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화 〉 돌입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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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 돌입 #6
드높은 성곽로,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협소한 길을 나아갔다.
뼛속까지 들이치는 추위에 손발이 뻣뻣하게 굳을 무렵 머리 위 첨탑으로부터 따스한 불빛이 드리웠다.
나는 천천히 상공을 올려다보며 내뱉었다.
“...망루야. 기사의 말대로라면 저기에 아래로 가는 길이 있을 텐데...”
“조심해요. 불빛에 그림자가 지는 걸로 봐서 위병이 있을 거예요. 니아 님이 계시니 제압하는 건 쉽다고 해도 자칫 경종이 울리면 성안의 모든 기사가 깨어날 거고요.”
“그럼 맨 위에 있는 적부터 차근차근 쓰러뜨리면서 내려가자. 그편이 제일 안전할 테니까.”
“설마 또 개미를 타고 성벽을 오르는 건...”
“...감내해.”
라디의 어깨를 토닥였다. 혹여나 들킬세라 근처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지막이 명령하자 사방에서 검은 형체가 튀어나왔다.
개미를 나눠 타고 벽을 기어오르던 중 손도 쓰지 않고 사뿐하게 성벽을 뛰어넘던 니아가 속삭여왔다.
“으음... 소년, 내가 먼저 가서 처리해놓고 있을까?”
“그야 그러면 좋긴 하지만... 조용히 해치우실 자신 있어요? 아니면 다 같이 한꺼번에 돌입하는 게...”
“...날 뭘로 보는 거야. 소년은 은근히 날 무시하는 경향이 있단 말이지... 풋내기 주제에.”
“평소에 매번 못 미더운 모습만 보여주니까 그렇죠. ...그럼 어디 한번 해보세요. 만약 도중에 무리라고 판단하면 바로 물러나서 저희와 합류하시고요.”
“그래! 이 기회에 멋진 모습을 보여줄 테니 기대하라구!”
그녀가 장난스럽게 내 귀를 잡아당기고 앞서나갔다.
산비탈을 오르는 토끼처럼 가뿐하게 수직 성벽을 뛰어오르는 뒷모습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아리엘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우리끼리는 어쩌나 불안했는데... 니아 님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딱 적절한 시기에 와줬어.”
“그러게요... 솔직히 저희만으로 영주성에 잠입하는 건 꿈도 못 꿨을 거예요. 도란님은 대체 어떻게 저런 거물을 꼬셔서...”
“.....”
난 그냥 같이 돌아다니면서 도시 소개 좀 해준 게 전부다.
조마조마하게 망루를 올려다보자 라디가 슬쩍 물어왔다.
“불안해요...?”
“....당연하지. 혹시라도 실수하면 어떡해. 아무리 A랭크라도 방심하다간... 너희는 걱정 안 돼?”
“뭐... 저희도 아예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
라디와 아리엘이 잠깐 시선을 교환하더니 소박한 웃음을 터트렸다.
조마조마한 심정도 억누르고 의아하게 쳐다보자 라디가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도란님이 니아 님을 걱정하는 건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아서요.”
“다른 이유라니... 동료가 다칠까 봐 걱정되는 건 당연하잖아. 요 며칠간 같이 돌아다니면서 정도 많이 들었고, 이렇게나 열심히 도와주는데...”
“어머, 우리 그런 소리는 한마디도 안 했는데? 도란은 그렇게나 니아 님이 신경 쓰이나 봐?”
“.....”
입을 다물자 라디가 포근하게 미소짓더니 성탑 끝을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저희는 니아 님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익히 들어왔으니까요. 저분이 이렇게 서슴없이 대화하고 자기 일처럼 선뜻 나서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 건지 도란님은 모를 거예요.”
“그래 도란, 니아 님은 강해. 물론 A랭크라 해도 무적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나라의 모험가 중에선 최고의 실력자 중 한 명이니까.”
“...그럼 S랭크는?”
“에이 그 사람들은... 하늘 위의 하늘 같은 존재지. 수도 워낙 적고. 왜, 궁금해?”
“....아니, 그보다 이제 슬슬 도착하니까 집중해야겠어. 미처 처리하지 못한 잔당이 남아있을지도 모르니까.”
바람에 젖혀진 후드를 원상태로 되돌렸다. 나는 개미를 타고 성탑 끝자락에 다다랐을 즈음 익숙하게 단도를 소환했고, 탁 트인 망루의 총안구 너머로 날렵하게 몸을 던졌다.
그리고 전율했다.
“무슨...”
성탑 내부로 발을 들인 내가 목격한 건, 포탄이 떨어진 야전병원처럼 처참한 광경이었다.
울퉁불퉁한 돌바닥엔 갑주에 긁혀 생겨난 상흔이 산재했고, 종잇장처럼 찢겨나간 갑옷 파편이 널브러져 끔찍한 사고가 있었음을 암시했다.
메두사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지독한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실신한 기사들과 처참하게 망가진 망루의 풍경 속에서 멀쩡한 물체라곤 대형 놋쇠 종만이 유일했으며, 이는 참담한 주변과 대비되어 강렬한 위화감을 풍겼다.
뒤따라 들어온 라디가 발치의 투구를 툭 차며 내뱉었다.
“...꼴 좋네요. 제 속이 다 후련해졌어요.”
“.....”
벙찐 채 니아의 행방을 쫓고 있자니 아리엘이 구석에서 손짓했다.
“도란, 여기 발자국이 나 있어.”
“발자국?”
“응, 사이즈로 봐서 니아 님 발자국 같은데...”
아리엘이 가리킨 곳으로 향하자 피웅덩이 옆으로 자그마한 족적이 나 있었다.
혈흔으로 덧칠되어 이젠 섬뜩함마저 느껴지는 발자국을 따라 망루 안쪽으로 나아가니 첫 번째 성탑에서 보았던 것과 동일한 돌계단이 나왔다.
벽에 걸린 횃불을 떼내어 신중하게 발치를 비추며 말했다.
“아마 이 아래로 향한 것 같은데... 내가 먼저 내려갈 테니까 바로 뒤따라올래?”
“응, 여차하면 아까처럼 빛 마법을 터트릴 테니까 신호하면 눈 감아.”
“그럼 제가 도란님 뒤에 설게요. 혹여나 이상한 낌새를 감지하면 곧바로 알려드려야 하니까요.”
“그래.”
아마 아래쪽도 비슷한 상황일 테지만 대비해서 나쁠 건 없다.
단도를 내세운 채 조심스럽게 계단 아래로 발을 디디자 스산한 황소바람이 불어왔다. 니아가 지나고 난 성탑 내부는 뱀파이어의 고성처럼 고요했고, 을씨년스러운 횃대의 그을음과 핏자국 탓에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웅웅거리며 귓가에 울리는 혈류, 하얗게 피어오르는 입김을 헤치며 층계를 내려가다 보니 완전히 반파되어 너덜거리는 문짝이 보였다.
그렇게 도달한 성탑의 다른 층에는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하긴... 그냥 지나쳤을 리가 없지.”
폭풍에 휩쓸린 가로수처럼 대자로 뻗은 기사들을 둘러보자니 아리엘이 입가를 짚으며 신음했다.
“...압도적이야. 심지어 중급 기사도 섞여 있고... 헤어진 지 몇 분도 안 됐는데 하물며 맨몸으로...”
“그뿐만이 아니에요. 이것 좀 보세요. 칼들이 전부 검집 안에 들어가 있어요. 제대로 반응도 하지 못하고 당했다는 건데... 아무리 기사의 평균 수준이 모험가보다 높다고 한들 이 정도로는 니아 님의 적수가 못 되나 봐요.”
“그러게...”
라디의 말대로, 바닥에 누워있는 기사 중 누구도 검을 뽑아 든 이가 없었다.
숙련된 검사들이 대처조차 하지 못할 정도면 얼마나 빠른 걸까?
천천히 시선을 떼며 말했다.
“...움직이자. 따라잡으려면 조금 서둘러야겠어. 아마 계단을 내려가면서 만난 기사란 기사는 전부 쓰러뜨릴 심산인가 본데...”
“어쩌면 생각보다 좋은 시기에 일이 터진 걸지도 모르겠어요. 기사단장도 얼마 전에 죽었고, 사교에 가담했던 기사들도 모조리 지하 광장에 매몰됐으니.”
“그러게... 사실상 전력이 반쪽 난 거나 다름없으니까. 안타깝지만 성 안의 고용인들도 전부 실험에 동원된 모양이고... 너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느낌인데 이 모든 게 우연일까 도란?”
“글쎄... 그건 당사자들만 알겠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기사단장은 이 모든 사태를 예견했을 거란 직감이 들지만...
단도를 도로 집어넣고 돌계단 아래로 향했다. 이젠 기척을 숨길 필요도 없이 달리듯 층계를 내려갔다. 성탑의 각 층마다 마주한 문짝은 성난 황소에 들이받히기라도 한 것처럼 갈기갈기 조각나 있었고, 문 너머로는 하나같이 처참한 광경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숨 가쁘게 내려가던 도중, 아리엘이 내 옷자락을 붙잡으며 말했다.
“...조심해 도란. 이 앞이 아마 마지막 층일 거야.”
“응? 그건 어떻게...”
“아까 성탑을 기어오르면서 외벽에 난 구멍의 개수를 살폈거든. 혹시 모르니까...”
“그 잠깐 사이에 그걸 봤단 말이야?”
“그뿐만이 아니에요. 이 앞에서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혈향이 풍겨오고 있어요. 틀림없이 치사량인데... 대비하죠.”
“...그래, 그렇단 말이지?”
허리춤에 매달린 장검의 감촉을 확인했다. 차분하게 숨을 고르고 발을 내딛자 서늘한 공기가 느껴진다. 비좁은 돌계단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지만, 라디의 말을 듣고 나니 괜스레 긴장되었다.
조금 더 나아가 망가진 청동제 걸쇠를 젖히고 슬쩍 문을 떠밀자 지독한 피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윽...!’
무심코 입가를 틀어막았다.
바닥의 갈라진 틈새를 타고 퍼져나간 핏줄기 위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살덩어리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고, 바닥뿐만 아니라 벽과 천장에서도 시뻘건 얼룩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니아는 그곳에 있었다.
적색 수면 중심에서 오연하게 홀로 선 채.
나는 조급하게 달려가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니아 님!!”
“.....”
니아는 뭔가에 골똘히 몰두하고 있었는지 멍하게 눈을 깜빡거리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며 내 가슴팍을 끌어안았다.
“소년!! 이제 왔어? 조금 늦었네?”
“아니 늦고 자시고...! 어디 다친 덴 없어요?! 어쩌다 이렇게 피를 뒤집어쓰고...!”
“응, 괜찮아! 난 멀쩡하니까! 걱정해 줘서 고마워 소년.”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왜 죽인 거예요? 뒤처리하기 곤란하니 일단은 가능한 한 원만하게 해결하려고 했는데...”
“응 그거 말이지... 이거 좀 봐봐.”
가면 아래 뺨에 묻은 피를 닦아주던 중, 불현듯 그녀가 표정을 굳히며 눈짓했다.
의아하게 허리를 굽혀 발치에 쌓인 시체를 단검 끝으로 뒤집자...
“이건... 촉수...?”
토막 난 살점 덩어리에 불길한 검보라색 돌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시선으로 설명을 구하자 니아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 녀석들... 평범한 인간이 아니야. 겉모습은 일반 기사하고 똑같았는데 완력하고 맷집이 엄청났어. 나도 처음엔 그냥 기절시키려고 했지만 아무리 때려도 다시 벌떡 일어나서...”
“...잘하셨어요. 설마 이렇게 대놓고 섞여 있었을 줄이야.. 실험이 성공한 걸까요...?”
“음... 그건 모르겠지만, 이 녀석들에게선 이상한 악취가 났으니까 가까이 다가가면 구별할 수는 있을 거야. 그래도 앞으로는 조심해야겠어. 중하급이라면 몰라도 만약 상급 기사들이 촉수를 달고 떼거리로 몰려들면... 힘조절을 하면서 싸우는 건 어려울 것 같아.”
“니아 님이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뭐, 걱정 마! 무슨 일이 있어도 소년은 내가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게 할 테니까! 아, 물론 라디랑 아리엘도!!”
“.....”
그렇다면야 좋겠지만...
“왜 소년? 아직도 내가 못 미더워?”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일단 빨리 여기서 벗어나죠. 그래도 덕분에 미리 알아서 다행이에요. 대처 방안을 미리 생각해둘 수 있으니까...”
“응! 소년이 앞장서! 난 네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갈게!”
“.....”
나는 피로 물든 성탑을 뒤로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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