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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281화 (281/375)

〈 281화 〉 돌입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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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돌입 #8

건물 안쪽에서 희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니아가 곧바로 무언가 외치려 했지만, 나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대었다.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고 소리가 들려왔던 곳으로 향하자 그곳엔 지하실로 이어지는 철계단이 있었다.

나는 슬쩍 일행을 돌아보며 속삭였다.

“...너희도 들었지? 이 아래에 뭔가 있는 모양인데...”

“...대체 뭘까? 무기질적인 건 아니었어. 사람 목소리 같았는데... 라디야, 혹시 무슨 냄새 안 나?”

“네... 이 건물에선 아까부터 시큼한 악취가 진동해서 다른 냄새를 맡기가 어렵거든요... 설마 이곳 지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뭐가 됐든 확인해 보자. 기사들이면 확실하게 처리해두는 편이 나으니까.”

이미 입구에 있던 병력을 제압한 시점. 무시하고 지나쳤다간 쓰러진 동료를 보고 우리의 존재를 눈치챌 수도 있다.

병사 간의 왕래가 적은 외성벽에서 기사를 쓰러뜨렸을 때와는 다른 상황.

나는 일행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중하게 철계단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단단한 신발 밑창이 철계를 밟자 큼지막한 금속성이 흘러나왔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라디오의 잡음처럼 웅성거리던 목소리도 차츰 명료해졌다.

희미한 목소리가 귓가에 와닿았다.

“...또 그 새끼들이야. 지치지도 않나..”

“네 명... 요 앞에서 근무를 서던 놈들이 모두 몇 명이었지...?”

“아마 다섯이었을 텐데... 나머지 한 명은 어디...”

“그런데 그놈들치고는 발소리가 너무 가볍지 않아? 갑주 소리도 안 들리고...”

“쉿...! 온다!”

“.....”

지하실은 구 막사의 잔재로 보이는 폐선반이나 관물대 따위로 가득했다.

먼지 쌓인 상자 더미, 화들짝 놀라 달아나는 쥐 일가족을 지나쳐 걷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말소리가 뚝 멎었다.

이윽고 아리엘이 마법으로 캄캄한 지하실을 밝히자 시야에 들어온 건...

‘죄수...?’

며칠 씻지 못한 것처럼 꼬질꼬질한 얼굴, 포승줄에 포박된 팔다리, 빛에 익숙지 않은지 눈살을 찡그리면서도 놀란 얼굴로 날 응시하는 열 명 남짓의 사내들이었다.

순간, 영주성이 납치했다던 시민들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곧바로 방금 생각을 거두어들였다.

이 사람들은 틀림없는 기사다.

곳곳에 멍이 들었을지언정 수많은 실전으로 단련된 근육, 검사 특유의 굳은살과 투구를 쓰느라 눌린 관자놀이의 흔적 따위를 보면 알 수 있다.

짧은 순간 판단을 마치고 칼자루를 움켜쥔 순간, 당황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뭐, 뭐야...?! 가면에 로브? 우리 기사단원이 아니잖아!!”

“자, 잠깐...! 왜 이런 곳에 외부인이...”

“그렇다면 아까 위에서 소란이 일었던 건...!”

“.....”

웅성웅성, 기사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퍼져나갔다.

적의가 느껴지지 않아 잠시 검끝을 내리고 상황을 지켜보자 대장 격으로 보이는 한 기사가 총대를 메고 나섰다.

“...실례하지. 혹시 당신들의 신원을 알 수 있나? 지금 영주성은 위험하다. 어서 이곳을 떠나는 게 좋을 거야.”

“.....”

말이 통하나?

나는 서서히 방아쇠에 힘을 싣는 라디를 손바닥으로 제지하고는 한 발자국 다가가며 읊조렸다.

“나야말로 질문하지. 너희들은 정체가 뭔데? 왜 기사가 이런 곳에 포박되어 있는 거야.”

“그건...”

남자가 고개를 돌리며 말을 삼키더니, 쓸개를 토해내듯 힘겹게 내뱉었다.

“....분쟁이 있었다. 외부인이 알 만한 내용은 아니야. 다만 지금 영주성에선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어서 이곳을 뜨는 게...”

“촉수 말인가?”

“네놈이 어떻게 그걸 알고 있지?!!”

사내가 눈을 부릅뜨고 날 노려보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떻게 알긴 뭘 어떻게 알아. 지금 도시에서 실종된 사람이 몇 명인데. 촉수가 영주의 소행이란 게 알려지는 것도 시간문제일걸?”

지금쯤 아카이아 부 길드장과 돌킨이 영주에 대항할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있을 테니.

내 말을 들은 기사가 멍하니 입을 벌리더니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그, 그렇군...!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야... 하지만 너무 늦었다. 간신히 몇 명은 목숨을 건질 수 있겠지만 오늘 밤이 지나면 이 도시 주민의 절반 이상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신세가 될 테니...”

“...그건 또 무슨 의미야. 여기서 진행되고 있는 실험이랑 관련이 있어?”

“.....”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실험이 성공했다.”

“성공했다니...”

“완성체가 나왔다는 소리다. 이제 곧 놈을 이용해 숙주를 늘려나가겠지. 촉수가 피부에 살짝 맞닿은 것만으로도 감염되니 말이다. 나와 내 동료는 미연에 영주의 속셈을 깨닫고 반기를 들었지만, 보다시피 이 모양 이 꼴이다.”

기사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웃음 섞인 그의 탄식에서는 적잖은 씁쓸함과 후회가 묻어나왔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부패한 기사들과는 달리 기사의 본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사내.

살짝 신기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자니 아리엘이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다들 바빠 보였던 거구나... 실험이 성공했으니 이제 성과를 거두어야 하니까...”

“그러게요... 저희도 촉수가 주위의 생물을 감염시키는 모습을 봤으니까요... 야음을 틈타 하룻밤 사이에 베라스틴 사람들을 전부 생채 병기로 만들 심산인 걸까요...? 그걸로 반역을 꾀하거나 국가로 전복시키려고...”

“그럴 수도 있겠네... 제길,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거리를...”

“...그럼 도란은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이제 단순 구출이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니아가 걱정스럽게 내 허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한데 그녀의 말을 들은 기사들이 크게 동요했다.

“도란...? 지금 도란이라고 했어...?!”

“도, 도란이라면... 그 사람이잖아!!”

“어떻게 이런 우연이...”

“저 사람이 바로 그...”

“.....”

나는 그중 날 뚫어져라 응시하는 한 젊은 기사에게 물었다.

“...날 알고 있나?”

“무, 물론입니다! 며칠 전, 이교도 사건의 진상 조사를 위해 왕실 특무대에서 요원을 파견했을 때 들었습니다...! 엄청나게 강하고 용맹하다고... 일인당백의 귀인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영주가 제일 경계하던 인물이라 들었는데...”

“....”

로닌인가.

어쩐지 해맑은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녀석을 머릿속에서 걷어내자 기사들이 은근슬쩍 서로의 어깨를 떠밀었다.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노라니 한 젊은 청년이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도란... 경?”

“...뭔데.”

“기사단장님의 마지막은 어땠습니까.”

“....”

기사단장이라...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영웅다운 최후였어.”

“그런가요...”

“왜,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제대로 못 들었나 보지?”

“예... 영주가 도통 말해주질 않더군요... 몇몇 사람들은 그를 변절자라 폄하했지만 저희는 믿고 있었습니다. 그분처럼 청렴하고 강직한 분도 세상에 없을 텐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젊은 기사가 침울하게 고개를 숙이자 주변 기사 사이에서도 숙연한 공기가 퍼져나갔다.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자 앞서 대화를 나누었던 대장이 헛기침하며 말했다.

“크흠... 추태는 거기까지 보이도록. ...도란 경, 외람되지만 한 가지 부탁해도 되겠나?”

“...뭔데.”

“우리를 풀어다오. 이곳에서 나가게만 해주면 내 숙주를 제거하고 부정한 기사단원을 척결하도록 하지. 만약 오늘 밤 영주의 계획을 제지하지 못하면 모든 게 끝장이다.”

“.....”

나는 천천히 그와 눈높이를 맞추며 입꼬리를 올렸다.

“마침 잘됐네. 우리도 이곳에 볼일이 있거든. 기사들의 눈을 피하면서 지하 감옥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지하 감옥...? 그곳은 비밀리에 실험이 이루어지는 곳인데 그쪽이 어떻게 그걸.... 첩자로군. 노예 중에 스파이를 심어두었어.”

“그래서, 어떻게 가는지나 빨리 말해.”

“....동쪽 주랑을 이용하면 쉽게 내성으로 진입할 수 있다. 위병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병력 대부분이 실험을 위해 차출된 상황이니 쉬이 돌파할 수 있을 거야. 서쪽 누각을 거치는 방법도 있지만 그쪽은 근처에 요새가 있어 금방 들키고 말 거다.”

“동쪽 주랑이라... 그 다음엔, 내성 안에도 여러 시설이 있을 거 아냐.”

“내성은 구조가 복잡해서 알려줘도 소용없다. 이곳에서 풀어주면 내 길잡이를 자청하도록 하지. 우리도 영주에게 되돌려주어야 할 빚이 있으니.”

“.....”

나는 잠깐 턱을 짚으며 고민에 잠겼다.

우리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 지금까지의 발언에서 논리가 어긋나는 점도 없고, 거짓말의 불온한 기척 또한 느껴지지 않는다.

더욱이 수인 소녀를 구출하고 난 후의 뒷수습까지 고려하면 한 명이라도 영주성의 상황을 잘 아는 우군이 있는 편이 편리하다.

이자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도통 예삿일이 아니기도 하고.

하지만 문제는...

‘이 사람들을 신뢰할 수 있는지인데...’

아직 우리의 존재가 완전히 노출되지 않은 시점이니 영주가 파 둔 함정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이대로 덥석 수용할 수도 없는 노릇.

겉으로는 견실해 보이나 경과에 따라 언제든 내 등에 칼을 꽂을지도 모르고,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기사는 대부분 성실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슬쩍 입꼬리를 비틀고는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경쾌한 딱! 소리가 울려퍼지자 기사들이 의아하게 쳐다봐왔지만, 곧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으아아아악!!! 이, 이게 뭐야!!!”

“이, 이 괴물은 대체...!”

“모두 한가운데로 뭉쳐!!! 어째서 이곳에 마물이...!!”

부서진 나무 선반, 후미진 구석, 무너져내린 천장을 뚫고 시꺼먼 줄기가 현실로 기어왔다.

기사들의 발치에 뚫린 거대한 공혈에서는 바글거리는 개미 떼가 군침을 질질 흘리며 그들을 노려보았고, 더욱이 길쭉하게 뻗은 복도 저편으로부터 조용히 다가오는 검고, 반질거리며, 심해의 해저 케이블처럼 기다란 생명체는...

“데, 데스웜...?”

“아, 아냐...! 다리가 있어! 저건...!!”

““다리 달린 데스웜이다!!!””

“.....”

노래기 인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용맹한 기사들도 벌벌 떨며 주위를 둘러보던 도중, 익숙한 사슴뿔 개미가 다가와 내 허벅지에 살갑게 머리를 문댔다.

리더의 얼굴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서, 설마 이 마물은...! 전부...”

“그래, 내 소환수야.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라도 너희가 날 배신하면...”

당장에라도 머리통을 으깰 것처럼 집게를 까딱거리는 개미를 눈짓하자 그가 아연실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그래. 그쪽이 인륜에 반하는 행동이라도 하지 않는 한 신뢰를 저버리는 일은 없으니 안심해라. ....어떻게 F랭크 모험가가 우리 기사단을 학살했는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의문이 풀렸군.”

“궁금증이 해소됐다니 반가운 소식이네. 그러면 일단은 교섭 성립인가?”

“그렇다. 소관 나이트 배너렛 백인대장 하킴, 목숨을 다하는 한이 있어도 자네를 도와 악의 원흉을 제거하도록 하지. 베라스틴의 기사는 응당 베라스틴의 시민을 위해 존재하는 법이니.”

“그래.”

나는 사납게 웃으며 포승줄을 끊어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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