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288화 (288/375)

〈 288화 〉 고양이 소녀 #6

* * *

[288] 고양이 소녀 #6

라디와 아리엘과도 헤어진 뒤 발길을 옮기다 보니 복도가 끊기는 지점이 나왔다.

나는 잠시 심호흡하고는 마지막 공간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목도한 건...

“끔찍하군...”

실험실.

사실 실험실이라고 하면 흔히들 떠올리는 이미지보단 고문을 행하는 장소에 가깝다.

다만 감옥에 포함되었던 시설 중 일부를 확장한 건지 넓고, 길다.

음산한 분위기가 맴도는 건물동 곳곳에는 구속구 달린 침상이 널려있었으며, 줄톱과 붉은 용액이 담긴 플라스크, 피 묻은 천 따위가 산재했다.

통로 구석의 수레에는 기형적으로 변한 채 죽어있는 희생자들의 주검과 살덩어리가 담겨있다.

인간의 탐구심이 삐뚤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한 광경.

한데 응급실처럼 좌우로 병상이 깔린 복도를 나아가다 보니 예사롭지 않은 흔적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건... 날카로운 날붙이에 당한 상처...? 환부가 나란히 네 쌍으로 벌어진 걸 보니 기사의 제식 무기는 아닌데...’

굳이 따지자면 클로나 마물의 손톱에 당한 듯한.

그뿐만이 아니다.

“잠깐... 이 팬 자국은 꼭 덩굴에 당한 흔적 같잖아...! 어째서 이런 게 여기에... 게다가 이 변이체들은 왜 죽은 거지...? 숨을 거둔 지 얼마 안 됐어...”

심상치 않다.

재빨리 흑도를 소환해 움켜쥐고 전진했다. 전방에서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소음에 온 정신을 기울이며.

그렇게 조금 더 나아가자 실험실 내부에서도 광활한 공간이 나왔다.

“여기가 바로...”

최심부(???).

선박의 기관실처럼 스팀펑크틱한 장소. 중추 시설이라는 걸 단박에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공을 들인 홀에는 고철 증류기와 추출기 등 갖가지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고, 이들로부터 쉴 새 없이 웅웅거리는 소음이 들려왔다.

꼭 중세가 아니라 산업 혁명의 시작점에 와 있는 것만 같은 광경.

그중에서도 단연 이목을 끄는 건 홀 중심의 대형 수조였는데, 수조 내부에는 고블린 부락에서 보았던 것과 동일한 보석이 투명한 용액에 담긴 채 붉은 광휘를 내뿜고 있었다.

‘감염체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성분을 추출하는 건가...?’

홀린 듯이 중심지에 다가가려는 순간­

­스윽...

나는 누군가 수조 앞에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

한 형체가 움직였다.

수조로부터 뿜어나오는 불그스름한 역광을 뒤집어쓴 탓에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털이 많고 덩치가 커다란 사내.

나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야 그자의 정체를 눈치챘다.

“넌... 그때의 늑대 수인...?”

돌킨의 노예 거래소에서 내게 대들었다가 격리소에 수감된 인원이 아니던가.

분명 니아의 고향인 칼른베니아 제국에서 공수해 온 노예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나는 무심코 다가가다가 문뜩 그의 등에서 꿈틀거리는 촉수를 보고 멈칫했다.

하지만 늑대 수인은 잠깐 내게 눈길을 주었을 뿐, 다시 홀린 듯이 보석을 쳐다보는 데 열중했다.

기습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그에게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름답지 않나?”

“뭐...?”

“이 광채 말이다. 이 붉은 빛... 아름답고도 영롱한... 아아...”

“.....”

설마 이 녀석도 자아를 가진 건가.

머리가 조금 맛 간 것 같기는 하지만.

나는 검 끝을 살짝 내리고 다가서며 말했다.

“영롱하기는 개뿔, 끔찍하기만 한대. 그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알아? 벌써 수백 명이 괴물로 변해버렸다고.”

“핫...! 괴물? 끔찍? 당치도 않다!”

늑대 수인이 콧방귀를 뀌더니 잔뜩 격양된 어조로 외쳤다.

“이건 진보다!!! 나약하던 나를 강인하게 만들어준 축복!! 아아... 느껴진다!! 나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힘!! 진화!! 아수르 님의 권능!!!”

“.....”

“이 힘만 있으면.. 이 힘만 있으면...! 노예로 전락할 필요도, 버러지처럼 매일매일 푼돈으로 연명하며 살 필요도 없다!! 내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 나는 선택받은 존재일지니!! 그렇지 못한 떨거지들은 도태될 뿐이다!!”

“.....”

이거 진짜 완전히 머리가 회까닥 가버렸는데...

놈이 잔뜩 도취된 표정으로 눈을 희번덕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리고 내 원대한 야심의 첫 번째 타깃은...”

그가 날 돌아보며 입꼬리를 찢었다.

늑대 수인이 서서히 이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잔인한 충동이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날 주시한다. 물고기 시체를 뜯어먹는 불가사리의 관족처럼 불길하게 맥동하는 촉수를 사방으로 산발하며.

“.....”

나는 흑도를 중단으로 뻗으며 전투에 대비했다.

내가 찾던 묘인족 소녀는 이곳 어딘가에 있을 터, 하지만 이 늑대 수인이 가로막고 있는 한 탐색할 수 없다. 놈의 공격에 대응하며 일일이 병상을 확인해볼 여유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전투에 열중해야 할 때다.

나는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는 수인을 응시하며 칠흑빛 아지랑이를 피어올렸고ㅡ

돌진했다.

폭발적으로 사방에서 줄기가 치솟았다. 도처에서 묵색 형체를 들끓게 했다. 인간 몸집만 한 개미들이 언데드처럼 톱니를 쩔꺽거리며 대지에서 솟아오르고, 거대한 노래기가 번쩍거리는 철갑을 꿈틀거리며 등장했다.

그들이 현실에 도래하는 사이 나는 순식간에 공간을 주파해 흑도를 내질렀다.

날카로운 호선을 그리며 쇄도한 검날이 늑대 수인의 기다란 손톱과 맞닿자 시뻘건 불똥이 피어올랐다.

­카아아아아아앙!!!!

“...제법이군!! 하지만 이 몸을 꺾을 순 없다!!!”

늑대 수인이 괴성을 내지르더니 우악스러운 완력으로 날 튕겨냈다.

놈은 마력 담긴 손톱을 펼치며 포효하더니 순식간에 태세를 갈무리하고 달려들었다. 보석의 광휘를 반사해 검붉게 빛나는 손톱. 시뻘건 안광.

폭력적인 살수가 쏟아졌다. 손톱이 자아내는 열 가닥의 빛줄기가 한 점으로 모이고, 흩어진다. 난폭하게 잘려나간 공기가 파열하고, 그가 팔을 휘두를 때마다 석재 바닥에 깊은 상흔이 그어졌다.

변화무쌍한 궤도로 치밀어오는 늑대의 손톱. 육탄 공격.

그에 반면 나는ㅡ.

‘...니아보다 훨씬 느려.’

여유롭게 흑도로 손톱을 처올렸다. 명민하게 측면으로 도약해 회피했다. 놈이 고함을 지르며 어깨로 들이받자 거리를 벌려 파훼했고, 직도를 세워 응수했다.

놈이 저돌적으로 달려들자 한계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 순간에 칼날을 회전시키며 허벅지를 베었다.

기사의 감염체보다 조금 더 까다로운 수준의 상대.

등 쪽에 난 촉수의 접합부가 몹시 매끄러운 걸로 보아 상당히 완성형에 가까운 변이체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자아가 있는 탓인지 막상 촉수를 다루는 데는 오히려 단조롭다.

놈도 그 사실을 깨닫고 노성을 지르며 일제히 촉수를 뻗어왔지만­

“먹어치워.”

­캬캭!!

­크샤아아앗!!!!

명령이 떨어지자 주위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개미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촉수를 물어뜯었다.

늑대 수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방위로 난폭하게 손톱을 휘두르며 개미들을 떨쳐내고 육박해왔다.

하지만 내가 누구던가.

“노래기 컴온.”

­우옹!

순식간에 내 앞으로 질주해온 노래기를 타고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올라가자 늑대 수인이 발을 구르며 길길이 날뛰었다.

“크아아아악!!! 이 비겁한 악마 놈!!! 내려와라!!!”

“...전투에 비겁하고 자시고가 어딨어. 소꿉놀이도 아니고.”

“크윽...! 네놈은 이전에도 그랬지...!! 사나이라면 일대일로 정정당당하게 붙어라!!!”

“...아니, 그때도 그냥 너 혼자 흥분해서 달려들다가 경비원한테 나가떨어진 거잖아.”

“날 능멸할 셈이냐아아아!!!!!”

늑대 수인이 재차 포효를 내지르며 힘을 끌어올렸다. 그가 몸을 웅크렸다가 펼치자 검붉은 마력이 폭발하며 개미들을 사방으로 날려보냈다. 이에 뭔가 술수를 부린 건지 놈의 몸 곳곳에서 울긋불긋한 핏줄과 함께 추가로 촉수가 돋아났지만­

“쫓아라.”

내가 가볍게 손짓하자 지반을 뚫고 솟아난 덩굴이 늑대 수인을 맹렬히 추격하기 시작했다.

방금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발등에 담뱃재가 떨어진 사람처럼 허겁지겁 덩굴을 회피하는 모습은 꼭 탭댄서라도 보는 것 같다.

‘여기에 조명만 있으면 딱인데...’

나는 느긋하게 노래기의 머리 위에 올라탄 채 그를 구경했다.

수감동에서 대적했던 기사의 변이체는 리치가 긴 장검을 장비한 탓에 개미들로 상대하기 까다로웠을뿐더러, 공간이 협소해 마음껏 힘을 발휘하기가 힘들었지만 이곳에서라면 다르다.

널찍한 대형 홀,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공간, 더군다나 아군을 신경 쓸 필요 없이 화력을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은 내 능력을 발동하기에 최적이었으니.

혹여나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수인 소녀가 말려들까 봐 노래기의 독무를 발동시키지 못한다는 점이 흠이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느긋하게 전장을 관망하고 있자니 늑대 수인이 가쁜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허억... 헉... 내려와라... 한 판 붙자...”

“너 하는 거 봐서.”

“크윽...! 대체 언제까지 날 우롱할 셈이냐!!!”

“조금만 더. 거기 개미들 쉰 마리만 더 잡으면 내려와서 상대해줄게.”

“저, 정말인가?!!”

“.....”

그냥 해 본 말인데...

이제와서 거짓말이라 하기에도 좀 미안한 바, 꼬리까지 흔들며 기뻐하는 늑대 수인을 보니 조금 측은한 마음이 들어 나는 살짝 덩굴의 속도를 늦추고는 입을 열었다.

“야, 근데 나 물을 게 하나 있는데.”

“비겁한 겁쟁이 악마와는 말을 섞지 않는다!!!”

“다섯 마리 줄여줄게.”

“...말해라.”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너 혹시 여기서 묘인족 수인 소녀 본 적 없냐? 너랑 같이 돌킨의 노예 상점에 갇혀 있었던 얜데.”

“하? 묘인족? 그딴 건 모른다! 왜 내가 알 거라 생각하지.”

“아니, 여기 실험실에서 본 적 없어? 한 세 시간쯤 전에 이곳에 이송됐을 거야.”

“세 시간? 나는 이곳에 방금 왔다! 영주가 이상한 약물을 주입하자 정신을 잃었고 깨어나 보니 이곳이었다!! 그리고 네놈이 곧바로 들어왔고!!”

“뭐? 잠깐만...!”

방금 대화에 위화감이...

“...그렇다면 여기 입구에 있던 시체들은. 손톱에 당한 흔적이 있던데 네가 한 게 아니야?”

“시체...? 난 그저 전투가 하고 싶을 뿐이다!! 겁쟁이처럼 약한 놈을 죽이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다!! 자고로 사나이는 피로 피를 씻으며 전투를 해야 하는 법!!! 그러니 나무 위의 원숭이처럼 얄밉게 씨불이지 말고 사내처럼 내려와서...!!”

“....그렇다면 아까 아수르라고 했던 건 뭐야. 그 힘이 아수르 님이랑 관련이 있어?”

아수르면 고블린 부락에서 마주했던 신전이자 니아에게 축복을 내려준 주신이다.

일단 이전에 그녀에게 보석을 보여주었을 땐 확실하게는 모르겠다고 했는데...

늑대 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느껴진다!!! 아수르 님의 힘이!! 또 그분 외에도 여러 신의 권능이!! 이 힘만 있으면 나는 이제 무적이다!!”

“아니, 무적이고 자시고 너 지금 나한테 쪽도 못 쓰고 있잖아.”

“그건 네가 비겁하게 도망만 치니까 그런 거다!!!”

“아니, 그러니까... 하... 말을 말지...”

뇌까지 근육으로 그득그득하게 찬 저놈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간 영원히 의문을 해소하지 못하고 말 거다.

아까부터 뭔가 중요한 걸 빠트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대체 뭐지...?

“야, 일단 우리끼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너 혹시...”

그때였다.

­푸욱─!!!

늑대 수인의 가슴에서 손이 자라났다.

선혈이 뿜어져나오고, 경악으로 동공이 벌어졌다.

이윽고 피를 토하며 서서히 기울어지는 늑대 수인 뒤에서 등장한 건...

“너, 넌... 그...”

그토록 찾아 마지않던 묘인족 소녀.

천천히 피에 젖은 손을 뽑아내는 완성체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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