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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282화 (282/375)

〈 282화 〉 돌입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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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돌입 #9

기사들이 서로의 구속을 풀어주는 사이, 자신을 백부장이라 소개했던 하킴과 논의를 마쳤다.

그가 허리춤에 검을 매달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출발하지. 서둘러야 할 거다. 꾸물거리다간 적기를 놓치고 말 테니.”

“알았어. 그럼 아까 말했던 동쪽 주랑으로 가는 거야?”

“그렇다.”

“그래, 빨리 가자.”

방침이 바뀌었다.

수인 소녀를 구한다는 것까지는 동일하지만, 이후로는 가능한 한 기사를 처리해둘 예정.

그렇지 않으면 소녀를 구출하는 것과는 별개로 베라스틴이 오늘 밤 촉수투성이가 되어버릴 테니.

한데 일사불란하게 행동을 개시하는 기사단원을 따라 골목에서 골목으로 은밀히 이동하고 있자니 옆에서 은근한 시선이 느껴졌다.

의아하게 돌아보자 니아가 날 지그시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요.”

“.....”

“저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요?”

“....”

니아는 잠시 망설이더니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소년, 아까 그건 얼마나 소환할 수 있는 거야?”

“그거라뇨? 아, 그 검은 애들이요? 음... 좀 애매한데...”

“....”

“덩굴은 저도 잘 모르겠고... 노래기는 한 마리밖에 불러낼 수 없는 대신 몸집이 크고.. 개미는 여럿 소환할 수 있긴 한데 그때그때 컨디션에 따라 수가 달라요.”

“대충 얼마나...?”

“음... 적을 땐 예닐곱 마리만 불러내도 두통이 오는데 저번에 최대로 소환했을 땐 세 자릿수까지...”

“세, 세 자릿수?!! 혹시 막 독도 내뿜거나 그러지는...”

“어? 어떻게 알았어요? 노래기가 딱 그런데.”

“.....”

니아가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자 그녀가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소년, 아니 도란. 정말로 우리 길드에 들어올 생각 없어...?”

“...그 얘긴 끝난 거 아니었어요? 갑자기 그건 또 왜...”

“하지만 그야... 그런 능력은 처음 봤는걸...? 안디라 님의 권능이라... 정말 무시무시하네...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선 한 번에 수백 명을 학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어...”

“...그렇다고는 해도 니아 님 정도 실력자면 언제든 파훼할 수 있잖아요. 아무리 많이 불러 모아도 한주먹거리조차 안 되니까. 그렇게까지 놀랄 건...”

여기서 능력이 더 진화한다면 모를까, 아직 니아처럼 월등한 강자를 꺾기엔 모자란 감이 있다. 수로 밀어붙이는 전술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니.

어째선지 능력에 조금 변화가 찾아온 것 같기도 하지만...

안디라 님에게 장검을 하사받고 난 뒤로부터 개미를 소환할 때면 들었던 위화감을 머릿속으로 되뇌고 있자니 백부장 하킴이 전방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 곧 위병이 정기적으로 순시하는 순회로에 도달한다. 주의하도록.”

“...이런 상황에도 순찰하는 병력이 남아있을까?”

“주의를 기울여서 나쁠 건 없다. 만반의 채비와 신중에서 무결이 싹트는 법이니.”

“정론이네... 아니, 그보다 너희는 같은 기사들을 죽일 수 있는 거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료였잖아.”

이젠 갈라섰다고는 해도 한때 동료였던 사람들을 해하는 건 어려운 법이다. 그것이 한솥밥을 먹고 함께 훈련을 받아온 이들이라면 더더욱.

미심쩍게 묻자 하킴이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저들은 사사로운 정과 사리를 위해 기사로서의 신념을 저버린 자들이다. 실험을 중단해야 한다는 우리의 의견을 묵살한 것으로도 모자라 무장을 빼앗고 감금해두었지. 심지어 우리 중 몇몇은 실험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대의를 위해서 반드시 처단해야 할 상대다.”

“뭐... 그쪽에서도 여러 일이 있었나 보네...”

“그렇다. 그리고 도란 경,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나.”

“...뭔데?”

“내성 안쪽 격리실에 가면 실험체를 모아두는 공간이 있다. 그 안에는 촉수에 감염된 동료와 내 부하가 있을 거다. ...그 녀석들의 목숨은 우리가 끊어주고 싶다.”

...방금 말한 희생양 말인가.

“그래 뭐 그 정도라면 상관없는데... 어디까지나 그럴 여유가 있으면. 나는 무조건 내 목표를 우선할 거야.”

“그거면 충분하다. 고맙군. 그렇다면...”

하킴이 말을 끊고 전방을 쳐다보자 그곳엔 앞서 정찰을 나섰던 기사단원이 돌아오고 있었다.

기사가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려 하자 하킴이 손바닥으로 제지하며 말했다.

“긴급 상황이니 간략하게 보고만 하도록. 어땠나?”

“예! 순회로를 배회하는 경계 병력은 찾지 못했고, 이어지는 흉벽에서도 위병은 보지 못했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합니다.”

“그런가... 희한하군. 아무리 이번 작전이 중요하다지만 내성 길목을 순찰하는 병력 정도는 남겨놨을 텐데...”

“어떻게 할까요...?”

“일단은 계속 전진한다. 함정일 수도 있으니 방심하지 말도록. 한시바삐 갑주와 무기를 되찾아서 대항할 힘을 갖추어야 한다.”

하킴이 단호하게 명령하고는 신속하게 안뜰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정찰부터 사주 경계까지 솔선해서 해주는 하킴 일행에 이전보다 다소 편한 마음으로 그를 뒤쫓았지만, 불현듯 등 뒤에서 음침한 기운이 느껴졌다.

의아하게 뒤를 돌아보니 그곳엔 라디가 벌레라도 씹은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빌어먹을 기사 새끼들.”

“....”

“다 뒈졌으면 좋을 텐데...”

중얼중얼, 꽁알꽁알...

나는 머쓱하게 목덜미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라디야.”

“.....”

“어쩔 수 없다는 거 알잖아. 대신 이따가 기사를 만나면 아무 거리낌 없이 해치울 수 있으니까...”

“흥! 저도 알거든요!”

“.....”

라디가 홱 고개를 틀더니 꽁한 표정으로 궁시렁거렸다.

그야 기분이 상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만..

가시방석에 앉은 심정으로 언짢아 보이는 라디와 그런 녀석을 토닥여주는 아리엘, 아까부터 날 멍하니 쳐다보는 니아와 함께 내성으로 향하고 있자니 불현듯 하킴이 정차된 수레 뒤로 내 어깨를 잡아끌었다.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방금 안뜰 포대 쪽에서 움직임이 있었다. 평소 이 시간대에는 인적이 뜸한 곳인데... 방심하고 지나쳤다간 사달이 날 뻔했군.”

“...어떻게 할까, 내가 처리해줘?”

“아니, 도란 경의 능력은 유용하지만 불필요한 소란을 발생시킬 염려가 있다. 여기선 우리가 나서도록 하지. ...조용히 접근해서 신호하면 일제히 제압한다. 실시.”

­척!!

사내들이 일사불란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경사로에 늘어선 포댓자루를 따라 낮게 포복하며 전진하더니 사람 형체를 목격했던 지점 앞에서 멈춰섰다.

어떻게 일을 벌일까 궁금하게 쳐다보던 찰나, 하킴의 손짓을 필두로 기사들이 일제히 행동을 개시했다.

“누, 누구냐?!!”

“적습인가?!”

“자, 잠깐만...! 네가 어째서 이곳에... 커허헉!!!”

“.....”

기사들이 날렵하게 포대를 넘어 급습하자 통렬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일렁이는 화톳불의 불길 사이로 번뜩이는 칼날의 반사광, 참혹하게 울려퍼지는 단말마, 돌담 위에 흩뿌려지는 새빨간 선혈에 전율하며 고개를 돌리자 만족한 기색의 하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너희들 정체가 뭐냐.”

“내가 지도하는 부하들, 그중에서도 저들은 후방 기습과 암살, 교란 등에 특화되어있는 정예 부대다. 이 정도면 식은 스튜 먹기지.”

“....조금 다시 봤네. 볼품없이 붙잡혀 있길래 약골인 줄 알았는데...”

“저들이 우리의 일원을 인질로 잡아서 어쩔 수 없었다.”

“....”

아니 어차피 몽땅 사로잡힐 거면 의미가 없지 않나...

지금까지 봐왔던 기사 중에선 상당히 강한 축에 속하는 자들이다. 나라도 똑같이 할 수는 있었을 테지만, 일체의 군더더기 없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몸놀림은 가히 칭찬할 만하다.

깔끔하게 시체를 유기하고 갑주와 무기를 뺏어 입는 기사들을 보며 감탄하고 있노라니 니아가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소년, 지금 멍때리고 있을 때가 아냐. 저기 아성에서 이쪽으로 대규모 병력이 오고 있어. 어림잡아 예순은 넘는 것 같아.”

“...그게 정말이에요?”

“응.”

“....”

니아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지만 너무 멀어 육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킴도 나란히 응시하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날 돌아보았다.

“그쪽 부인분은...?”

“아... 내 동료인데 엄청 강하니 믿어도 될 거야. ...그럼 어떻게 할 거야? 일단 기사를 척결한다고는 했지만 내성에 진입하기 전까지 쓸데없는 교전은 피하고 싶은데.”

방금처럼 소수와 맞붙는 거라면 몰라도 대규모 병력을 상대하는 건 꺼려진다. 니아가 있으니 우리 중에 사상자가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전에도 말했듯 만약 영주가 지레 겁먹고 증거 인멸이라도 꾀했다간 수인 소녀의 안위가 위험하니까.

잔당을 정리하는 건 모든 게 끝나고 난 뒤에 해도 충분하다.

하킴이 저 멀리 부하들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우리도 며칠간 구속되었던 터라 체력이 소진된 상태이니 가능한 한 정면충돌은 피하고 싶군. 솔직히 그쪽 부인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일단은 숨어서 경과를 보도록 하지.”

하킴이 능숙하게 수신호를 보내자 부하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포대 뒤로 숨었다.

나도 일행과 함께 얼른 장애물 뒤에 숨어서 기다리자 잠시 후, 정말로 다수의 발소리와 함께 숨가쁜 음성이 들려왔다.

“허억.. 헉...! 다들 서둘러라!! 한시바삐 진압해야 한다!!”

“이쪽으로!! 모두 속도를 높여!!!”

“이제 곧 내성으로 진입한다!! 대열을 유지하고 절대로 흐트러지지 말도록!!”

“모두 전투에 대비하라!!!”

“.....”

요란하게 절그럭거리던 갑주의 소음이 멀어질 즈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그러니까 저게 다 완성체 때문이라는 거지? 대체 얼마나 대단한 몸이길래... 하킴?”

“.....”

반응이 없어 옆을 돌아보자 하킴은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내 시선을 의식하고 벌어진 입을 다물더니 턱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명백한 이상 상황이다. 실험체 중에 완성형이 나왔다고 한들 저렇게까지 서두를 필요는...”

“...뭔가 잘못된 건가?”

“그렇... 다고 보는 게 옳겠군. 어차피 곧 알게 될 것이다. 우리도 저들이 향한 경로로 내성에 진입하게 될 테니. ...가자!”

““옛!!””

하킴이 옷자락을 휘날리며 앞서나가자 수하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나는 잠시 일행과 시선을 교환하고는 재빨리 그들을 뒤쫓았다. 부지런히 발을 놀리자 처음엔 멀게만 느껴졌던 내성도 점점 가까워진다.

한데 서둘러 발길을 재촉하는 우리의 양옆으로 예사롭지 않은 광경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저건... 연기? 주탑 안쪽에서 뿜어나오고 있어... 화재가 난 걸까?”

“피 냄새랑 탄내... 내성으로 갈수록 점점 진해져...”

“...그뿐만이 아니에요. 저기 성루에 걸려 있는 초록색 덩어리 보여요? 아무리 봐도 시체 같은데... 저희 말고 누군가가 영주성에 다녀갔을 리도 없는데 어떻게 된 걸까요...?”

“...하킴 잠깐만, 뭔가 이상...”

“다들 주목!! 이제 곧 내성으로 이어지는 주랑이 나온다. 반드시 경비 병력이 있을 테니 다들 주의하도록!”

““옛!!””

“....”

조용히 불러세우고자 했지만, 하킴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나아갈 뿐.

그렇게 부단히 걸어 거대한 기둥이 양옆으로 늘어선 주랑에 접어들자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 건ㅡ

“...도란님! 시체가 가득해요!!”

“한둘이 아니잖아...! 대체 무슨...”

“처참해...”

피로 붉게 물든 대리석과 그 위에 잠겨있는 무수한 송장이었다.

붉은 얼룩으로 원래의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는 대리석 기둥과 즐비한 주검을 둘러보고 있자니, 당황한 기색의 하킴이 언성을 높여 외쳤다.

“이, 이게 무슨...! 빨리 사태를 파악하라!!”

“보라색 상흔... 촉수에 당한 흔적입니다!!”

“뭣이라...?! 촉수가 왜 여기서...!”

“이 시체도...! 보라색 상흔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전원 촉수에 당했습니다!!!”

“대체 무슨...”

“백부장님!! 여기 생존자가 있습니다!!!”

“내가 직접 간다!!”

찰나, 주랑 안쪽에서 고성이 터져나오자 하킴이 서둘러 달려갔다.

그를 따라 어수선하게 몰려든 사내들을 제치고 인파 안쪽으로 들어선 내 눈에 보인 건, 복부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기둥에 기대어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가쁜 호흡을 내쉬는 청년이었다.

하킴이 청년의 어깨를 강하게 붙들고 말했다.

“넌... 보급대의 견습 기사로군.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말해줄 수 있겠나?”

“누구... 하, 하.. 하킴 백부장님...? 쿨럭...! 커흑!!”

청년은 피를 토해내더니 흐릿한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며­

“실험체가... 폭주했습니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운송하는 과정이었는데... 시꺼먼 촉수로 철창을 부수고... 콜록!!”

“완성체가 탈출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쿨럭! ...게다가 그놈이 지금까지 수용해두었던 다른 감염체를 해방시켜서... 내성이 쑥대밭이 된 상황입니다... 커흐흑!!!”

“....제기랄.”

“죄송합니다... 하킴 백부장님.. 죄송합니다.... 신의를 저버려서... 백부장님이 끌려갈 때... 도와드렸어야 했는데..”

“...상부 명령이었겠지. 나도 안다. 그러니 편히 눈 감도록.”

“죄송.. 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

­툭..

청년의 새하얀 손이 떨어져내렸다.

하킴은 그의 눈을 감겨주며 짧게 기도하더니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크게 심호흡하고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명령을 기다리는 부하들을 둘러보며 고했다.

“당황하지 마라!! 우리는 예정대로 건물에 입성해서 부정한 기사를 척결하고, 영주를 쫓는다!! 알겠나!!”

““옛!!! 하킴 백부장님!!””

“그래!! 그럼 바로 돌입한다!! 내부가 어떤 상황일지 모르니 절대 긴장의 끈을 놓지 말도록!! 우리는 영광스러운 베라스틴의 기사일지니!!!”

““와아아아아아!!!!!””

“대의를 위하여!!”

“앞으로!!!!”

기사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주랑 반대편의 육중한 중문으로 달려갔다.

“.....”

나 또한 세 여인과 시선을 마주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내성에 돌입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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