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화 〉 돌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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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 돌입 #2
“그럼... 이 늙은이는 이제 슬슬 움직여 보겠네. 길드 상위 모험가의 주소를 알고 있으니 신용할 수 있는 자들을 모아다가 후일에 대비하도록 하지. 무운을 비네.”
“감사합니다. 부 길드장님도 모쪼록 조심하십시오.”
“무리하면 안 돼 도란.. 꼭 무사하게 돌아와야 해... 나도 영주성이 한 악행의 증거 자료를 모으고 있을 테니까...”
“그래, 고마워 카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렌을 돌아보았다.
한데 돌연 그녀가 날 와락 껴안아왔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두 팔을 들어올린 채 당황하자 가슴팍 아래서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해.”
“...뭐라고?”
“...약속 지켜. 너 나랑 처음 만났을 때 그랬잖아. 자기를 길드원으로 받아준 걸 절대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주겠다고.. 나 아직 후회한단 말야... 맨날 무모한 일이나 벌이기만 하고...”
“.....”
나는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꼭 약속 지킬게. 날 받아준 걸 후회하지 않도록 해줄게. ...평생.”
“펴, 평생...?! 그거 무슨 의미...”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카렌. 무사히 돌아올 테니까.”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어째선지 한껏 얼굴을 붉힌 채 안절부절못하는 카렌을 배웅해 주고 나자 라디와 아리엘이 말없이 다가와 내 볼따구를 잡아당겼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얼얼한 뺨을 움켜쥐고 의아하게 내가 한 행동을 되짚어보고 있노라니 이번엔 돌킨과 종자가 머리를 숙였다.
“그럼 저희도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나으리.”
“그래, 뭐... 어떻게 할 거야?”
“우선은 제 연락망을 이용해 다른 노예 상인들에게도 사정을 알릴 예정입니다. 사람들을 불러모아 언제든 나리의 명에 맞춰 움직일 수 있도록 대비하겠습니다. 더욱이 제 산하의 집사와 메이드에게도 비밀리에 군사훈련을 시켜뒀으니 위급 상황 시 미약하게나마 나리께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
전투 메이드라...
“항상 신세만 지네... 고맙다.”
“당치도 않습니다! 저야말로 나리를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설마 나으리가 안디라 신의 권능을 이어받은 존재였다니... 이제야 나리의 어마무시한 저력의 원천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호들갑은... 그래 뭐... 고맙다, 그럼 수고하고.”
“옛! 무운을 빌겠습니다!!”
노예 상인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고 떠나가자 떠들썩했던 집안이 한층 조용해졌다.
한숨을 내쉬며 현관문을 닫고 거실 안쪽으로 들어서니 세 여인이 거실에 둘러앉아 무기를 점검하고 있었다.
나는 곁에 걸터앉아 입을 열었다.
“...준비됐어?”
“응, 난 다 끝났어 도란.”
“잠시만요 저는 챙길 게 많아서... 거미 맹독이랑 독성 수액 중 뭘 챙겨가는 게 더 좋을까요?”
“글쎄... 거기서 거기 아냐? 둘 다 끔찍해 보이는데...”
“달라요. 거미 맹독은 좀 더 치명적인 대신 고통이 덜하고, 독성 수액은 더 고통스럽게 죽는 대신 효과가 더디게 나타나요. 완전히 다르다고요.”
“...그럼 거미 맹독으로 가자. 일단 당장 눈앞의 적을 처리하는 게 중요하니까. ...그보다 니아 님은 그걸로 충분한 거예요? 조금 위태위태해 보이는데...”
니아의 장비는 팔랑거리는 평상복 위에 로브를 걸친 게 전부. 레더아머에 각종 금속 보호대를 장비한 나나 경장갑을 걸친 라디와 아리엘에 비하면 심히 불안한 차림이다.
아무리 A랭크라 해도 이대로 가면 성치 못할 텐데...
걱정스럽게 쳐다보자 니아가 쾌활하게 웃으며 내 팔을 두드렸다.
“괜찮아 괜찮아~! 마력으로 피부를 강화하면 웬만한 화살쯤은 튕겨낼 수 있거든! 물론 보호구를 착용한 것만은 못하지만... 어중간한 장비를 착용해서 움직임을 방해받는 것보단 나아. ...왜, 걱정돼?”
“그야 당연하죠... 만약 큰 상처라도 나면 큰일이잖아요.”
“응? 상처가 생겨도 아리엘의 능력이면 나중에 치유할 수 있잖아?”
“그래도 마음이 안 좋으니까요. 니아 님이 다치는 건 싫어요. 아파하는 모습을 보기도 싫고요.”
“으윽...! 가, 갑자기 그런 건 반칙이야!”
“네?”
뺨을 붉히고 시선을 피하는 니아를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녀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 그렇게 걱정되면 부탁이라도 하나 들어주던가.”
“부탁이요?”
“응, 너 저번에 내기에서 져서 내 소원 들어주기로 한 것도 흐지부지됐잖아. 이참에 무사히 돌아오면 제대로 약속 지켜.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기로. 그래야 나도 의욕이 좀 살지!”
“알겠어요. 뭐 그 정도쯤이야...”
목숨을 걸고 행하는 일이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기사의 소굴로 들어가는 만큼 안전히 돌아올 거라는 보장도 없고, 개중엔 A랭크에 버금가는 실력자도 분명 존재할 거다. 전 기사단장이었던 키론 경도 본디 S랭크에 맞먹는 강자였으니.
니아는 오롯이 날 위해 변변찮은 무기와 방어구도 없이 사지에 뛰어드는 것이니 조금은 응석을 받아줘도 되겠지.
나는 환희를 주체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꼬리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도 너무 긴장 풀고 계시지는 마세요.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건 잘 아시잖아요. 물론 저희의 최우선 목표는 기사들과 정면으로 맞서는 게 아니지만요.”
“응, 비밀리에 잠입해서 그 소녀를 구출해오는 거라고 했지? 그런데 만약 도중에 영주가 나타나서 방해하면 어떻게 할 거야?”
“뭐... 최대한 원만하게 해결하는 편이 좋겠지만... 정 불가능하다면 적대하는 것도 각오해야죠. 아리엘,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 거야?”
니아에게서 시선을 떼자 라디의 레더아머 가죽끈을 조여주던 아리엘이 난처하게 대답했다.
“음... 솔직히 영주는 죽이지 않는 게 최선이지만... 영주를 해치지 않는다고 해서 마냥 안도할 상황은 아냐. 몰래 침입을 시도한 것 자체만으로도 반역죄로 처벌받을 수 있거든. 또 국가의 군사 기밀을 빼돌리려 했다거나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거나 둥 누명이란 누명은 잔뜩 뒤집어쓸 수 있어.”
“...그럼 무슨 일이 있어도 정체를 들키면 안 되겠네.”
“응, 그게 최선이긴 한데... 다행인 건 영주도 대놓고 공표하지는 못할 거야. 시민을 납치해서 괴물로 만들려 한 게 들통나면 입지가 위험해지는 건 물론이고, 교회의 심판을 받을 게 뻔하니까.”
“그 말은 즉, 일단 베라스틴을 빠져나오면 다른 도시로 망명하는 건 가능하다는 거야?”
“음... 일단은?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만약 일이 잘못 틀어지면 아버지한테 부탁하면 되니까! 분명 병력을 파견해서 진압해 주실 거야!”
“.....”
그건 또 어떨지...
새삼스럽지만, 그녀가 유력한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것이 떠오르자 죄책감이 가슴을 쿡쿡 찔렀다. 즐거운 경험만 시켜줘도 모자랄 판에 사지로 내모는 꼴이라니.
무심코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아리엘은 날 바라보며 미소짓더니 부드럽게 가슴팍을 끌어안았다.
“...미안해하지 마 도란. 이건 내가 선택한 거니까. 난 도란을 도울 수 있어서 정말로 기쁜걸? 덕분에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행복해.”
“그래도... 나 때문에 고생하는 것 같아서...”
“정말... 그런 소리 안 하기로 했잖아. 한 번 더 그러면 화낼 거야. 이럴 땐 걱정해 주는 게 아니라...”
아리엘이 살짝 머뭇거리더니 수줍게 까치발을 들어 입술을 맞췄다.
그녀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사랑스럽게 내 뺨을 매만지며 속삭였다.
“...그냥 이런 식으로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해 주면 돼. 어렵지 않잖아. 그치?”
“.....”
연푸른색 눈동자에 아름다운 색채가 일렁였다.
충동적으로 그녀의 입술을 덮치자 먹먹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단단한 흉갑 너머로 느껴지는 부드러움, 비강을 적시는 달콤한 체취를 맡으며 진한 입맞춤을 나누자 옆에서 다분한 시선이 느껴졌다.
“.....”
천천히 아리엘을 놓아주고 겸연쩍게 돌아보며 말했다.
“...라디, 너도 일로 와.”
“.....”
라디가 미소지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자칫 이번 일이 틀어지면 영영 이별할 수도 있는 바, 그녀와도 애틋한 키스를 나누고 나자 그제야 가슴 한구석을 메웠던 미련이 녹아내리는 듯하다.
전투에 돌입하기 전, 마지막으로 서로의 유대감을 확인하며 웃자 이번엔 니아가 잔뜩 기대에 찬 얼굴로 다가와 소매를 잡아당겼다.
“소, 소년 혹시 나도...”
“.....”
난처하게 라디와 아리엘을 돌아보고는 읊조렸다.
“...눈 감아봐요.”
“저, 정말...?! 아, 알았어...! 난 준비됐으니까...”
니아가 질끈 눈을 감았다.
붉게 상기된 뺨과 쥐치처럼 내민 입술은 그녀가 얼마나 기대에 차 있는지 절절히 실감할 수 있을 정도.
하지만 내가 장난스럽게 손가락으로 입술을 튕기자 그녀가 불만스럽게 볼을 부풀렸다.
나는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으며 속삭였다.
“...미안해요. 그래도 지금은 이걸로 참아요. 무사히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땐 뽀뽀 정도는 생각해 볼 테니까.”
“저, 정말이지...?!”
“네, 뭐 그야...”
“앗싸~! 그, 그래도 그건 소원하고는 별개다?! 약속해!!”
“...알겠어요.”
“해냈다!!!”
니아가 반색하며 내 등을 끌어안았다.
이런 내가 대체 뭐가 좋은지 행복하게 미소짓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문뜩 따스한 시선을 보내오는 두 녀석이 시야에 들어왔다.
머쓱하게 미소짓고 막 문을 나서려는 찰나, 아리엘이 아차 싶은 듯 손뼉을 치며 저택 안쪽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손에는 낯익은 병 하나가 들려있었다.
“그건... 성수...?”
“그래, 저번에 도란이 연금술 가게에서 받아온 거잖아. 촉수에 효능이 있다고 했으니 이럴 때 써먹어야 하지 않겠어?”
“...그러네.”
이 모든 게 토끼.. 아니, 실비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지.
“..도란?”
“아무것도 아니야. 근데 이걸 어떻게 들고 가지? 그냥 가져갔다간 금방 깨져버릴 텐데...”
“그럼 수통에다가 넣어가요. 특수 처리된 병이 아니라 금방 효력이 증발할 테지만 지금은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니까요.”
“그래, 그러자.”
되도록 쓸 일이 없으면 좋겠다만...
철제 수통 안에 든 내용물을 쏟아붓고 조심조심 그 안에 성수를 흘려넣었다. 아무리 약소 신전의 하급 성수라고는 해도 상당히 고가품인 바, 한 방울도 흘리지 않도록 노심초사 옮겨담고 마개를 덮자 니아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로 란이도 데려갈 거야?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저도 그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뭐 어떡해요. 안 데려가면 가만히 안 있겠다고 생떼를 부려대는데... 대신 수통 안에 얌전히 들어가 있기로 약속했어요. 그리고 가끔 전력이 될 때도 있으니까요.”
“...보면 볼수록 소년은 란이한테 무른 것 같아.”
“뭐... 딸 같은 아이니까요. 그보다 이제 슬슬 출발하죠. 날이 밝기 전에 일을 마치려면 서둘러야겠어요.”
“알았어! 그럼 가볼까?”
우리는 천천히 현관문을 젖히고 나와 발길을 옮겼다.
저 멀리 솟아난 영주성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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