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화 〉 고양이 소녀 #7
* * *
[289] 고양이 소녀 #7
의문이 풀렸다.
묘인족 소녀가 실험실에 들어가고 소란이 발생하기까지의 절묘한 시간.
입구에 있었던 손톱 자국의 정체.
망각했던 완성체의 존재.
지금까지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
“.....”
소녀는 고개를 들어 보석이 담긴 수조 위에서 접근하던 사슴뿔 개미를 올려다봤다.
자연스럽게 등을 돌리는 구도가 되었고, 그 덕에 나는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등허리에서 돋아난 두 줄기의 새까만 촉수를.
극한으로 응축되어 검은 빛깔을 띤 촉수. 제비나비처럼 한 쌍의 줄기가 완벽한 대칭을 이룬 모습은 아름다움마저 느껴졌고, 적당한 폭과 두께로 늘씬하게 뻗어 어여쁜 물잠자리의 날개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나는 그 매혹적인 자태를 보며 절망했다.
이미 소녀가 감염되었다는 것, 모든 게 늦어버렸다는 걸 깨닫자 뼈저린 무력감이 팔다리를 옥죄었다.
지금까지 다들 그렇게 열심히 달려왔는데 그 결과가 고작 이거라니.
시간을 벌어주겠다고 솔선해서 전장에 남은 니아,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우리를 이곳까지 안내해 준 하킴 일행, 끝까지 날 믿고 의지해준 라디와 아리엘, 친히 내방하면서까지 무기를 하사했던 안디라 님. 그리고...
소녀와 했던 약속.
며칠 전, 반드시 구해주겠다던 맹세는 지금 이 순간 물거품이 되었다.
잔혹한 현실에 망연히 검 끝을 늘어뜨리고 있자니 소녀의 시선을 뒤집어쓴 사슴뿔 개미가 흠칫 놀라며 날 쳐다보았다.
나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저, 저기!!”
“.....”
“호, 혹시 나 기억해...?! 그때 그 노예 거래소에서 만났었잖아!! 너랑 같은 검은 머리!!”
“....”
“설마 기억 못 하는 건...”
“....”
스윽...
“아...”
소녀가 한 발자국 내게 다가왔다. 다행히도 말뜻이 전해진 모양.
그리고 말을 이해할 수 있다면 늑대 수인이나 백발의 노인처럼 대화의 여지가 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완전히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미약한 희망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생각해 보니 나는 란이도 촉수로부터 구출한 적이 있지 않던가.
물론 그때는 감염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고 변이도 심하지 않았지만, 분명 잘 찾아보면 이 소녀도 방법이 있을...
그때였다.
“....”
소녀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순간 늑대 수인의 최후가 떠올라 전방으로 뛰쳐나가자 내 눈에 들어온 건
“미친!!!”
종잇장처럼 찢겨나가 너덜거리는 노래기의 머리통과 참혹하게 번들거리는 소녀의 손톱이었다.
나는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으며 외쳤다.
“자, 잠깐만!! 나야 나!!! 적이 아니라고!! 널 도우러 왔.... 크윽...?!”
카아아앙!!!
검명음이 작렬하고, 삐걱이는 오른팔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급급하게 소녀의 공격을 틀어막은 칼날에서 끔찍한 소음이 발발했다. 새빨간 불똥이 무감각한 소녀의 얼굴을 비추고, 사라진다. 이어서 몰아치는 연격. 파열하는 대기.
머리를 향해 치미는 일격을 간신히 틀어막자 시차 없이 하단으로 손톱이 파고들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어 흘려내며 경악했다.
‘뭐, 뭐가 이렇게 빨라...!’
나와 엇비슷한 정도, 아니 살짝 상회한다.
공격을 막아낼 때마다 점점 속도가 올라갔다. 무작위로 추출된 난수처럼 변화무쌍한 궤도가 육박해온다.
이에 강력하게 내찔러진 일격을 검면으로 수비하자 소녀의 배후에서 칠흑빛 윤곽이 꿀렁였다.
나는 식겁하며 바닥을 박차 자리를 모면했다.
간발의 차로 시커먼 촉수가 카멜레온의 혀처럼 폭발적으로 뻗어왔고, 불시에 구부러지며 지면에 착탄했다.
스르륵 원위치로 되돌아가는 촉수가 빠져나왔던 장소에는 파일 드라이버에 뚫린 현장처럼 깊게 팬 구멍이 생겨나 있었다.
나는 아연실색하며 소환수들에게 명령했다.
“다들 이쪽으로 모여!! 저 소녀를 붙잡되 절대로 해치지 말고 움직임만 봉쇄해!!!”
크, 크샤아앗...!!
캬캭? 캬카카칵!!
개미들은 혼란스러운 눈치였으나 톱니를 까딱거리며 묘인족 수인에게 달려들었다. 저 스피드와 촉수만 봉쇄한다면 얼추 제압할 수 있을 터.
하지만 내가 간과했던 한 가지 사실.
그것은 바로 소녀 또한 안디라 신의 권능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것.
소녀는 자신에게 몰려드는 덩굴과 개미를 잠시 응시하더니 새가 나는 법을 깨우치듯 자연스럽게 대지에서 그림자를 소환했다.
그로서 순식간에 들끓은 검은 형체들이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페로몬이 엇갈리기라도 한 것처럼 쌍방을 물어뜯는 개미 군단. 서로 뒤엉켜 날뛰는 노래기. 굶주린 상어 떼처럼 피아 구분 없이 저들끼리 헐뜯고 찢어발기는 덩굴.
“젠장!!!”
나는 일순간 아수라장이 된 전장을 보며 좀전의 실수를 통감했다.
이로써 소환수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어차피 빠르나 늦느냐의 차이였겠지마는.
“잠깐...!! 제발 진정해!! 난 널 도우러... 크윽?!”
“....”
찰나, 소녀가 근접하더니 오싹하리만치 아름다운 얼굴로 살수를 휘둘러왔다. 민첩하고 과격하게. 사양 없는 일격.
내 하단으로 파고들어 복부를 노린 뒤로는 급격히 제동해 타이밍을 뺏고, 짧게 일격, 자세를 흩트려놓으며 역회전해 참격. 연타.
재빨리 거리를 벌려 물러나고자 하면 다리를 걸어 유착하고, 발등을 찍어누르고, 옷깃을 붙잡아 횡으로 도려내고, 잇따라 연격.
그녀를 노예 거래소의 철창 안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욱신거릴 정도의 기시감이 드는 광경.
이 움직임, 검격에 자연스럽게 체술을 녹여 쓰는 듯한 모습은...
‘그냥 내 전투 스타일이랑 판박이잖아...!!’
나는 섬뜩한 기분을 떨쳐내고 어떻게든 촉수라도 베어보고자 노력했지만, 치명상을 입혀선 안 된다는 제약 탓에 검격이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
그럴수록 소녀는 더욱 속도를 올렸다.
저돌적으로 달려들어 맹타. 좌우로 방향을 교란하며 가속. 틈을 보고 파고들어 질속.
소녀가 목전까지 치달았다. 날렵하게 스텝을 밟아 내 배후로 뒤돌아왔다. 손톱을 세워 허리춤을 찍어누른 뒤로는 참격. 잇따른 뒤돌려차기. 거리를 벌리고, 촉수로 내 머리를 강타한 직후, 다시 밀착하여 손톱 베기.
피로 물든 살수를 내지른다. 치명적인 열 개의 칼날. 흑도를 세워 가로막으면 무방비한 몸통에 참격을 쑤셔박았다. 날카로운 은빛 잔상을 자아내며 사정없이 휘몰아친다. 눈에 전부 담기 힘들 정도의 쾌속.
몹시도 까다로운 상대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아슬아슬하게 회피를 지속하자 소녀는 차가운 흑안으로 날 올려다보더니
“캬아아아악!!!!”
증속(??). 속도에 속도를 더해. 발디딤에 가속을 실어. 뾰족한 송곳니로 살갗을 물어뜯고, 소용돌이처럼 날렵하게, 회전하며 손톱을 휘두르고, 잇따른 상단 공격. 이어서 하단. 다시 측면으로 우회하며 역습.
아슬아슬한 묘기. 균형을 잡는다. 때론 체중을 옮겨가며. 때로는 칼날을 박아가며. 춤추듯이 현란하고, 곡예처럼 아찔하게 난도질한다.
흑도에 촉수 끄트머리가 잘려나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맹렬하게 달려드는 수인 소녀.
나는 그녀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틈을 보인 순간 날렵하게 몸을 비틀어 부츠로 명치를 가격했다.
급소를 걷어차인 소녀는 멀찌감치 떠밀려 가슴을 움켜쥐고 캑캑거렸다.
“괘, 괜찮아...? 하, 하지만 네가 저항해서 어쩔 수... 어...?”
걱정스럽게 들여다보던 도중, 나는 한 가지 위화감을 눈치챘다. 분명 맨손이었을 소녀의 손아귀에 한 물체가 쥐어져 있던 것.
어쩐지 몹시도 낯이 익은 외형에 황급히 허리춤을 더듬자...
“서, 설마...!”
내 단도!!
순간, 이 소녀가 노예로 팔려 오게 된 원인이 절도라는 것이 떠올랐다.
아연하게 서 있자니 소녀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자세를 바로잡았다. 내가 빠르게 공격을 퍼부을 때면 주로 사용하는 역수 그립. 날을 비스듬히 내밀고 중단으로 심장을 보호한 자세.
나는 칼자루를 짧게 고쳐쥐며 이어질 전투에 대비했다. 천천히 손아귀에 힘을 싣고, 호흡을 갈무리하며 소녀를 응시했다.
소녀 또한 고개를 들어 날 올려다보았다.
혼란스러운 전장 속에서 양자의 숨소리를 느끼고,
두 사람의 주의가 온전히 서로에게 집중되는 걸 느끼고,
고요히 서로를 눈동자를 응시한 뒤로는ㅡ
격돌(??).
두 자루 칼날이 엇갈렸다. 서로에게 들러붙어 검을 내질렀다. 쇄도하는 검격을 빗겨내고, 역으로 응수. 디딤발을 내밀어 밀착. 상대가 크게 팔을 휘둘러오면, 회피하고 반격. 촉수가 뻗어오면 몸을 비틀었다가 다시 접근.
올려치고, 내려찍고. 횡으로 크게 한 번. 아래에서 강하게 칼자루를 부여잡으며 상단으로. 디딤발에 회전을 실어 하단에서 솟구치는 궤적을 회피하고, 손목을 꺾어 위로 파고든다. 무릎으로 돌려차며 손잡이를 짧게 쥐고 손톱을 튕겨낸다.
슈화아아악!!!
우상단. 촉수가 되돌아가는 순간에 맞추어 쏜살같이 실선을 내리그었다. 소녀가 날렵하게 흘려내자 더더욱 몰아쳤다. 이에 기다렸다는 듯이 치밀어오는 손톱. 은빛 칼날이 쇄도했으나 기민하게 바닥을 굴러 회피. 반전된 세상을 딛고 높게 도약.
장검을 크게 횡으로 내두르고 손목을 돌려 검은 형체를 꿰뚫었다.
촉수를 관통하자 시꺼먼 액체가 울컥 쏟아졌지만, 소녀 또한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았다.
그녀가 손아귀에서 단도의 위치를 바꾸었다. 내 움직임에 맞추어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칼날을 전환했다. 정수로 움켜쥔 단도로 내 윗가슴을 찍고, 올려베고, 다시 바꾸고. 예리한 첨단으로 살갗을 옅게 가른 뒤로는 엄지와 검지 사이로 단검을 돌렸다.
군더더기 없는 전환. 다시 베고. 돌리고. 긋는다. 스타카토 선율처럼 짧고, 짧고 더 짧게. 무수한 일격을 이어 연격으로 만든다. 고양이 수인의 유연성을 살려, 뇌운이 몰아치는 폭풍우처럼 격정적으로.
빠르게. 빠르게. 조금 더 짧고 빠르게. 역동적으로.
칼바람이 살갗을 스치며 자아낸 잔흔에서 핏물을 흩뿌리며 내게 달려들었다.
난폭하게 무릎을 차올리고, 밑날찍기. 회전베기. 집요하게 유착하며 검을 거머쥐고, 위에서 아래로. 재빠르게. 날카롭게. 치밀하게.
전후좌우. 베고 또 베고, 베고 또 베고. 본능에 충실하게.
가히 신속이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는 소녀의 공격을 받던 나는ㅡ
신속하게 고블린 단검을 거머쥐었다. 칼날을 교차하며 휘두르고, 선회하며 베었다. 디딤발에 힘을 싣고 뛰어넘어 배후로. 흑도로 촉수를 베자 측면에서 손톱이 육박했으나 단검으로 튕겨냈다.
소녀가 발악하듯 단도를 휘두르자 들숨을 들이쉬며 몸의 균형을 다잡고, 지면을 단단히 딛고 다시 돌진.
촉수가 뻗어온다. 허리를 비틀어 피했다. 강하게 발걸음을 내디뎌 속도를 올린다. 빠르게. 더 빠르게. 베고. 찌르고. 돌리고. 내리긋고. 다시 벤다. 이어서 크게 선회한다. 말려든 개미의 등딱지가 터져나가자 잠시 숨을 들이쉬고 다시 공격을 연계해나간다.
강하게 돌려차고. 내려찍고. 쳐올리고. 밑날베기. 능숙하게 단검을 돌려 역수로 움켜쥔다.
어둠의 궤적이 춤추고, 불똥과 선혈이 나부낀다. 더 빨리. 더 신속하게.
보폭을 좁게. 현란하게. 몸을 불사른다. 치미는 공격을 틀어막고, 촉수를 벤다. 서로의 숨결이 오가는 초근접전.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 두 자루의 검으로 몸의 중심을 잡는다.
나는 감정이 실리기 시작한 소녀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횡으로 칼날을 내둘렀다.
“카아아아악!!!!”
촉수를 베인 소녀의 입에서 노성이 튀어나왔다. 지척에서 손톱이 날아든다. 어둠에 동화된 일격. 팔뚝을 걷어차 파훼하고, 칼등으로 잇따른 공격을 쳐냈다. 소녀가 뾰족한 치아로 내 목을 물어뜯었으나 몸을 던져 회피하고, 바닥을 굴러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어서 다시 일격. 지친 몸을 채찍질했다. 굳어가는 발걸음을 내디뎌 뺨을 스치는 촉수를 지나쳤다. 꿈틀거리는 음영 한복판으로 파고들어 호선을 자아낸다.
콰르르르르!!
파형(??). 칠흑빛 물결이 그림자를 갈라놓았다. 불가사의한 칼날이 서늘한 광채를 발했다. 파도처럼 공간에 수놓아지는 검격이 어둠에 어둠을 더하며 세계를 검게 물들였다.
음영이 짙어지고 있다.
나와 그녀가 춤사위를 벌일수록 세계가 검게 물들었다. 시간의 흐름이 끈적한 실타래처럼 늘어진다. 죽음의 신의 권능이 충돌하며 생겨난 부의 기운이 공간을 잠식했고, 소환수들의 처절한 비명과 이명이 귓전을 희롱했다.
노래기와 덩굴이 날뛸 때마다 시설이 파괴되며 날카로운 파편이 비산했다. 포탄처럼 날아든 철조각에 개미들이 찢겨나갔고, 허공에 잔류했던 그림자들이 별개의 의지를 지닌 듯 꿈틀꿈틀 모여들더니 점차 선명도를 더하기 시작했다.
심연(??).
이곳은 어둠. 근원의 공포가 가득한 공간. 헤어나올 수 없이 깊은 나락일지니.
연옥. 타르타로스의 밑바닥을 연상시키는 광경 속,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질주했다. 극한의 몰입으로 감각이 서서히 멀어진다. 기민하게 촉수를 회피하며 바닥을 박차올랐다. 이어 허공에서 회전. 소녀의 옆구리를 후려찼다. 즉각 검은 궤적이 마수를 펼쳐 오지만, 검극을 휘둘러 쫓아냈다.
손바닥에 고인 핏물을 안구에 흩뿌렸다. 시야를 차단하고 옆구리로 파고든다. 목덜미에 단검을 내려찍고. 고블린 석검으로 복부를 헤집는다. 소녀가 거리를 벌리자 순식간에 쫓아간다. 지척으로 들러붙었다.
빠르게. 더 빠르게. 증속한다. 거친 물살을 거스르듯 피와 어둠이 뒤섞인 공동을 헤집는다. 극한의 가속으로 정지된 세계 속, 서로의 시선을 마주하며 격렬히 부대낀다.
가속한다. 더 빨리. 산란하는 불빛. 공기의 흐름을 난폭하게 베어낸다. 질주. 공간을 뛰어넘고. 칼날을 꽂는다. 이어지는 가속. 더 빠르게. 더 날카롭게.
더욱 날카롭게 더욱 광포하게. 화폭에 그림을 그리듯 검광을 흩뿌렸다.
참격에 참격을 거듭하며 짙은 땀과 피의 향기에 아찔해질 즈음ㅡ
“...잡았다.”
푸화아아아아악!!!!
횡으로 크게 칼날을 그으며 선회하자 날카로운 사선에 닿은 촉수가 터져나갔다.
흩날리는 검은 형체. 손아귀에 선연한 감촉. 명백한 유효타.
잘려나간 촉수에서 뿜어나온 검은 액체가 어지럽게 허공을 수놓는다.
끅...! 비틀거리며 신음을 흘린 소녀가 고개를 들자 흉흉한 안광이 번뜩였다.
허리에서 골반으로, 골반에서 허벅지로 흘러내리는 검은 액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소녀가 천천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로서 전장이 일변하기 시작한다.
지하의 모든 음영이 소녀에게 빨려들듯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전신을 휘감은 흑색 오라가 짙게 소용돌이치더니 도처의 불빛들이 불안하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대류 현상을 일으키기 시작한 기류가 서서히 돌풍을 자아내고, 위태위태하게 깜박이는 불꽃은 더더욱 어둠을 더했다. 바람의 불안한 웅성거림이 전장의 소음을 덮어씌우자, 서로에게 이빨을 겨누던 소환수들도 동작을 멈추고 태풍의 중심지를 바라보았다.
나는 눈앞의 광경을 보며 다시 한번 강렬한 기시감에 휩싸였다.
나는 분명 이 공격을 안다.
이 뒤로 세찬 충격파가 전장을 휩쓸리라는 것도.
그렇다면...
“.....”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입안에 고인 핏물로부터 비릿한 향이 맴돈다. 짙고 짙은 어둠 속에서 무수한 시선이 느껴지고, 솜털을 덮는 탁류가 소환수들의 숨결을 전해주었다.
찰랑찰랑 발목을 간질이는 잔물결은 나를 더 깊은 심층 의식으로 끌고 내려갔다.
시야가 급격하게 암전되며 여러 광경이 비춰진다. 강렬한 빛이 점등하고, 묵직한 압박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짙은 안개가 흘러넘치고, 폐 속으로 스며든다.
깊이. 더 깊이.
현실과 감각이 격리되고, 분리된다. 무의식의 저변에 깔린 수면이 발목을 찰랑이자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여러 쌍의 새빨간 눈동자가 보인다.
이놈이 나의 새로운 소환수가 될 터이니.
강한 확신이 머릿속을 장악했다. 도움이 절실한 지금, 지금이라면 불러낼 수 있다. 적들의 공포를 자아내고, 발을 묶고, 은밀하게 기습할 수 있는 소환수가.
이 녀석이 소녀의 폭주를 가라앉혀 줄 것이다.
장면이 뒤바뀌자 나는 다시금 검은 태풍이 몰아치는 지하에 있었다. 하나둘씩 뜯겨나가 발치를 맴도는 고철 덩어리가 보인다. 소녀의 살갗에 화상을 입히고, 어둠을 잡아먹으며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 검붉은 기운도 보였다.
하지만ㅡ
나는 입꼬리를 비틀며 미소지었다. 검날을 늘어뜨려 자세를 풀었다.
나라고 해도 저 일격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무사할 수는 없다. 제정신이 박혀 있다면 당장 목숨을 구걸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간 잠재력에 구속되어있던 그것이 방금 풀려났으니.
흑요석처럼 번뜩이는 내 흑안에 비친 건ㅡ
소녀의 등 뒤에서 섬뜩한 독니를 박아넣기 직전의 거대한 생명체였다.
* * *