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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277화 (277/375)

〈 277화 〉 돌입 #4

* * *

[277] 돌입 #4

“라디야, 괜찮아?”

“네 이 정도쯤이야... 히끅!”

“...거의 다 와 가니까 계속 눈 감고 있어.”

개미의 등에 매달린 채 성벽을 타고 올랐다. 고도가 높아지자 사방에서 거센 돌풍이 불어왔지만, 다행히 녀석들은 휘청거리는 일 없이 거뜬하게 지탱해주었다.

첩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은밀하게 기어올라 좁다란 성벽로가 늘어선 외성의 윗부분까지 도달하자 나는 라디를 안고 재빨리 개미의 등에서 내려왔다. 손바닥을 내저어 녀석들을 그림자 속으로 물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먼저 도착한 니아가 멍하니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슬쩍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위험하게 여기서 뭐해요.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

“이쪽으로 오세요.”

“소년.”

“네.”

“이것 좀 봐.”

“.....”

니아 옆에 나란히 서자 두꺼운 성곽 너머로 광활한 도시의 전경이 내려다보였다. 드넓은 원형 광장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가도는 박달나무의 가지를 연상시켰고, 크고 작은 주홍색 불빛이 무수하게 반짝여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꿈틀거리며 태동하는 이 세계 문명의 전반을 보는 듯한 광경.

지구에서 본 야경과 비교하면 소박할지언정 금빛 눈동자에 비쳐 일렁거리는 푸른 도시의 풍경에는 그를 웃도는 아취가 있었다.

나는 미련을 떨쳐내고 그녀를 부드럽게 다독이며 말했다.

“아쉽지만 이대로 계속 서 있다간 위병한테 들킬 거예요. ...움직이죠.”

“...응.”

니아가 마지못해 발걸음을 옮겼다. 상당히 아쉬움이 남는 눈치였지만 그녀의 마음이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다.

마천루가 즐비한 발전된 문명에서 자라온 나와는 달리 이렇게 높은 장소에서, 그것도 해가 저문 뒤의 도시를 내려다볼 기회는 좀처럼 흔치 않을 테니까.

마찬가지로 야경의 매력에 푹 빠진 아리엘과 풍경 따윈 안중에도 없이 기사를 찾아서 두 눈을 부릅뜨는 라디를 이끌고 협소한 성곽로를 거닐자 거센 북풍이 로브 자락을 휘날렸다.

니아가 가면을 고쳐쓰며 물어왔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여기서 뛰어내리면 곧장 성채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니아 님이라면 몰라도 저희가 그랬다간 온몸의 뼈란 뼈는 죄다 으스러질걸요. 아까처럼 개미를 타고 내려간다면 모를까... 하지만 이번엔 그것도 힘들 테고요.”

외성 안쪽을 내려다보자 환한 마석등의 불빛 탓에 눈살이 찡그려졌다. 더군다나 심야에 가까운 시간임에도 기사들이 분주하게 배회하는 탓에 섣불리 행동했다간 내성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포위되고 말 거다.

혹여나 들킬세라 자세를 낮추며 말했다.

“...일단은 이곳에서 벗어나야 해요. 이런 외길에서 기사를 맞닥뜨렸다간 꼼짝없이 들킬 수밖에 없으니까요. 어디 숨을 데도 없고...”

“무력으로 제압하는 건 안 돼?”

“당연히 안 되죠. 정말 위급한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저희의 존재를 노출하는 시기는 최대한 늦춰야 해요. 니아 님이 아무리 강해도 혼자서 이곳의 모든 기사를 상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만약 영주가 지레 겁먹고 시설을 불태우기라도 하면 그 애는 꼼짝없이 죽을 테니까요.”

“그래...? 알겠어! 난 전적으로 소년의 말에 따를게!”

“...고마워요.”

조금 답답할 수도 있을 텐데 이렇게나 잘 맞춰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나는 그녀에게 미소짓고는 부지런히 발길을 옮겼다. 외각 성벽의 순회로는 사방에서 날카로운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탓에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었고, 아직 다 녹지 않은 빙판이 산재해 몹시 미끄러웠다.

드센 바람에 펄럭거리는 로브를 힘겹게 억누르며 첫 번째 성탑에 도착하자 나는 벽 뒤에 몸을 숨기며 멈춰섰다.

뒤따라 밀착한 그녀들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성탑이야. 안에 예비 병력이 있을지도 모르니 신중하게 행동하자. 내가 먼저 들여다볼 테니까...”

“네, 저희가 주변을 경계하고 있을게요.”

“여차하면 마법으로 시야를 뺏을 테니까 말만 해 도란.”

“그래, 다들 여기 기다리고 있어 봐.”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아들었다. 오른손 역수로 칼자루를 움켜쥐고 모퉁이 너머를 엿보자 어둑한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살금살금 안으로 발을 내딛자­

­저벅...

“....아무도 없나.”

울퉁불퉁한 석재와 벽돌로 이루어진 원형 공간 내부는 싸늘한 한기만이 맴돌 뿐, 어디에서도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라디에게 신호하고 안쪽으로 들어서자 살벌하게 몰아치던 추위가 한층 잦아들었다.

단도를 칼집에 도로 넣으며 중얼거렸다.

“...바람이 없으니까 조금 살 것 같네. 아까까지는 추워 죽는 줄 알았어.”

“그러게요... 해자를 건너면서 물에 젖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에요. 설마 처음부터 란이의 도움을 받게 될 줄이야...”

“오늘이 그믐달이란 점도 한몫했어. 만약 달빛이 조금만 더 밝았으면 이렇게 마음 편히 돌아다니지는 못했을 거야.”

“그것도 그러네...”

개미에게 업혀서 성벽을 올라오느라 얼얼한 손바닥을 주물럭거리고 있자니 니아가 사뿐한 걸음걸이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근데 여기는 뭐 하는 공간일까? 막사라기엔 너무 황량한데... 문도 없고, 병사도 없고.”

“여긴 막사가 아니라 방어 시설이에요. 저기 뚫린 구멍들 보이시죠? 전시에는 저곳에 궁사를 배치해 적을 요격하는 거죠. 여기 있는 목함들을 열어보면 화살이 잔뜩 들어있을걸요.”

“어디 한번... 와 정말이야! 반짝거리는 새 화살이 이렇게나... 구멍도 자세히 보니깐 그냥 뚫려있는 게 아니라 아래쪽으로 기울어 있어!”

“도란님, 그럼 저 포댓자루는...”

“저건... 예비 석재를 담아둔 거네. 만약 공격을 받다가 성탑이 파손되면 저걸로 보강하는 거야. 급한 대로 화살은 막아내야 하니까. 당장 포화를 받고 있는데 지상에서부터 여기까지 바윗덩어리를 끌어올 순 없잖아?”

“그렇네요... 덕분에 하나 배웠어요.”

라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아무리 지식욕이 왕성한 녀석이라지만, 폐쇄적인 이 세계에서 군사 시설까지 탐구할 기회는 얼마 없었을 테니까.

혹여나 아래쪽으로 향하는 통로가 있을까 주변을 면밀히 살피고 있자니 아리엘이 손짓했다.

“도란 이것 좀 봐, 여기 계단이 있어! 혹시 지상하고 이어지지는 않을까?”

“잠깐만, 지금 확인해볼게.”

잡다한 화살 무더기에서 시선을 돌리고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주변을 둘러보던 라디와 함께 다가가자 아리엘이 손바닥에서 어렴풋한 빛무리를 피워올렸다.

그녀의 말대로 군용품 담긴 목함과 밧줄, 석재 따위가 뒤엉킨 성탑 구석에는 아래로 향하는 돌계단이 도사리고 있었다.

살짝 끌어안아주며 칭찬하자 아리엘이 부끄러운 듯 어깨를 움츠렸다.

“잘했어, 어두워서 자칫하면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었겠네. 요 아래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내려가 볼까 하는데 계속 비춰줄 수 있어?”

“물론이지, 그래도 방심하지는 마. 갑자기 기사들이 튀어나올지도 모르니까. 우리도 대비하고 있을게.”

“그래, 그럼...”

천천히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벽면과 바닥에 유심히 불빛을 비춰 혹시 모를 함정의 유무를 확인하고는 조심조심 나선형 계단을 내려갔다.

하지만 채 몇 걸음도 떼기 전에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잠긴 문이야. 자물쇠가 엄청 녹이 슨 걸로 봐서 꽤 오래된 시설인 모양인데... 아리엘, 혹시 머리핀 있어?”

“머리핀? 미안.. 전투할 때는 두고 다니거든. 아니면 대용으로 쓸만한 게...”

“아, 그럼 제 걸 쓰실래요? 머리핀은 아니지만 볼트로 비슷하게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어디 한 번 줘봐.”

“네, 잠시만요...”

라디가 로브를 잡아당기자 안쪽에 겹겹이 고정된 쇠뇌용 대못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제일 가느다란 놈과 중간 사이즈 볼트를 건네받아 자물쇠 구멍에 밀어넣자 단단한 감촉이 손가락 끝에 전해져왔다.

“녹슬어서 조금 힘드네.. 잘하면 될 것 같기도 한데...”

“그냥 문을 부수는 건 안 돼 소년?”

“네, 반대편이 어떤 상황일지 모르니까요. 여기는 군사 시설이니 화약처럼 충격에 민감한 물건으로 차 있을 수도 있고, 소리를 듣고 내부에서 누군가 달려 올 수도 있어요. ...라디야 혹시 윤활유 대용으로 쓸 수 있는 거 있어?”

“아 네, 이건 나가의 기름인데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대신 인화성이 아주 높은 물질이라 조심하셔야 해요.”

“괜찮아. 한두 방울이면 충분하거든. 이걸 여기에 흘려 넣고 이렇게 돌리면...”

­딸칵!

“...어때, 됐지?”

“....언제 봐도 신기하네. 도란은 참 재주도 좋아.”

“우와...! 방금 어떻게 한 거야?! 잠깐 눈 한번 깜짝할 사이에...”

“그냥 잔재주에요. 어렸을 때부터 문 따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거든요. 그럼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내가 앞장설까?”

“아뇨, 니아 님이 나서는 건 좀 더 나중이에요. 여기서는 일단...”

나는 조용히 입가에 검지를 세운 뒤 단도를 움켜쥐고 신중하게 문고리를 붙잡았다.

이후 천천히 문을 젖히고 발을 들이자...

“...아리엘 빛 좀 더 높여 줘.”

“알았어, 잠시만...”

“.....”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 그녀가 환하게 조명을 밝히자 시야에 들어온 건, 오싹할 정도로 즐비하게 늘어선 포열과 발리스타였다.

대량 살상을 목적으로 고안된 쇳덩어리가 한곳에 모여있는 걸 보자 살짝 섬뜩했다. 더군다나 코끝을 맴도는 이 구릿한 냄새는 화약의 주성분인 유황과 염초가 분명하다.

도시를 향해 겨누어진 거대 병기, 내 키에 맞먹는 초대형 작살과 사람 머리통만 한 포탄 따위를 둘러보며 신음하자 라디가 진중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흉흉한 물건이 겨누어진 곳에서 살고 있었다니... 영주성 방비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직접 보니 몹시 불쾌하네요.”

“그러게...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만 영주가 조금이라도 딴마음을 품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골로 갈 수 있었다는 거 아냐. ...아니, 주민들을 납치했다는 시점에서 이미 아웃인가...”

“...도란, 이거 도화선이 그대로 살아있어. 불만 붙이면 언제든 발사할 수 있는 수준이야. 평소에 관리를 꼼꼼하게 한 걸까, 아니면...”

“그랬더라면 이렇게 장전까지 해 두진 않았겠지... 왕실에서 낌새를 눈치채고 병력을 파견했을 때 농성할 심산으로 준비한 게 아닐까? 몇몇은 아예 새것처럼 보이는데...”

“으... 무시무시하네...!”

니아가 귀를 쫑긋거리며 흥미롭게 포구 안쪽을 들여다봤다.

산책 나온 강아지를 다루듯 목덜미를 잡아끌자 그녀가 내 팔에 대롱대롱 매달리며 물었다.

“우음... 근데 소년은 정말로 산골 마을 출신이야?”

“...네, 갑자기 그건 왜요?”

“아니... 그런 것치고는 너무 똑똑해서! 아는 것도 많고 머리도 좋은데 가끔은 또 당연히 알 만한 걸 모르기도 하고... 신기해!”

“.....”

왜 이럴 땐 또 괜히 감이 좋아가지고...

“....뭐, 그런 게 있어요.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니아 님에게도 알려드릴... 지도 모르겠네요. 그보다 빨리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찾아야 할 텐데... 아리엘 혹시 아까처럼 다른 계단은...”

­철그럭!

““....!!!””

순간, 일제히 동작을 멈추었다.

층계 너머로부터 희미한 철제 갑주의 소음이 들려왔기에.

소리는 점점 선명하게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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