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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278화 (278/375)

〈 278화 〉 돌입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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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 돌입 #5

“그러니까... 여기쯤에서 이상한 형체를 봤다는 거지?”

“그래, 어두워서 자세히 본 건 아닌데 분명 뭔가 있었어.”

“...그냥 착각한 거 아니야? 오늘 뭔가 좀 이상하잖아. 아무리 그믐달이라고 해도 너무 어두운 데다가 동절기는 한참 전에 지나갔는데 곳곳에 얼음이 껴 있고... 왠지 모르게 음산하기까지...”

“그것뿐만이 아냐. 들어보니까 저기 칼슨네 조는 경계근무 투입이 세 시간이나 늦어졌는데 별일 없이 지나갔데. 평소라면 조금만 늦어도 위병조장이 개지랄을 떨어댔을 텐데 말이야. 심지어 아까는 조명이 전부 나가기도 했었고... 다들 하나같이 뭐에 홀린 것 마냥...”

“...그만 좀 호들갑 떨어. 너희들은 그런 걸 믿냐? 위병조가 근무 땡땡이치려고 말 지어내는 게 한두 번이어야지... 여기까지 온 것도 네가 하도 귀찮게 구니까... 호오...?”

“왜, 뭔데?”

““.....””

살짝 열린 문 너머로 목소리를 낮추는 기척이 전해져왔다. 이어서 자물쇠 구멍을 들여다보는 소음이 들려온 뒤로는 스르릉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칼날의 서늘한 음색,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사내들의 희미한 웃음이 돌벽을 타고 전해져왔다.

뒤이어 문이 벌컥 젖혀지며 기세 네 명이 홀 안으로 난입해왔다.

“동작 그만!!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투항하라!!!”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였다간 즉각 처형하겠다!!!”

“도망칠 생각 하지 마!!”

사내들이 일사불란하게 산개했다. 완연한 어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은 그들이 허울뿐만이 아닌, 실전을 겪으며 성장해온 노련한 기사라는 걸 증명했다.

물론 그들도 이런 상황을 상정하진 못했을 테지만.

­치지지직... 파앗!!!!

“크윽...?!”

“이, 이건 대체...!?!”

“당황하지 마라!! 침착하게 상대의 기척을 살펴!!!”

일순간, 울퉁불퉁한 바닥 타일 아래서 크기를 불려나가던 빛조각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섬광탄처럼 날카로운 파쇄음과 함께 무수한 파편으로 쪼개진 빛무리는 순식간에 기사들의 시야를 앗아갔고, 허공에 잔류하며 성탑을 환하게 밝혔다.

놈들이 당황하며 검을 내세웠을 땐 이미 늦었다.

나는 진작에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투화악!!!!

“크헉?!!”

화포 뒤에 숨어있다가 뛰쳐나갔다. 좌우로 도약해 발소리를 교란했다. 눈앞의 기사가 기척에 반응해 검을 올려베었지만 나는 민첩하게 허리 비틀어 회피했다.

즉각 시퍼런 칼날이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되돌아왔으나 나는 이미 배후로 이동한 후.

회전력을 살려 목 언저리에 팔꿈치를 처박자 기사가 신음을 내뱉으며 고꾸라졌다.

이어 후속타를 날리고자 접근했으나 사내 또한 만만치 않았다.

“크윽...! 이런 비겁한 쥐새끼가...!!”

비틀거리는 기사의 아밍 소드에 서늘한 냉기가 괴여들었다. 투구 안 눈동자에 서슬 퍼런 광채가 남실거린다. 일반인이었다면 의식을 잃고도 남을 일격이었으나 그는 검을 놓치지 않았고, 통증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영창을 읊어나갔다.

이대로 놔두다간 마법에 당하고 말 터.

물론 그대로 보고만 있을 내가 아니지만.

“윽...! 너, 너 대체 뭘...”

“.....”

­콰자작!!!!

사내의 뒤통수를 한 손으로 붙들고 돌바닥에 처박자 철판이 우그러들며 소름끼치는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이에 그치지 않고 전진하며 투구 상판을 바닥에 갈아버리고는 그를 내동댕이치고 단단한 부츠 밑창으로 목을 짓밟았다.

“커흑...! 끄허어어억... 꺽...”

“느려.”

­챙그랑!!!

기사가 필사적으로 검을 들어올렸으나 팔목을 걷어차 떨쳐냈다. 사내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칼날은 바닥을 긁으며 떠밀려갔고, 새하얀 검의 반사광이 드리운 방향에는 빛 마법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기절한 사내와 막 기사의 목덜미에 기다란 대못을 찔러넣는 라디가 있었다.

...저거 눈이 회까닥 돌아갔는데.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야, 죽이면 안 된다.”

“....알아요.”

“정말로...?”

“.....”

“....”

라디가 차갑게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머쓱하게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시선을 돌렸다.

발바닥에 체중을 실어 사내를 혼절시킨 뒤 구석에 웅크린 젊은 기사에게 다가가자 그가 얼굴을 창백히 물들이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제, 젠장...! 젠장!! 어디서 갑자기 이런 놈들이...! 너, 너희는 지금 베라스틴의 군사 시설을 침범하고 있다!! 안드릭 백작의 성에 난입하여 기사에게 위해를 가한 죄...! 바, 반드시 처벌...”

“야.”

“야, 야...? 감히...”

“우리 구차하게 이러지 말자고. 보아하니 하급 기사인 거 같은데 서로 후딱후딱 볼일만 보고 헤어지자. 내가 물을 게 좀 있는데 말이야...”

“침입자와는 말을 섞지 않는다!! 당장 여기서 날 내보내줘!”

“미안하지만, 제안이 아니야.”

“크헉...?!!”

순식간에 소환한 단도로 기사의 허벅지를 옅게 도려냈다. 이어 화려한 뒤돌려차기로 상복근을 걷어차자 그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돌벽에 처박혔다.

바닥에 떨어진 기사의 검을 멀리 걷어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 ...너 촉수에 대해 얼마나 아냐.”

“크윽... 헉...! 초, 촉수? 그게 뭐지...? 번지수 잘못 짚었어..! 여기가 무슨 수산시장인 줄...!”

“도라... 크흠.. 이 사람 심박수가 올라갔어.”

“그래, 딱 봐도 거짓말이겠지. ...그럼 시작할까?”

“대, 대체 뭘...!”

남자가 다급하게 바닥을 더듬었지만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다.

그는 꿀꺽 침을 삼키고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리엘의 손바닥에 하얀 빛줄기가 남실거리고 있음을 깨닫자 좀전의 태도가 무색하게도 사시나무 떨듯 떨며 질겁했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 사이로 절망 어린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서, 서.. 설마... 너, 넌.. 아가사 신전 사제냐...?”

“...그렇다면요?”

“크흑...! 아, 알았어...! 씨발 씨발!!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아, 알았으니까 아는 대로 다 불게!! 그러니까 다, 다가오지 마!!!”

““.....””

나는 잠시 아리엘과 시선을 교환하고는 쪼그리고 앉아 물었다.

“...태도가 바뀌었는데,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보지?”

“윽...! 이 악마 같은 새끼... 그게 저 괴물을 대동하고서 하는 소리냐...? 아가사 사제의 고문을 견뎌낼 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다고...!”

“.....”

하기야... 예전에 아리엘이 그랬지. 아가사 신전의 사제들은 수행 과정에서 고문에 관련된 내용도 배운다고.

상냥하고 선량한 이미지와는 달리, 그들의 치유 능력이 때때로는 최악의 방식으로도 쓰일 수 있다는 건 나도 안다.

실제로 던전에서 베라스틴으로 복귀한 당일, 아리엘과 함께 돌아다니다가 그녀가 골목길에서 깡패를 잔인하게 도살하는 걸 직접 목격하기도 했었고.

그녀가 아군이라는 점에 안도하며 막 입술을 떼려던 찰나, 층계 너머에서 요란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철컹! 철그렁! 콰르르르!!!

“뭐, 뭐야... 갑자기...!”

“....마무리가 허술해 소년. 남은 일행이 있는지도 확실하게 살폈어야지. 조금만 더 늦었으면 비상종이 울렸을걸?”

“.....”

갑옷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간 기사가 실신한 채 계단에서 떠밀려오고, 뒤이어 익숙한 금발 소녀가 그 위를 사뿐하게 즈려밟으며 나타났다.

니아가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더니 내 팔뚝에 안겨들었다.

“어때? 나 잘했어 도란?”

“.....”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기 고맙기는 한데... 기사 앞에서는 서로 이름 안 부르기로 한 거 잊었어요?”

“응...? 아... 아...!! 맞다! 미안해 도... 아, 아니... 도른...?”

“.....”

단도를 들어올리며 돌아보자 기사가 끔찍하게 공포에 물든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나, 난 아무것도 못 들었어...! 매, 맹세할게!! 정말로!!! 제발...! 제발 죽이지만 말아줘... 난 이곳에 온 지도 얼마 안 됐단 말야!!”

“.....”

나는 단도의 검면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고했다.

“네가 어떻게 처신하는지에 따라 달렸어. 그러니...”

“그, 그래! 아, 알았어...! 촉수에 대해서 알고 싶은 거지?! ....솔직히 나도 마음에 안 들었어! 그거 때문에 우리가 고생한 걸 생각하면...”

“기사들은 어디까지 연루되어 있지?”

“솔직히... 잠깐, 그 전에... 너희들 어디까지 알고 왔어...?”

“영주성에서 노예를 잔뜩 사들인 걸로도 모자라 납치한 시민들로 생체 실험을 벌이고 있다는 것쯤은. 촉수에 대해서도 알고, 매개체를 이용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도 알아.”

“그렇게까지나... 아, 아니 애초에 그러면 숨길 필요도 없었잖아...!”

“.....”

묵묵히 쳐다보자 그가 손바닥으로 허벅지의 상처를 지혈하며 말을 이었다.

“끄응... 네가 방금 말한 건 전부 사실이야. 하지만 기사 중에 민간인 납치에 가담한 건 정말 소수야! 그쪽은 따로 외주 업체가 있거든...! 아마 용역을 고용한 모양이던데...”

“궤변 늘여놓지 말고.”

“아, 알았으니까 그거 좀 내려놔! ....그래, 이곳 지하실에서 마법사들이 실험을 진행했어. 강력한 군사를 만든다나 뭐라나.. 처음엔 노예를 데려다가 써먹었는데 나중에는 그걸로 모자랐는지 성안의 고용인들을 잡아다가 쓰더라고. 그러다가 이제 남아나는 사람이 없으니까 시민한테까지 손을 댄 거고... 미친 짓이지.”

“...성 안의 고용인도 희생당했다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언성을 높였다.

“그래 그렇다니까!! 당최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마치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마구마구 괴물을 만들어내고 있어...! 얼마나 사람들을 잡아들였으면 성 안이 텅텅 비어서 우리 기사들이 허드렛일을 도맡아서 하고 있다고!! 빨래부터 청소까지... 그걸로도 모자라서 이젠.... 끄아아아악!!!”

“...잘난 짓이다.”

부츠로 환부를 짓이기자 그가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끄으윽...! 고의는 아니었어!! 그냥 까라니까 까는 거지!! 게, 게다가 희생자 중에는 내가 아는 사람도 있었단 말이야! 우리더러 같은 도시 사람을 납치하는 게 달가울 리가 없잖아!!”

천천히 발을 떼자 그가 숨을 헐떡이며 재빨리 덧붙였다.

“으윽... 그, 그래...!! 게다가 요즘에는 기사들마저 실험에 동원하고 있다는 소문마저 나돌고 있어!! 숙주가 건강해야 강인한 실험체가 나온다고! 진짜 뭐에 씐 게 분명해...! 그 씨발...!”

“영주 말이지?”

“.....”

사내가 굳게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그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으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극명했다.

천천히 쪼그리고 앉았던 무릎을 펴며 말했다.

“그래 그럼 그건 됐고, 이제 내성으로 진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나 불어.”

“그, 그건...”

­스윽.

“...이 성곽로를 쭉 따라가다 보면 망루가 있는 성탑이 나와. 거기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돼. 그리고 연무장을 지나면 내성에 들어갈 수 있을 거야.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그래 고맙다. 그럼 잘 가.”

“자, 잠깐...!”

한 발자국 다가가자 사내가 황급히 두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무심하게 내려다보자 그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 약속이 다르잖아! 분명히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살려준다고... 내가 아는 건 이게 다야! 촉수에 관해 묻고 싶으면 실험에 직접 관여한 마법사들한테 물어!!”

“...죽이지는 않을게. 그냥 잠깐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거니 걱정 마.”

“그, 그것도 좀...! 나는 그냥 여기 쥐 죽은 듯 조용히 있을 테니까.”

“야.”

“으응...?”

“생각을 좀 해봐. 네 동료들이 깨어났을 때 너만 멀쩡한 걸 보면 뭐라 생각하겠냐. 당연히 네가 우리랑 내통했다고 생각하겠지. 차라리 잠깐 기절해 있는 게 낫다니까?”

“그, 그런가...? 그렇군...! 그렇다면 살살 부탁...”

“그래.”

가볍게 턱짓하자 라디가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나왔다.

녀석은 차마 피할 틈도 주지 않고 초록빛 액체가 번들거리는 대못을 사내의 고간에 박아넣었다.

“끄아아아아악!!!!!!! 이, 이건 뭐야!!! 사, 살려줘!!! 아파아파아파아파!!!!”

“.....”

살짝 힐난의 눈길로 쳐다보자 라디가 어깨를 으쓱하며 읊조렸다.

“죽이면 안 된다고 했지 불구로 만들면 안 된다는 말은 없었잖아요. 앞으로 잠시 후면 잠잠해질 거예요. 뭐, 부작용으로 성기능을 잃게 될지도 모르지만요.”

“.....”

라디가 관대해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리엘을 두 번째 애인으로 받아들였을 때 나도 이 남자처럼...

사타구니를 움켜쥐며 몸서리치자 아리엘이 주변에 널브러진 기사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쉽게 제압하긴 했지만 지하 광장에서 봤던 기사들보다 훨씬 강한 것 같아. 만약 처음 기습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해치우는 데 살짝 애먹었을지도 모르겠어...”

“...그러고 보니 그때 기사단장이 죽기 전에 남긴 말이 있어. 사교에 가담했던 기사는 전부 나약한 놈들이라 쉽게 구슬릴 수 있었다고... 방심해선 안 되겠네.”

아마 이 녀석들은 하급 기사일 터, 중급이나 상급 기사들에게 포위당하면 녹록치 않을 게 분명하다.

설마 기사단장은 이번 사태도 예견하고...

발걸음을 돌리며 말했다.

“...가자, 부득이하게 적과 마주쳤으니 이제부턴 서둘러야 해. 시간을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구출에 실패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거야. 이 녀석들이 실종된 걸 알면 추가 병력을 보낼 테니까.”

“...네.”

“그래 도란, 서두르자.”

“가자고~!”

“....”

우리는 일제히 검은 로브를 휘날리며 성곽로를 향해 나아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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