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272화 (272/375)

〈 272화 〉 잠든 도시 #4

* * *

[272] 잠든 도시 #4

즉시 벽면에 내동댕이쳐졌다.

­쾅!!

“크윽...!”

“야.”

“니, 니아 님...”

“너 제정신이야? 이런 상황에 어딜 싸돌아다니려고 해. 죽으려고 작정했어?”

“이, 일단 이것 좀...”

“안 놔줘. 사태가 파악되기 전까지 밖에 나가는 건 꿈도 꾸지 마.”

“수, 숨이...”

“라디, 너도 빨리 와서 막... 꺄읏...?!”

돌연 니아가 허벅지를 모으며 주저앉았다.

그녀가 황금빛 눈동자로 날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소년. 너 이걸로 세 번째야. 이젠 변명도 못... 읏...!”

­꽈악...!

꼬리를 움켜쥔 손아귀에 힘을 싣자 그녀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허리를 움찔했다.

이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벙끗거렸으나 끝끝내 입을 열지 못하고 촉촉해진 눈망울로 애원했다.

“소, 소년... 놓아줘...”

“....”

나는 한껏 꼬리를 주물럭거린 뒤 천천히 손아귀를 느슨하게 풀며 말했다.

“...진정 좀 하세요. 갑자기 흥분해가지고는...”

“소, 소년이야말로 느닷없이 왜...”

“안 그랬으면 진짜로 기절시킬 생각이었잖아요. 걱정하는 건 이해가 간다만...”

“그래도...”

“이제 됐으니 일어나요. 옷에 먼지 묻겠다.”

“.....”

손을 맞잡아 일으켜주자 부 길드장이 턱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A랭크를 수족 부리듯 다루는 F랭크라... 엄청난 호색가라기에 뜬소문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겠군... 범상치 않아.”

“....”

애써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는 잠시 요 앞에 나갔다 올 테니까 여기 꼼짝 말고 계세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대비...”

“어디 가려는 거야!! 나도 이런 건 본 적이 없단 말야! 하물며 약해빠진 주제에 나서려고나 하고...”

“걱정돼요?”

“그야 당연하지... 만약 소년이 나가서 무슨 일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난...”

니아가 고개를 숙이며 뒷말을 흐렸다.

나는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그것만 확인하고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요.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으면 중간에 곧바로 돌아올게요. 저 이래 봬도 목숨 하나만큼은 진짜 끈질기잖아요. 알겠죠?”

“....”

“그럼 다녀올게요.”

어깨를 토닥이고 뒤돌았다.

다시금 말이 나오기 전에 재빨리 현관을 나서려는 차, 이번엔 라디가 내 발길을 붙들었다.

“도란님, 저도 이번엔 도란님의 의견에 반대해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혼자서 돌아다니는 건 너무 위험이 커요. 가만히 있으면 상황이 진정될지도 모르는데 괜히 불길 속으로 뛰쳐들 필요는 없잖아요.”

“상황이 진정되다니... 짚이는 거라도 있어?”

“네, 아마 상대는 베라스틴을 침공하는 게 목적이 아닐 거예요.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복잡하고 번거로운 마법을 구사하기보단 화력으로 밀어붙이거나 영주성을 집중적으로 공략했겠죠.”

라디가 커튼 너머로 높게 솟은 성벽을 힐끔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희가 이변을 알아차린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아무런 추가 소식이 없어요. 대규모 공작을 벌이는 것도 아니고, 암살자들이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니 뭔가 특수한 의도가 있을 거예요. 예컨데 어떤 물건이나 사람을 찾아낸다거나... 시민들을 잠재운 건 그런 과정에서 간섭받기를 원하지 않는 거고요.”

“...이대로 있으면 그냥 지나갈 거란 거야?”

“네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요. 적어도 지금까지의 행태로 봤을 땐 불필요한 인명 피해를 원치 않을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뭔가를 찾아낸다라...”

일리 있는 말이다.

턱을 짚으며 생각에 잠기자 옆에서 감탄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엄청난 수완이로군. 단시간에 거기까지 꿰뚫어 보다니... 역시 도란 군의 아내라 그런 겐가?”

“과찬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남들 눈치를 보며 살아왔거든요.”

“....”

라디가 무심결에 뺨의 문장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녀석을 쓰다듬자 니아가 조심조심 물어왔다.

“...그럼 이제 어떡할 거야 소년?”

“글쎄요... 솔직히 좀 고민되지만...”

이런 시기에 이변이라...

과연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일까?

어쩌면 단순 휘말린 것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든다.

호텔 정원에서 목격한 두 인영. 마주칠 때마다 사건을 몰고 다녔던 검은 토끼. 홀연히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티바르 신. 마치 날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했던 연금술사...

지금도 현관 밖에서 날 빤히 바라보는 새빨간 두 눈동자.

불현듯 티바르가 마지막에 남긴 말이 뇌리에 맴돌았다.

설마 누군가가 날 찾아올 거라고 했던 게...

“.....”

칼자루를 굳게 움켜쥐고 망설이자 니아가 내 뺨을 붙들며 물었다.

“왜 소년... 뭔가 걸리는 게 있어?”

“...네, 저거 보여요? 마당에...”

“뭐 말하는 거야? 아무것도... 없는데...?”

“...아무튼 한번 확인해봐야겠어요. 밖에 나가도 습격자랑 마주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할게요. 그리고 만에 하나 베라스틴을 침공할 의도가 섞여 있다고 판단되면 한시바삐 이곳에서 도망치거나 대책을 마련해야 하니까요.”

힐끔 눈치를 보며 내뱉자 라디가 내 눈동자를 깊게 들여다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정 그렇다면 니아 님이랑 같이 가세요. 저도 이건 양보 못 해요. 혼자서는 절대로 안 보낼 거예요.”

“그러면 너랑 아리엘은...”

“저희도 제 몸 하나쯤은 건사할 수 있어요. 그러기 위해 지금까지 단련해온 거니까요.”

“.....”

“못 믿겠어요?”

“...아니, 내가 널 안 믿으면 누굴 믿어.”

라디는 내가 아는 최고의 모험가 중 한 명이니까.

나는 녀석을 꼭 끌어안아 주며 속삭였다.

“...그래, 그럼 니아 님이랑 같이 갔다 올게. 금방 다녀올 테니까 여차하면 지하실에 숨어 있어.”

“알겠어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뭔가 낌새가 이상하면 곧바로 돌아오시고요. ...사랑해요.”

라디가 뺨에 입술을 맞췄다.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현관을 나서자 니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손목을 붙잡으며 물었다.

“소년, 정말 무슨 일 있어? 왜 너답지 않게...”

“니아 님, 이전에 봤던 토끼 기억해요?”

“토끼? 시장 골목에서 봤던 검은 토끼를 말하는 거야?”

“네, 그 녀석이 방금 저희 정원에도 왔었어요.”

“...난 분명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정말이야?”

“.....”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네, 아마 우연은 아닐 거예요. 이 도시의 모든 생물이 잠들었는데 어떻게 그 녀석만... 어쩌면 라디가 말했던 습격자의 의도가 저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요?”

정말로 그 토끼가 평범한 토끼가 아니고, 이번 사건의 핵심이라면 당장 이곳에서 멀어져야 한다.

자칫하다가 라디와 아리엘이 말려들 수도 있으니까.

대체 어떤 연유로 날 불러내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니아 님... 만약 지금이라도 돌아가 달라고 하면...”

“응, 화낼 거야. 엄청. 그때는 꼬리 만져도 절대 안 봐줄 거야.”

“정말로요?”

“응, 지금 한번 해볼래?”

“...사실 그러면서 은근히 사심 채우려는 거 아니에요?”

“.....”

“이, 일단 집중하죠. 분명 이 근처에서 마지막으로 봤었는데...”

덤불 근처로 가 바닥을 살폈다. 조심스레 마석등을 드리우자 새하얗게 풀잎을 덮은 서리와 물방울 모양으로 굳어버린 빗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기 어딘가에 발자국이 남아있을 거다. 하다못해 털 뭉치라던가.

집중해서 둘러보고 있던 도중, 오른쪽 옆구리에서 잡아당기는 감촉이 느껴졌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왜요, 니아 님.”

“응? 난 갑자기 왜?”

“아니 아까부터 계속 잡아당...”

니아는 왼쪽에 서 있다.

화들짝 놀라며 물러나자 검은 형체가 툭 떨어져내렸다.

니아가 난처하게 뺨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토끼네.”

“....토끼네요.”

­.....

요 며칠간 줄곧 날 괴롭혔던 토끼가 발치에서 멀뚱히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녀석은 기다란 귀를 쫑긋거리고는 순식간에 정원을 가로질러 풀쩍 담벼락 위에 안착했다.

나는 얼이 빠진 상태로 니아와 마주보았다.

“누가 봐도...”

“따라오라는 거네. 응.”

“저 갑자기 저택 밖으로 나온 게 조금 후회되기 시작했는데...”

“...가서 붙잡아 줄까?”

“아뇨, 그랬다간 어떤 화를 입을지도 모르니까요. 아무리 니아 님이 강하다고는 해도 상대는 도시를 잠재울 정도의 마법을 구사하는 실력자에요. ...적당히 떨어져서 쫓아가죠. 이 정도 거리가 좋겠어요.”

토끼를 뒤따라 저택 부지를 나왔다.

녀석은 입김이 얼어붙을 정도의 추위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깡총거리며 오솔길을 나아갔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도 된 심정으로 주의를 기울이며 전진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가도에 접어들었고, 토끼는 곧바로 방향을 틀어 남쪽으로 향했다.

니아가 토끼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응... 긴가민가했는데.. 역시 저 토끼는 사역마가 맞는 거 같아. 아니면...”

“그래요...? 뭐 저도 보통 토끼는 아닐 거라고 이전부터 생각은 했는데... 어떤 점을 보고 판단하신 거예요?”

“글쎄... 그냥 직감...? 근데 확실한 건 아냐. 보통 사역마라고 하면 특유의 마력 파장이 있거든? 주인하고 얇은 끈 같은 걸로 이어져 있단 말야. 근데 저 토끼한텐 그런 게 없어.”

“그래요? 전 마력을 못 느끼니까... 그건 모든 사역마 공통이에요?”

“대부분은. 예외도 있긴 한데 엄청 드물어. 애초에 사역마 자체가 그렇게 흔한 것도 아니고...”

“그런가...”

잠깐.

“근데 저 같은 경우는 마나를 못 쓰는데도 마물을 길들인 적이 있는데 그건 뭐예요? 니아 님 말대로라면 마력을 쓸 수 있어야 사역마를 부릴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아, 정령은 워낙 특별하니까...”

“아니 정령 말고요.”

“응? 란이 말고?”

“네, 이전에 네눈박이 늑대를 길들인 적이 있거든요.”

“.....”

니아가 눈매를 가늘게 뜨더니 묘한 눈초리로 말했다.

“네눈박이 늑대라... 그 흉포한 마물을...? 그러고 보니 던전 7계층에서 네눈박이 늑대가 출몰한다고 했었지... 소년, 네가 거기서 어떻게 살아나왔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나?”

“...들켰네요. 뭐, 니아 님한테는 언젠가 밝힐 생각이었으니까요. 실은 던전 7층에 다시 방문하고 싶어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에요. 어떻게든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서...”

“흐음... 그거 재밌겠는데? 아무튼, 내가 방금 예외도 있다고 했잖아. 그게 바로 소년의 경우야. 온전히 교감만으로 주종 관계를 이뤄낸 경우. 이런 케이스가 워낙 드물고, 마나를 이용해 소통하지를 못하니 세세한 명령을 내리기 어렵다거나 깊은 교감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

이상하다... 나는 잘만 되던데.

해일과 메라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하지 않는 편이 낫겠지.

토끼를 눈으로 쫓으며 물었다.

“그런데 아까 사역마 말고도 뭐라고 말하려 했던 것 같은데 그건 뭐예요?”

“음... 나도 이건 전승으로만 들은 얘기긴 한데... 소년은 혹시 애니미구스라고 들어봤어?”

“애니미구스? 그게 뭔데요?”

“응... 애니미구스가 뭐냐면... 동물로 변할 수 있는 재주를 지닌 사...”

“니아 님...?”

찰나ㅡ

니아가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