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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271화 (271/375)

〈 271화 〉 잠든 도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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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잠든 도시 #3

“이거 정말 심각하군...”

“...아저씨는 이런 거 보신 적 있으세요..?”

“아니, 나도 처음일세. 하룻밤 사이에 도시가 이렇게 변해버리다니...”

노년의 남성이 탄식했다.

일전에 자신을 아카이아 길드의 부 지부장이라고 소개했던 노인은 아직 잠이 덜 깬듯 힘겹게 눈꺼풀을 깜빡거렸으나, 고요하게 가라앉은 도시를 목격하자 곧바로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그가 턱을 짚으며 빠르게 머리를 굴리더니 허물없는 어투로 내게 물었다.

“그래서 이건 대체 어떻게 된 건가 도란 군. 혹시 뭔가 알고 있나?”

“아닙니다. 저도 카렌에게 물으러 길드에 방문한 겁니다.”

“저도 어느 순간부터 잠들었어요. 기름도 가득 채워놨는데 등불부터 난방까지 불이란 불은 죄다 꺼져 있고... 심지어 이상할 정도로 불이 잘 붙지도 않아요. 마치 장작이 죄다 젖은 것처럼...”

“...자세한 내용은 가면서 듣도록 하지. 구해줘서 정말 고맙네 도란 군. 설마 자네에게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야..”

“뭘요... 제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당연한 거죠.”

겸연쩍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카렌이야 두말할 것도 없고, 이 사람 또한 내가 길드에서 제명당할 뻔한 걸 도와주었던 과거가 있으니.

노인은 나를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장난기 다분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으흠... 상당히 건실한 청년이로군. 자네 혹시 우리 카렌을 첩으로 맞이할 의향은 없는가? 성격이 조금 드세긴 해도 꽤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게다가 남성 경험도 전무해서 아직 처...”

“아저씨!!!”

카렌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그가 태연하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허허 왜 발끈하고 그러나. 요즘 도란 군이 베라스틴에서 얼마나 화제인지 네가 제일 잘 알 텐데 말이야. 조만간 다른 길드에서도 포섭하려 들 텐데 도란 군 같은 인재를 우리 길드에 붙잡아 두려면 무슨 수라도 써야 하지 않겠나.”

“하, 하지만 도란에겐 이미 연인이...”

“이미 여럿 있다고 들었네. 첫 삽이 어렵지 두 번째가 어렵겠는가? 게다가 그중 한 명은 네 절친이기까지 하고. ...더 꾸물대다간 정말로 혼기를 놓칠 수도 있네.”

“.....”

카렌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경험상 그녀가 침묵할 때는 대부분 좋지 못한 경우였기에 나는 재빨리 앞으로 나서서 중재했다.

“당분간 제가 길드를 떠날 일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그보다 카렌의 의사를 존중해줘야죠. 아무리 상사라지만 그런 건...”

“흠? 카렌, 도란 군에게 말 안 했는가?”

“....”

카렌이 고개를 들더니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이 사람과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어. 우리 아버지의 절친이신데 고향에 있을 때부터 종종 신세를 지곤 했거든... 거의 가족 같은 존재야.”

“아 그랬어...? 그런데 왜 지금까지 말 안 한 거야?”

“당연히 말 못 하지. 부 길드장과 아는 사이라고 하면 특혜를 받았다는 소문이 돌지도 모르니까. 난 내 능력으로 인정받고 싶단 말이야.”

“뭐... 너답네.”

나는 선선하게 입꼬리를 올려보였다.

노인이 곧바로 능글맞게 내뱉었지만.

“으흠... 정말로 카렌을 받아갈 생각이 없나? 지금이라면 서비스로 혼수까지 잔뜩 얹어 줄 수 있다만. 이래 봬도 일편단심인 성격이라 자네가 받아준다면 죽을 때까지 정성껏 내조...”

“아저씨!!! 나 화낼 거야!!”

“평소에도 입만 열었다 하면 도란이 오늘은 어떤 마물을 잡았네, 도란이 어떤 임무를 해왔네 등등 항상 자네 이야기를... 커허억?!!”

카렌이 부 길드장의 복부에 정권을 찔러넣었다.

군더더기 없는 일격에 흠칫 놀라자 그녀가 주먹을 들어올린 채 씩씩거리며 중얼거렸다.

“...노친네는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아. 내가 예전부터 입조심하라고 했지?”

“커흑... 그렇다고.. 정말로... 노인 공경은 못할망정.. 노인 공격을...”

“빨리 옷이나 입어. 아니면 그냥 얼어 죽던가.”

“.....”

“뭐.”

“아, 아닙니닷...!”

카렌이 살벌하게 노려봐 재빨리 눈을 내리깔았다.

애꿎은 팔뚝만 문질거리며 딴청을 피우자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로브를 건넸다.

“자, 받아. 아까는 고마웠어.”

“...이제 필요 없는 거야? 밖에 엄청 추운데...”

“나는 아저씨 옷 빌리면 돼. 입는 거 도와줄 테니 이리 와.”

“.....”

마지못해 다가가자 카렌이 까치발을 들어 내 옷깃을 붙잡았다. 그녀는 내 어깨끈을 묶어 로브를 단단히 고정하더니 어색하게나마 단추를 여며주었다.

솔직히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긴 한데...

분위기를 봐서 잠자코 있자 어느새 회복한 부 길드장이 코트를 껴입고는 허리춤에 낡은 한손검을 장비하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잡담은 그만하고 슬슬 출발하도록 하지. 카렌 자네도 어서 옷 입게.”

“네.”

카렌이 사뭇 진지하게 표정을 굳히고는 두꺼운 외투를 몸 위에 걸쳤다.

모두가 준비를 마치고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주고받은 뒤, 서서히 정문을 젖히자 숨이 멎을 듯한 한기가 끼쳐왔다.

나는 로브 앞섶으로 입가를 가리며 말했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해. 목소리도 최대한 낮추고. 어두우니까 내 등 뒤에 꼭 붙어있어.”

“응.”

“알겠네. 명심하지.”

“.....”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공동묘지처럼 적막한 길드 부지를 지나 가도에 접어들자 우리는 담벼락에 최대한 밀착했다. 자칫 위치를 노출시킬 수 있는 마석등은 완전히 불을 끈 뒤 소음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천으로 동여매었고, 빛을 반사할 수 있는 철제 장검 대신 칠흑빛 단도를 뽑아 거머쥐었다.

시꺼먼 발아래를 비추는 불빛이라곤 전무했으며, 이따금씩 두꺼운 구름 사이로 흘러들어온 별빛과 그를 반사해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살얼음을 이정표 삼아 나아갔다.

묵묵히 앞길을 재촉해 상당한 거리를 지나왔을 무렵, 부 길드장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참담하구먼... 마치 전화에 휩쓸린 도시를 보는 것 같네. 이래서야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할 수 없지 않겠는가.”

“...부 길드장님은 이번 사태의 주동자가 누구라고 보십니까?”

“주동자? 흠...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로군... 왕실의 초일류 마법사가 여럿 뭉친다고 한들 이런 마법을 구사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만...”

노인이 말끝을 흐리자 카렌이 자그맣게 속삭였다.

“그렇다면 제국 쪽 소행일까요...? 아니면 인근 왕국이라던가...”

“흠... 그건 아닐 걸세. 최근 그쪽에서 전쟁을 벌일 조짐을 보였다는 소식은 들은 바 없군. 상호간의 무역도 활발하고 사이도 나쁘지 않았으니 말일세. 게다가 도시를 습격할 셈이었다면 번거롭게 시민을 재우는 것보단 압도적인 화력으로 쓸어버리는 것이 훨씬 수월했을 테니...”

“.....”

...글쎄다.

정녕 이게 평범한 인간의 소행일까?

나는 어스름진 잡목림 안으로 발을 내디디며 말했다.

“...이제 곧 저택이 나와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마세요. 무슨 일이 생기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려가서 도움을 청하고요.”

“알겠네. 듬직하구먼.”

“응... 고마워 도란...”

나는 주위를 유심히 훑으며 계속 앞서나갔다.

심야의 오솔길은 음산하기 그지없었으나 일전에 홀로 통과했을 때와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막 정문 근처에 도달했을 무렵, 뒤쪽에서 짧은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

“꺅...!”

“카, 카렌?!”

황급히 달려가 부축하자 그녀가 재빨리 손사래치며 말했다.

“괘, 괜찮아!! 다친 게 아니니까...! 뭔가를 밟은 모양인데... 읏...! 들러붙어서 안 떨어져...”

“...어디 한번 보자.”

천천히 마석등을 점등했다. 희미한 푸른빛이 드리우자 그곳엔 보는 것만으로도 오싹한 얼음 웅덩이가 카렌의 부츠를 꽉 움켜쥔 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마석등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역시 이거 평범한 웅덩이가 아니었네... 섣불리 손으로 떼어내려 했다간 같이 붙어버릴 수도 있겠어. ...괜찮아?”

“그... 조금 아파... 냉기가 점점 파고들고 있어.”

“...지금 바로 깨부술 테니까 움직이지 마.”

허리춤에서 장검을 풀어내 거칠게 내리찍었다.

칼집이 웅덩이를 강타하자 반짝이는 얼음 파편이 사방으로 터져나갔고, 아름다운 빛무리를 산란하며 공기에 녹아들었다.

‘살벌하네...’

잘게 부수어진 조각에 살짝 스쳤을 뿐인데도 로브 밑단이 얼어붙었다. 만약 도마뱀이나 설치류 같은 생물이 여기에 잘못 발을 헛디뎠다간 그대로 절명했겠지.

조심스럽게 부츠를 떼어주자 카렌이 비틀거렸다.

“...괜찮아?”

“으응... 좀 아프긴 하지만...”

“그럼 업힐래?”

“뭐...?”

“반응이 뭐 그래. 걸을 수 있겠어?”

“다, 당연하지 그 정도야...”

“그럼 부축해줄 테니까 나한테 기대.”

“....고마워.”

카렌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내 어깨에 손을 얹더니 슬그머니 체중을 실었다.

나는 잘록한 허리에 손을 두르며 말했다.

“넘어지면 안 되니까 더 기대. 불편하면 말하고.”

“그... 미안해..”

“뭘... 우리 사이에.”

이전부터 카렌에겐 많은 도움을 받아왔으니.

오갈 데 없던 나를 길드의 일원으로 받아준 것도 그렇고, 코볼트 킹 사건 이후에 뒤처리를 해준 것도 그녀였으며, 지하수로에 돌입할 때 위험을 무릅써가면서까지 망을 봐 주기도 했었다.

그 외에도 자잘하게 편의를 봐준 건 셀 수도 없다.

반면 내가 해준 건 얼마 안 되지만.

발밑을 주시하며 카렌과 함께 침엽수 아래를 거닐고 있자니 옆에서 어렴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란.”

“왜.”

“너... 지금 아리엘이랑 연애하고 있잖아...”

“그렇지.”

“그럼 같이 키스도 하고 막... 같이 자기도 하고 그랬겠네...?”

“.....”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건 갑자기 또 왜 물어? 관심 있어?”

“아, 아니... 그냥 친구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니까...”

“이따가 직접 물어봐. 이제 다 왔으니까.”

열쇠로 어찌어찌 얼어붙은 정문을 따고 들어갔다.

여전히 정원에서는 작은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고, 곳곳에 반짝이는 얼음 웅덩이가 산재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한데 추위에 얼어붙은 몸을 이끌고 현관에 도착하자 대문 열쇠를 꺼내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며 익숙한 세 인영이 나타났다.

“도란님!!”

“소년!! 어디 갔다 왔...!”

“.....”

니아가 다가오다 말고 우뚝 정지했다. 라디 또한 예상치 못한 동행에 잠시 멈칫했지만, 곧바로 아리엘이 그녀들을 비집고 나와 외쳤다.

“카, 카렌...! 무슨 일이야?! 다쳤어!? 잠깐만 기다려 봐...! 지금 당장 치유 마법을 쓸 테니까!!”

“별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오면서 있던 웅덩이를 밟았거든. 신발이 통째로 얼어붙어서...”

“동상에 걸렸을 수도 있어! 지금 당장 벽난로로 가자!! 아니, 목욕물 받아 줄 테니까 이리 와!!”

“자, 잠깐...!”

아리엘이 내게서 카렌을 건네받더니 둘쳐업다시피 한 채 층계를 올랐다.

머쓱하게 거실로 들어서자 라디가 로브를 붙잡고 물었다.

“도란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자고 일어났더니 하루가 꼬박 지나있는 데다가 밖은 얼음투성이에 바람도 불지 않고.. 사람은 없고...”

“나도 그래서 확인해 보러 나갔다 온 거야. 도시 전체가 그렇더라. 아카이아 길드에도 가 봤는데 보다시피...”

“...부 길드장일세. 칠칠맞게 쓰러져 있는 걸 도란 군이 구해줬지. 자네가 바로 라디로군. 그리고 그쪽은...”

“......”

니아는 그에게 별 관심이 없는지 가볍게 흘려넘기고는 날 거세게 끌어안았다.

그녀가 떨리는 눈동자로 날 올려다보며 뺨을 어루만졌다.

“소, 소년... 괜찮아...? 혹시 무슨 일을 당한 건 아니지...?”

“...네, 그냥 상황 파악 좀 하고 온 거예요. 딱히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지만요. 혹시 이 사태에 대해 짐작 가는 게 있으세요?”

“아니, 나도 전혀 모르겠어... 이렇게나 대규모의 마법인데도 마력이 전혀 안 느껴져... 이건 마나라기보단...”

“...일단 그 얘기는 들어와서 하는 게 좋겠어요. 부 길드장님도 어서 와서 몸 좀 녹이세요. 차를 내오면 될까요?”

“황송하군.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

“네 그럼 이쪽으로... 그리고 도란님도 많이 추울 텐데 벽난로에서... 도란님?”

“.....”

찰나ㅡ

그대로 자리에 얼어붙었다.

나는 천천히 니아를 떼어놓고는 다시금 장검을 갈무리하며 읊조렸다.

“...난 잠깐 어디 좀 다녀올 테니까 다들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

“도, 도란님...? 지금 어딜 가시겠다는 거예요?!”

“금방 돌아올게.”

현관문을 젖히고 나왔다.

유령처럼 창백한 마석등의 불빛 너머로 내가 목격한 건­

“토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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