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286화 (286/375)

〈 286화 〉 고양이 소녀 #4

* * *

[286] 고양이 소녀 #4

니아는 어둠 너머로 사라지는 도란의 등을 시선으로 쫓으며 어렴풋이 미소지었다.

마지막에 그가 보여준 모습을 떠올리며.

‘엄청 귀여웠지...’

평소의 여유로운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얼굴을 붉히고 어버버 당황하는 모습은 그림으로 남겨두고 싶었을 정도다.

한 방 먹은 듯한 그의 표정만 떠올려도 족히 일주일은 단잠을 잘 수 있을 지경.

반면, 나 자신도 쿵쾅거리는 심장을 감추느라 부단히 애썼지만.

니아는 꿈을 꾸는 듯 고개를 들었다. 은하수가 빠져든 것처럼 일렁일렁 반짝이는 눈망울로 그믐달을 올려다봤다. 아직도 그의 온기가 잔존한 입술을 어루만지며.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니아 아르제. 칼른베니아 제국 아르헨 지방 출생.

아르제 문파 출신.

도란 일행에게는 귀족이라 소개했지만, 정작 니아는 귀족 태생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귀족이라는 건 사실이다.

니아는 아르제 가문·문파에 입양된 수많은 상속 후보 중 하나니까.

이를 이해하려면 제국의 기형적인 문화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자고로 부불삼대(?不三?) 권불십년(?不??)이라 했던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제국에서 가문이 쇠락하고 새로 등장하는 건, 하늘의 샛별이 지고 다시 떠오르는 것만큼이나 흔한 일이다.

신흥 가문은 부상을 염원하고, 몰락 가문은 부흥을 꿈꾼다. 또한 무를 숭상하는 제국의 풍토상 가문의 격을 올리기 위해선 가내에서 걸출한 무인을 배출해내는 것이 절실하다.

이에 본디 혈육으로 이어져야 할 가문은 점차 문파라고 불리우는 집단으로 변질했고, 문하생이라는 명목하에 재능 있는 어린 소년 소녀를 가문의 일원으로 입양하는 사회 현상을 유발했다.

니아는 그러한 아이 중 하나였다.

몰락한 가문을 다시 부흥시키기 위한 수단이자 도구.

날마다 벌어지는 대전에서 높은 순위를 달성하면 여러 혜택이 주어졌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밥을 굶고, 쉬지 못하고, 훈육이라는 이름의 체벌을 당했다.

화장실조차 제대로 가지 못하고, 차가운 우물가에서 같은 처지의 아이 수십 명과 바가지 하나를 돌려쓰며 씻은 뒤로는, 프레임밖에 남지 않은 침상에서 부러진 뼈를 맞추고, 그걸 다시 또 반복하는 그런 삶.

하루에 두 번 묽은 죽을 배급받거나 간간이 콩이 들어간 수프, 또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이 잠에 드는 취침 시간만이 인생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런 불우한 환경을 바꿔나가기 시작한 건 니아였다.

그녀에겐 몹시 큰 결단이었지만, 수프에 들어간 콩을 미끼로 숙소에 들끓던 쥐를 사냥해 아래 계급끼리 나눠 먹기도 하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기도 하며, 천성의 밝음으로 암울한 숙사에 웃음을 전파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니아는 스스로 무투술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고양잇과 수인 특유의 유연성과 표범의 탄력, 맹수 수인족의 전유물과도 같은 호전성을 살려 저돌적으로 달려들면 가끔 손위의 언니나 오빠를 이기는 경우가 나왔다.

그렇게 성적이 쌓이고 쌓여 한 단계 높은 계급에 앉아서 본 광경은 대단했다.

국에는 조금이나마 살점 붙은 뼈다귀가 섞여나왔고, 조그마한 종지엔 간장이나 말라비틀어진 짠지, 배추를 식초에 절인 시큼한 반찬 따위가 딸려나왔다.

그때 처음 맛본 생밤은 어찌나 달콤하던지...

흙먼지 폴폴 날리는 공터가 아니라 제대로 바닥이 갖춰진 수련장과 팔다리가 달린 허수아비, 지푸라기 깔린 침대 등은 정말로 별세계였다.

하지만 처우가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니아는 마음이 허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에 니아는 규정을 어기고 국에 나온 고기를 몰래 아껴두었다가 이전 숙소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곳에는 새로운 얼굴이 있을 뿐, 함께 고락을 나누었던 친구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에 의문을 느낀 니아는 모두가 잠든 틈을 타 몰래 금서고에 잠입했다. 거기에 답이 있을 거라 확신하고.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진실은 니아가 전혀 알고 싶지 않던 것이었다.

??년 子월 ??일 ??시.

男 : 26(??) / ? : 18(??)

? : 44(??)

???.

??년 ?월 ??일 子?시.

男 : 34(?) / ? : 16(??)

? : 50(??)

???.

??년 ?월 ??일 ??시.

男 : 33() / ? : 24(??)

? : 57(???)

???.

처음에는 이 수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으나­

‘경인(??)년 11(子)월 무진(??)일 새벽 1시에서 3시 사이(??)... 남자 26명에 여자 18명... ???...?’

???라... 이 단어가 뭐였더라...?

‘그러니까 분명... 살.. 살...’

살처분(???).

“서, 설마...!!”

니아는 빠르게 책장을 넘겨나갔다.

그리고 피로 덧칠된 기록을 눈에 담았다.

“비, 비고... 시신 처리 기록... 악산에 매장 중 여아가 흙을 파헤치고.. 빠, 빠져나와 삽 모서리로 두개골을 강타. 즉사(死)..”

“주, 줄톱으로 잘게 썰어 호해(??)에 수장. 집단 소각... 햇볕에 건조 후... 윽...! 살점 분리... 무당에게 주, 주술 용품으로 매각... 유기(??)..”

“시체 소분(小?) 후 가, 가축용 사료로 이용...?! 뭐, 뭐... 가축.. 사.. 사....”

설마 아까 먹었던 고기에도...

“우에엑!!! 우읍...! 꺼허어억!!”

틀어막은 입 사이로 토악질이 치밀었다.

니아는 맹렬하게 속을 게워내고는 떨리는 손으로 마저 책장을 넘겼다.

묻으면 들킬세라 토사물에 더럽혀진 손바닥을 옷에 문질러 닦고.

그렇게 마지막 장까지 피의 서사를 낱낱이 눈에 담은 뒤로는.

­텁.

책장을 덮었다.

호기심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며.

“으윽... 큭..”

니아는 주저앉아 오열했다. 가슴을 부여잡고 목청을 놓아 울었다. 소중한 친구들을 잃었다는 것. 잠시나마 그들을 잊었다는 죄책감. 조금만 더 빨리 찾아왔으면 어땠을까 후회. 회환. 이 비루한 삶. 이 빌어먹을...

공포(??).

나도 언젠가 이렇게 되는 건 아닐까. 버려지는 건 아닐까. 처참하게 폐기되어 들개의 먹이로 전락하는 건 아닐지. 이런 가혹한 진실 따위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해...?

니아는 절망했다. 좌절했다. 울음과 토사물에 범벅이 된 채 한참을 오읍한 뒤로는 창가로 드리운 여명에 비틀거리며 벽을 짚고 일어나 책을 서고에 돌려놓았다.

그 뒤로는 순진무구한 모습을 연기해왔다.

상처투성이 외피에 싸구려 가식을 입히고, 도금을 씌우고.

본심을 감추고, 감정을 죽이고, 껍질을 만들고.

스스로를 속이고.

웃고, 웃고, 또 웃고.

멍청한 척. 바보 같은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할 수 있어 니아. 넌 지금까지 잘해 왔으니까.

그 뒤로도 꾸준하게.

꾸준하게.

문파 내부에서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간 뒤로도.

무투대회에서 우승해 아수르 님께 축복을 받은 뒤로도.

모두의 선망을 받으며 아르제 가문의 이름을 널리 알린 뒤로도.

현 가주의 인정을 받아 문파를 이어받을 차기 가주로 지목된 뒤로도.

고독 속에서 수십 년을 방황했다.

유령처럼 귀신처럼.

그 뒤로는 출세에만 혈안이 된 분위기에 싫증이 나 문파를 뛰쳐나왔다.

비록 가문의 족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지만, 니아는 달콤한 자유를 느꼈다.

푸른 하늘을 만끽하고, 들판에 누워 하릴없이 지평선을 바라보고, 번개가 내리치는 날 초원에 나가 흠뻑 젖기도 하고, 동문으로부터 독살을 걱정할 염려가 없는 식사를 누리기도 하고.

언젠가 발길이 닿은 에르티넬라 영지에서 영지민들에게 꽃을 나눠주는 귀엽고 작은 은발 소녀를 먼발치에서 보기도 하고.

떠돌이처럼 방방곡곡을 떠돌다 베라스틴의 외딴 장소에서 기연을 만나 수련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실리아를 상면했다.

입단 제의를 받아 처음으로 문파가 아닌 집단에 소속되어 활동해 보고, 같은 목표를 위해 협력하는 동료가 생겼다.

하지만 과거의 멍에는 끈덕지게 남아서 니아를 괴롭혔다.

저도 모르게 감정의 벽을 만들고, 웃는 얼굴 안쪽으로는 타인의 선의를 의심하고.

스스로를 극한에 몰아세우다가 지쳐 잠이 들고 난 뒤로는 모두에게 날 선 경계심을 세우고, 잘 어우러지지 못하고.

붉은 매 길드원들은 그런 니아를 다정하게 대해주었지만, 아델을 제외하면, 아니 그녀를 포함해도 완전히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만큼 가슴 속 깊이 자리 잡은 니아의 트라우마는 지독한 것이었으니.

그리고.

그리고...

한 소년을 만났다.

*

“별일이군 니아 아르제. 우리 측 첩보원에 따르면 네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 했는데.”

“.....”

“평소엔 착한 모습을 가장하지만 실로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이고, 밝은 겉모습과는 달리 속으로는 타인을 혐오하고 신뢰하지 못한다고 보고서에 쓰여 있더군. 끔찍한 위선자라고 하던가.”

“....”

“그런 네가 희생을 자처하다니. 놀라울 따름이로군. 그렇게나 저 청년이 소중했나?”

“....”

그래, 소중하다.

타인의 악의에 극도로 민감한 내게도 일말의 사심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사람.

재물이나 육욕을 목적으로 접근한 이들, 혹은 저도 모르게 그런 눈길로 쳐다보는 남성들과는 달리 바보처럼 마냥 순수한 사람.

내 어리광에 어울려주고, 같이 웃어주며 안타까워해 주고,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자연스럽게 배려가 녹아들어 있는 사람.

소중한 이를 위해 절벽에서 몸을 던질 줄도 알고, 또 그런 이타심이 너무나 눈부셔 동경하게 되는 사람.

내게는 없는, 내가 모자란 점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

그래, 나는 애정이 고팠던 걸지도 모른다.

니아는 꿈결같이 흘러갔던 그이와의 지난 나날을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나름의 노력과 은근한 유혹에도 단 한 번 일선을 넘지 않았던 그이를 떠올리며 그믐달을 올려다봤다.

나도 참...

희경(??)하고 화락(?)하고 가가(??)하구나.

야차(??)가 사랑에 빠졌으니 어째 우습지 않을쏘냐.

내 받은 덕이 막심하니 각골난망(???忘)하고.

그이의 적을 신멸(??)하여 반보(反?)하리라.

니아는 얼굴에 덮었던 가면을 벗었다.

또한, 마음을 싸맸던 가식의 가면도 벗었다.

이곳에서 나는 혼자.

전장에서 살고 죽는 악귀가 도래했으니.

그녀를 둘러싼 공기가 돌변했다. 응축된 마력이 피안개를 불태운다. 녹아내린 수증기가 발치로 모여들어 황금빛 웅덩이를 이뤘고, 서서히 퍼져나가 오싹한 금빛 물결을 드리웠다.

곧이어 전신에서 찬란한 황색 오라를 내뿜자, 사내의 검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송골송골 배어 나온 식은땀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니아가 천천히 발을 내딛자 사내는 그녀의 등 뒤로 거대한 표범의 화신이 아른거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니아가 입을 열었다.

“...나처럼 지랄맞은 썅년은 처음이지?”

감히 나와 소년의 두근두근 영주성 데이트를 방해해...?

넌 진짜 뒤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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