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화 〉 돌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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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돌입 #3
한적한 가도를 거닐어 영주성이 위치한 도시 최북단으로 향하자 점점 성의 윤곽이 뚜렷해졌다. 마천루처럼 높게 솟은 성마루는 짙은 음영이 드리운 탓에 마치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하다.
아리엘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드문드문 길가를 지나는 행인을 살피며 속삭였다.
“다들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아마 기억이 왜곡된 모양이에요.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도록.”
“이런 게 가능하다니 역시 신은 신이구나...”
“뭐, 우리한텐 좋은 소식이지. 덕분에 경비도 그대로일 테니까.”
수증기마저 얼어붙을 정도의 기상 이변이다. 만약 영주성에 기거하는 기사들이 이 사실을 눈치챘더라면 경비가 곱절로 삼엄해졌을 수도 있었다.
감각이 예리한 자라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한파와 곳곳에 녹아내린 웅덩이를 보고 위화감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발걸음을 늦추며 입을 열었다.
“...이제 곧 외성이 나와. 순찰을 돌아다니는 기사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심하자. 라디, 전방에서 기척이 느껴지면 바로 알려줘.”
“네... 기사들은 특유의 쇠와 땀 냄새가 있어서 바로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성벽 안쪽으로는 어떻게 잠입하실 거예요?”
“음... 일단 가서 확인해봐야지. 영주성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여차하면 전면전도 각오하고 있다.
어눅어눅한 밤길을 나아간 지 제법 지났을 무렵, 호화스러운 부유층 거리도 지나치자 우리는 최북단 구역에 다다랐다.
도시 구획 수 개를 통째로 잡아먹은 듯 거대한 성채의 규모에서는 압도적인 위용이 느껴졌고, 드높게 내걸린 녹색 깃발로 하여금 이곳이 도시의 심장부라는 걸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성문 앞 개활지를 목전에 두고 가로수 뒤에 숨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훨씬 엄중하네... 이거 쉽지 않겠어.”
“해자라... 도시 외부에서 흘러들어오는 강물을 방어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봤지만 실제로 보니 막막하네요. 상당히 효율적인 구조에요. 저걸 어떻게 돌파하죠?”
“그러게... 그냥 헤엄쳐서 갈 수도 없고...”
유심히 살펴보자 외각 성벽 아래에 뚫린 구멍으로부터 막대한 수량이 쏟아지고 있었다. 해자를 채운 물은 영주성을 크게 한 바퀴 돈 뒤 폭 넓은 수로를 통해 도시 안쪽으로 이어진다.
저 상수는 곧 주민들이 빨래를 하거나 식기를 세척하는 용도로 쓰이겠지.
턱을 짚으며 고민하자 아리엘이 전방을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물소리를 들어보니 유속이 제법 되는 것 같은데 그냥 헤엄쳐서 건너려고 했다간 휩쓸려 버릴 거야. 애초에 반대편까지 도달하기도 전에 요 앞에 있는 경비병들한테 들킬 테고...”
“...소년, 그러면 여기선 내가 나설까? 나라면 물을 뛰어넘어서 벽을 기어오를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래도 곤란해요. 그 뒤에 저희가 뒤따라 돌입할 방법이 없거든요. 도개교를 내리면 소리 때문에 성안의 기사들이 전부 깨어날 테고... 분명 좀 더 좋은 수가 있을 텐데...”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며 성채를 주시했다.
하다못해 주변에 고층 건물이라도 있으면 여러 수단을 모색해 봤을 테지만 영주성 인근은 고도제한 구역이다.
마치 경비 병력이 건재하다는 걸 과시하기라도 하듯 은은한 횃불의 불길이 아른거리는 망루와 도개교 주변 초소에서 조용히 이쪽을 응시하는 기사를 보며 침음하자 라디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아니면... 란이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란이 말이야?”
“네, 란이의 수류 조작 능력이면 물살에 휩쓸리지 않고도 반대편까지 나아갈 수 있을 거예요. 수면 아래로 이동하면 들킬 위험도 적고요.”
“...좋은 의견이야. 하지만 해자를 건넌다고 하더라도 저 굳건한 외성 안쪽으로 진입할 방법이... 아.”
“...도란님?”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잠깐만 기다려 봐.”
기척을 흘리지 않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나는 경비병들이 나무에 가려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후퇴한 다음,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명령했다.
“나와 인마.”
슈화아아악...!
언령이 떨어지자 발치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솟구쳤다. 개미를 소환할 때면 으레 봐왔던 장면.
한데...
“어...! 어...?!”
불현듯 망가진 제트 엔진에서 뿜어나오는 연기처럼 심상치 않은 연무량에 당황하던 찰나, 녀석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크샥...!
“아니 너 왜...”
커졌다.
고작 중형견 크기에 불과했던 개미가 내 허리까지 올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독특한 사슴뿔 모양 톱니가 한층 날카로워졌고, 등딱지엔 미세한 돌기가 자라났으며, 전신에서 고급 세단처럼 칠흑빛 광택이 흐르기까지 한다.
흉흉한 자색 안광이 번뜩거리는 눈을 들여다보자 녀석이 다가와 종아리에 뺨을 문댔다.
크샤아아앗!!
“아, 아니 반갑고 자시고 너 왜 갑자기 커졌냐...?”
크샥...? 크샤아아앗?!! 캬캬캭!! 캬캭!
“...좋단다 아주.”
녀석은 그제야 자신에게 닥친 변화를 깨달고 제 몸을 둘러보며 희희낙락거렸다.
갑작스러운 개미의 변화에 살짝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짚이는 구석이 있다.
‘아마 안디라 님과 만난 것 때문이겠지...’
어쩌면 그분이 넘겨준 흑도 덕분이거나.
혹시 노래기와 덩굴에도 변화가 생겼을까 의문을 품고 있자니 수풀 너머로부터 라디 일행이 다가왔다.
한데 니아가 개미를 보고 흠칫 놀라며 날 뒤로 잡아끌었다.
“소년! 위험해!!”
“커, 커흑?! 자, 잠깐 숨이...!!”
“왜 갑자기 이런 곳에 마물이...! 걱정 마 내가 해치울 테니까!”
“아, 아니 걘 마물이 아니라...! 제 사역마에요!!”
“뭐, 뭐...? 사역마?”
“네... 아으 아파라... 이게 제가 안디라 님께 하사받은 권능 중 하나에요. 개미 말고도 한두 종류 더 불러낼 수 있고요. 덩굴이나 노래기 같은...”
“그, 그래...? 그거 진짜 신기한 능력이네... 아니, 잠깐...!”
니아가 돌연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히며 날 올려다봤다.
“그거 세 달 전 즈음 던전 2층에서 발생했던 정체불명의 현상이랑 똑같잖아!! 도적단이 모험가들을 습격했다가 거대 마물이 나타나고, 도중부터는 사람만 한 개미 떼랑 덩굴이 치솟아서 전부 다 쓸어버렸다는...! 설마설마했는데 그거 진짜 소년이 한 거였어?!”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
“음... 아마도요...?”
“아마도라니 그게 무슨...!”
“사실 저는 그때의 기억이 없거든요. 게다가 그땐 제가 능력을 각성하기도 훨씬 더 전이였고요.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어디 흔할 리도 없고 붉은 매 길드원 외에도 목격자가 있었으니 제가 한 게 맞긴 할 테지만...”
로닌도 나한테 비슷한 소리를 했었지... 내가 두더지와 멧돼지를 잡아먹었다던가... 거대 늑대의 브레스를 맞고도 살아남았다던가...
나는 잠시 숙고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이번엔 얘네를 이용해서 성벽을 올라보려고요. 마침 덩치도 더 커져서 딱 좋겠네요.”
“으음... 그거 재밌겠다!”
“좋은 생각이네. 그러면 큰 소란을 내지 않고도 조용히 성 내부로 침투할 수 있을 거야!”
“하긴... 개미는 수직 절벽도 수월하게 오를 수 있으니까요. 잠깐, 그 말은 설마...”
라디가 말끝을 흐리더니 창백한 얼굴로 날 올려다보았다.
나는 다소 난감하게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그래, 하는 수 없이 매달리는 꼴이 될 텐데 괜찮겠어? 라디, 넌 높은 데 무서워하잖아.”
“으으... 혹시 밧줄 같은 거라도...”
“...있을 리가 없지. 최대한 떨어지지 않게 잘 붙들고 있어. 아니면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그, 그건 싫어요...!”
“그럼 내가 안아줄 테니까 같이 올라가자. 그러면 괜찮지?”
“네...”
라디가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녀석을 살짝 쓰다듬어주고는 서서히 성채 쪽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그럼... 이제 성벽은 해결됐고, 수로는 란이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되는데... 거기까지 도달하는 게 가장 큰 문제네. 좋은 수가 없을까? 무턱대고 개활지를 건너다간 저 초소에 있는 감시병한테 들킬 테고, 그렇다고 무력으로 제압했다간 교대 시간에 다 들통날 거 아냐.”
”아, 그런 거라면 나한테 맡겨. 빛 마법으로 시선을 끌 수 있으니까.“
”...괜찮을까? 그러다가 괜히 경계심만 높이는 건...“
“괜찮아! 나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적당한 선에서 할 거야.”
“그래 그럼...”
자신만만한 걸 보니 믿고 맡겨도 되겠지.
고개를 끄덕인 뒤 허리춤에서 미다스 금속이 함유된 수통을 열자 란이가 귀여운 탄성과 함께 뛰쳐나왔다.
황급히 녀석의 입을 틀어막고 사정을 설명하는 사이 아리엘은 전방을 응시하며 두 손을 내밀고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 후, 그녀의 새하얀 손바닥에서 반딧불이를 모방한 불빛이 여럿 흘러나와 수풀 위를 맴돌았고, 보초가 있는 방향으로 둥실둥실 나아갔다.
아리엘이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오래가지는 않을 거야. 경비병의 시선이 분산된 틈을 타 이동해야 돼.”
“그래, 이제 가자. 다들 가면 쓰고.”
“응!”
“알겠어요.”
우리는 일제히 품 안에 넣어두었던 마스크를 꺼내 얼굴에 덮었다.
신중하게 개활지에 발을 디디자 불쾌한 해자의 습기가 불어닥쳤다. 불현듯 불어온 삭풍은 칠흑색 로브를 휘날렸고, 창공의 그믐달은 어렴풋한 월광으로 하여금 하늘을 수놓았다.
우리는 경비병의 기척에 온 집중을 기울이며 신속하게 질주했다.
만일 벌써부터 발각된다면 앞으로의 계획에 큰 차질을 빚을 수도 있기에.
한계까지 기척을 낮추고 초소 주변을 지나자 경비병의 따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야... 저기 봐, 반딧불이야... 반딧불이는 오랜만에 보는데 별일이네.”
“그러게... 나도 베라스틴에선 처음이야. 내가 살던 곳은 깡촌이라 밤만 되면 흔하게 볼 수 있었는데... 밤에 양초가 따로 필요 없었어.”
“뭐야, 너도 시골 출신이었냐? 우리 집도 반딧불이를 잡아다가 자루에 담아서 쓰고 그랬는데. 너무 오래 가둬두면 죽어버리니까 초저녁 즈음에 미리 잡아다가 날이 밝으면 풀어주고 그랬지.”
“이야 추억이네... 역시 어디나 사람 사는 건 다 똑같... 음?”
“...뭐야 왜 그래?”
“아니 방금 이상한 소리가...”
“에이... 이런 야밤에 누가 온다고 그래. 그보다 다음번 근무자는 대체 언제 오...”
“.....”
사냥감을 앞둔 코요테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은밀하게 해자에 접근했다. 실수로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박아둔 울타리를 넘어서자 눈앞으로 시커먼 탁류가 요동쳤다.
여기서 반 발자국만 더 내디딘다면 세찬 물살에 휩쓸리고 말 터.
물론 란이가 없다고 가정했을 때의 일이지만.
“...란이야.”
...됴란!
녀석이 아기자기한 손바닥을 앞으로 뻗자 거친 수면에 파문이 생겨나더니 물이 좌우로 갈라졌다.
모세의 기적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벌어지는 물살을 멍하니 응시하자 곧 성인 두 명이 지나갈 수 있을 법한 샛길이 생겨났다.
누가 볼세라 재빨리 안으로 발을 디디니 머리 위로 물의 막이 닫혔고, 아리엘이 마법으로 서늘한 조명을 피워올리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새어나왔다.
“우와... 이건 정말이지.. 너무나 아름다워요...”
“응... 꼭 은하수 속에 잠겨 있는 것 같아.”
“말도 안 돼... 엄청 이쁘다...”
크샥...!
“.....”
나는 서둘러 발길을 재촉하며 말했다.
“...바닥이 미끄러우니까 조심하세요. 니아 님은 밖으로 손 내밀지 마시고요. 자칫하다간 물살에 휘말릴 수도 있어요.”
“응응! 알았어!! 근데 소년은 왤케 태연해? 나도 방방곡곡을 떠돌면서 별의별 경험은 다 해봤지만 이런 건 처음인데!”
“뭐... 저는 이전에 한 번 겪어봤으니까요. 그래도 이렇게 밤중에 들어와 보는 건 처음인데.. 이것도 멋있네요.”
태연하게 말했지만 실은 내심 놀랐다. 푸른 조명이 수면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풍경은 마치 은하수가 빠져든 밤바다를 연상시켰고, 윙윙거리는 소음과 이따금씩 맑게 터져나오는 물거품 소리는 묘한 고양감을 전해주었기에.
역시 란이의 마법은 언제나 봐도 아름답다.
우주 속을 유영하는 듯한 감상을 품으며 수굴을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막다른 지점에 도달했다.
나는 벽면을 짚고 올라가 근처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 이제 외성을 기어올라야 할 텐데 나랑 라디가 한 조로 갈 테니까 니아 님이랑 아리엘은...”
“음... 난 괜찮아! 혼자서도 오를 수 있어!”
“네, 그럼... 아리엘. 너한테 개미를 붙여줄 건데 괜찮겠어?”
“응! 맡겨줘!”
“그래 그럼...”
나는 어둠 속에서 추가로 개미를 불러들였다.
이제 성벽 안쪽으로 돌입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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