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5화 〉 고양이 소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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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 고양이 소녀 #3
드넓은 원형 공간, 공허한 관중석, 야트막한 호수처럼 잔잔하게 발치를 적시는 핏물.
높다란 시쳇더미 위에 걸터앉은 기사.
고급스러운 양각 문양에 핏물이 스며든 갑주는 오묘한 적색과 은빛으로 빛났고, 공작새의 꽁지깃털로 치장된 투구 사이로 비치는 눈동자엔 잔인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면갑 아래로 드러난 입가엔 냉해처럼 차가운 미소가 맺혀 있었으며, 귀족 특유의 방탕함과 기사의 엄격함이 공존했다.
그가 뱉은 말.
삼백.
그저 흔한 숫자 중 하나일 뿐.
하지만 그 말을 듣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와 하킴 일행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하나씩 올라가는 셈과 즐비한 송장이 맞물리자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냈기에.
우리의 인원수는 정확히 열, 그가 더한 숫자도 열.
그 말은 즉...
“너희가 이곳에 방문한 지 딱 300번째 되는 인간이다.”
또한, 이곳에서 300번째로 잠들 인간이다.
그런 함의가 압축된 선포에 오싹함을 느끼며 옆을 돌아보자 바짝 얼어붙은 하킴이 보였다.
그의 입술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부 기사단장... 위베르 경...”
‘부 기사단장...?’
기사단의 부단장이면 지금은 아군일 텐데...
의아하게 앞으로 발을 내디디려는 차, 하킴이 우악스러운 손으로 날 잡아끌었다.
“위험하다!! 다가가지 마라!!”
“...왜, 부 기사단장이면..”
“저자는 기사단장 키론 경이 서거한 직후 지금까지 종적을 감추었다!! 무슨 낯짝으로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다니...! 일설에서는 저자가 이번 촉수 소동의 발단이라는 말도 있다!”
“그런...!”
“경솔하군 하킴. 언제부터 백부장 따위가 내게 그따위 무례를 지껄일 수 있었지?”
“...시, 시정하겠습니다.”
“뭐, 괜찮다. 어차피 이곳엔 아무도 없던 것이니.”
“그건 무슨...”
“이곳에 나와 너희 모두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스릉... 그가 어깨에 비스듬히 걸쳤던 클레이모어를 우리에게 향했다.
반사적으로 검을 중단으로 내밀고 돌발 상황에 대비하던 차, 뒤에서 흠칫 놀라는 기척이 전해져왔다.
라디가 연무장 입구에 쌓인 시체탑 중 하나에서 삐져나온 팔을 잡아당기자 목 없는 기사의 주검이 딸려나왔다.
촉수의 흔적 없이 멀쩡한 시체가.
“조심해요!! 저 사람...! 이곳에 발을 들인 사람을 모조리 다 죽일 심산이에요!!”
“어, 어째서.... 윽?!!”
찰나, 남자의 형상이 사라져 있었다.
솜털이 곤두서는 한기에 반사적으로 바닥을 구르자ㅡ
슈확─!!
“호오...?”
직전까지 내 목덜미가 있던 공간을 날카로운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하킴이 곧바로 아밍 소드를 내찌르며 그에게 육박했으나.
카드득!!!
“...느리군. 이래서 인재를 육성할 수 있겠어?”
“크윽...!”
남자는 가뿐하게 그의 일격을 틀어막고는 역으로 응수했다.
짧은 순간, 범람하는 홍수처럼 몰아치는 검격에 하킴이 급급하게 틀어막으며 물러서자 나는 자세를 바로잡고 그에게 가세했다.
보법으로 순식간에 사내의 배후를 점하고 심장이 펄떡대는 위치에 검날을 찔러넣으려 했지만
“크윽?!!”
부단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칼집으로 내 발등을 찍어눌렀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하킴을 멀리 걷어차더니 그대로 회전해 내 정강이를 가격해 바닥에 짓눌렀다.
“크아악!!”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적수를 상대해본 적이 없는 모양이지?”
콰직! 사내가 내 손목을 즈려밟았다. 뿌직거리며 살점이 짓뭉개지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개미들이 날 구하고자 서둘러 달려들었지만, 남자가 마력을 방사하자 방사선에 피폭당한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
그가 내 멱살을 붙들고 끌어올려 순식간에 흉부를 꿰뚫으려던 순간ㅡ
카득!!
“.....”
눈부신 빛의 보호막이 검 끝을 막아세웠다.
부단장은 칼날에 들러붙은 황금빛 박막과 주변을 맴도는 은은한 광휘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같잖군. 귀찮은 게 꼭 파리 같아.”
파창창!!!
그가 손등을 휘두르자 보호막이 깨져나갔다.
직후, 놈이 날 내동댕이치고 질주한 방향에는...
“뭣...?! 아, 안 돼 아리엘!!!”
“....!!”
무방비하게 노출된 아리엘이 있었다.
부단장이 보란 듯이 웃으며 그녀의 새하얀 살결을 도륙하려던 순간ㅡ
“물러나세요!!”
측면에서 잿빛 형체가 튀어나와 가로막았다.
라디가 로브를 휘날리며 바닥에 독병을 깨트리자 시꺼먼 연막이 피어올라 시야를 차단했다.
이에 부단장이 멈춰선 사이를 노려 하킴이 빛의 속도로 달려들었으나, 짧은 순간 연막 사이로 내가 목격한 건
‘미소...?’
설마...!
“안 돼 하킴!!!”
덥석!!
부단장이 장갑을 낀 손으로 하킴의 칼날을 붙잡았다.
그는 핏빛 망토를 휘둘러 연무를 손쉽게 날려버리더니 그대로 하킴의 심장을
콰득!!!
...뚫지 못했다.
부단장은 발치에서 돋아나 그의 칼날을 튕겨낸 덩굴을 언짢은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이내 즉각 암기를 빼내드는 하킴을 성가시다는 듯 혀를 차며 내던졌다.
나는 내 옆으로 날아와 나란히 시체에 파묻힌 하킴을 보며 외쳤다.
“여엄병!! 대체 어떻게 저런 새끼가 부단장인 거야?!! 완전 또라이잖아!!!”
“지금까지는 기사단장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행실에 문제가 있다고는 하나 그분 앞에선 얌전했다!! 실력만큼은 진짜배기인 자다!!”
“대체 얼마나 강한 건데?!!”
“도란 경 같은 모험가로 따지면 A랭크에 필적한다!!!”
기사단장 당신은 대체 어떤 싸움을...
“씨발!!!”
정상인이라고는 전무한 기사단에 라디의 심정을 백번 천번 이해하고 있자니 부단장이 커다란 클레이모어를 어깨에 짊어지며 중얼거렸다.
“도란...? 도란이라... 과연 싹수는 있는 꼬맹이로군. 과연 대장이 관심을 가질 만도 해.”
“대장...? 기사단장한테서 그런 소리를 들었다고...? 그럴 리가! 그 사람은 진작에 지하에서...!”
“보아하니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 그가 아니다.”
“뭐...? 기사단장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
돌연 부단장이 광인처럼 배를 짚고 웃어젖혔다.
갑작스러운 기행에 모두가 얼어붙자 그는 천천히 웃음기를 거두더니 왼팔 갑주의 이음매를 풀었다.
철컹! 묵직한 건틀릿이 피웅덩이 위로 떨어져 파문을 자아내고, 달빛이 그의 팔에 내려앉자 내 시야에 들어온 건...
“문신...?”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생동감 넘치는 심장과 톱날 단검 문신이었다.
욱신거리며 눈가를 찌르는 기시감에 미간을 찌푸리자
“소년, 물러서.”
“니아 님...?”
“네가 대적할 수 없는 상대야.”
내 곁으로 다가온 니아가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무심결에 사내에게서 눈을 떼고 그녀를 돌아보자
─오싹.
니아는 생전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순간 오금이 저려 나는 저도 모르게 한발 뒤로 물러났다.
....내가?
내가 니아에게 겁을 먹었다는 것과, 과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녀에게 놀라고 있자니 어렴풋한 아리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톱날 단검... 무신 가문으로 유명한 아니스 공작의 상징이야... 하지만 저 심장 문양은 처음 보는 건데...”
“아니스...?”
잠깐, 아니스 가문이라면 분명...!
“던전에서 만났던 도적단 수장이야!!! 그놈하고 관련이 있는 게 분명해!!”
틀림없다. 말톤에게 화상을 입혔던 원흉이자 라디를 절벽에서 떨어져 죽게 만들 뻔했던, 붉은 매 길드가 쫓고 있다는 바로 그 남자.
그자도 허리춤에 톱날 단검을 차고 있었으니.
니아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맞아. 그 사람이 이끄는 범죄 집단 수뇌부에 고위 기사가 있다는 첩보가 있었는데 설마 이런 곳에서 맞닥뜨릴 줄이야...”
그렇다는 건...
“이번 촉수 소동에도 그가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
니아의 시선을 따라 남자를 쳐다보자 그가 비릿하게 미소지었다.
“글쎄다... 나는 잘 모르겠군. 일단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만 말해둘까.”
“...네가 이곳에서 길을 막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나?”
“무의미한 질문이군. 어차피 너희는 모두 이곳에서 죽을 테니. ...정 궁금하면 알려줄 수는 있지만 대신 그쪽도 대가를 치러야겠어. 들어보겠나?
남자가 검날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경계심을 거두지 않고 그가 하는 말을 경청하자...
“뭐... 딱히 어려운 건 아냐. 단지 네가 동료를 버리고 우리에게 합류하면...”
“혀가 길구나.
──────────!!!!!!!!!!
...애송아.”
대지가 폭발했다.
막대한 폭음이 세상의 소리를 지웠다. 굉대한 충격이 두개골을 강타했다. 바닥에 고였던 핏물이 역류하고,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하강하자 피안개 섞인 그믐달의 붉은 광채가 연무장에 드리웠다.
반사적으로 들어올렸던 팔을 내리니 함몰된 지반을 딛고 오연하게 선 니아의 등이 보였다.
희미한 목소리가 귓가에 와닿았다.
“...가 소년.”
“네...?”
“여긴 내게 맡기고 먼저 가.”
“자, 잠깐?! 그게 무슨 소리에요!! 어떻게 니아 님을 두고...!”
“소년.”
그녀가 말을 끊었다.
이윽고 천천히 날 돌아보는 니아의 입가에는 사랑하는 연인처럼 다정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내 말 들어 소년. 소년은 그 아이를 구한다고 했지? 이대로 미적거리다간 제시간에 맞추지 못할 거야. 그러니 소년은 소년이 해야 할 일을 우선해.”
“하지만 그럼 니아 님은...! 위험하잖아요!! 상대는 니아 님과 동격인 적수라고요!! 그런데 혼자서 맨몸으로...!!”
“괜찮으니까 내 말 들어. 그 아이를 못 구했다간 어차피 본말전도잖아.”
“그런...”
갈등했다.
가혹한 현실에 번민하고, 그녀를 두고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며.
주먹이 새하얘질 정도로 고민한 뒤로는 차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맞서 싸우기 위해 칼자루를 거칠게 움켜쥔 순간ㅡ
“도란.”
“.....”
“도란...”
“....”
“...도란은 내 각오를 허사로 만들 셈이야?”
“.....”
제길.
검 끝을 내리자 니아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도란. 내 억지를 들어줘서. 난 도란의 그런 점이 정말...”
“...약속해요.”
“응?”
“무사히 살아남겠다고 약속해요. 아직 니아 님이랑 하고 싶은 게 많단 말이에요...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약속도 못 지켰고, 카라멜 팝콘을 맛보여주겠다던 약속도 아직 못 지켰는데...”
“.....”
니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그녀의 결심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는 바, 재빨리 라디와 아리엘, 하킴 일행을 데리고 연무장 안쪽 쪽문으로 향하려던 차
“아 도란, 그리고 꼭 해두고 싶은 말이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니아가 손짓했다.
달빛을 거슬러 다가가자 그녀는 조용히 내 옷깃을 붙잡고 잡아당기더니ㅡ
쪽.
“...사랑해.”
배꽃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내 등을 떠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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