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화 〉 돌입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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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 돌입 #7
문을 열자 아래쪽에서 거센 돌개바람이 불어왔다.
성탑의 하단부는 원기둥 형태로 지상까지 곧게 뚫려있었으며, 나선 궤도를 그린 층계가 끝없이 아래로 이어졌다.
아리엘이 피워올린 빛무리를 등불 삼아 계단을 내려가다 보니 곧 지상이 나왔다. 조용히 수신호를 보낸 뒤 영주성 안뜰 방향으로 난 대문을 살짝 밀어 엿보자 그곳엔 상당한 수의 기사가 대열을 갖추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천천히 문을 원래대로 되돌리며 말했다.
“...모두 바삐 움직이고 있어. 이런 한밤중에 무슨 일이길레...”
“그러게... 어쩐지 다들 어수선해 보이네.. 예기치 못한 일이라도 발생한 걸까?”
“혹시 안디라 님이 도시에 왔다 간 걸 눈치챈 거 아냐?”
“음... 그건 아니지 않을까요? 그랬더라면 더 큰 소란이 벌어졌을 테니까요. 외성벽 방비에도 더 많은 병력을 배치했을 테니 그것보단...”
“다들 잔뜩 긴장해 있어. 뭔가를 준비하는 걸지도 모르겠네... 어쨌든 이대로라면 당장 돌파하는 건 어렵겠어.”
경비가 너무 삼엄하다.
수인 소녀가 잡혀갔다던 지하 실험실로 진입하려면 필연적으로 외각 구역을 가로질러 주탑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도중에 기사들의 시선을 피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주랑이나 순회로를 비롯한 여러 시설을 통과해야만 한다.
계획 없이 무턱대고 뛰쳐나갔다간 바로 들키고 말겠지.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성곽로에서 내려다보았던 성 구조를 떠올렸다.
“...정면으로 돌파한다는 건 말도 안 되고.. 측면으로 돌아가야겠어. 외성 부지 안에 여러 시설이 있으니까 그쪽으로 이동하면 기사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거야.”
“음... 내성벽은 외성벽보다 낮으니까 쉽게 오를 수 있겠네. 도란의 말대로 근처에 구조물도 많으니 잘만 이용하면 유용할 테고...”
“...그럼 신속하게 움직여야겠어요. 기사들과 적대한 이상 저희의 존재를 들키는 건 시간문제에요. 빠져나오는 것까지 고려하면 더더욱 서둘러야 하고요.”
“좋아, 그럼 출발하자!”
“...네!”
분대 단위로 분주하게 움직이던 기사들이 시야 너머로 사라지자 우리는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가면을 고쳐쓰고 신중하게 문을 젖히자 머리 위에서 눈부신 백광이 쏟아져내렸다. 성채 내부는 외부와 달리 반사판을 덧댄 마석등이 도처에 내걸려 있었으며, 공방이나 마구간, 예배당을 비롯한 각종 시설이 배치되어 있었다.
최대한 성벽에 밀착해 이동하던 중 불현듯 내성 쪽에서 성난 고함이 들려왔다.
“다들 서둘러!! 죄다 느려터져서 뭣들 하는 거야?!!”
“1분대는 이쪽으로!! 3분대는 칼슨 소대장을 따라가!! 서둘러야 한다!!”
““옛!!””
“.....”
뭔가 일이 벌어지기는 한 모양인데...
놈들의 동향에 온 주의를 기울이며 부지런히 외각 구역을 나아갔다. 자세를 낮춰 살금살금 성벽 아래를 거닐자 넉넉한 기장의 로브가 땅에 쓸렸지만 신경 쓸 겨를은 없다.
적지 한복판을 헤집고 있다는 긴장감에 입술이 바짝바짝 메마르고, 휘황한 조명에 현기증이 인다.
근처에서 절그럭거리는 갑주의 소음이 들릴 때면 장애물 뒤로 숨으며 숨죽이기를 반복하던 중, 라디가 다급하게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도란님...! 이 앞은 개활지라 그냥 나갔다가는 바로 들킬 거예요...!”
“그러게... 젠장, 내성에 접근하려면 꼭 이 길목을 지나야만 하는데...”
기병들이 군마에 쉽게 탑승할 수 있도록 마련된 단(?) 뒤에 숨어서 슬쩍 전방을 엿보자 건재한 경비 병력이 보였다.
주위를 둘러봤으나 더 이상 몸을 가릴 만한 장애물은 보이지 않았다.
곤란하게 턱을 짚고 고민하던 차, 니아가 내 허리춤을 콕콕 찌르며 성채 구석을 손짓했다.
“으음... 아니면 저쪽으로 가는 건 어때? 조금 돌아가기는 해도 건물 안을 경유하면 들키지 않고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디 보자... 그러네요. 건물끼리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잘하면 내성 입구까지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겠어요. 안에도 기사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 정도야 그냥 제압하면 그만이고...”
니아가 가리킨 방향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성채 안이라는 한정된 공간 탓에 건물이 밀집해 있어 잠입하기엔 최적의 환경.
나는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고는 보초의 시선이 돌아간 틈을 타 신속하게 건물 앞까지 이동했다.
이어서 내부로부터 두런두런 들려오는 말소리에 뒤따라온 라디 일행과 눈빛을 교환한 뒤, 문을 박차며 단숨에 돌입했다.
콰앙!!!
“뭐, 뭐야...?! 네놈들은 누구냐!?!”
“당장 가면을 벗고 신원을 밝... 커어어억?!!”
강타(?).
순식간에 질주해 기사의 복부를 타격했다. 가속을 살려 그대로 턱뼈를 후려쳤다. 놈은 자세를 비틀거리면서도 곧바로 검을 뽑아들었지만, 나는 부츠 밑창으로 손목을 내려찍어 발도를 늦추고 회전해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사내가 눈깔을 까뒤집은 채 맥없이 쓰러지자 측면으로부터 날카로운 섬광이 치달아왔다.
슈화아아악!!
“호오... 이걸 피했단 말이지?”
어깨에 녹색 견장을 단 기사가 칼날을 되돌렸다. 자세를 낮추고 돌진의 전조 동작을 취했다. 무릎부터 어깨까지 일련의 동작이 매끄럽게 이어진 뒤로는, 그의 갑주 아래 근육에 팽팽한 긴장이 실렸다.
기사가 짧은 기합을 내지르며 돌격해왔다.
“죽어라!!!”
“....”
침착하게 대응했다. 단도를 뽑아 칼날을 틀어막았다. 놈의 장검이 칠흑빛 도신을 강타하자 손아귀에 저릿한 감각이 전해져왔고, 날카로운 불똥이 어두운 실내를 밝힌다.
그가 능숙하게 손목을 꺾으며 전진했지만 놈들이 구사하는 검술은 이미 숱하게 겪어본 바.
스륵...
“뭣...?!”
기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도중에 손에서 단도를 놓아버린 까닭. 예기치 못한 상황에 놈은 제때 반응하지 못했고, 내 단도를 휘어감으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는 그의 하단으로 육박했다.
팔꿈치로 관절을 타격하자 기사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종아리를 옭아매어 물러나지 못하도록 유착했다. 자세가 흐트러진 사이 하복부를 강타했고, 사슬 갑옷을 붙잡아 움직임을 봉쇄했다.
놈이 롱소드를 버리고 급박하게 보조 무기를 뽑아들었으나 이 또한 예상하던 바.
칼날을 휘두르는 타이밍에 맞추어 그를 떨쳐내고 고블린 단검으로 허벅지를 가르자 시뻘건 선혈이 뭉텅이로 튀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뒷목을 붙잡아 벽에 처박자 사내는 풀썩 바닥에 먼지를 일으키며 혼절했다.
순식간에 두 명을 제압하고 단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있자니 등 뒤에서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와락!!!
“까, 깜짝이야... 말도 안 하고 갑자기 끌어안으면 위험하잖아요! 아직 칼을 넣은 것도 아닌데...”
“...소년.”
“네...?”
“방금 지인짜 멋졌어!! 소년은 검만 잘 다루는 게 아니라 체술도 엄청 뛰어났구나...! 엄청 듬직하고 늠름했어!!”
“...니아 님이 그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잖아요.”
대체 어떤 콩깍지가 끼면 그렇게 보이는 걸까.
내가 기사 두 명을 쓰러뜨리는 사이 니아에게 명치가 오목해져 드러누운 기사들을 흘겨보자니 그녀가 내 가슴팍을 어루만지며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소년은 뭐랄까... 나랑은 스타일이 완전 다른걸? 동작 하나하나가 정제되면서도 사나운 느낌이야. 어쩐지 무투가 동료가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이대로 계속 같이 수련하면서 이야기하면 좋을 텐데... 에헤헤...”
“....”
살짝 한숨을 내쉬고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쓸어주자 밖을 경계하던 라디가 쇠뇌를 내리며 읊조렸다.
“...다행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에요. 누가 오기 전에 빨리 정리하고 여길 뜨죠.”
“그래.”
각자 널브러진 기사의 다리를 붙잡고 구석으로 잡아끌었다.
어두컴컴한 건물동 내부엔 먼지 쌓인 거미줄과 용도를 알 수 없는 빈 포댓자루가 잔뜩 포개져 있었고, 출처를 알 수 없는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다.
어쩐지 몹시 불쾌한 냄새에 숨을 틀어막고 빈방에 기사들을 몰아넣은 뒤 문을 잠그자 창밖으로 사람 그림자가 여럿 지나갔다.
라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천만다행이네요... 조금만 쓰러뜨리는 게 늦었어도 소리 때문에 다 들켰을 거예요.”
“그러게... 근데 여긴 무슨 건물일까? 다른 시설보다 유독 낡은 것 같은데...”
“음... 아마 옛날에 쓰던 병영이 아닐까? 예전에 아빠 성에서 기사단 숙소를 둘러볼 때 비슷한 건물을 본 적이 있어.”
“병영이라...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봤다 싶었는데... 씁...”
어쩐지 쉰 냄새가 난다더니 비좁고 난방도 제대로 안 되는 모양새가 군시절 겪었던 내무반이랑 판박이다.
불현듯 치미는 트라우마에 입가를 짚으며 신음하자 라디가 의아한 눈길로 쳐다봐왔다.
“도란님? 갑자기 왜 인상을...”
“...아무것도 아냐. 그보다 빨리 여길 벗어나자. 저 반대편 출구로 나가면 될 것 같은데...”
“잠깐, 불빛을 비춰줄게.”
아리엘이 손바닥에서 빛무리를 피워올렸다.
어슴푸레한 조명에 의지해 건물 안쪽으로 들어서자 발치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삭아서 곳곳이 움푹 꺼진 복도는 눈길이 닿는 곳마다 시퍼런 곰팡이가 피어있었고, 좌우의 빈 생활관에는 망가진 침상과 관물대 따위가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일렬로 뻗은 복도를 가로지르며 나아가던 중, 라디가 허리를 굽혀 반파된 문짝 아래 깔린 신문지를 주워들더니 뽀얗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메다올리눔 마을에서 정체불명의 역병 창궐... 비스마르크령을 강타한 대기근... 십 년도 더 전에 간행된 일간지네요. 아마 그쯤에 숙소를 비우다가 떨어뜨리고 방치된 것 같은데... 이상해요...”
“이상하다니 뭐가?”
“아니...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건물에서 왜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었을까요? 그것도 중무장한 상태로요.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걸 보니 방 안쪽까지는 아예 건드리지도 않은 모양인데...”
“...듣고 보니 조금 이상하긴 하네. 왜 이런 시간에 폐건물에서... 혹시 근무를 서는 게 귀찮아서 땡땡이치고 있던 건 아닐까? 그 왜 있잖아, 보통 말년이 되면 만사가 귀찮아지니까...”
“.....”
라디가 말없이 고개를 들더니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쳐다봐왔다.
“그러고 보니... 도란님은 이전에 병사로 근무한 적이 있다고 했었죠... 혹시 경험담...?”
“.....”
슬쩍 시선을 피하자 녀석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 그건 아무래도 그렇다 치고... 또 한 가지 이상한 게.. 여기 이 자국 보여요?”
“어디 보자... 쓸린 자국? 뭔가를 옮기려고 했던 것 같은데... 이게 왜?”
“아니, 이 흔적에만 먼지가 없잖아요. 생겨난 지 얼마 안 됐다는 소린데... 게다가 입구에 쌓여있던 포댓자루도 신경쓰이고... 다른 사물은 전부 그대로인 반면 복도에 쓸린 자국이 가득하다는 말은...”
철컹!!!
““.....!!!””
찰나, 날카로운 소음이 터져나왔다.
번개에 직격한 것처럼 자리에 멈춰서서 귀를 기울이자ㅡ
....!!
.....!!
“...가.”
“....겠지.”
철계단 아래, 어두컴컴한 지하실로부터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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