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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283화 (283/375)

〈 283화 〉 고양이 소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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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 고양이 소녀 #1

내성에 진입하고 처음으로 느낀 감상은 ‘아비규환’ 이었다.

“용맹하게 맞서라!! 절대로 물러서선 안 된다!!!”

“전열을 유지해!!! 흐트러지는 순간 끝장이다!!”

“전사들은 앞으로!! 쓰러진 전우의 방패를 주워서 전진하라!!!”

낭자한 선혈, 시뻘건 불길, 역병처럼 퍼져나가는 공포와 그을음.

도처에서 날카로운 금속성과 비명이 빗발쳤다. 엎치락거리는 전선에선 드문드문 보라색 잔상이 점멸한다. 화려한 장식이 내걸렸던 회랑은 불타오르는 잔해로 뒤덮였고, 본디 방문객을 환영해야 할 로비에는 실험체와 기사의 시체가 뒤엉켜 구르고 있었다.

비지땀을 흘리며 대항하는 기사들의 앞으로는 한때 인간이었던 괴물들이 검보라색 촉수를 사방으로 뻗치며 날뛰었다.

­카아아아아악!!!!

­크르르르륵..!!!

­그아앗!! 카악!!

“으아악!! 도, 도와줘!!!”

한 감염체가 날카로운 손톱을 휘두르자 기사가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는 검을 내둘러 떨쳐내고자 했지만 촉수에 다리를 붙들렸고, 순식간에 변이체 사이로 빨려들어갔다.

잠시 후, 우글거리는 괴물의 장벽이 갈라섰을 땐 그 자리에 새로운 감염체가 생겨나 있었다.

고블린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완력. 호전성. 전이력.

인간과 괴물의 처절한 전투를 목도하자 하킴의 부하들은 망연한 표정으로 검을 늘어뜨리고 대장을 돌아보았다.

하킴은 잠시 숙고한 뒤 결론을 내렸다.

“전 동료를 문책하는 건 나중에 한다!! 지금은 우선 이 분란을 진압해야 할 때다! 모두 부상자를 구출하고 전투에 가담하라!!”

““옛!!””

기사들이 일말의 주저 없이 달려나갔다. 아무리 밉상이라고는 해도 이런 상황을 보고도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일 수는 없을 터.

그들이 전선에 합류하자 곳곳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너, 너는...?! 깁슨...?”

“케일 네가 어째서 이곳에... 분명 구금되었을 텐데...!”

“닥치고 있어 인마. 신나서 뒤통수 까더니 된통 깨지기나 하고.”

“.....”

순식간에 전열로 파고들어 부상자를 후방으로 잡아끄는 기사 무리, 홀로 최전선으로 달려나가 감염체를 상대하는 하킴을 보고 있자니 니아가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소년, 우리도 가담할까?”

“네, 이대로 가다간 전부 몰살당하겠어요. ...아리엘, 축복 걸어줄 수 있겠어?”

“응! 그 다음엔 어떡하면 될까?”

“일단 후방에서 부상자를 돌보고 중간중간 전선이 위험할 때 보호막을 발동해줘. 나중에 긴급하게 필요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회복 능력은 아껴두고. 그리고 라디 넌...”

“...싸울 수 있어요. 지금은 좋고 싫고를 따지고 있을 상황이 아니니까요. 저번에 고블린과 싸울 때 촉수에는 독이 잘 통하지 않는 것도 알았으니 이번엔 훨씬 더 치명적인 걸로 준비했고요.”

“그래, 그래도 전투가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니 소모품은 최대한 아껴둬. 전열에 나서기보단 후방에서 보조에 전념하고.”

“그, 그럼 나는?!”

전방으로 달려나가려던 차, 니아가 내 팔목을 붙들었다.

나는 그녀를 돌아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니아 님은 물러나 계세요.”

“뭐, 뭐어...?! 어째서...!”

“니아 님은 아직 저들이 어떤 상대인지 잘 모르잖아요. 만약 니아 님이 감염돼서 이성을 잃으면 여기 전원이 떼죽음이에요. 무기도 없으니 근접해서 주먹을 휘두르다간 금방 감염되고 말 테고요.”

“.....”

“...그러니 조금만 참아요. 나중에 니아 님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가 있을 테니까. 그럼...”

지면을 박차고 나섰다.

축복의 광휘가 자아내는 빛꼬리를 이끌고 격전지로 향했다. 로브를 휘날리며 질주하자 매끈한 대리석 바닥에 검은 형상이 비쳐보였다. 나는 순식간에 가속해 전선에 도달했고, 보랏빛 촉수에 뒤덮여 꿈틀거리는 불길한 형상을 노려보았다.

내가 니아를 처음부터 전선에 투입시키지 않은 또 한 가지 이유.

­철컥.

신에게 하사받은 새 장검을 움켜쥐고. 두 다리에 힘을 싣고. 눈을 부릅뜨며 검은 아지랑이와 함께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도신을 폭발적으로 뽑아내자...

­콰르르르르르륵!!!!!!!

일섬(一?).

노도의 기세로 해방된 칠흑빛 섬광이 적지를 갈라놓았다.

터져나가는 살덩어리, 참렬한 겸명음, 날카로운 낚시꾼의 바늘에 찢겨나간 수산물처럼 갈라져 나가떨어지는 감염체들의 중심에 서자 사방에서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뭐, 뭣이?! 우리가 그토록 고전하던 괴물을 순식간에...!”

“검은 로브에 가면...? 기사단의 제식 복장이 아니다!! 저건 대체 누구야?!”

“이, 일단 저 사람을 도와라!! 이것저것 잴 상황이 아니야!”

갑작스러운 난입으로 감염체의 공세가 살짝 주춤한 사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던 기사들이 허겁지겁 일어나더니 나를 중심으로 전열을 가다듬었다.

순식간에 이목이 몰려들자 나는...

‘미친...’

오싹한 전율에 휩싸여 흑도(??)를 내려다보았다.

어마어마한 절삭력과 상상을 초월하는 첨예함, 이에 상승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가벼움.

기존 단도의 단점인 리치를 완벽하게 극복한 무기. 더군다나 오랫동안 사용하기라도 한 것처럼 내 손에 딱 맞아떨어지기까지 한다.

이것만 있다면...

­철컥!

나는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리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검을 측면으로, 칼날을 뒤로 향하게 두어 올려베기의 전조를 취하는 나벤흣(Nebenhut)의 변형 자세. 그간 사지에서 숱하게 구르며 독자적으로 갈고닦아온 검술.

사정권 안으로 감염체가 들어오자 나는 잠시 호흡을 틀어막고는ㅡ

“하아아아압!!!!”

­콰아아아아악!!!!!!

기합을 내지르며 촉수를 가르자 난폭한 소음이 터져나왔다. 살점이 반개하자 내장이 튀어나와 뺨을 때린다. 나는 순식간에 감염체를 양단하며 전진했고, 신속하게 자세를 전환하며 다음 표적을 절삭했다.

부주의하게 달려드는 한 농부 실험체의 울대를 꿰뚫고 떨쳐내자 주위에서 촉수가 뻗어왔으나 내가 누구던가.

이미 고블린 부락에서 수도 없이 놈들을 상대해봤던 몸이다.

­서거걱─!!!

제자리에서 짧게 회전하며 촉수를 모조리 절단하자 기사들이 아연실색했다.

“뭐, 뭐야!!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저런 묘기가 가능하다니...!”

“압도적이야... 대체 저런 강자가 어디서 나타난 건데!!”

“.....”

학살(??).

유린이라는 표현이 걸맞은 행위.

나는 주변에서 이목이 들러붙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살육을 이어나갔다. 손에 착착 감기는 흑도의 성능에 올라간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며.

‘...역시 안디라 그 양반 겉은 좀 무서워도 착한 신이 분명해.’

이런 무기를 선뜻 내어주는 존재가 나쁠 리 없지 않겠는가?

좀 지나치게 섬뜩한 면모가 있긴 했지만.

­콰드드득!!!

나는 더욱 전진하며 검을 휘둘렀다. 골통을 부수며 광인처럼 날뛰었다. 놈들의 강함은 생전 역량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바, 기사도 아닌 일반 시민의 변이체가 새 무기를 얻은 내 앞길을 가로막을 순 없었으니.

하지만...

­쿠르르륵!!!

“....?!!”

적들을 도륙해나가던 도중 발치에서 오싹한 기류가 느껴졌다. 두 갈래로 양분했던 상반신에서 발악하듯 새로운 촉수가 돋아난 까닭.

너무 들떠있던 걸 후회하며, 피해를 무릅쓰고 검을 쥔 오른손을 보호하려던 찰나ㅡ

“내가 방심하지 말랬지.”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산발하는 폭음, 너덜너덜하게 찢겨나가는 촉수, 휘몰아치는 풍압.

흙먼지가 걷히고 눈가를 가렸던 팔을 치우자 위풍당당하게 선 니아가 보였다.

나는 충격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반사적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소리쳤다.

“니, 니아 님!! 왜 오신 거예요! 위험하니까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도와준 건 고맙지만...!”

“.....”

니아는 말없이 날 올려다보더니 살짝 웃으며­

“소년,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하지만...! 니아 님은 마땅히 대적할 수단도 없잖아요!”

“대적할 수단?”

“네...!! 지금은 건틀릿도 없으시면서... 니, 니아 님...?”

“...소년.”

“.....”

“그러니까 소년은 그런 점이....”

­푸화악───!!!

“...살짝 열받아.”

니아가 주먹을 뻗자 다가오던 감염체들이 터져나갔다.

살갗에 닿지도 않았는데 머리통이 사라지는 신기에 경악하며 뚫어져라 쳐다보자 내 눈에 뜨인 건...

‘바람...?’

설마 권압만으로 감염체들을 날려버린 건가..!

나라면 엄두도 못 낼 무위에 아연실색하자 그녀가 싱긋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뱀처럼 쉿쉿거리는 촉수가 몰려드는 전방으로.

“...불쌍하네.”

­콰아아아앙!!!

니아가 주먹을 내지르자 대기가 파열했다. 재차 가격하자 일직선상으로 뻗어나간 파동이 공간을 분쇄했다. 이어서 정신을 집중하니 그녀의 발치로 에어록처럼 새하얀 기류가 몰려들고, 유려하게 회전하며 발을 구르자 솟구친 지면이 해일처럼 변이체를 덮쳤다.

니아는 이에 그치지 않고 기사의 어깨를 밟으며 높게 뛰어오르더니ㅡ

­쿠구구구구구구구구궁!!!!!!

“...전투란 이런 걸 말하는 거야.”

기둥을 감염체 위로 차서 무너뜨리곤 목련잎처럼 사뿐하게 착지하며 내 로브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었다.

압도적인 무력에 모두가 벙찐 채 무기를 늘어뜨리고 니아를 바라보던 중, 불현듯 하킴이 한 기사를 붙잡으며 외쳤다.

“영주는 어디 있나!!”

“하, 하킴 백부장님?! 백인대장님이 어떻게 이곳에...”

“묻는 말에만 답해라!!!”

“여, 영주는 지하에 있습니다!! 마지막에 목격했던 장소가 실험실 근처이니...!”

“그렇다면 완성체는 어디 있나!! 이 사단을 진정시키려면 완성체를 사살해야만 한다!”

“시, 실험에 성공한 개체를 말하는 거라면 그놈도 지하로 향했습니다...! 영주를 쫓으려는 건지 다른 실험체를 해방시키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

잠깐.. 지하...?

지하라면!!

“도란님!! 지하실엔 그 아이가 있어요...!”

“젠장!! 하킴!! 당장 지하로 가야 해!!”

재빨리 하킴을 붙들고 소리치자 후방에서 상처를 지혈하던 한 기사가 외쳤다.

“아, 안 돼!! 너무 위험해!! 가는 길에 괴물이 쫙 깔렸다고!! 지금 지하로 가는 건 자살행위야!!”

“네 알 바 아니야. 우린 당장 지하로 가야 한다고...! 하킴!!”

“.....”

하킴은 골똘히 생각에 몰두하더니...

“...약속은 지킨다. 따라와라. 깁슨하고 케일을 비롯한 중하급 기사는 남아서 전선을 구축하고 부상자를 돕도록. 나머지는 나와 함께 지하실을 향해 간다.”

““옛...!””

하킴이 피로 붉게 물든 옷자락을 휘날리며 내성 안쪽으로 향하자 상급 기사 다섯 명이 신속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나는 일행과 시선을 교환하고는 서둘러 그와 보폭을 맞추며 물었다.

“잠깐...! 다른 부하들은 안 데려가도 괜찮은 거야?”

“물론이다. 다들 제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런 전투가 계속된다면 하급 기사는 오히려 방해만 된다.”

“...그럼 앞으로의 계획은.”

“우선 소수정예로 이곳을 돌파한다. 이대로 쭉 나아가면 연무장이 나온다. 그곳의 샛길을 통해 빠르게 지하로 진입할 수 있다. 그때부턴 실험체의 저항도 더욱 거세질 테니 도란 경과 그쪽 여인은 힘을 온존해 두도록.”

하킴이 성큼성큼 전진하며 니아를 턱짓했다.

일자로 뻗은 회랑을 나아가자 감염체들이 달려와 우리를 가로막았으나 하킴을 비롯한 상급 기사들이 앞서나가 길을 터 주었다.

내성 곳곳마다 새빨간 내장과 사체, 구멍 뚫린 갑주 따위가 걸려 있는 광경은 마치 좀비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러한 감상도 잠시, 막 모퉁이를 돈 순간 모두가 자리에 얼어붙었다.

눈앞에 펼쳐진 대형 연회 홀에 어림잡아도 백을 웃도는 감염체가 바글거렸기에.

누군가의 입에서 절망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럴 수가... 괴물이 이렇게나 많다니...”

“아, 아직 지하에 도달한 것도 아닌데... 배, 백부장님, 저희는 대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

“백부장님...?”

“....”

하킴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하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만 한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다수의 희생을 감수하거나...”

그가 힐끗 니아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몰리자 니아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막아선 인물이 있었으니­

­...탁.

“...소년? 왜...”

“여기선 제가 해결할게요.”

“뭐...? 하지만 소년 혼자서 이걸 다 상대하는 건...”

“혼자가 아니니까요.”

“.....”

니아는 의아하게 날 올려다보다가 뭔가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뜨며 멈칫했다.

나는 그녀에게 웃어보이곤 변이체가 득시글거리는 전방으로 나섰다.

확인해 볼 것이 있다.

“....전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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