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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270화 (270/375)

〈 270화 〉 잠든 도시 #2

* * *

[270] 잠든 도시 #2

­끼이이익...

조심스레 응접실 문을 열고 나서자 난간 아래로 텅 빈 홀이 내려다보였다.

마석등의 서늘한 조명이 건물 내부를 비추자 쓸쓸한 분위기가 흐른다.

‘...적막하네.’

이렇게 조용한 모험가 길드는 처음이다.

테이블에서 싸구려 럼을 홀짝이는 모험가도, 의뢰 게시판 앞에 몰려들어 부산스럽게 떠드는 인파도 없으니 평소에는 비좁기만 하던 건물이 오늘따라 넓게 느껴진다.

지금이라면 의뢰를 독차지할 수도 있지 않을까.

“.....”

후드를 젖히며 잡생각을 흘려보내곤 마석등의 광량을 높였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접수창구로 다가서자 차곡차곡 쌓인 양피지, 잉크 병에 담긴 깃펜과 가지런히 정돈된 책자 등 사무적인 향취가 물씬 풍겼다.

접수원들이 취급하는 비밀문서에 관심이 동하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지금은 이런 데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두꺼운 칸막이를 젖히고 창구 안쪽으로 들어서자 자그마한 쪽문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움켜쥐었으나 다행히 잠겨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언제든 단도를 뽑을 수 있도록 대비하고 발끝으로 문을 밀자 어둑어둑한 통로와 고시원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방이 여럿 드러났다.

“.....”

이곳 어딘가에 카렌의 개인실이 있다.

마석등을 들어올리자 문에 걸린 명패가 보였다. 개중 반쯤 열린 빈방을 들여다보자 두 평 정도 되는 작은 공간엔 단출한 책상과 의자가 전부였다.

창문 하나 없는 방안에 습한 빨래가 널려져 있는 광경은 마치 교도소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조용히 물러나 마저 몇 걸음 더 옮기자 복도 끝에 다다랐다. 마지막 방 앞에 걸린 명패에는 반듯한 글씨체로 ‘카렌’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신중하게 노크했다.

“카렌, 안에 있어...?”

­....

“들어갈게.”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비틀고 안으로 들어서자...

‘...허탕인가.’

카렌의 개인실은 사무용품 몇 개를 제외하고 텅텅 비어있었다.

착잡한 심정을 추스르며 물러나려는 찰나, 어디선가 희미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

“.....”

큰 기대 없이 소리가 들려오는 방문을 열어젖히자­

“...카렌?”

잉크가 쏟아져 흥건하게 젖은 책상 옆으로 주홍색 머리칼의 여성이 엎어져 있었다.

황급히 달려가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카, 카렌! 일어나!!”

“.....”

“제길!!”

맥박이 뛰는 걸로 보아 죽은 건 아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로 미루어 깊게 잠든 모양.

하지만 안도할 수는 없었다. 손바닥에 맞닿은 그녀의 피부가 얼음장처럼 차가웠기에.

당장 체온을 높여야 한다.

다급하게 그녀를 의자에서 끌어내 웃옷을 벗겨내던 찰나­

“도란...”

“응?”

“이 나쁜 놈... 내가 얼마나 챙겨줬는데...”

...설마 깨어 있나?

“카렌! 정신 차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으음... 도란... 이러면 안 돼... 우리는..”

“안 되긴 뭘 안 돼! 일어나라고 인마!!”

“으으... 오 분만 더... 뭐야... 도란...?”

“그래, 정신이 좀 들어?”

“음... 아직 꿈인가 보네... 음냐..”

“....”

나는 다소 강하게 볼때기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일어나 이 여자야. 지금 태평하게 자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아얏...! 뭐, 뭐야 이거 꿈이 아니야...?”

“그래, 꿈 아니니까 정신 좀 차려.”

“읏...?!”

카렌의 감귤색 눈동자에 총기가 맺히는가 싶더니 돌연 얼굴을 붉히고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풀어진 앞섶을 다급하게 가리며 주변을 둘러보고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도란이 왜 여기 있는 건데?! 그리고 내 옷은 왜 벗...!”

“일단 진정 좀 해. ...도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길거리에 아무도 없고 건물이란 건물은 죄다 얼어붙었어. 혹시 아는 거 없어?”

“그게 무슨...”

카렌이 천천히 시선을 돌리더니 엎어진 유리병을 보고 황급히 도로 세웠다. 하지만 이미 잉크는 잔뜩 넘쳐버린 상태.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나직하게 물었다.

“...심상치 않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리고 여긴 또 왜 이렇게 으슬으슬한 거고... 추워...”

“직접 보는 게 빠르겠다. 따라와, 이거 걸치고.”

“아... 고, 고마워..”

나는 로브를 벗어 카렌의 머리 위에 덮어주었다.

모험가 길드 건물의 1층에는 방범을 위해 창문이 없는 바,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내가 들어왔던 응접실로 데려가자 카렌이 창밖을 내다보며 경악했다.

“이, 이게 뭐야?! 동절기는 한참 전에 지났는데 웬 얼음이 잔뜩... 하늘은 왜 또 이렇게 어두워...?”

“말했잖아 이상하다고. 게다가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오면서 문이란 문은 죄다 두들기고 다녔는데도 전혀 반응이 없고. 혹시 뭐 짐작 가는 거 있어?”

“그럴 리가... 살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근데 이건 네가 한 거야?”

“....”

카렌이 응접실 바닥에 널브러진 파편을 눈짓하자 나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녀가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주제를 되돌렸다.

“그래, 일단 이건 넘어가고... 설명 좀 해줄 수 있겠어? 지금 베라스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데?”

“나도 그걸 물어보러 찾아온 거야. 자고 일어났는데 도시가 하루아침 만에 완전히 딴판이 되어 있잖아. 너라면 알 거 같아서 와본 건데... 모르나 보네.”

그래도 다행이다.

내 일행을 제외하고 이곳에서 만난 첫 번째 사람이다. 카렌이 무사히 잠들어 있었다는 건 다른 시민도 비슷한 상황일 확률이 높다.

한시름 놓으며 어둠에 잠긴 도시를 내다보고 있자니 카렌이 팔뚝을 문지르며 말했다.

“일단 장소를 바꾸자 도란. 여긴 너무 추워. 아마 위층이 비어 있을 텐데..”

“그래, 가자.”

방에서 나온 뒤 층계를 올랐다.

추위에 오들오들 떠는 카렌을 지탱해주며 니아를 맞이할 때 썼던 고급 응접실에 들어서자 향긋한 방향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카렌이 벽난로에 불을 지피더니 주전자에 물을 끓이며 물었다.

“...도란도 차 마실 거야?”

“아니, 난 괜찮아. 그보다 불을 피울 거면 확실하게 커튼을 치는 게 좋겠어. 혹여나 이상한 게 꼬이면 큰일이니까.”

“그러네... 이렇게 어두우면 멀리서도 잘 보이겠어.”

상황이 파악되기 전까지 외부에 노출되는 건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그녀가 커튼을 치고 날 소파에 앉히더니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 상황을 정리하자면... 자고 일어났더니 도시가 이렇게 변해버렸다는 거지? 사람들은 없고, 불은 죄다 꺼져있고... 이상할 정도의 추위에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그렇지... 이해가 빠른데?”

“폼으로 십 년 넘게 접수원을 하는 건 아니니까. 여기서 일하다 보면 별의별 소식이 들려오거든... 어쨌든, 그럼 너도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여기로 달려온 거야? 어떻게 된 건지 물으려고?”

“반쯤은, 네가 걱정돼서 온 것도 있어.”

“그래, 내가 걱정돼서... 응? 지, 지금 뭐라고 했어...?”

“너한테 무슨 일이 생겼으면 큰일이잖아. 나한테 정말 소중한 사람인데.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카렌.”

“자, 잠깐...! 그러고 보니 너 아까 나 깨울 때 혹시 뭐 들었...”

“들었다니, 뭐 말하는 건데?”

“아, 아냐 아무것도...”

“혹시 잠꼬대 말하는 거야? 내 꿈 꿨어?”

“....!!!”

불현듯 카렌이 신음하며 물러났다.

어두워서 표정을 살필 순 없었으나 그녀가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의아하게 쳐다보자 카렌이 다소 새된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그건 잊어! 그, 그보다...! 아리엘은?! 걘 무사한 거야? 라디라는 애나 그 정령은...”

“니아랑 같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아마 이 도시에서 제일 안전할걸.”

“그래, 그렇다면 다행... 잠깐, 왜 이런 시간까지 다 같이 모여있는 건데. 설마 소문이 사실이었어?”

“소문? 무슨 소문...?”

“네가 아리엘이랑 라디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니아 님한테까지 손을 댔다는 거. 듣자 하니 웬 옷가게에서 대놓고 외설 행위를 하다가 걸렸다던데. 그거 말고도 많아.”

“...그걸 믿냐. 넌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아니까 하는 소리야. 너 자각이 없어서 그렇지 진짜 장난 아니거든?”

“.....”

어째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 헛기침하며 화제를 되돌렸다.

“...그 얘긴 나중에 하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애초에 넌 왜 그런 곳에서 자고 있던 건데? 침대도 아니고 책상에서.”

“음... 왜 그런 곳에서 자고 있었냐고? 그러고 보니... 아, 맞아. 내가 오늘 당직이었거든. 졸음도 쫓을 겸 밀린 서류 처리하고 있었지. 다른 접수원 방에 있었던 건 내 개인실 책상이 한쪽으로 기울어서 그런 거고...”

“...그럼 잠든 건? 혹시 잠들기 직전에 뭐 이상한 거 없었어? 이상한 마력을 느겼다던가.”

“어...? 그러고 보니 왜 잠든 거지...? 이상하네... 그동안 당직을 서면서 이런 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누군가가 도시 전체에 마법을 건 것 같아.”

“그게 가능해? 아무리 대마법사라도 그런 건...”

“그게 아니고서야 도저히 설명할 수 없잖아. 날씨는 둘째 치더라도 모두가 동시에 잠든 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우리는 어젯밤에 잠들었다가 지금에서야 일어났어. 하루 꼬박 곯아떨어져 있었다고.”

“.....”

카렌이 진지하게 턱을 짚으며 고심하더니 내 얼굴을 직시하며 말했다.

“...그럼 너는 왜 멀쩡해?”

“응?”

“아니... 도시 전체가 이렇게 변해버렸는데 넌 왜 태연하게 돌아다니는 거야. 네 말마따나 누군가가 마법을 부린 거라면 상식적으로 니아 님이 먼저 일어났어야 하는 거 아니야? 마법 저항력도 훨씬 높을 텐데.”

“생각해 보니 그러네.... 뭐, 그냥 우연 아닐까? 어쩌면 네 말마따나 니아 님이 제일 먼저 일어났는데 피곤해서 다시 잠들었을 수도 있고.”

“.....”

“왜...?”

“...아무것도 아냐. 그보다 이제 어떡할 거야? 보다시피 난 아무것도 몰라. 미안하지만 딱히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없고...”

“뭐, 그래도 네가 무사한 걸 확인했으니 그걸로 충분해. 나는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서 애들이랑 의견을 나눠볼까 하는데... 너도 같이 가자.”

“어... 나도?”

카렌이 머뭇거리며 자신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반응이 그래. 여기 있다간 위험할지도 모르잖아. 저택 지하에 식료품 저장고가 있으니까 거기 숨어 있어. 여차하면 같이 도시 밖으로 도망가게 될지도 모르고.”

“....고마워. 근데 아마 부 길드장님도 지금 이 건물에 계실 거야. 같이 데려가도 될까?”

“부 길드장? 아, 그 정정한 할아버지? 그래 물론이지. 머릿수가 하나라도 더 있는 편이 나으니까.”

“고마워... 그럼 빨리 움직이자.”

우리는 서둘러 응접실을 나왔다.

기껏 데운 홍차를 마실 여유도 없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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