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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284화 (284/375)

〈 284화 〉 고양이 소녀 #2

* * *

[284] 고양이 소녀 #2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진화한 개미를 보고 난 뒤로부터 줄곧 생각했던 의문.

‘...다른 생물은 어떻게 변했을까?’

기사단을 위협할 때 잠깐 불러들이기는 했으나 찰나에 불과했으니.

나는 서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연회장의 붉은 융단 위에 발을 디디자 감염체들이 일제히 날 돌아보았다.

나는 그들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고했다.

“....전개(??).”

그로서 세계가 뒤집힌다.

­──────────!!!!!!!

뻗어나가는 그림자, 귓가를 메우는 폭류의 소음, 선체에 부딪힌 파도처럼 솟구쳐오르는 검은 음영.

천지가 개벽하며 변화하고, 대지가 검게 물들었다.

난폭한 파동이 요동치며 발치를 적셔나갔고, 아지랑이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칠흑빛 물결이 세상을 잠식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나.

무턱대고 달려들다가 난폭한 기류에 떠밀려 옴짝달싹 못 하는 변이체들.

나는 그들을 방관하며 내뱉었다.

“식사 시간이다.”

­콰르르르르르륵!!!!!!

­우오오오옹!!

­크샤아아아아앗!!!!!

검은 형상이 들끓었다.

일렁이던 칠흑빛 물살에서 그림자로 뒤덮인 피조물이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현실의 도래해 눈앞의 생명체를 먹어치우는 소환수들.

개미가 변이체를 수로 압살하며 강화된 톱니로 촉수를 찢어발겼다. 노래기가 기다란 몸체로 크레인처럼 적을 머리 위에서 낚아채면 덩굴은 지면에서 솟아올라 표적을 꿰뚫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린 연회장, 게걸스럽게 배를 채우는 소환수들을 보며 나는...

‘역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네...’

덩굴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났고, 노래기는 철갑처럼 번뜩거리는 갑피가 생겨나 있었다.

변이체의 날카로운 손톱 공격에도 끄떡없이 연회장을 질주하는 노래기와 사방으로 뻗쳐나갈 때마다 경로의 물체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가시덩굴의 성장은 가히 경이로울 지경.

적어도 어둠이 잠식한 이 영역에서만큼은 녀석들을 끝없이 소환할 수 있다.

나는 앞으로 걸어나갔다. 흑도의 칼날을 낮게 드리우고, 미지의 공포에 잠식된 눈동자를 응시하며.

지금 놈들이 느끼는 감정은 내가 안디라 님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감상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리고 만약 그분이라면 지금 이 순간에 어떻게 했을까.

나는 그때의 기억을 반추했다. 새까만 밤하늘 아래 들려오던 철썩거리는 소음, 선수의 앞돛처럼 흔들리던 몸체, 보는 것만으로도 이성을 앗아갈 것만 같이 거대한 생명체들...

그들이 전투를 벌인다면 어떤 모습일지.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이 모든 이변의 원흉이 나임을 깨닫고 몰려드는 감염체들을 향해.

이내 잔인하게 입꼬리를 비틀며 손가락을 튕기자ㅡ

­콰지지지지지직ㅡ!!!!!!

발밑에서 무수한 가시줄기가 일제히 돋아나 변이체의 척추를 깨부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손으로 덩굴을 조종하자 전방 일대가 모조리 쓸려나갔다.

용솟음치며 회전하는 줄기, 크라켄의 수족처럼 거칠게 날뛰며 지상 위의 존재를 모조리 파괴하는 덩굴 세례.

학살. 파괴. 압도.

신의 권능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무력.

감염체가 합을 맞춰 떼거리로 몰려들었으나 발치에서 덩굴을 내뿜어 머리통을 꿰뚫었다. 미끌거리는 촉수를 뻗어왔지만 손짓 한 번으로 모조리 날려버렸다. 굴하지 않고 놈들이 날렵하게 촉수로 바닥을 비집으며 달려들자 나는 추가로 덩굴을 소환했고, 놈들을 붙잡아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사로잡힌 변이체들이 난폭하게 몸을 비틀며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궤(?).”

입꼬리를 올리며 주먹을 움켜쥐자 넝쿨이 일순간에 옥죄어들었다.

터져나가는 몸뚱어리, 비산하는 살점, 머리 위로부터 주르륵 흘러내리는 시뻘건 내장을 뒤집어써 시야가 차단되자 변이체들이 이때다 싶어 내게 달려들었다.

그저 가소로울 따름.

“파(?).”

손바닥을 펼치자 터져나간 가시가 산탄처럼 좌중을 덮쳤다.

상어가 휩쓸고 간 치어 때처럼 쑥대밭이 된 참상에 변이체들이 내게 맞서는 건 역부족임을 깨닫고 주변 개미들로 표적을 돌렸지만...

­크아아아악!!!

녀석들 또한 평범한 생물이 아닌 바, 촉수에 붙들리자 되려 환희하는 개미들에게 둘러싸여 오징어 다리처럼 요리조리 뜯겨나가는 변이체를 보고 있자니 내가 다 불쌍할 지경이다.

‘...이거 누가 나쁜 놈인지 모르겠네.’

따지고 보면 이들도 실험에 억울하게 희생당한 피해자지만, 한 번 감염된 이상 베라스틴의 안녕을 위해서 제거할 수밖에 없다. 그저 빠르게 숨통을 끊어주는 것만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일 뿐.

한데...

‘...실?’

소환수를 조종하며 변이체를 제거해나가던 중 소란스럽게 날뛰는 개미들 너머로 어렴풋하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장식으로 가득한 연회장 벽면에 덧칠된 하얀 실낱.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건가...?

하지만 기현상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휙!

“....?”

옆에 있던 감염체가 사라졌다.

옆뿐만 아니라 뒤도, 앞도.

내게 달려들던 변이체들이 한둘씩 흔적도 남기지 않고 증발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중 마침 감염체의 머리통을 케이크처럼 맛있게 먹으려던 사슴뿔 개미가 눈에 들어왔지만­

“어, 어어...?”

녀석도 순식간에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혹시나 싶어 위를 올려다보자...

“....너 언제 거기까지 올라갔냐.”

­크샤아아앗...!!

대형 샹들리에가 매달린 천장에서 바둥거리는 녀석이 보였다.

...내 소환수 중에 저런 능력을 지닌 놈이 있었던가?

문뜩 의문이 뇌리를 스쳤으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여 흘려넘기고는 눈앞의 변이체를 처리하는데 몰두했다.

*

감염자들로 득시글거렸던 홀이 잠잠해지는 데까지는 채 십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전투가 얼추 마무리되자 나는 마지막 잔당을 앞두고 흑도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과연 신에게 직접 하사받은 물건답게 수도 없이 살덩어리를 베고 뼈를 분쇄했음에도 전혀 날이 무뎌지지 않은 자태를 보니 전율이 일 지경이다.

게다가 지하 광장에서 이교도를 도륙할 때 단도의 날 길이가 성장했던 것처럼 역시 도신의 면적이 가용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에 영향을 미치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만큼이나 소환수를 불러냈는데도 전혀 무리가 없으니.

어쩌면 조만간 새로운 생물을 불러낼 수 있을지도...?

나는 흑도를 어둠 속으로 되돌리고는 저들끼리 연회를 벌이며 간만의 포식을 만끽하는 개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럼 나머지는 알아서 적당히 처리하고 와. 난 먼저 가고 있을 테니까.”

­크샤아아앗!!!

­키키킥!!

­캬캭!! 캬캬캬캭!!

좌우로 까딱까딱 더듬이를 흔들어 배웅해주는 개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연회장 입구로 향하자 우두커니 서 있는 하킴과 라디 일행이 눈에 들어왔다.

한데...

‘...다들 표정이 왜 저래?’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고 다가가자 한 상급 기사가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날 삿대질했다.

“괴, 괴물...”

“.....”

아니... 그래도 사람보고 대뜸 괴물이라니...

나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상급 기사쯤 됐으면 산전수전 다 겪어봤을 거 아냐. 강한 마물이나 하이랭커도 자주 만나봤을 테고. 뭘 이 정도로 그래.”

“....”

“아니야?”

­도리도리!!

“...그럼 그만큼 내 능력이 놀랄 일이야?”

­끄덕끄덕!!

“.....”

뭐... 라디와 아리엘의 언질도 있었고 무려 2위계 신의 권능이니 당연히 유별날 거라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하늘에서 불벼락을 떨어뜨리거나 지형을 뒤바꾸는 마법사도 있고, 정령으로도 모자라 뿔 달린 말이나 드래곤도 실존하는 세계이니 이 정도는 그냥 조금 독특한 정도로 치부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실제로 나 말고도 소환수를 부리는 계통의 마법도 존재하지 않던가?

점점 지성이 올라가는지, 변이체의 머리통을 칵테일 꼬치처럼 집게에 꽂고 노래기 위에 올라타 질펀하게 파티를 벌이는 사슴뿔 개미와 동료들을 보자 조금 과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응, 내가 생각해도 방금 발언은 좀 아닌 것 같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하킴이 다가와 내 어깨를 붙들었다.

“도, 도란 경...! 저 생물은 다 뭔가...! 어떻게 이런 능력이 존재할 수 있는 거지! 설마 신의 권능인가...?”

“너답지 않게 왜 그래 하킴. 말까지 더듬고. 너도 아까 구 막사에서 봤잖아.”

“...그땐 몹시 어두웠다는 걸 간과했군 도란 경. 저렇게 끔찍한 마물이었을 줄이야.. 더군다나 전투를 벌이는 모습을 실제로 목격하니 참으로... 대체 그동안 왜 이런 능력을 가지고도 무명으로 있었던 건가? 혹시 세금 감면을 위해 모험가 등급을 위장할 심산이었다면...”

“번거롭게 왜 그런 짓을 하겠냐. 랭크가 올라가서 얻는 이득이 훨씬 더 큰데. 이게 다 너희 영주 때문이잖아. 그 사람이 빨리 이교도 사건을 공표해야 나도 공로를 인정받아 승급하든 말든 할 텐데 뒤에서 이따위 일이나 벌이고 있었으니.”

“...그건 내가 대신 사과하지. 미연에 막지 못한 내 불찰이 크다. 볼 낯이 없군.”

“그래, 최대한 열심히 미안해 해. 그래야 빛을 팍팍 씌워둬서 나중에 콩고물이라도 좀 얻어먹지.”

백부장이면 상당히 높은 지위일 터, 이번 일로 기사단이 대거 물갈이되면 현 공석인 기사단장 위치까지도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부하들로부터 제법 신임도 얻는 모양이고, 다른 기사들보단 제법 똑바른 사상이 박힌 녀석이니.

나는 하킴의 어깨를 두드리고 라디 일행에게 향했다.

그런데 여기도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아니, 너희는 왜 반응이 그래? 이미 전에 봤잖...”

...아닌가.

지금처럼 능력을 풀로 전개했던 지하 광장에서는 라디와 아리엘이 사로잡힌 상태였고, 고블린 부락에서도 단도의 제약 탓에 그때만큼의 힘은 발휘하지 못했으니까.

즉 내 소환수를 목격한 적은 있어도 이번처럼 대규모로 학살하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란 소리다.

라디가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아리엘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방금 저 개미 보셨어요? 저 강하던 감염체를 그냥 장난감 다루듯...”

“그러게... 심지어 쟤네 죽어도 다시 부활하잖아... 게다가 다른 소환수들도 더 강해졌어.”

“....있잖아, 조금 진지하게 묻는 건데 소년은 사실 정말로 마족 아냐...?”

“으음... 그, 그럴 리가요...”

“하지만 아무리 봐도...”

속닥속닥, 소곤소곤.

“.....”

나는 겸연쩍게 목청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빨리 가자. 시간이 없어. 꾸물거리다간 늦을지도 몰라.”

도중에 불가피하게 시간이 소요됐으니 더욱 서둘러야 한다.

나는 검은 로브를 휘날리며 연회장 안쪽으로 향했다.

왕을 모시듯 양옆으로 갈라서며 길을 터 주는 개미들을 지나치자 기사들과 라디 일행도 쭈뼛거리며 뒤따라왔다.

하킴이 보폭을 맞추어 걷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도란 경은 정말... 두려운 존재로군. 반목하지 않는 게 이렇게 안심되는 사람은 처음이다.”

“뭐, 그쪽에서 먼저 이상한 수작이라도 부리는 게 아니면 서로 얼굴 붉힐 일은 없지. 우리도 덕분에 쉽게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어서 좋고. ...지하까지는 얼마나 걸려?”

“도란 경의 활약으로 상당히 시간이 단축될 예정이다. 이제 이 복도만 지나면 대형 연무장이 나온다. 실험체를 수용해두는 지하 격리실에서 바로 이어진 곳이니 변이체가 다수 모여있을 것이라 예상하지만, 그곳만 넘어서면 당장 지하로 진입할 수 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

“...아까는 질문을 삼갔지만 도란 경은 지하실에 수감된 인물 중에 구출해야 할 지인이 있는 건가?”

“.....”

뭐, 괜찮겠지.

“맞아. 영주성에 들어온 것도 그것 때문이야.”

“지킬 것이 있는 자는 강한 법이다. 꼭 바라던 바를 이루길 바란다.”

“...고마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길을 나아갔다.

발길을 재촉해 빠른 보폭으로 복도를 거닐자 피에 젖은 대리석 바닥에 파문이 일었다. 이따금씩 내성을 배회하던 변이체가 달려들었으나, 모두 개미들의 한 끼 식사가 되어 사라질 뿐.

따로 위장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잡아먹힌 건 어디로 가는 걸까 둥 쓸데없는 생각을 속으로 뇌까리며 나아가다 보니 건물 안에서도 천장이 탁 트인 장소가 나왔다.

하킴이 전방을 눈짓하며 말했다.

“이제 이 앞에 있는 격벽만 지나면 내성 연무장이 나온다. 영주성에 귀인이 방문했을 때 기사단원이 훈련하는 모습을 관람할 수 있게 개방된 곳이지. 거센 저항이 예상되니 주의하도록.”

“그래, 내가 앞장설 테니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지원해줘.”

나는 흑도를 소환해 오른손에 움켜쥐었다.

베라스틴의 상징이 조각된 중후한 문 앞에 서서 시선을 교환하고 서서히 팔에 힘을 주자 뿌연 먼지가 일며 문이 밀리기 시작했다.

묵직한 돌쩌귀의 소음이 들려오고, 어슴푸레한 그믐달의 광채가 커다란 원형 공간을 비추자 그곳엔 하킴의 말대로 수많은 변이체가 있었다.

모두 숨통이 끊긴 채.

하나같이 급소에 커다란 자상을 입은 채로 쓰레기 처리장의 폐기물처럼 쌓인 시체의 산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자아냈다.

비강을 들쑤시는 피비린내와 시체 썩은 내에 코를 틀어막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연무장 안으로 발을 들이자...

“이백아흔하나.”

연무장 중심, 드높은 시체의 탑 정상에서

“이백아흔둘, 이백아흔셋, 이백아흔넷.”

상처 하나 없이 피투성이인 한 사내가­

“..이백아흔여덟. 이백아흔아홉...

....삼백(三?).”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름끼치게 웃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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