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화 〉 돌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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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 돌입 #1
서둘러 열쇠로 문을 열고 현관 안쪽으로 들어서자 불 꺼진 실내가 보였다.
잠시 자리에 멈춰서서 마석등을 비추니 기둥 뒤에서 익숙한 두 형체가 걸어나왔다.
라디가 쇠뇌를 내리며 읊조렸다.
“좀 늦으셨네요... 그보다 뒤에 그 사람들은...”
“안녕하십니까! 남쪽 구획에서 노예 거래소를 운영 중인 돌킨입니다! 지하 광장을 빠져나올 때 한번 뵈었지요? 그리고 이쪽은 제 종자입니다.”
“아... 오랜만이에요.”
라디가 거실 불을 켜고 가볍게 묵례하자 아리엘이 다가와 날 끌어안았다.
“고생했어 도란.. 원하던 건 알아낸 거야? 추울 텐데 차라도 내올게”
“고마워... 그보다 카렌하고 부 길드장님은 어디 있어?”
“지금은 일단 지하실에 숨어 있어. 밖에 나와 있다간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아까 가도 쪽에서 불빛이 비쳐오는 걸 봤는데 혹시 도시가 정상화 된 거야?”
“그래, 다 설명할 테니까 전부 불러와 줘.”
“그 두 사람도?”
“어, 급한 일이야.”
“...알았어.”
아리엘이 재빨리 저택 안쪽으로 달려갔다.
외투를 벗겨주고자 다가온 라디를 눈빛으로 제지하고 담담하게 부츠를 벗자 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표정이 엉망인데... 이렇게 심각한 도란님은 처음 봐요.”
“...다 모였을 때 한 번에 얘기할 테니까 조금 기다려줘. 돌킨 너도 빨리 들어오고.”
“실례하겠습니다...!”
돌킨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더니 종자를 데리고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둘러앉아 잠시 기다리자 아리엘이 당황한 카렌과 부 길드장을 데리고 다가왔다.
카렌은 초면인 돌킨과 그의 종자를 보고 흠칫했지만, 옆에 앉은 나를 발견하고 안심하며 물었다.
“도란, 뭐야 갑자기 할 말이라는 게...”
“지금부터 설명할 테니까 잘 들어. ...부 길드장님도 동석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네. 내 경청하도록 하지. 이번 사태랑 관련이 있는 겐가?”
“네. ...돌킨.”
“옛...! 알겠습니다!! 그럼...”
돌킨이 테이블에 둘러앉은 면면들을 살피며 짧게 자기소개를 마치더니, 목청을 가다듬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 서론은 이쯤 하고... 나리께는 예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만, 최근 영주성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노예를 긁어모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중 대다수의 행방이 묘연해졌지요. 저는 이를 의아하게 여겨 납품할 노예 중에 이들의 동향을 파악해줄 심복을 심어두었습니다.”
“그건 불법인 게...”
“...긴급한 상황이니 책망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에 해주십시오. 더욱이 그 결정에는 나리의 요청도 있었으니. 크흠.. 아무튼, 조금 전 그때 뿌려둔 심복에게서 첩보가 도착했습니다. 여기 보고서가 있는데...”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해 돌킨. 다 들을 수 있게.”
“...알겠습니다.”
그가 눈짓하자 종자가 품속에서 한 양피지를 꺼내들었다.
돌킨이 양피지를 건네받고는 진지한 음성으로 내용을 읊어나갔다.
“핵심만 요약하자면... 그들은 노역을 위해 동원된 게 아니었습니다. 또한 도시 재건과 수복 모두 헛소문이었습니다. 영주성은... 그들을 이용해 인체 실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인체 실험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리엘이 눈매를 날카롭게 좁히며 묻자 돌킨이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들을 숙주로 삼아 새로운 병기를 개발하려는 모양이더군요... 해당 과정을 직접 목격한 심복의 말에 따르면 대다수가 실험 도중에 처참한 몰골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계속 새로운 노예를 충원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
“그, 그럴 수가...”
“그 실험 내용이란 건...?”
“저도 상세한 부분까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신체 능력을 강화하고 자아를 제거한다고 했습니다.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강력한 군대를 양산해내려는 의도가 아닐까 합니다. 보고에 따르면 실험에 성공한 개체는 하나같이 보라색 촉수가 몸에 돋아났...”
“잠깐...!! 지금 뭐라고...?!”
돌연 카렌이 탁자를 내려치며 벌떡 일어서자 돌킨이 주춤하며 대답했다.
“예 예... 그쪽께서도 소문을 들어보셨군요... 최근 베라스틴에 발생했던 실종 및 촉수 소동은 전부 영주성의 소행이었습니다. 영주 본인이 가담되어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정황상 틀림없을 겁니다.”
“그런...”
“.....”
카렌이 입가를 틀어막으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모두가 숨죽이고 누군가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도중, 부 길드장이 손을 들어올리며 나섰다.
“...잠시 실례하지. 당신의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도란 군, 이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네, 적어도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에요.”
“제가 나으리를 속일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만일 그랬다간 목숨이 백 개라도 모자랄 테니까요. 만일 원하신다면 그동안 모아온 자료들을 모두 넘겨드릴 의향도 있습니다.”
“.....”
부 길드장이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가늠하자 라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영주성 측도 변이를 일으킬 수 있는 매개체를 소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겠네요. 최근 발생했던 실종 사건도 모자란 숙주를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가정하면 아귀가 맞아요. 실종자 중 유독 건장한 남성의 비중이 높았던 것도 실험을 견딜 수 있도록 튼튼한 사람을 선별한 거라면...”
“그러게... 우리도 고블린이 변이 도중 피를 쏟으면서 요절하는 걸 봤으니까. 건강한 사람일수록 부하를 견딜 확률이 높다는 건 당연히 그쪽도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러면 이제 도란은 어떻게 할 거야? 아까부터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데...”
“.....”
나는 소파 등받이에 등을 젖히며 대답했다.
“영주성에 쳐들어갈 거야.”
“응, 영주성에... 잠깐, 지금 뭐라고 했어...?”
아리엘이 눈을 크게 뜨고 당황하자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해야 할 일이 생겼어. 오늘 밤 꼭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해. ...돌킨.”
“예...! 나으리가 신원 확보를 요청했던 고양이 수인도 현재 영주성 안에 있는 걸로 판명됐습니다! 게다가 정보원이 보내온 첩보에 따르면 어젯밤 실험 대상을 선별해놓은 지하 감옥으로 이송되었다고 합니다. ...한시가 시급한 상황입니다.”
“...큰일이네. 왜 지금까지 줄곧 면회 요청을 묵살했는지도 이제야 납득이 가.”
“하기야... 그런 수작을 꾸미고 있었더라면 저라도 외부인을 들이기 꺼렸을 거예요. 게다가 도란님은 기사 수백도 해치웠던 전적이 있으니... 그러면 오늘 밤 그 아이를 구출해오실 예정이라는 거죠? 안디... 저희에게 중요한 아이니까...”
“.....”
라디가 주변인을 의식해 말을 고쳤지만, 나는 테이블에 놓인 냉수를 들이켜고는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안디라 님하고는 이미 만나고 왔어.”
“네, 그러니까... 예...? 지, 지금 뭐라고...”
“안디라 님과 만났어. 조금 전에.”
““.....””
적막이 내리깔렸다.
그의 존함이 기온을 낮추기라도 한 듯 벽난로의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쥐 죽은 듯 고요한 거실에는 떨리는 숨소리와 스산하게 창문을 때리는 바람의 소음이 들려왔다.
감히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는 와중, 내가 잔을 내려놓는 걸 기점으로 사방에서 격한 반응이 들끓었다.
“자, 잠깐...! 안디라 신을 만나고 왔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안디라 님을...? 아니... 언젠가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잠깐!! 안디라라니...! 대체 언제 만난 건데...?! 설마 그때야!? 나랑 잠시 떨어졌을 때...!”
“아, 안디라...? 죽음의 신이잖아...! 그분의 이름이 갑자기 왜 여기서... 게다가 만났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도란?!!”
“흠... 이거 상당히 흥미롭군...”
“나, 나으리...? 서, 설마 나리의 그 능력이...”
“.....”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내 사지가 잘 달려있나 확인하는 니아를 살짝 떨어뜨려 주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진정되면 털어놓을 예정이었지만, 전혀 가라앉을 기미가 안 보인다.
마지못해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을 뒤집자 순식간에 시꺼먼 직도가 나타났다.
카렌과 돌킨이 흠칫 놀라며 물러나자 라디와 아리엘이 다가와 침음했다.
“이건... 도란님이 가지고 계신 단도의 장검 버전이네요... 도신도 가늘고... 엄청 날카로워 보여요.”
“이런 무기를 길바닥에서 주워 왔을 리도 없고... 정말로 안디라 님을 만나고 온 거야...?”
“그래, 그분이 이변의 원인이었어. 저번에 내가 말했던 토끼 기억해? 그 토끼를 쫓다 보니 니아 님과 헤어지고 남쪽 슬럼가 광장에 도착했어. 그리고 거기서 그분과 만났고...”
“그 뒤론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건...”
오한이 치밀었다.
광장에서 목도했던 괴물, 존재만으로 피를 얼리고 호흡을 앗아가던 생물들을 떠올리고 있자니 라디가 떨리는 손을 맞잡아 주었다.
“...괜찮아요. 꼭 말해주지 않아도. 전 도란님이 무사히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해요.”
“맞아 도란, 힘들었지? 이리 와. 안아줄게.”
“....고마워.”
라디와 아리엘이 포근하게 양쪽에서 날 끌어안았다.
한데 불현듯 카렌이 테이블을 꽉 움켜쥐며 격양된 어조로 외쳤다.
“잠깐...!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데?! 안디라 신님은 수백 년간 세간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잖아...! 근데 갑자기 베라스틴에 나타났다는 건 뭐야?! 게다가 꼭 도란하고 이전부터 알던 사이인 것처럼...”
“.....”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난 안디라 님에게 축복을 받았어. ...아마도. 지금 여기 보이는 단도랑 장검은 그분의 성물이고, 던전에서 스노우 타이거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전부 그것 때문이야.”
“추, 축복?! 하, 하지만 그분은 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위계가 높은 대물 신이잖아! 절대로 축복을 내려주지 않기로 유명하고...! 그런데 도란이 그분의 가호를 받았다는 건...”
“뭐... 그렇게 됐다.”
“으...”
카렌이 어금니를 깨물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이전까지는 정말로 내가 그분의 축복을 받은 것이 맞는지 반신반의했으나 이번 일로 반쯤 공인받은 것이라 여겨도 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다.
그가 무슨 연유로 날 찾았는지는 명백했기에.
“...어쨌든, 난 영주성에 들어가서 그 수인을 구출해야만 해. 놈들이 하는 짓거리가 맘에 안 드는 것도 있고, 무기까지 받아온 마당에 가만히 집에 가만히 틀어박혀 있다간 어떤 신벌을 받을지 모르니까.”
안디라 님이 이전부터 그 애를 보살펴 주고 있었다는 건 확실한 상황.
만약 구출에 실패한다면 끔찍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
확고하게 내뱉자 라디와 아리엘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알겠어요. 사실 이렇게 될 것도 조금은 예상했으니까요. ...대신 덕분에 가감없이 기사들을 처분할 수 있겠네요.”
“나도 동의해. 하지만 문제는... 가능할까...? 도시 안에서도 제일 방비가 삼엄한 구역인데...”
“쉽진 않겠지. 우리 세 명만으로는 절대 무리일 거야. 그래도 우리한테는 최강의 전사가 있잖아?”
“아...”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니아가 어깨를 움찔했다.
그녀가 자신을 가리키며 새된 목소리로 읊조렸다.
“뭐... 나, 나...?”
“...안 될까요?”
“으음....”
니아가 난처하게 미간을 구기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게... 솔직히 말처럼 쉬운 건 아니야. 영주성에 갇힌 노예를 구하려면 부득이하게 피를 흘려야 할 텐데... 그러면 일이 엄청 크게 번질 수도 있거든. 나는 제국의 귀족인 데다가 붉은 매 길드의 핵심 일원 중 한 명이니까...”
“.....”
“뭐... 도란이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안 될 건 없는데...”
니아가 머리칼을 비비 꼬며 힐끔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보며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릴게요 니아 님. 이번 일은 저희의 힘만으로는 무리에요. 굉장히 무례하고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건 알지만... 니아 님이 필요해요.”
그녀의 두 손을 붙잡으며 간절하게 종용하자 니아가 뺨을 붉히며 미소지었다.
“으응...! 알았어! 아실리한테 꾸지람 좀 듣지 뭐!! 그럼 다들 준비하자!! 소년을 곤란하게 만든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고!”
“.....”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 흑도(??)를 손아귀에 움켜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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