜩함을 느껴 그만두었다.
“...제기랄.”
이 길이 이렇게나 넓었던가.
이리저리 왕래하며 떠드는 행인도, 마차의 달그락거림도 없으니 꼭 다른 세계에 흘려들어온 것만 같다.
설마 이 모든 게 가짜고 나와 내 일행만 이 세상에 포류한 거라면...
‘아니... 그건 아니야... 침착하자.’
냉정하게 정신을 갈무리하고 사고를 되돌렸다.
나는 로브 앞섶을 끌어올려 차디찬 냉기를 틀어막으며 길모퉁이로 향했다. 얼음과 진흙으로 어수선한 도보 구석엔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무심결에 버린 쓰레기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자세를 낮추고 유심히 바닥을 살피던 중, 드디어 목표했던 물건을 발견했다.
“...찾았다.”
내가 바닥에서 주워올린 건 한 싸구려 신문.
표면에 묻은 얼음과 돌부스러기를 털어내고 내용을 살피자 물에 번져 흐릿한 활자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의 베라스틴 종○일보]
[오늘의 특○! 아카이아 길드의 도○ 여성 전용 의○점 외설 ○○ 발각!]
[화제의 그 남○ 구매한 장신구○ 알아○○!]
[충격! 하수구에서 연○은 변사체 발○!! 목격자 진술 ○○ 촉수 달린 ○○!]
[천둥을 동반한 폭우○ 예상○...]
“.....”
빗물에 잉크가 번진 탓에 더 이상의 내용은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내 이름이 나와 있어. 이건 아마 여성 전용 의류점을 말하는 걸 테고... 그럼 이 신문은 적어도 우리가 술을 마신 다음 날 아침에 발행된 걸 텐데...”
거실 테이블에 남아있던 술상의 흔적과 신문 발행일로 종합해 봤을 때 우리가 잠들어 있던 시간은 한나절 남짓.
그리고 하루 만에 모든 시민이 사라졌을 리는 없다.
판자로 막아놓은 대문이나 창문 등 피난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불에 그슬린 자국이나 손상된 시설 등 침략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시민들은 모종의 이유로 자택 안에서 잠들어 있다고 판단하는 게 합리적이겠지. 나와 그녀들이 그러했듯이.
신문에 갑작스런 한파에 관련된 언급이 없다는 점도 포함해...
“...마법인가.”
그것 외에는 떠올릴 수 없다.
도시 전체를 깊은 잠에 빠뜨릴 정도의 강력한 마법이 존재하는지는 의문이다만, 지금은 그보다 먼저 할 일이 있다.
“....카렌.”
아카이아 길드로 가야 한다.
저택에는 니아가 있으니 안전하다. 침실을 나서기 전에 라디가 일어난 걸 확인했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녀석이 일행을 깨울 테지.
그렇다면 지금은 카렌의 안위를 확인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게 급선무다. 습격자의 정체를 확인하고 만약 우리의 힘으로 맞서는 게 무리라고 판단되면 신속하게 도시를 이탈해야 하니까.
나는 단도를 칼집에 갈무리하며 짧게 심호흡을 내쉰 뒤...
도약했다.
단단한 부츠 밑창으로 노면을 딛자 살얼음이 깨져나갔다. 나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기척을 줄였다. 날카롭게 흑안을 빛내며 사방을 주시했고, 담벼락에 울려퍼지는 반향에 귀 기울이며 사소한 기척에도 집중했다.
최근 아무리 오래 쉬었다고 한들 사지 속에서 단련되어 온 감각은 쉬이 녹슬지 않았고, 지금 이 순간 세포 하나하나 되살아났다.
콰드득!!!
길가에 놓인 신문 판매대를 밟고 뛰어올랐다.
단단하게 동결된 노점 천막 위를 거닐자 박살 난 얼음 파편이 비산했다. 나는 로브로 마석등을 덮어 불빛을 최소한도로 줄였고, 지붕과 지붕 사이를 뛰어넘으며 지름길로 접어들었다.
찰나, 정지된 시간 속 상공에서 바라본 베라스틴은 아이러니하게도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발이 지면에 닿자마자 나는 다시 급박하게 사고를 회전시켰다.
‘제발 있어라...!’
카렌의 거주지는 들어본 적 없다. 그러니 잔업 때문에 아직 길드에 남아있기를 바랠 뿐.
그녀라면 무언가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 베라스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가장 먼저 전해듣고 능동적으로 모험가에게 의뢰를 배분해 주는 게 접수원의 업무니까.
무엇보다 내 은인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어둠 속을 질주했다. 모험가 길드가 주로 포진한 동쪽 거리에 접어들자 건물 양식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외벽부터 굴뚝까지 전부 얼음에 뒤덮인 모양새는 마치 북유럽의 외딴 마을 중 하나에 방문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지금껏 수없이 왕복한 길이었으나 빛 한 점 없는 거리는 기시감 대신 생소함을 전해주었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최단 거리로 지붕을 뛰어넘던 중, 한 공방의 첨탑을 지나치자 마침내 저만치 새하얀 석조 건물이 보였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내쉬며 아카이아 길드 앞에 도달해 정문을 두드렸다.
“카렌!! 안에 있어?! 있으면 좀 대답해 봐!!”
.....
“제길!!”
반응이 없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당면하니 참담하다.
나는 곤혹스러운 심정으로 굳게 닫힌 철문을 올려다보았다. 지금까지는 늘 이른 시간대로만 다녔으니 스윙도어 외엔 볼일이 없었는데...
이걸 부숴서 돌입하려 했다간 온 도시의 잠을 깨울 정도로 큰 소음이 나고 말 거다.
그렇다면.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창문도 문은 문 아닌가.
길드 부지의 뒤뜰로 돌아가 하늘을 올려다보자 응접실 나무창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만 쉽게 닿을 높이는 아니었고, 얼음으로 뒤덮여 건물 외벽을 타고 오르는 것도 수월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물론 내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다.
“...와라.”
츠츠츠츳...
명령이 떨어지자 한적한 뒷마당에서 칠흑빛 아지랑이가 솟구쳤다. 노도의 기세로 덩치를 불려나간 검은 증기는 불길하게 요동치더니 순식간에 식물의 형상을 갖추며 내 발밑으로 괴여들었다.
한데...
“너 어째 오늘따라 좀 신난 것 같다...?”
.....
뿌드득거리며 줄기를 꿈틀거리는 모양새가 마치 햇빛을 받아 환희하는 관엽식물을 보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귀도 입도 없는 식물이 대답할 리도 없는 노릇이라, 놈은 그저 내 명령을 따라 묵묵하게 넝쿨을 뻗었다.
나는 잭과 콩나무에서 나오는 유명한 장면처럼 덩굴을 붙잡고 상승해 응접실 창문 앞까지 도달했지만 굳게 닫힌 나무창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미안 카렌.”
콰직!!!
망설임 없이 창문을 걷어차자 목제 틀이 통째로 떨어져나가며 응접실 내부 정경이 드러났다.
신중하게 건물 안으로 발을 디디자 박살 난 나무 파편과 얼음 조각이 부츠 밑창에 바스라졌다.
“.....”
이제 이 건물 안에서 서둘러 카렌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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